2024 강릉단오제 전국백일장 장원 (강릉시교육장상) 수상작
손
최원규 (강릉제일고 3)
아침부터 요란한 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웠다
덕분에 평소 일어나지도 않는 시간에 눈이 떠진 나는 방 밖으로 나왔다
내 눈앞에 보인 광경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말다툼을 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치매 판정을 받은 이후부터 가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로 인해 어머니의 불평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증상 중에서 가장 심각했던 것은 우표에 대한 집착이었다
할머니는 가끔씩 창고에 들어가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는 먼지가 가득 쌓인 상자를 들고 나왔다
할머니는 매번 거실 한복판에 털썩 앉으시고는 상자를 여셨다
그 안에는 우표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할머니는 우표를 들고 대화를 하거나 색칠을 하는 등 우표를 마치 장난감 다루듯 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의 표정은 어린아이 같아졌었다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세워진 거실에서 한참 동안 어머니와 실랑이 하시던 할머니는 점심을 드시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집 안은 고요해졌다
잠시 후 어머니는 할머니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방 안을 살피더니 할머니가 낮잠 주무시는 걸 확인한 듯 했다
그리고는 거실에 있던 우표를 모두 쓰레기봉투에 넣으신 어머니가 나를 부르더니 그 쓰레기봉투를 쓰레기장에 던져두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문 앞에 섰지만 선뜻 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생각이 바뀐 나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발걸음을 돌려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표 꾸러미를 내 방 침대 밑에 몰래 넣어두었다
몇 시간 뒤 낮잠에서 깨신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는 휑한 거실을 뚫어지게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이내 어머니에게 달려가 우표가 어디 있느냐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는 계속 모른다며 발뺌을 했다
할머니는 실수로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 아니냐며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밖으로 달려 나가셨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나는 신발을 챙긴 뒤 빠르게 달려가 할머니를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할머니께 나는 우표는 쓰레기장에 없다고 말하며 손을 꼭 붙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내 방으로 모시고 가 침대 밑에서 할머니의 우표 꾸러미를 꺼냈다
우표가 무사한 것을 보자마자 할머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 후 진정이 되셨는지 할머니는 내 침대에 걸터앉은 후 말을 꺼내셨다
할머니는 벚꽃이 그려진 우표를 내게 자랑하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여행 작가였다
그래서 그런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우표가 우리 집에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오사카성에서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피는 벚꽃 절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축제가 열릴 정도라고 했다
할머니가 내게 자랑했던 우표도 그곳에서 구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뉴욕 거리를 걸으면서 샀던 만화영화 우표도 보여주시고 강릉단오제를 즐기며 기념으로 산 우표도 자랑하셨다
할머니는 또 주머니에서 책자 하나를 꺼냈는데 그 책자에는 크리스마스 우표가 가득 모아져 있었다
할머니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남산 둘레길도 걸었다고 하셨다
함께했던 모든 순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손을 놓지 않았었다며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할머니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밤이 깊어졌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 깜박 잠이 들었던 내가 퍼뜩 깨어 주변을 둘러보니 할머니는 아직도 우표를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며 하염없는 손길로 쓰다듬고 계셨다
어두운 방 안에 거실 불빛이 새어 들어와 할머니의 얼굴을 비추며 같이 긴긴 밤을 위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움으로 가득 찬 할머니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영감. 그때 봤던 벚꽃이 올해도 피겠지요?’
나는 조용히 일어나 우표를 바라보며 홀로 읊조리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의 하얀 머리가 풍성하게 핀 벚꽃처럼 보였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가만이 잡았다
‘ 할머니. 봄이 오면 꼭 벚꽃 보러 가요. 그런데 할머니 머리에 핀 꽃이 더 예쁘다’
내가 너스레를 떨자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이니?’
나를 조용히 바라다보는 할머니의 미소가 서글퍼보였다. 마음을 에렸다.
‘응. 할아버지도 좋아할거야’
할머니와 맞잡은 두 손이 점점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