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대성당이 유명해 진 것은 그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당에 안치된 콜롬버스의 석관묘 떄문이기도 하다.
1450년 이탈리아 제노버 출신의 항해사 콜럼버스는 당시 베스트셀러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포루투갈, 영국, 프랑스 등의 제후나 부자들에게 서쪽으로 나가 인도 항로개척 프로젝트를 설득했다.
지구는 둥그니 오스만제국을 피해 서쪽으로 나가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취득 보물의 10%와 현지 영구 총독 인정을 바라는 그의 과도한 요구로 모두 실패했다.
동시대의 마젤란은 5%와 기록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하였다.
1492년 겨우 스페인 이사벨여왕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세비야를 출발한 그는 지금의 바하마제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이 인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잔인하게 현지인을 살육하고 노예로 삼아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그 후 스페인은 아메리카로부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금은보화를 실어날랐고
식민지를 건설해 제국의 틀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역사상 가장 잔인한 탐험가라는 악명을 얻었다.
4차에 걸친 원정 탐험 과정에서 원주민을 총검으로 죽이고 불로 태우거나 맹견으로 물리는 등
잔인하게 학살하여 30만명에 가까웠던 타이노족을 멸족시켰고 노예로 유럽에 팔아넘겼다.
그의 만행이 얼마나 극악했는지 현지 스페인군이나 동행한 선원들로부터 저항을 받아
부하들로부터 암살을 당할 뻔하기도 하였다.
기대했던만큼의 수익이 나지 않고 각종 비위와 악행으로 내부반란이 일어나자
페르난도 2세는 조사관을 파견해 그를 쇠사슬로 묶어 소환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기가 도착한 곳이 인도에 인접한 섬 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단을 통해 실제 인도에 도달하고,
또 다른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차가 1503년 실제 콜럼부스의 항해경로를 따라가
그곳이 인도가 아닌 신대륙임을 알리면서
대륙의 이름은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라 아메리카로 불리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인도에 도착하였다는 주장을 바꾸지 않았다.
콜롬버스의 사후 운명은 험난했다.
1506년 스페인의 발라도리드에서 사망하자 아들은 그의 시신을 세비야로 옮겼다.
그러나 자신을 모욕한 스페인 땅에 묻히기 싫다고 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곧 도미니카에 모셨다.
1795년 도미니카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자 쿠바의 아바나로 옮겨졌고,
1898냔 쿠바가 미국의 식민지가되자 다시 세비야로 옮겨졌는데,
스페인이 싫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1899년 세비야성당에 공중부양형태로 묻혔다고 한다.
당대의 관습에 따라 위인의 묘는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가 가져온 금은보화가 있어 이 거대한 성당이 건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묻히기는 했지만
그의 석관묘가 네 재후의 어깨에 들려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당대의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와 지금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대로 그의 항해를 지원한 카스티야의 이사벨여왕(앞 좌)과
사자 휘장의 레온왕(앞 우)은
앞자리에서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그를 비위혐의로 체포해 쇠사슬로 묶어 송환했던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도2세(뒤 좌)와
그를 반대했던 나바라왕(뒤 우)은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숙이고 있다.
뒷편의 두 얼굴은 영구토록 조롱받는 느낌이다.
그는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잔인하고 욕심 많으며 무능하고 오만한 장사치였다는
오욕의 탐험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죽어서도 땅에 묻히지 못한 콜럼버스의 두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