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동천(洞天)의 유산(遊山) ①
김윤식(金允植)의 북한산 부어동(浮魚洞)과 조계(漕溪) 유람기
조장빈 / 산악문화연구소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1896년 9월 7일과 8일 북한산 부어동(浮魚洞)과 조계(漕溪)를 유람했다. ‘부어동(浮魚洞)’은 화계사 약지에 “화계사는 고려 광종 때 왕사와 국사를 지낸 법인 탄문(法印坦文)대사가 인근의 부허동(浮虛洞)에 창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화계사 북쪽 계곡인 대보동을 일컫는 것으로 여겨진다.
북한산 구천계곡은 조선시대에 조계동(曹溪洞)이라 불렀고 그 남쪽 계곡이 보등동((寶燈洞)인데, 지금의 냉골로 대보동(大菩洞)이라고도 하였고 소보동(小菩洞)이 화계사 계곡이다. 조계동의 구천은폭(九天銀瀑)은 북한산 동쪽에서 가장 뛰어난 승처로 알려져 북한산을 유람하는 선비들은 대개 이곳을 보고 대동문으로 올랐으나 보등동은 근대에 흥선대원군 등 궁의 후원으로 불사를 일으켜 사세가 확장된 화계사를 간혹 경유하는 이가 있었으나 동(洞)을 유람한 선비들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냉골은 초입에 계류가 더위를 피할 만 하고 그 위로 은밀한 곳에 작은 폭포가 있다. 산등성이에 오르면 주위를 둘러선 바위로 아늑한 터가 기이하다.
김윤식은 조계의 지명이 폭(瀑) 아래로 층층히 펼쳐진 구유 바위(槽石)에서 유래한 것이고 보허각(步虛閣)이 김자점(金自點) 정자의 터라고 잘못된 전해 들은 것은 세월을 탓할 일인가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기던 은폭(銀瀑) 아래 너럭바위에서 여전히 술잔을 기울였다는 것인가.
7일 계해(葵亥), 8월 초하루 백로절이다. 날씨는 맑았다.
장지이(張芝二)가 성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오후에 학여(學汝), 순소(舜韶), 운성(雲成)과 함께 부어동(浮魚洞)의 수석(水石)을 보러 갔다. 골짜기는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겨우 2리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이때 밭의 곡식은 익어가고 있었고, 온갖 나무들은 모두 붉은 단풍의 정취를 머금고 있었다. 삼각산(三角山)과 도봉산(道峯山) 등 여러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그 빼어난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니, 맑은 바람이 옷깃으로 불어와 문득 속세의 번뇌가 모두 씻겨 나가는 듯했다.
골짜기에 이르니 푸른 절벽 수십 길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서로 돌아보며 가려주고 비추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맑은 물과 켜켜이 쌓인 너럭바위가 있어,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며 폭포를 이루었다.
손을 씻고 발을 담그며(盥濯) 한참을 보내니, 사람으로 하여금 돌아가는 것을 잊게 만들었다. 멀리서 외딴 산을 바라보니 비를 머금은 구름이 짙고 검어지기에, 마침내 아쉬운 마음을 버려두고 돌아왔다.
‘九天銀瀑 李伸書’
경덕궁(慶德宮) 창건 시 흥화문(興化門)의 편액을 쓴 것으로 알려진 이신(李伸)은 1656년 인평대군이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청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갈 때, 예방(禮房)의 책무로 수행하였다. 한지 전지 한 장에 두 글자를 담을 수 없는 크기의 대자(大字)다. “九”자 첫획 부분이 조금 깨졌다. 초탁에 실패한 후 지금까지 미적 거리고 있는데, 전문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근래에 집중호우에 해마다 계곡이 심하게 파헤쳐져 언제 폭 위의 돌이 떨어져 파손될지 모를 일이다.
오래전부터 조계(漕溪)의 뛰어난 경치를 들었기에, 학여(學汝)·순소(舜韶)·운성(雲成) 그리고 나무꾼 상연(祥淵)과 함께 조계로 유람을 떠났다. 마을 서쪽을 경유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는데, 상연이 샛길이 있다고 하여 산등성이를 올라갔으나 겨우 발 한 짝을 디딜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좌우는 모두 네댓 길(仞)이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깊은 골짜기였고, 모래가 굴러 신발이 미끄러져 아찔하고 대단히 위험한 산길을 약 5리쯤 걸어갔다.
동천(洞天) 입구에 이르렀으나 또 길을 알 수 없어, 곧장 왼쪽 절벽의 바위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니 대단히 어렵고 험난했다. 마침내 동천 안으로 들어가니, 두 산이 벽처럼 마주 서 있고 위태로운 바위들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그 가운데 거대한 너럭바위가 깎아 세운 층계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는데, 색이 눈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물이 위에서 흘러내려 폭포를 이루었는데, 바위 표면에 '구천은폭(九天銀瀑)'이라 새겨져 있었고, 그 옆에는 '이신(李伸)이 쓰다'라고 새겨져 있었으나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위에는 작은 탑 하나가 돌을 쌓아 만들어져 있었는데 아이들 장난처럼 보였다.
그 아래 바위 표면은 조금 오목하게 파여 있어서 흘러내린 물이 못(潭)을 이루었는데, 발을 씻고 수영을 할 만했다. 좌우는 모두 넓고 평평한 바위여서 수십 명은 앉을 수 있었다. 맞은편 너럭바위는 네댓 칸쯤 되어 보였는데, 색이 검고 정으로 판 흔적이 있으니, 옛사람들이 정자를 지을 때 기둥을 세웠던 자리였다. 옆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고 '보허각(步虛閣)'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전해지는 말로는 김자점(金自點) 정자의 터라고 한다. 조계(漕溪)는 곧 조계(槽溪, 구유 계곡)인데, 바위 모양이 마치 말구유(槽)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정작 구유 모양의 바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른쪽 산등성이를 통해 올라가며 넝쿨을 붙잡고 절벽에 매달려 겨우 나무꾼들이 다니는 길을 통해 꼭대기에 이르렀다. 다시 몇 층을 더 돌아서 올라가니, 올려다보이는 북한산성의 성벽이 아주 가까운 거리(咫尺)에 있었는데, 바로 동문(東門) 밖이었다. 이른바 돌구유(石槽)라는 것은 보이지 않고, 오직 어지럽게 널린 돌 사이로 가느다란 물줄기만 흘러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이에 왼쪽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와 다시 은폭(銀瀑) 아래의 너럭바위에 이르렀다. 여러 사람과 둘러앉아 술을 각자 한 잔씩 마시니 해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큰길을 따라 걸어왔는데, 길이 평탄하고 가까워서 그제야 처음에 샛길로 가려 했던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돌아와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니, 구유 바위(槽石)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은폭 아래 바위 표면이 오목하게 파인 곳이라고 했다.
〔주석〕
1. 부허동(浮虛洞)은 ‘들뜨고 헛된’의 뜻으로 음차로 보이는데 불가의 언어로 다른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사찰임을 뜻하는 ‘보등동(寶燈洞)’이라고도 했다. 다만 필자 생각에, 19세기 초 지도에는 ‘보동동(普東洞)’으로 표기되어 있어 보현봉의 동쪽 계곡을 말하는 것이며, 부허동은 조계동에 있었던 인평대군의 별업의 누정인 ‘보허각(步虛閣)’에서 유래한 명칭이 아닌가 한다.
《화계사대웅보전중건기문(華溪寺大雄寶殿重建記文)》에 “한강 북쪽에 산이 있으니 이름은 삼각산(三角山)이다. 그 동쪽 고개에 계곡이 있으니 이름은 보허동(普虛洞)이요, 그 계곡 안에 절이 있으니 조계 보덕(漕溪普德)이라 한다.”고 하여 사찰이 ‘조계(漕溪)’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조계동 중단에 고려 이래로 조계사가 있었는데, 허목(許穆, 1595~1682)은 대흥사(大興寺)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조계동(曹溪洞) 별업(別業)이라고 하였고 이익(李瀷, 1681~1763)은 “석가령(釋迦嶺) 고개에서 동쪽 지역을 조계(漕溪)라 하고 조계사(漕溪寺)가 있는데 이 절에는 폭포”가 있다고 하여 고려조의 조계사가 폐사된 후 그 법통이 대흥사, 조계사, 화계사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모두 왕실의 후원으로 사세가 확장된 사찰로 그 자세한 유래는 전문가의 검토가 필요하다.
2. 학여(學汝):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국학자이자 불교학자였던 이능화(李能和)를 말하며 나머지 일행은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3. 원문은 ‘雜樹皆含丹楓意、三角·道峯諸山環抱、 秀色可餐’의 ‘수색가찬(秀色可餐)’으로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4. 이렇듯 거칠게 쌓은 돌탑의 사례는 인수봉 초등자로 알려졌던 클레멘트 아처(Clement H. Archer, 英)가 보았다는 인수봉 정상의 인물은 클라이머가 아니라 수련을 하던 처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즈음 북한산을 유람한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이 〈유북한기(遊北漢記)〉에서 인수봉 꼭대기에 붉은 깃발과 흰 깃발 두 개가 꽂은 영남 김씨의 이야기나 1910년경 북한산을 조사한 〈북한산지초략(北漢山地誌抄畧)〉에서 인수봉 정상에 스님이 돌탑을 쌓았다는 기록 및 ‘고독의 길’ 동굴의 폐자기편에서도 이러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백운산장의 이해문이 백운대에 자리한 것도 같은 목적에서였다.
〔참조〕
1. 김윤식(金允植), 속음청사(續陰晴史), 국사편찬위원회, 1971 (『속음청사(續陰晴史)』는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 의 일기로 1887년부터 1921년까지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2.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자료 잘 정리했습니다. 즐럽게 감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