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여덟
중도, 이 시대의 길
말한이 활성
일러두기
2016년 10월 16일 남원 <고요한소리> 역경원에서 하신 말씀을 엮어 정리하였다.
차 례
중도, 이 시대의 길·5
늦깎이 출가자의 서원·7
부처님께 빚 갚기·9
왜 <고요한소리>를?·11
법이란 뭘까?·14
법이 왜 어려운가?·17
법의 핵심은 중도(中道)·22
눈먼 과학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 중도·25
불교가 아닌 불법으로·28
육처(六處)와 육근(六根)·31
오온개공(五蘊皆空)과 오취온고(五取蘊苦)의 차이·34
중도는 팔정도·36
정념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이다·40
신념처와 수념처·42
심념처·43
법념처·47
대단히 반갑습니다. 제가 작년에 건강이 좀 좋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걱정을 많이 끼쳤는데 회원님들이 다 염려해주시고 기원해주신 덕분으로 그런대로 법회를 해볼 엄두를 내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오늘 하필이면 비가 오네요. 법회 날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것은 〈고요한소리〉 법회를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요즈음 안팎으로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해보면 어디라고 우순풍조(雨順風調)합디까? 우리나라가 겪는 모습도 또 우리 인류가 겪고 있는 전체 모습도 비슷비슷합니다. 하늘은 기후가 불순하고 땅도 요사이는 그냥 조용하지 않지요. 여기 경주에서 오신 분도 있는데 이번 지진으로 많이 놀랐지요. 이렇게 하늘과 땅이 심상치 않고, 게다가 저 북쪽에서는 여러 가지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천지인(天地人)이 합동해서 우리 국민들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신삼재(新三災)의 대단히 중차대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런 상황에 대처하면서 자기 마음을 추슬러 나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매우 절박한 현실로 다가옵니다. 법을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런 문제가 우리에게 오늘 법문의 주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처럼 이렇게 내리는 비가 이런 주제를 다루기에 오히려 합당한 분위기를 마련해주는 것 같기도 하네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다른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한가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런 시대를 사는 인류에게 부처님은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셨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늦깎이 출가자의 서원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30대 후반에 출가한 늦깎이입니다. 부처님 법을 사모해서 막상 절집에 들어와 보니 부처님 법이 좀 어렵게 느껴졌어요. 접근하기도 매우 힘들고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막연한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좀 엉뚱하게 들리시겠지만 우선 몇 가지 원을 세웠습니다. 중노릇을 얼마나 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동안에는 ‘주지 안 하겠다’, 또 ‘목탁 안 치겠다’, 그리고 뭣하지만 ‘상좌 안 두겠다’, 이런 원을 세웠어요. 왜? 그게 일반적인 절집 풍토인데 그런 풍토를 살아내기에는 나로서는 도저히 힘들고 감당을 못 할 것 같았어요. 상좌 키울 자신도 없고, 또 중노릇 한다고 어떻게 보면 너무 종교적인 냄새 풍기는 그런 종교인은 되기 싫고, 그래서 주지도 안 하고 목탁도 안 치고, 물론 제사나 뭐 그런 것도 안 하고 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은사스님을 찾아뵌 것이 출가의 연이 되었는데, 그때 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한 생 안 난 셈치고 살아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안 난 셈 치고’ 그 말씀이 나의 가슴에 아주 깊은 울림을 주었어요. ‘그래, 이 세상을 두고 뭐 이런저런 여러 의미를 부여해서 그걸 이루어보겠다고 허둥대며 사는 것은 당치않다. 안 난 셈 치고 아주 홀가분히 그냥 한 세상 살아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스님께서는 제가 한 생 안 난 셈치고 세상 인연 털어버리고 출가해서 수행해보란 말씀이셨겠지만, 그것 역시 한세상 챙기고 사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안 난 셈치고 살 생각하니 책임질 일도 없을 것이고 분명히 편할 것 같긴 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사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요.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자문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부처님께 빚 갚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보려 하니까 뭔가 그 나름대로 빚을 갚는 일을 자꾸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주지를 하지 않겠다던 내가 뜻밖에 여러 가지로 종단 일에까지 관여하여 어떤 역할도 조금 해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 내가 부처님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종단에 관여해 무슨 일을 해본다는 그런 생각은 가져본 적 없습니다.
이렇게 안 난 셈치고 살아가다 보니, 우리 〈고요한소리〉가 생긴 지 30년 가까이 되도록 회원도 늘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지도 안 하겠다는 사람이 〈고요한소리〉라는 모임은 왜 만들었느냐, 그건 한 가지 원력 때문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주지는 안 하겠다 했지만 부처님 밥을 먹으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부처님께는 꼭 빚을 갚아야 되겠고, 또 여러 가지로 겪어보니까 하나하나 모든 일들이 우연한 일도 개인적인 일도 없는 것 같더라고요. 여러분들이 이런 말을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 가피 아닌 일은 하나도 없구나, 나란 어떤 개인이 있는 게 아니라 나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 노는 손오공 같은 존재, 한낱 장기판의 장기알에 불과하구나.’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다 그렇지요.
그렇게 부처님 가피를 받았으면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지요. 저도 예불 때마다 부처님 은혜 갚기를, 그리고 중생의 은혜 갚기를 서원합니다. 그래야 빚 없이 살고 또 갈 때 가볍게 가지요. 여러분들도 갈 때 홀가분하고 수월하고 가볍게 가고 싶지요? 안 그렇겠어요? 나도 개인적으로 부처님 은혜를 갚는 일이 닥치면 열심히 하겠다 했더니 정말 그런 일들이 닥치더군요. 나에게는 〈고요한소리〉도 바로 그런 일의 하나였던 셈입니다.
왜 〈고요한소리〉를?
왜 하필 〈고요한소리〉를 하게 되었을까? 그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만 한국 불교는 이른 바 대승불교입니다. 소의경전으로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등의 대승경전에 의지하고 있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종래의 우리 불교가 매우 종교적이에요. 나는 종교인이 되고 싶어서 출가한 것은 아니거든요. 부처님은 우리에게 종교인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종교인이라는 것은 벌써 눈이 어디 갇히고 한정되어서 맹목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맹목이야말로 부처님이 가장 경계하신 것이거든요.
오늘날 우리 인류가 얼마나 맹목적입니까. 아까도 내가 천재(天災), 인재(人災)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것 모두 맹목적인 데서 오는 것 아닙니까? 만일 한국인들이 좀 더 깨어 있고 의식수준도 높다면 과연 오늘날 이 나라나 이 민족이 겪고 있는 이런 시련을 꼭 이런 모습으로 겪어야 할까요?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닐 수 있는데 이러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탓이에요.
그 원인을 일단 불교 안에서만 볼 때 부처님은 종교 창시자가 아닌데 우리는 부처님을 종교 창시자 내지는 신(神)으로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마치 신 받들 듯이 부처님을 받드는 이런 풍토가 지배적이에요. 이래 가지고는 부처님이 오신 보람이 없고 오히려 이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출가하면서부터 해왔습니다. 그나마 한국 불교는 항상 ‘이뭐꼬, 이뭐꼬’ 하면서 일체를 있는 그대로 알려고, 또 보려고 노력하는 훌륭한 풍토가 강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쉽게 낼 수 있었던 것 같고, 그렇게 해도 누가 탓하지 않아 괜찮았지요. 더러는 내가 남방불교에 너무 집착하는 것 아닌가, 현재 상황의 무거운 의미를 너무 경시하는 것 아니냐면서 못마땅해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조용히 하니까 크게 말썽은 없었지요.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의 원형을 이 기회에 한 번 나름대로 밝혀보는 것도 안 난 셈치고 사는 것으로는 괜찮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우연하게도 어떤 인연이 거들어 스리랑카에 있는 불자출판협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라는 단체에서 내는 책자를 몇 권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이 묘하게도 서양 스님이었지요. 출가 전에는 그런 책이 있는지 그런 단체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그 책이 너무나 반가운 거예요. 그래서 혼자 읽고 말기엔 아까워서 마침 한기호 처사 부부에게 소개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번역 얘기가 나와 한처사가 BPS에 가서 번역권을 얻어 오기에 이르렀지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고요한소리〉모임을 만들게 되고, 이 모임에서 BPS 시리즈 중 우리 한국 불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자를 골라 번역 출판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후 그쪽에서 나온 책들을 우리 윤문 팀이 그야말로 있는 정성을 다해서 번역, 윤문하였습니다. 설혹 정확하다고 자신할 수도 없고 또 명문도 못 되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성의껏 성실하게 번역하고 다듬고 해서 내었습니다. 아마 그 성실성이 배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도 상당히 공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에 꾸준히 백만 부 이상을 일단 출판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제가 항상 견지해온 몇 가지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주신 게 법(法)인데, 과연 법이란 게 뭘까?
법이란 뭘까?
법(法)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뭐라고 하겠어요? 법이라면 한자 아닙니까? 우리말로 뭐라고 할까요? 여기서 당장 답이 나올 리 없습니다. 참 어려워요. 영국 곰브리치 교수 같은 분은 굉장히 고심을 했는데 뜻이 36가지나 되어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입니다. 또 영국의 유명한 빠알리 학자 노먼 박사 같은 분도 가령 불교 경전 중에서 《숫따니빠따(Suttanipāta)》 같은 경은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입니다. 자기도 영역(英譯)을 아주 상세하게 성심껏 했지만, 이건 번역이 아니다라고 고백할 만큼, 그만큼 사실 우리 불교의 경전이나 법이 옮겨내기가 어렵습니다. 그걸 언어만 따라서 좇아가자들면 한없이 어렵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중간하게 그냥 하다 말 수도 없는 거지요. 접근 방식을 달리하면 어떤 바른 길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그동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항상 합니다. 매일 화두지요.
부처님이 도대체 뭘 가르치셨나. 우리는 불·법·승(佛法僧)을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법이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법에 주목해보겠습니다. 부처님이 만드신 그 법은 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부처님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진리를 누가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하지만 법은 만들 수 있습니다. 법은 부처님의 지혜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깨우쳐주는 수단입니다. 즉, 길입니다. 다리라고 할까요, 또는 배라고 할까요, 법은 진리를 우리와 연결시켜주는 가교입니다. 인류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두뇌들이 노력하고 고심했습니까? 그 진리를 부처님이 마침내 완벽하게 깨달으신 거지요. 그리고는 이것을 꼭 저 무명 중생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부처님이 바로 반열반(般涅槃)에 안 드시고 팔십 노구에 이르도록까지 고생하면서 애쓰신 겁니다. 즉 ‘법을 만들어서 전해주겠다’ 당신이 깨달은 ‘진리의 소식을 정확하고도 확실하게 효과적으로 전해주겠다’, 이게 부처님의 원이예요. 그래서 열반에 들지 않고 그렇게 노력하시다가 마침내 뜻을 다 이루시고 ‘이제 다 되었다, 할일 다 했다,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법을 만들었다.’ 할일을 다 했으니까 이제 가겠다 하고 가신 겁니다.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법, 그 법! 그것을 우리가 너무 감사해서 불·법·승을 삼보로 삼아서 조석으로 항상 예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법이 왜 어려운가?
그러면 그 법이 과연 뭔가? 흔히 법이 너무 어렵다 하는데 그렇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부처님이 어려운 법을 만드셨을 리가 없잖아요. 부처님이 굳이 어려운 법을 만들어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중생들을 더 골치 아프게 만들고 가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건 사생의 자부인 부처님의 도리가 아닐 테지요. 부처님은 틀림없이 쉽고 아주 간명하게 법을 설하셨을 텐데, 이 법이 그동안 인도에서 전해져오는 동안 역사의 때가 묻게 되고, 다시 그것이 서역을 거처 중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오기까지 잔뜩 꼬이고 때가 묻고 비틀리고 해서 어렵게 된 게 아닌가 하는 게 제가 품은 생각입니다.
쉽고 간명한 법을 어렵게 만들어가지고 지금 불교가 어떻게 보면 비틀거리고, 그 법의 어려움에 눌려 스님들도 갈팡질팡하고 있단 말입니다. 스님들, 노력 얼마나 많이 합니까. 용맹정진도 하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도 이 법의 무게에서 좀체 헤어나지 못하는 거지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문제의식으로 접근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영어 번역이나 한역도 문제가 많을 것이라는 의심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요한소리〉를 통해서 그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했지요. 그냥 단순하게 책 번역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부처님 법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길이 없나 하는 원을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지식인들 및 출가자들 중에 비슷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쉽고 합리적이며 이해 가능한 글을 쓰려 노력하는 분들을 BPS 시리즈에서 많이 본 것입니다. 천군만마의 우군을 얻은 듯했습니다. 그분들의 견해나 해석에 전적으로 공감하거나 찬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일단 문제를 제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고요한소리〉에서 그동안 주로 BPS 책을 번역,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는 가교로서 법을 만드셨다면 그 법은 분명하고 확실하고 논리적이고 또 합리적이고 빈틈없이 짜여 있는 완벽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이 꼬여 있다 이 말이지요. 한번 풀어보자! 꼬인 건 풀고, 때가 있으면 벗겨내고, 그래서 부처님 원음에 가깝게 어떻게든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해 드려야 이게 부처님 제자 된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랫동안 상당히 고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심하면서 들여다보니까 불교의 핵심 용어들부터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뜻과는 다를 수 있는 소지가 많더라고요. 불교가 인도에서 만들어져 몇 백 년 구전되어 오는 사이에 자연히 인도의 상황을 타게 되겠지요. 인도의 때랄까, 인도 사람들의 기질, 바람,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많이 흡수 반영되어서, 말하자면 불교가 상당히 인도식의 어떤 모습을 띠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접하는 아비담마(abhidhamma) 있잖습니까. 이 아비담마가 무엇이겠어요? 이게 바로 인도사람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한 방식이 아니겠어요. 여러분, 이런 농담 들어봤지요. 독일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 좋아하지만 인도 사람 만나면 학을 떼고 도망간다지 않습니까. 그만큼 인도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뭘 파고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기질인가 봅니다. 인도의 많은 종교 계파가 다 그렇듯이 그런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불교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서 나타난 것이 아비담마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담마를 만드는 데서 그칩니까. 그건 논(論)이고 또 논에 대해서 주(註)를 달고 거기다 또 주를 달아서 복주(ṭika)가 나오고 또 부연 확대되고 다시 또 요약 정리되고, 이런 식으로 방대하게 전개되어 불교가 무슨 철학논리처럼 추상화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인도사람들이 흥미를 잃게 되었고 불교는 마침내 배척당해 인도에서는 수명이 다해버립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져버려요. 말하자면 너무 고답적이랄까 추상화되고 이론화되어 진리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역할보다는 논리적 희론(戱論 papañca)의 대상이 되어 불교는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는 동안 그 불교가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남방의 몇몇 나라에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가 북쪽으로는 서역 땅을 거쳐서 중국으로 왔어요. 서역에서는 과연 어떤 창조적인 해석이 가해졌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중국에 가서는 대승불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용수보살의 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지요. 그런데 용수보살 하면 팔불중도(八不中道)를 생각하게 되지요 그것을 추종하든 반대의 입론이든 간에 여기에 중도란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띤다고 봅니다.
법의 핵심은 중도(中道)
부처님이 깨닫고 최초로 다섯 비구에게 설하신 경이 있는데, 바로 《초전법륜경(Dhammacakkapavattanasutta)》이지요. 이 경에서 부처님이 ‘내가 깨달은 바는 중도(中道)고, 그 중도가 곧 팔정도(八正道)다’라고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깨달은 ‘중(中)의 걸음[中道]’, 눈을 밝히고 앎을 밝히는 것, 고요[寂靜]로, 수승한 지혜[神通智]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그 치우침 없는 걸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 요소의 길[聖八支道]’이다.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이어서 사성제(四聖諦)를 설하면서 거기서 ‘도(道), 즉 중도’의 위치를 잘 가늠케 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법문이니까 참으로 핵심이라 봐야 되겠지요. 그래서 저도 부처님 가르침의 핵은 중도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중도가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인도나 중국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왔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중도가 한문이지요. 가운데 중(中), 길 도(道)자 쓰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은 별로 의심을 안 하지요. 또 중도라는 말은 하도 흔하게 쓰니까 당연히 그런 걸로 알고 넘어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더라고요.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맛지마 빠띠빠다(majjhima paṭipadā)를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다시 또 아리야 앗탕기까 막가(ariya aṭṭhaṅgika magga)를 이야기하셨어요. 그런데 중도라는 한문 그대로 하자면 맛지마 막가(majjhima magga)라야 할 것입니다. 물론 빠띠빠다(paṭipadā)를 막가(magga)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맛지마 빠띠빠다가 중도(中道)라 하는 것에 대해 조금 의심이 가요. 아무리 봐도 빠띠(paṭi)가 주로 ‘무엇을 지향하는’, ‘무엇을 향해서’ 이런 뜻이고, 빠다(padā)는 ‘발, 걸음걸이’인데, 그렇다면 맛지마 빠띠빠다는 ‘중을 지향해서 걷는 걸음’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길과 걸음은 관련이 깊지만 동의어는 아니잖아요. 길은 수많은 걸음이 만들어내고, 또 수많은 걸음이 되풀이 되도록 유도하는 어떤 밑바탕이고 기본이지 그 자체가 걸음은 아니거든요.
요즈음은 움직이는 길도 만들어지고, 앞으로는 그런 길이 보편화될 지도 모르겠으나 우리가 아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취지의 길은 그런 기계적 동력으로 움직이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맛지마 빠띠빠다는 어디까지나 ‘중을 취하는 자세, 중을 취하는 걸음, 중을 지향하여 나아감’ 이런 것이라야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리야 앗탕기까 막가는 길입니다. 성스러운 여덟 가지 요소랄까,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길입니다.
예를 들면 경부고속도로는 길이지요. 그러면 부산서 대구까지, 대구서 대전까지, 대전서 서울까지 이렇게 구분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각 분절의 역할은 서로 얽히기도 하지만 하여튼 그것은 어디까지나 길이지, 그게 걸음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리야 앗탕기까 막가의 막가는 길이고, 맛지마 빠띠빠다는 ‘중을 취한 걸음’ 또는 ‘중을 향한 걸음이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눈먼 과학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 중도
여기 빠알리어 학자들도 여러분 계시는데 그분들의 견해는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도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요한소리〉에서만 내 주장을 말하고 그칠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중에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고요한소리〉가 부처님의 핵심을 선양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만큼, 내년 2017년에 중도포럼을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학자 분들의 날카로운 두뇌를 가동해서 이 문제를 더 천착해보자, 파고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사 문제가 아니거든요. 중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중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서 그 덕을 볼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인류가 처한 이 엄중한 위기에 그 위기를 타개할 길로서 중도를, 팔정도를 활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덕을 봐야 됩니다. 이득을 얻어야 돼요. 안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부처님 법에 대한 의미 천착과 활용방안, 즉 이득을 얻는 방법을 더 깊이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시도가 한 번에 끝날 일은 아닐 것이고, 오히려 ‘이 시대 인류 모두에게 특히 지성인들에게 과제’가 되도록 문제를 계속 제기해나가보려는 거지요.
이 시대 인류가 그야말로 위기에 처해 있지요. 과학은 청맹과니지요. 자본이 뒤에서 밀어주고 인류의 세속적 욕망이 목표를 설정하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조건 내닫는 게 오늘날의 과학이고 기술 아닙니까? 그건 눈먼 과학이에요. 지금 그러한 과학이 인류를 이끌고 벼랑 끝을 향해 질주하는데 이럴 때 부처님의 법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이런 과학의 질주를 제어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아서 틀 것은 틀고 꺾을 건 꺾고 해서 과학이 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해야 하는데 그걸 누가 하겠습니까?
많은 이데올로기가 그걸 하겠다고 나섰었지요.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온갖 것이 나왔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전부 다 참담한 실패입니다. 그럼 종교는 어떻습니까? 그걸 할 수 있는 건 종교일 수 있는데, 지금 현재로선 어떤 종교에서도 그걸 할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할 필요도 없겠지요. 매일 신문에서 TV에서 보니까 다들 잘 아시겠지요.
불교가 아닌 불법으로
다시 말하면 종교로서의 불교도 그런 일은 해낼 수가 없습니다. 불교에도 종교의 색채가 너무 짙거든요. 그러나 종교 불교가 아닌, 부처님 원래의 진리 불교, 진리로서의 불교, 진리 전달체로서의 법, 이것이 꼭 그 역할을 해낼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인류는 결국에 진리를 모른 채로, 아니 모르기 때문에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뭣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요. 오늘날 심지어 과학자들마저 지구 멸망을 상정하고, 어느 별나라에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인류의 기지를 만들 꿈을 꾸고 있을 만큼 상황이 긴박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을 두고 과거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인류 업의 당연한 보입니다, 업보입니다. 인류 스스로가 살아온 역사라는 것이 업보의 역사 아닙니까? 그럼 그 업보는 인류 책임이지요. 그걸 하늘이나 신의 탓으로 돌리는데 그게 아니다 이 말이지요.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그건 뭐 어떤 대책도 없는 것 아닙니까? 신에게 그냥 제발 그만두시고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런다고 되겠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업을 짓는 주체로서 인간을 규정하거든요. 인간의 존재는 오취온(五取蘊)이고, 오취온인 인간의 역할은 업 짓는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 업보를 받고는 그 업을 기초로 해서 자기를 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자꾸 모색해나가는, 그게 사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간입니다. 부처님 당신이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경에 보면 창조주 브라만이 자기가 모르는 일을 인간인 부처님께 묻거든요. 신이 전지전능하기를 우리가 기대하지만 전지전능하지 않거든요. 전지전능할 수가 없어요. 다만 탁월한 능력, 신통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 신통력은 하나의 능력일 뿐입니다. 그러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전지전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신통력으로 절대 자만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그냥 법 전해주고 가신 겁니다.
우리가 조석으로 부처님을 찾고 염불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부처님에게 의지하려 하지만 부처님에게 의지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 가셨어요, 법 전해주시고.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란 말 들어보셨지요. ‘내가 법 전해주었으니까 법 의지하고 그리고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 왜 남에게 의지하려 하느냐’, 그게 부처님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자등명 법등명! 자기 자신, 그걸 신뢰하라는 거지요. 그런데 어설프면 신뢰할 가치가 없잖아요. 그렇게 했다간 낭패 나잖아요. 그렇지만 법을 아는 자기 자신은 가장 신뢰할 수 있으니까 ‘절대 낭패 안 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법 전해주시고 홀가분하게 할일 다 마쳤다고 외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 법을 받은 우리가 제대로 법을 이용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불법을 공부하던 사람들이 법을 이렇게 어려운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오히려 그 무게에 짓눌려 어떻게 할 줄 모른다면 오늘날 인류가 이 꼴이 되어도 불교가 속수무책인 겁니다. 그것은 부처님 취지도 아니고 불교에서 이해한 인간의 도리도 아닌 것입니다.
육처(六處)와 육근(六根)
불교가 도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가 하고 경을 들여다보면서 용어들을 눈에 띄는 대로 검토해보니까 참 문제가 많아요. 말하자면 부처님 원래의 법을 전하는 그 소식에 접할 수 없게끔 오히려 장벽이 많이 만들어져 있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처(處), 아야따나(āyatana)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지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육처(六處)라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육근(六根)이라 할 때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참으로 지혜인이라 어떤 말씀을 하실 때는 무슨 말이든 허투로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용어든 정확한 의미로 쓰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새로 만들어내신 용어도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되는지는 지금 여기서 따질 일이 아니겠고, 우선 한 예로 부처님이 육처와 육근이라는 용어를 쓰셨는데, 학자들은 대개 그 말의 어원을 따지고, 산스크리트어로 어근이 무엇이고, 거기서 나와서 이런 말이 되었으니까 이건 이런 뜻이다 하고는 넘어가버려요. 그러니까 이게 산스크리트, 즉 힌두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때지요. 때가 묻어서 이런 저런 곡절 끝에 비틀어져버리는 거지요.
아까 말한 육처와 육근의 경우도 남방에선 이 둘의 차이가 주목을 받지 못해요. ‘처’와 ‘근’, 엄연히 다릅니다. 처(處)라는 말은 물론 아야따나의 한문 번역어인데 입(入)이라고 옮기기도 해요, 육처 또는 육입. 그럼 뭐가 들어오는 것이냐. 상(想)과 수(受)와 식(識)이 들어오는 겁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서 특히 그 상과 식이 들어와서 행(行)이 이루어지는 곳이 처입니다. 그러면 근(根 indriya)은 뭐냐. 그렇게 수·상·행·식과 어울려서 노는 차원에 매몰되지 않은, 원래의 어떤 기능, 어떤 능력입니다. 눈이 뭔가를 볼 때 있는 그대로를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떤 관념에 의해서 본단 말입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다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우리가 뭘 인식할 때 다 관념 작용에 의하여 벌써 때 묻은 인식을 하지,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이게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지요. 그래서 바로 보는 근을 지키는 것, 즉 근방호, 인드리야상와라(indriyasaṃvara)라고 하는데, 그 근방호를 잘해서 상 놀음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거 조금 졸리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너무 중요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과 오취온고(五取蘊苦)의 차이
온蘊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반야심경》 염송했지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했지요. 과연 부처님이 오온개공을 말씀하셨을까요? 아닐 겁니다. 오취온(五取蘊) 즉 고(苦)라 했어요. 오온개공은 대승경전에 나올 뿐 빠알리 경에는 제가 과문한 탓인지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아니오, 참 다르지요. 오온이 공(空)하다 하는 말은 벌써 그건 공의 어떤 측면에 중점을 두고 오온도 결국 공이다 하는 이야기거든요. 공이라는 말이 경에도 여러 형태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걸 대하는 부처님 말씀의 뜻은 공을 반드시 긍정적으로 수용해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지요. 그것이 공무변처정의 공이든 순냐따(suññatā)를 뜻하는 공이든 불교가 지향하는 열반에 직접 관련되는 혜해탈의 영역에 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리를 눈뜨게 만들어 고로부터 벗어나게 만들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지 무슨 훌륭하고 황홀하고 좋은 경험이나 구경을 시키려고 하시는 건 아니거든요. 예를 들면 사무색정(四無色定)에 들어서 아주 더 없이 높은 정을 누릴지라도, 그건 부처님의 취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그 높은 곳 쓸모없다고 버리고 팔정도를 찾아낸 것 아닙니까. 팔정도에 정정(正定)이 마지막에 있지요. 그리고 정정은 사선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흔히들 정에만 마음이 팔려 정에는 초선·이선·삼선·사선이 있고 그 위로 사무색정이 있다고 얘기들 하지요. 이것은 정의 소식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정을 강조하고 가르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은연중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무색계 정에 빠져서 머무르지 않고 무색계 정을 벗어나서 팔정도로 들어오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팔정도 끝은 정정(正定)이지요. 부처님은 ‘정정은 사선(四禪)’이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선정(禪定)이라는 말이 귀에 익습니다. 그러면 사선은 무얼까. 우리가 펴낸 시리즈 가운데 《염신경》이 있었지요. 거기에 비유를 들어가며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거기에 입각해서 살펴보면 초선은 계의 청정, 이선은 정의 청정, 삼선은 혜의 조건, 사선은 해탈의 조건이 익어가는 향상의 걸음으로 이해됩니다.
중도는 팔정도
그러면 이러한 사선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부처님 전기 읽어보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부처님도 출가해서 웃따까 라마뿟따와 알라라 깔라마라고 하는 그 시대의 최고 선지식이고 요기이고 또 정의 대가인 분들을 만나서 다 배웠지요. 그런데 그분들이 가르친 것은 무색계정의 최고의 영역이었습니다. 그 무색계정의 최고의 영역을 다 배운 분이 왜 그걸 마다하고 이걸로는 안 된다, 이건 내가 목표하던 바가 아니다 하고 오히려 고행림에 들어서 고행을 하신 걸까요? 그런데 고행해서도 되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고행을
했기 때문에 고행의 폐단을 알고서 마침내 제삼의 길을 찾게 되었지요. 그래서 ‘내가 발견했다. 내가 찾아내고 발견해낸 깨달은 그 길은 팔정도라는 중도다’라고 하시게 된 겁니다.
중국에는 중용(中庸)이 있고 서양에는 황금률(the golden mean)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추상적입니다. 그렇지요? 추상적입니다. 중(中)!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양쪽 극단을 다 피하면 그게 중인가? 그러면 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중국에도 있었고 서양에도 있는 중, 그 중이라는 이상을 부처님도 일단은 긍정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은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중을 취한다고 하면 회색분자나 어중간한 소극분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뭔가가 없습니다. 그저 추상적인 개념 놀음이거나 아니면 세속의 처신술에 그쳐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현실에서 사는 태도는 대단히 애매모호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 자세로 어떻게 진리를 찾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이 중을 설하시면서 양변을 떠난다면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는 의문에 ‘팔정도를 걸어라’고 확언하신 겁니다. 아시겠어요? ‘양변을 버렸다’, 좋습니다. 그럼 중을 취해야겠는데 그 중은 어떤 것이냐? 애매하고 사실 구체적으로 당면하면 이게 정말 어렵고 용기 안 나는 일입니다. 양변을 버리는 거야 폐단을 눈으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이거다’ 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회피주의, 회색주의, 또는 거부, 극단의 거부, 내가 너무 막가지 않겠다, 뭐 이런 정도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부처님이 팔정도를 말씀하심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팔정도야말로 부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이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러면 팔정도, 그것은 왜 칠정도면 안 되고 팔정도라야만 하는가? 팔정도는 과연 그 자체로서 어떻게 완벽한 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알라라 깔라마나 웃따까 라마뿟따 같은 분이 계율을 지키지 않았겠어요? 살생하고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그분들이 어긋난 생활 수단을 가지고 살았겠습니까? 정 닦는 노력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팔정도의 여러 요소들이 거의 다 있는데 부처님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게 무엇일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건 정념이 거기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팔정도의 일곱 번째 정념, 이것이 부처님의 법과 그 시대 여타 선지식들의 법과의 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념이 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그것 참 흥미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 제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조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정념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이다
정념이 뭐냐 하는 문제를 제자가 부처님께 질문을 합니다. 정념이 뭡니까? 그런데 대개는 그 당시 이 말이 나올 때엔 정지·정념(正知正念)의 형태로 나옵니다. 그 정지·정념이 뭡니까 하고 물으니까, 부처님이 정지라고 하는 것은 내가 숨을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고 내쉬면 내쉰다고 안다, 걸으면 걷는다고 알고 말을 하면 말을 한다고 안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 행하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정지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참 중요하지요. 우리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관념적으로 아는 것, 추상적으로 아는 것, 또는 상상으로 대개 짐작해서 아는 것, 이런 것하고 다르지요. 내가 지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또 걷고 앉고 하는 것은 확실하지요. 내가 손을 들고 내리고 하는 것은 확실해요.
그러나 남이 어떤 것을 어떻게 할 때 내가 확실히 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누가 손 긁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이 가려워서 긁는가 보다 하는데 그 사람은 다른 사정으로 긁을 수 있는 것이거든요. 남을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어요. 예를 들면 부부간에 몇 십 년 같이 살아도 사람 마음 서로 모르잖아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마음은 조금 알지요. 그것도 자꾸 보는 훈련을 하면 점점 예민해져 나중에 제대로 보게 되지요. ‘자기’, 요게 참 중요합니다. 인간이 노력하면 자기를 알고 자기를 볼 수 있다, 그러니 알 되 일단 자기를 제대로 보는 훈련을 해보자고 해서 관심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겁니다. 이것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항상 남을, 바깥을 보고 알기에 열중해왔거든요. 그런데 이제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관심을 돌리는 큰 변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안을 살피는 자세로 볼 때 보여지는 몸, 그 몸이란 부처님이 ‘정념은 신·수·심·법이다’라고 대답하신 말씀 중에 신이에요. ‘신·수·심·법’, 이 네 가지가 바로 정념의 전부에요. 그러면 신·수·심·법이 뭔
가? 왜 신·수·심·법이 정념인가?
신념처와 수념처
첫째로 신, 몸 신(身)자입니다. 빠알리어로는 까아야(kāya)입니다. 정지(正知)로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몸을 보니까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하더라 이겁니다. 하는 그대로를 봐요. 그 다음에는 이 몸뚱이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보니까 뼈도 있고 살도 있고 오장육부도 있고 피부도 있고 똥도 오줌도 있고 별개 다 있지요. 나를 들여다보면서 그런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어떻게 보면 걸어 다니는 똥오줌통이지요. 그런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신념(身念)입니다.
그런데 이 몸에서도 대체 뭐가 벌어지고 있는가 하고 보니까 느낌이라는 것이 거기서 일어나더라는 겁니다. 가렵다 지금,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아프다, 이게 다 느낌이지요. 그 느낌을 수(受), 웨다나(vedanā)라고 하지요. 몸을 보고 거기서 느낌을 보고 그리고 또 그 몸과 느낌을 기초로 해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또 다른 요소를 보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마음(心 citta)입니다.
심념처
마음 놀음 이게 또 벌어집니다, 내 속에서.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남의 마음보다 내 마음은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내 마음을 자꾸 보는 훈련을 하면 마침내 내 마음이 탐욕과 같이 어울려 탐욕의 성질을 띠고 있구나, 지금 내 마음이 성내는 성질을 띠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내 마음이 치암, 어리석음과 어울리고 또 산만했다가 어디 집중했다가 이상적으로 큰마음을 가졌다가 옹졸한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또 정을 좀 닦아서 제법 올라가고 그래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마음이 되었다가 마침내 제대로 해탈했는지 아닌지까지도 알게 됩니다.1)
이러한 마음의 사정, 상태를 볼 수 있는 게 심념(心念)이고 그래서 이루어지는 게 심해탈입니다. 말하자면 자유로워지는 것이지요. 이 마음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졌다고 해서 끝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부처님을 찾고 법을 찾는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가 보면 고통 때문이거든요. 안 그렇습니까? 내게 고통이 없으면, 몸도 마음도 고통이 없으면 뭐 하러 공부하겠습니까? 필요가 없지요. 고가 있으니까 고에 쫓겨서 공부를 하게 되는 거지요. 우선 마찰 갈등의 여지를 줄이는 노력부터 하게 되지요. 계율 공부를 닦는 거지요. 무엇을 하라 하지 마라 어떻게 하라 하는 것은 가지치기 수준의 고의 해결은 되지만 여전히 고의 줄기는 건재합니다. 그래서 그 고의 줄기를 쳐내려고 더 노력하다 보니까 정을 닦게 되고 마음을 집중해서 정을 닦게 됩니다. 마침내는 심해탈까지 이루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심해탈을 이루면 고를 벗어나기는 하지만 고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나무의 줄기는 쳤는데 뿌리가 남아 있는 거지요. 많은 경우에 뿌리에서 다시 싹을 내밀고 가지를 뻗고 돋아나지요. 그러면 그 뿌리마저 완벽하게 쳐내는 게 뭔가? 그게 ‘지혜의 칼’이다 이 말입니다. 뿌리째 뽑아내 버리는 것,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고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 이것은 지혜가 없이는 안 되더라, 즉 심해탈만으로 안 되고 혜해탈이라야 한다고 하신 겁니다. 부처님이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와 같이 있을 때, 심해탈은 이미 이루었어요.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을 이루어 팔심해탈 중 최고 경계를 맛보았는데 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분명히 해탈한 마음인데도 그 정도로는 고의 뿌리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더란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살이에서 요사이처럼 이렇게 재난이 겹쳐 들어올 때 과연 그걸 외면하고 눈 감아버리고 정에 도피해서 간신히 피하는 것 말고, 눈 딱 뜨고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걸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생을 해탈시키고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그런 힘이 거기서 나오느냐 하면 안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고의 뿌리를 뽑아내고, 또 온갖 중생들이 그 해택을 골고루 맛볼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마침내는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셨던 것입니다.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다 보니까 정념에서 신·수·심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법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념처
그렇다면 법이란 뭔가? 진리와의 관계에서, 중생과의 관계에서 이미 법을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그러한 법이 우리에게 소용 닿기 위해서는 법을 잘 공부해서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내외처(六內外處)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육내외처에서 육내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이고, 육외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입니다. 아까도 육처를 이야기했지요. 육처의 대상이 육경인데 그 육경의 마지막 여섯 번째가 법입니다. 여러분 아시겠지요?
즉, 어떤 기관을 통해서 법을 알게 되느냐 하면 의(意)를 통해서 안다 이 말입니다. 의(意), 뜻 ‘의’ 자지요. 이 ‘의’를 통해서 법을 알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의를 잘 건사하고 잘 발전시키면 법을 쉽게 알 수도 있고 또 법을 활용할 수도 있겠지요. 법하고 통하는 것은 의잖아요. 눈은 법하고 안 통합니다. 눈 자체는 그냥 형상과 색깔만 볼 뿐이지 거기에 담겨 있는 법은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안·이·비·설·신 모두 다 그래요. 그런데 의가 법을 대상으로 하는 기관이고 기능이다 보니까 의를 통해서 우리가 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를 잘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 집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 의를 어떻게 잘 지키느냐 하는 것을 불교에서 처음부터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그 법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의를 처로부터 근으로, 다시 말해 의처를 의근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또는 의근이 의처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근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순수한 기능인데, 처는 항상 상이라든가 수라든가 식이라든가 이런 것에 오염되어버려서 밖의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왜? 그것들이 와서 노는 장소니까요. 왜 들어오느냐? 놀기 위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육처에 산냐(想 saññā)같은 것이 들어와서 인식을 그냥 휘저어버리고 오염시켜버리고 때 묻혀버리는 겁니다.
그것으로부터 의를 보호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의 보호’ 이게 대단히 중요해서 옛날 중국에서도 아나빠나사띠를 안반수의라 옮겼습니다.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의 수가 지킬 수(守)자입니다. 의를 잘 보호하고 건사해서 잘 활용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불교 공부가 법을 공부하는 것이라면 수의(守意)가 전부가 되는 셈이지요. 그것을 생각하면 의라는 말의 의미는 그야말로 크고 막중합니다. 수의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법을 잘 지켜야 되는 겁니다. 의를 잘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많은 노력을 해서 마침내는 신·수·심을 제대로 알게 되면 비로소 법념처 공부에 들어갑니다. 법념처는 의가 발달된 것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신·수·심이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법을 공부할 수 있는 준비가 되면 법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탐욕이라든가 우리 공부를 방해하는온갖오염요소들을 다시 면밀하게 들여다봅니다. 감각적 욕망(kmacchanda), 염오(v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들뜸과 회한(uddhaccakukkucca), 의심(vicikicchā)을 다섯 가지 장애, 오개(五蓋)라고 하는데 우리가 법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장애되는 이 요소들을 하나하나 색출해서 뽑아내야 하는 겁니다. 이전에 관하는 능력을 키웠으니까 오개를 닦고, 보고, 관하고, 그걸 있는 그대로 보면 해결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미망 망상을 가지고 보니까 해결되지는 않고 꼬이기만 해서 점점 더 어려운 문제가 되는데 있는 그대로를 보면 햇빛 앞에 얼음이 그냥 스르르 녹아버리듯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법 공부를 제대로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 그때는다섯 가지 취로 이루어진 이 오취온이 ‘나’라는 존재라고 관념적으로 유신견(有身見)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바라보고 지켜보게 됩니다. 즉 오취온(五取蘊)을 관(觀)하여 유신견을 확실하게 타파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다음은 바깥세상이라는 육경이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내게 부딪쳐서 이루어지는 색·성·향·미·촉·법들이 실존하는 것인가 보게 됩니다. 앞에서는 내가 실존하는 것인 양 유신견에 빠져 있었다면 이제는 육경, 즉 바깥세상이 실존하는 것인가 하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파악하고 파지(把持)하는 능력을 얻고 키우게 됩니다. 그래서 육처가 어떻게 육처결(六處結)로 우리를 묶고 있는가를, 안·이·비·설·신·의를 묶어서 세상이 마치 실존하는 것인 양 세상살이에 골몰하도록 만드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안과 밖이 다 파악이 되면 그 다음 할 일은 지혜의 눈을 한 걸음 한 걸음 더 완성시키는 거지요. 그게 칠각지(七覺支)입니다. 그래서 칠각지가 완성되면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우리가 도달하거나 진리를 파지하거나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정념(正念), 즉 사띠(sati)입니다. 이 사띠를 통해서 진리를 보는 눈이 자연히 열리니까 지혜가 생기고 해탈이라도 심해탈만이 아닌 혜해탈까지 이루어내어 마침내 열반(涅槃 nibbāna)에 든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전체적인 윤곽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역사상에 가끔 일어나는 류(類)의 변혁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거대하고 심각한 변혁기입니다. 청동기시대로부터 철기 시대로 접어들던 부처님 당시의 시대가 그랬던 것과 같이 새로운 가치관이, 새로운 진리관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위기의 측면에선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인 것입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인류의 생존이 지구의 존속과는 연관되지 않았으니까요. 이러한 대 위기의 변혁기를 감당해 내려면 방편 차원의 해결책이 아니라 진리 차원의 ‘신(新)가치관’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진리로서의 사성제(四聖諦), 그 사성제의 핵심인 팔정도(八正道), 그 팔정도의 실천으로서의 중도(中道)[중(中)의 걸음]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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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이 활성 스님
1938년 출생. 1975년 통도사 경봉 스님 문하에 출가. 통도사 극락암 아란야, 해인사, 봉암사, 태백산 동암, 축서사 등지에서 수행 정진. 현재 지리산 토굴에서 정진 중. <고요한소리> 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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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일곱
참선과 팔정도
초판 1쇄 발행 2017년 4월 13일
말한이 : 활성
펴낸이 : 하주락·변영섭
펴낸곳 : (사)고요한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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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 1,000원
<고요한소리>는
]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이 책의 출판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비용은 전액 빠알리경전의 역경과 그 준비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비용과 기금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고요한소리〉모임에 새로이 동참하실 회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비, 후원금, 책값 보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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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금주 : (사) 고요한소리 -
주 해
1)심적 요소(쩨따시까) 기준의 16가지 주시대상 마음
sarāgaṃ cittaṃ―vītarāgaṃ cittaṃ
욕망이 수반된 마음과 욕망이 수반되지 않은 마음
sadosaṃ cittaṃ―vītadosaṃ cittaṃ
성냄이 수반된 마음과 성냄이 수반되지 않은 마음
samohaṃ cittaṃ―vītamohaṃ cittaṃ
미혹이 수반된 마음과 미혹이 수반되지 않은 마음
saṅkhittaṃ cittaṃ―vikkhittaṃ cittaṃ
제대로 정돈된 마음과 흐트러진 마음
mahaggataṃ cittaṃ―amahaggataṃ cittaṃ
(출가)장부심과 범부의 마음
sauttaraṃ cittaṃ―anuttaraṃ cittaṃ
보다 더 높은 정이 있는 비상비비상처정 까지의 마음(유상심)과 상수멸처정의 마음(무상심)
samāhitaṃ cittaṃ―asamāhitaṃ cittaṃ
정정(正定)을 이룬 마음과 정정에 들지 못한 마음
vimuttaṃ cittaṃ―avimuttaṃ cittaṃ
해탈한 마음과 해탈하지 못한 마음 본문으로
소리8 중도 이 시대의 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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