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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다층》- 올해의 좋은시조 총평
고단한 여울목에서 부르는 우리 시대의 희망가
정용국(시조시인)
1. 들어가면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의 유지가 극한에 이르러 “풍요 속의 빈곤”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러 더 이상 자원의 총량을 늘릴 수가 없을 정도의 생산력을 갖춘 사회가 도래하면 사회적인 모순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더 이상 기업의 이익에 구애받지 않은 생산능력을 활용해 사회 구성원들의 자원난을 사라지게 하고 그때서야 인간은 의식주 해결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주장한 '자신의 자아를 위한 노동'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필자가 이 단락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풍요 속의 빈곤’이다.
정부가 발표하는 경제지표를 살펴보면 우리의 현실은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개인소득은 25,000달러가 되었고 수출은 이미 1조 달러를 돌파한 지 오래 되었으며 세계 경제력 순위에서는 11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2013년 세계행복조사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를 살펴보면 우리의 행복 수준은 세계41위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상황을 단지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면이 많다. 그것의 주 요인은 ‘양극화 현상’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데 모든 통계를 이루는 ‘평균치’라는 용어에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치의 도표가 항아리 형이 아니라 장구형 구조인 까닭인데 그만큼 중산층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은 정부로부터 끝없는 혜택 (법인세와 종부세 인하, 부당노동행위 묵과, 원가이하로 제공되는 전기요금 등)을 등에 업고 수출전선에 서면서 그것도 모자라 인건비 절감을 이유로 해외에 공장을 짓고 있다. 이렇게 창출된 수익은 고스란히 재벌의 수입구조에 보태지지만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만만치 않은 세금과 각종 공제금, 비정규직 확대, 시간제 노동, 최저임금 부족, 노동운동 제지 등의 걸림돌에 묶여 버리기 일쑤이다. 양극화 현상은 공정한 세제와 복지의 확대로 극복할 수 있지만 새 정부의 선거공약은 날이 갈수록 휴지 조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층 시조 총평을 쓰면서 서두를 머리 아픈 이야기로 시작한 연유는 바로 이러한 ‘풍요 속의 빈곤’으로 빚어지는 고단한 우리들의 삶이 2013년 다층이 선정한 좋은 시조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에 주목한 까닭이다. 좋은 시조 열 편 속에 녹여 낸 시편들에는 끈끈한 희망가들이 가파르게 양극으로 흩어진 우리 사회의 화근 덩어리를 향해 화해와 긍정의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은 마치 메마른 가슴팍을 적시며 흐르는 한 줄기 젖줄과도 같았다. 대략 그들의 범주를 살펴보면 ‘희망’ ‘사랑’ ‘가족’의 주제가 현실의 고단함과 상처를 위무하고 치유하려는 살뜰함으로 넘치고 있음을 느끼며 세 가닥을 잡아 편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2. 보름달과 핸드랩과 피아노의 희망3중주.
김남주 시인은 「시인」이라는 시에서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 없다” 라는 구절로 시인의 역할을 갈파한 바 있다. ‘몽둥이’를 어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만은 공권력이 불공정하게 작용하여 유발하는 모든 구속과 방치와 억압은 모두 몽둥이에 해당한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양극화 현상’도 국가의 무능력과 방치와 조장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시국사범들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는 가장 극악한 경우이며 무죄로 귀결된 수많은 복역자들은 극심한 ‘몽둥이’의 피해자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사상에 상처를 받은 사람, 가족의 피해를 지켜보아야 했던 수많은 가족들과 친지들과 ‘국민의 우울’까지도 광범위한 피해의 범주로 볼 수 있다. 이제 ‘행복한 시인’들이 ‘몽둥이’를 이겨내고 저자 거리에 나지막하게 불러주는 희망가를 들어보자.
저 노랗고 둥근 표적에 날아간 화살들은 포물선 그으며 땅으로 떨어지거나 밤하늘 사수자리에 박혀서 빛난다.
바람의 촉들이 항상 널 가두지만 한 번도 명중 못하고 그냥 빗나갈 뿐 이 가을, 어쩌자고 꿈은 저리 멀리 달아났나.
보름달을 숭덩숭덩 잘라 파는 정육점 달빛이 구긴 지붕 다려주는 세탁소 옛 꿈이 노른자위가 툭, 달동네에 떨어진다.
- 박성민의 「보름달」 전문 (나래시조, 2012 겨울호) -
작품을 읽자마자 필자의 뇌리를 스친 다른 시조가 있었다. (밤이면 비틀대는 청진동 골목길을/ 도려 낸 웃음처럼 플라스틱 달이 뜨면/ 청동의 굴레 밖으로 다시 솟는 이 멀미 - 김현의 「영위營爲」 첫수) 그러나 “돌아선 내 어깨에는 견장 같은 또 하루”라며 쓸쓸하게 문을 닫은 김현 선생의 시와는 달리 위 작품은 셋째 수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거두어들이는 시인의 힘이 놀랍다. 희망으로 날아간 화살들이 아쉽게도 “사수자리”에서 박힐 뿐이라는 제시도 강한 복선을 담고 있다. 사수자리는 여름이 끝날 무렵의 남쪽 하늘 아래 은하수가 아주 짙게 보이는 곳에 있는 별자리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켄타우르 키론은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말인 반인반마의 모습인데 바로 궁수자리라고도 불리는 이 별자리의 주인공이다. 학문과 무술에 뛰어난 젊은 영웅들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니 얼마나 안타까운 신화를 간직한 별인가. 인간 세계에서 이루어지지 못할 꿈을 “사수자리”라는 시어를 통해 중의적으로 상징하게 해 놓았다.
도시의 달이 “플라스틱 달”처럼 대개 냉소적으로 시에 등장하기 십상인데 상황을 뒤집는 셋째 수는 역시 박성민 다운 대반전이다. 달은 또 흔히 ‘꿈이나 희망’으로도 자주 표현된다. “노랗고 둥근 표적”도 그렇다. 그러나 “날아간 화살”들은 표적에 이르지도 못하고 “떨어지거나” “그냥 빗나갈 뿐”이라는 절망을 시인은 끝내 내버려 두지 않았다. 파격적인 발상으로 달동네에 “엣 꿈이 노른자위가 툭” 떨어지게 하는 상상력이라니 숨이 턱에 와 닿는다. 종장을 버티게 해주는 초,중장이 그 상상력의 에너지요 추진력이라 할 수 있다. 달동네의 정겨운 “정육점”과 “세탁소”에서 “보름달을 숭덩숭덩 잘라” 팔고 “구긴 지붕을 다려주”기 때문인데 완전 세일가격으로 ‘숭덩숭덩’ 썰어주며 다리미 대신 ‘달빛’으로 다려주는 빅 이벤트가 펼쳐진다. 그 ‘보름달’과 ‘달빛’은 서울 강남의 고층 타워 팰리스 위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데 바로 박성민의 장풍(掌風) 때문이 아니겠는가. 종장 3,5의 자리인 “옛 꿈이 노른자위가”에서 소유격(~의)이 아닌 나열형 '~이‘를 배치하므로 인해 음보가 탁월해지고 주어가 두 배나 크고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숭덩숭덩’이라는 부사가 전해주는 푸근함과 호흡은 작품 안에서 발군의 시어로 빛을 발하고 있는데 아마 ‘숭덩숭덩’이라는 부사는 이제 이보다 더 좋은 자리에 쓰여 지기는 어려울 듯하다. 남자의 소리는 오래도록 닫혀 있었다
새들의 지저귐을 새장 속에 가둬둔 방
복도엔 긴 널빤지만 덜컹대고 있었다
남자의 손 마디마디, 매듭으로 핀 침묵
그 속에 갇혀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누군가 부러진 길을 맨발로 걸어간다
오선지에 그리던 밤이 소복소복 쌓인다
추억을 두드리며 내리는 겨울비
손톱은 낮은음자리, 낮달로 돋아난다
- 이송희 「피아노가 있는 방」 전문 (나래시조, 2013 봄호)
이송희의 위 작품은 유부남과 미혼녀 '나'의 불륜을 그리고 있는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와 유사한 분위기의 시조이다. 마치 남의 비밀스런 편지를 엿보는 느낌으로 독자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사랑의 자취와 '나'의 어린 시절의 남다른 기억들을 좇게 되는 소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피아노가 남성의 악기이고 바이올린이 여성으로 비유되는 점을 적용해 본다면 아마 시 속의 “피아노”는 남자일 것이다. “남자의 소리는 오래도록 닫혀 있었다”는 것을 피아노가 오래 연주되지 않은 것으로 유추해 보면 이별하였거나 혹은 죽은 연인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 속에 갇혀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라는 구절도 이 점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첫 수에서 불안한 암시가 전해지고 둘째 수에 와서는 그것이 심화된다. “매듭으로 핀 침묵” “길을 잃었을까” “부러진 길을 맨발로 걸어간다”로 감지되는 연인과의 불화는 둘째 수에 이르러 극에 달하며 난해한 두 수가 위태롭다. 두 연인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여성의 섬세한 감성을 벼랑 위에 올려놓은 채 등골이 서늘하게 심리묘사가 이어지는 “부러진 길”과 “맨발”로 추락 직전에 놓이게 된다. 사건의 전말이 모호하고 사실 여부도 파악되지 않지만 두 수의 분위기는 충분하게 독자에게 감지되며 피아노와 화자의 긴장도를 팽팽하게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보법이며 호흡이다. 드디어 마지막 수에 와서는 화자가 “오선지에 그리던 밤이” 쌓여가고 “추억을 두드리며 내리는 겨울비”는 ‘두드린다’ ‘오선지’ ‘낮은음자리’등 음악과 연관되는 이미지를 동원하며 피아노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연인을 추억해내는 낯설면서도 추리소설같은 이아기는 “낮달로 돋아난다”는 상징으로 화해하고 있다. 시조에서 이런 스토리를 풀어 낸 작품은 상당히 드문 경우인데 이는 아스라한 검불을 붙잡고 물을 건너는 것처럼 위태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선하고 유려한 경험으로 기억할 작품이다. 두 연인의 낯선 화해는 마치 신경숙의 소설을 넘어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을 따라 나서는 신비로운 경험으로 기억 될 것이다.
복싱 체육관 앞에 널린 젖은 핸드랩 캄캄한 글러브 속 거친 꿈을 움켜쥔 채
온 몸이 상처투성이다 올이 다 풀려있다
두들길수록 그만큼 샌드백은 질겨져도 청춘의 맨 앞은 주먹 두 개로 붉으니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쳐라, 젊은 복서여
- 서숙희 「젖은 핸드랩을 위한 시」 전문 (시조시학, 2013 가을호) -
다시 ‘꿈’이 등장한다.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한 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꿈일 것이다. 박성민의 ‘보름달’과 이송희의 ‘낮달’이 꿈이고 희망이었다면 위 시에서는 단지 붉고 젊은 “주먹 두 개”일 뿐이다. 그래서 이 시는 단도직입이며 선언으로 가득하다. 젖지 않고 “온 몸이 상처 투성이”가 아닌 ‘핸드랩’은 가치가 없는 것이리라. “캄캄한” “거친” “상처투성이” “승부”등의 시어는 모두 핸드랩의 이미지를 넘어 희망으로 연결되고 있는 모습으로 얽혀있다.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쳐라,/ 젊은 복서여”로 완결되는 두 수는 구조와 소재의 면에서 다소 평이하지만 잔잔한 여운을 주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절망과 상처를 사랑하고 부둥켜 안아줄 희망가는 슬프고도 벅찬 감동으로 따듯하다.
3. 사랑의 끝을 찾아 나서다.
사랑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 되묻곤 한다. 어쩌면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의 심저에는 ‘분노’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설파한 것처럼 사랑의 근저에도 정 반대의 심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사랑의 배후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포용과 애린’이 자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분노에서 출발한 의식이 그 대상이나 사실을 전환해 보려는 의지로 노력을 경주하여 정의를 추구한다면 포용과 애린을 그것을 넘어 상대를 애처롭게 여기고 감싸 안으려는 훨씬 더 깊고 융숭한 마음의 상태가 결국 사랑의 출발점이며 도착지가 될 것이다. 이번 다층의 좋은 시조 기획에 선정된 작품들 중에서 사랑의 본질을 묻고 살피려는 시편들을 두 번째 단락에 모았다.
푸른 물과 붉은 물이 서로 덥석 손을 잡네
어디서 왔는지도, 가는지도 묻지 않네
사랑이 비루한 과거를 온 몸으로 껴안듯이
- 민병도 「두물머리」 전문 (시조21, 2013 여름호) -
산자락 붉나무 코끝도 빨간 아침
버틴다고 버틴 산발치 배추들이 소름 돋은 고갱이 환히 내밀고 있다 무슨 기척에 도망갔는지 웃잎만 건드린 어린 고라니 엉덩이 강종강종 건너갔을 마른 개울 저만치
겁먹은 어미의 긴 속눈썹 눈망울도 지나갔다
- 홍성란 「霜降 무렵」 전문 (서정시학, 2013 봄호) -
두 작품에 앞서 말한 ‘포용과 애린’의 감정이 흥건히 녹아 있다. 인간관계를 넘어 세상 만물이 서로 융화하고 교신하는 물아일체의 높은 경지에 다다른 정경들이다. 붉고 푸른 ‘물’도 ‘비루한 과거’도 코끝 빨간 ‘붉나무’도 ‘산발치 배추’도 ‘어린 고라니’도 ‘’겁먹은 어미의 긴 속눈썹 눈망울‘도 사랑의 품 안에 평온하고 애처롭다. 「두물머리」의 사랑은 강한 상징과 은유를 속에 감추고 있는 데 비해 「霜降 무렵」에서의 사랑은 조용하고 여백이 가득하게 화두를 던지고 있는 한 폭 그림이다. “푸른 물”과 “붉은 물” 그리고 “비루한 과거”는 다양하고 색다른 해석을 유추해 낼 수 있는 개연성을 지니고 있어서 분단현실이나 양극의 대립 또는 진보와 수구 등의 화해를 의미로도 조명될 수 있는 중의(重義)를 확보하고 있다. 초,중장의 평이함이 종장을 만나 부연, 확대되는 시조의 매력과 내용을 잘 상징하는 시제도 시를 견인하고 있다.
홍성란의 시에서는 무자화두(無子話頭)의 냄새가 짙다. 눈짓으로만 펼쳐 낸 그림은 조용히 독자의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매력을 담고 있다. 해월(海月)선생이 주창한 인내천(人乃天)의 경지를 지나 물신일체(物神一體)에 닿은 시는 아무 말 없이 모든 말을 해주는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고라니만 이 시의 주인인 것 같아 보이지만 가만히 더 들여다보면 붉나무도 배추도 모두 시의 주인공임을 알게 된다. 마치 이 세상의 주인이 나와 사람뿐만이 아니고 작은 벌레 하나 좁쌀 한 톨은 물론이고 물건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있음을 시는 말하고 있다. 처연함이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그 처연함 속에 깃든 아주 작은 평화는 「霜降 무렵」이라는 시제에 아주 잘 어울려서 조화를 이룬다.
오월로 뛰어 가는 김천 하고 어디쯤에 복사꽃이 피었다, 흰눈 펑펑 내리는 날 기차가 그냥 지나쳐도 손 흔드는 간이역
내일이면 지워질 이 역에서 쓰는 편지 반쯤 고개 내민 복사우체통 비둘기 천년을, 또 천년을 향해 눈꽃 경적 울린다
- 임성구 「도화역桃花驛」 전문 (시조21, 2013 여름호) -
환하고 재미있는 그림 한 장이다. 복사꽃 핀 오월에 잠깐 다녀간 흰 눈이 여간 시인의 눈길을 잡아 끌만 했나보다. 고해(苦海)에 살고 있는 인간은 기쁨보다 슬픔에 더 익숙한지도 모른다. 생활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며 내가 지고 가야할 짐의 무게가 늘 적재적량을 초과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고 보면 역에서 본 눈 내리는 진경은 신나는 일이였을 것이다. 철도 노선표에는 없는 “도화역”은 천국에나 있을 법한 간이역일 것인데 잠깐 지나가는 정경은 “내일이면 지워질”것이라는 안타까움에 다시 마음은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편지에는 어떤 내용을 적었을까. 아무리 바쁘고 고달픈 삶이라 해도 ‘사랑’이야기가 적혀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내일 새까맣게 잊혀진다 해도 말이다.
꽃이 환하게 핀 오월에 잠시 만난 흰 눈에 일상의 먼지라도 털어내고 짧지만 들뜬 기분으로 “천 년을, 또 천 년을 향해” 고함을 질러 본다. 장애물을 향해 길 비키라고 빽빽 울려대는 위험한 경적이 아닌,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복사꽃 환하게 핀 날 하늘이 내려주는 축복과 격려의 고함 소리가 바로 “눈꽃 경적”일 것이다. 옹색한 하루 속에 서도 순간에 다녀온 “도화역”에서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같은 느낌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도화역은 바로 무릉도원이 틀림없다. 도화역에서 쓴 편지는 두고두고 삶이 힘들고 벅찰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오는 문지메시지처럼 ‘딩동’ 소리를 내며 날아와서 우리의 등을 두드려 주고 갈 것이다.
4. 우울한 시절에 서로의 버팀목으로 남은 가족
현대사회의 가장 극명한 특징 중 하나가 핵가족이다. 결혼을 해도 집을 떠나지 못했던 시절은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요즘은 성인만 되면 집을 나가려고 애쓴다. 학교와 직장을 핑계로 1인가구를 만들어 독립한다. 지지고 볶으며 갈등을 끌어안고 부딪고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마찰을 두려워하고 미리 기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밥상머리 찌개 그릇에 식구들이 숟가락을 함께 담글 일도 줄어들었고 밥을 먹으며 나누었던 정답고 시시콜하고 때로는 목소리를 높였던 부모님들의 잔소리까지도 날아가 버렸다. 언뜻 봐서 젊은이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시원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사라지는 것들 중에 꼭 필요한 대목들도 많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시들은 이것의 중요성을 확연하게 일깨워 주는 작품들이다. 가족은 평화로운 시절보다 위험하고 긴급한 때에 반드시 힘이 되는 버팀목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병마를 만나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다. 무엇보다도 푸근하고 누구보다도 애처로운 가족의 시편들을 살펴보자.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이젠 도리 없다”
요양병원 지겹다고 사는 게 두렵다고
어머니 부러진 다리 슬그머니 매만진다
먼지 뽀얀 신발을 날마다 쳐다보며
중얼 중얼 혼잣말에 눈물도 글썽이며
맨발로 가야할 길도 있는가를 묻는다
- 김선희 「신발 한 켤레」 전문 (열린시학, 2013 봄호) -
부모님을 집에서 돌볼 수 없는 시절이 되었다. 약으로 인명을 연장하고 기계가 장기의 역할을 해내면서 생긴 풍속도다. 사는 것도 힘이 들지만 죽는 것도 쉽지 않다는 우스갯소리를 집집마다 실감하는 세태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먼지 뽀얀 신발”은 어머니의 장기입원을 대변하고 “사는 게 두렵다고” “중얼 중얼 혼잣말에 눈물도 글썽이”는 모습은 어느 집에서도 이젠 평범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의식불명으로 십 수 년을 견디고 있다는 환자들의 이야기도 흔하다. 시제는 비록 “신발 한 켤레”지만 가장 중요한 시어는 “맨발”이다. 시제와 역설의 관계를 구축하며 상징되는 “가야할 길”은 죽음이다. 신발은 많은 시 속에 등장하며 살아있음과 왕성한 활동을 상징하지만 “맨발”과 상충하며 어느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길이 바로 죽음이라는 숙연한 명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오히려 죽음만도 못한 이승에서의 연명이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연민과 경제적 부담을 초래하고 형제간의 갈등까지도 유발하는 무서운 세태가 “맨발”이라는 까칠한 시어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제는 죽음마저도 ‘길’ 위에서 맞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우울이다.
대학병원 폐암 병동 금연 구역 휴게실
대롱대롱 흔들리는 링거병을 팔에 꽂은
중년의 마른 남자와 휠체어 밀던 아낙
깊은 산 호수 수면 그 잔잔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서로 불을 붙여준다
주위의 눈길을 닫는 저 뜨거운 합일(合一)!
- 변현상 「부부라는 이름의 시(詩)」 전문 (시조21, 2013 가을호) -
극과 극의 충돌이다. 그러나 시인은 “뜨거운 합일”로 시를 내려놓고 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서는 지구상의 모든 순환 관계를 상생과 상극의 관계로 파악한다. 상생의 관계는 순리관계지만 상극은 서로 충돌하여 악연을 만드는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불교의 인연법에 이르면 극과 극마저 상통할 수 있는 대화합을 이룬다. 부부의 관계는 상생과 상극이 공존하는 관계일 수 있다. 부모자식의 관계처럼 생명을 이어 온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혼’이라는 절차를 거치면 합법적으로 관계를 해지할 수도 있다. 시에 등장하는 부부는 상생 관계의 종점에 서 있는 듯하다. 죽음이 곧 그들의 관계를 정리해 줄 것이기 때문에 이별을 준비한 두 사람 앞에서 폐암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이미 거칠 것이 없는 대자유의 경지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 안에 대립하고 있는 상극들 즉 “폐암 병동 금연 구역”과 “담배를 꺼내 물고”, “대롱대롱 흔들리는”과 “호수 수면 그 잔잔한 표정”도 ‘합일“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환자가 담배 하나 꼭 피우고 싶다고 아내를 졸랐을 것이고 말리고 말리다가 소원이나 다름없는 폐암의 상극인 담배를 허락한 것이리라. 그렇게 ‘극’을 수용한 두 사람의 안중에 “주위의 눈길” 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상생과 상극을 합일로 뒤집은 시인의 눈이나 “서로 불을 붙여”주는 두 사람의 마음은 평온하다. 독자들이 오히려 “대롱대롱 흔들리는 링거병”을 바라보며 마음을 졸이다가 불을 붙인 담배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를 것이다. 그러나 시 안에 있는 삶과 죽음의 거리는 한 치도 안 되는 거리일 뿐이다.
도랑치마 걷어 올리고 도랑물 건너가네
마른 땅 끌던 꿈 허리에다 동여매고
물살에 정강이 찧으며 고픈 봄날 건너가네
어머니와 어머니가 나를 끌고 건너가네
뻐꾸기도 울지 않는 징검돌 없는 봄날
도랑물 밀어 올리며 도랑치마로 건너가네
- 박명숙 「어머니와 어머니가」전문 -
고 황수관 박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어머니’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자신의 어머니가 전쟁통에 비행기 폭격을 몸으로 막아냈던 일화를 들었지만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가족의 핵심으로 생명의 원천으로 어머니는 늘 굳건하다. 특히 자식에게는 삶의 울타리요 젖줄인 것이다. 유사한 계통의 단어가 연접된다는 것은 대개 "모든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하늘과 땅’은 우주를 표현하고 ‘물과 불’, ‘산과 강’, ‘돈과 권력’, ‘손과 발’ 등도 그렇다. 그런데 동일어가 연접되면 그 의미는 가장 강력한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시 “어머니와 어머니가”의 모든 개념이 들어 있다.
봄날이지만 ‘환한 봄날’이 아니고 하수상한 봄날이다. 시는 아주 불안한 화자의 심사를 그대로 노출시키며 출발하고 있다. ‘도랑치마’는 원래 짧은 치마인데 무엇이 불안해 그것을 더 “걷어 올리고” 물을 건너는 것일까. 강동한 치마가 혹시 물에라도 젖을까 걷어 올리는 손끝에 중장의 “마른 땅 끌던 꿈/ 허리에다 동여매고” 가야 하는 “고픈 봄날”이 그대로 묻어난다. 윤사월 봄 나절에 그리 울던 흔한 “뻐꾸기도 울지 않는/ 징검돌 없는 봄날”이 시의 배경이다. 나의 상황이 어렵고 고될수록 ‘어머니’는 간절한 대상이요 구원자이다. 드디어 둘째 수에 앞에 이야기 한 동일어의 중첩 “어머니와 어머니가” 고맙고 감사하게 “나를 끌고 건너가”며 화자는 평정심을 되찾는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 있게 “도랑물 밀어 오리며” 물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시의 문은 불안하게 열렸지만 마무리가 자신 있게 정리되는 과정에는 최전방의 첫 수 초장(도랑치마 걷어 올리고/ 도랑물 건너가네)과 최후방의 종장(도랑물 밀어 올리며/ 도랑치마로 건너가네)이 아주 효과적인 대구와 반복을 이루며 시의 완성미와 긴장도를 높여주고 있다. 치마가 젖을까봐 근심스레 도랑치마를 걷어 올렸던 화자가 자신 있게 도랑물을 밀어 올리며 내를 건너는 힘은 바로 어머니의 힘이고 사랑의 힘이다.
5. 나가면서
어설픈 필자의 졸시도 이번 좋은 시조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자신의 시에 대해 장광설을 펼치는 것도 팔불출일 것이니 그저 원문을 얹어 두는 것으로 가름하려 한다. 중곡동으로 거처를 옮긴지 이태가 되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서민 주거지역인 이곳에는 아파트가 없다. 제법 큰 단독주택들이 하나 씩 헐리며 열다섯 개의 원룸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반 지하’방이라는 것이 불법적으로 생겨난다. 주로 주차장 자리를 개조하는 편법이 많다고 하는데 값이 헐한 탓에 여러 가지 불편함에도 찾기가 쉽지 않은 반 지하 창밖에서 담배를 피거나 막걸리 추렴을 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왜 그리 정다웠을까.
햇살은 들다 말고 바람도 스쳐가는
중곡동 헐한 월세 반 지하 창밖에는
귀 열린 상추 댓 포기 옹알이가 한창이다
웃음보 자지러진 외손자 걸음마에
장맛비로 반 토막 나 울상이 된 품삯도
해거름 탁배기 잔에 다소곳이 졸고 있다
- 정용국 「반 지하 창밖에는」전문 (시조21, 2013 여름호) -
현대 사회는 획기적으로 다양화, 구체화 하는 특징을 가지고 끝없는 분화와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의 기능과 목표도 신속하게 변화해야 함은 물론이고 이를 미리 예측하고 감지하여 국민을 선도하여야 한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불화를 최소화하여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을 존중하여야 함은 엄중한 역사적 임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보수 정권이 연이어 집권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국민의 피와 눈물로 구축된 많은 성과물들이 언론, 노동, 복지, 통일, 외교 등의 분야에서의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며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사실은 지극히 위험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모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국민의 기본권은 물론이고 다양한 불평등과 정신적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번 다층에서 선정한 좋은 시조 열 편 속에는 그러한 서민들의 혼곤(昏困)과 분노가 뒤섞여 나타난 모습들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시인들의 눈과 손길은 따듯하여 그들의 가슴에 안락의 손길로 스며드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사랑으로 가족과 주변을 더듬은 시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지난 겨울호 좋은 시조 총평에서 필자가 제기한 서툰 의견에 귀를 기울여 다층의 좋은 시를 수렴하는 방법과 결정 과정이 많이 개선되었다. 보다 객관적이며 오롯한 기획으로 변신한 것에 주목하며 편집인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다만 중견시인들의 중첩된 선고를 시차를 두어 배제하고 자유시와 시조를 교차 선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중후함은 조금 덜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한층 젊어진 시조가 진정 저자거리 한 복판으로 나와 시절가조로서의 난장을 엮었다는 기쁨을 감출 할 수 없다. (발췌: 계간 《다층》201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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