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강화의 안드레라고 불린 강화 불온면 출신의 한학자 구건조가 1901년 힐라리(한국명 길강준)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구건조는 이 지역 사람으로서 한학자였기에 주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당시 온수리에는 ‘아흔 아홉 칸 기와집’ 광산 김 씨의 종가집이 있었는데 구건조는 온수리의 가장 유력한 양반 집안인 ‘광산 김씨’ 문중을 전도한다.
조선의 법률 책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왕실이 아닌 사대부 주택은 99칸까지 지을 수 있다고 기록된 것을 보아도 광산 김 씨 문중의 가세를 짐작할 수 있다.
온수리에 터를 잡고 살던 이 집안의 5형제 중 둘째 집의 아들 김영선과 다섯째 집의 장남 김영지가 먼저 교인이 되었다.
구한말 온수리의 가장 큰 세력가였던 광산 김 씨의 문중이 성공회교회에 나오게 된 사건은 이 지역의 종교적 판도를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 씨 문중뿐 아니라 김 씨 문중의 넓은 땅에서 소작을 부치던 소작인들까지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이다.
김갑수(요나)는 부친 김영팔과 모친 조 씨의 장남으로 온수리에서 태어났다.
자식이 없던 광산 김 씨 문중의 김성악은 김갑수를 양자로 들이게 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롯한 문중이 성공회를 믿었기에 유아세례를 받았던 김갑수는 별 거부감 없이 교회를 다녔다.
건사할 처자식과 신경 써야 할 사업이 많았던 탓일까. 결혼과 동시에 신앙에서 차츰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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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온수리성당 복원 보수공사 기공식에서 맨앞줄 가운데가 김갑수 회장 |
강화지역 복음전파에 앞장선 광산 김 씨 일가 김갑수의 삼촌뻘 되는 김영선은 일찍이 신학을 공부했다.
1924년 사제서품을 받자 1925년 5월 6일 관할 사제로 온수리에 부임해 30년 동안 목회를 했다.
김영선 신부는 1954년 퇴임할 때까지 약 30년을 반 자급사제로 시무했다.
지역 유지로 높은 신망과 권위를 지닌 김영선 신부는 온수리교회 신자들에게 있어 ‘신앙의 수호자요. 엄격한 스승’이었다.
일제 시대 고통을 당하던 주민들에게 김영선 신부는 안팎으로 어려운 형편을 살피고 온수리교회와 지역주민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김영선 신부와 함께 광산 김 씨 문중에서 가장 먼저 예수를 영접한 김영지는 진명학교 교장을 지냈다.
성공회대 총장과 주교를 지낸 김성수 신부도 광산 김 씨로 온수리 출신이다.
아들의 성직과 함께 다시 교회로
김갑수의 장남 김용국의 기억에는 교회에 다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1986년 장남 김용국이 신부가 되기로 작정하면서 김갑수 또한 다시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니 그 공백은 거의 50년 동안 이어진 셈이다.
1994년 10월, 이대용(요셉) 신부(후에 성공회 부산교구장)가 부임하면서 온수리에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김갑수 회장(장로교의 장로)은 나이가 들고 몸이 불편해지면서 남은 생을 하나님께 바쳐야겠다고 다짐한다.
이제는 교회와 신앙의 후손들을 위해 1911년 봉헌된 낡고 협소한 한옥 성당 대신에 성전을 신축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
1996년 2월 7일 홍영선(베드로) 신부가 부임하면서 그 다짐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재산 기증을 위해 기도하던 김갑수 회장은 1996년 8월에 교회 건축을 위해 양아버지인 김성악에게서 물려받은 길상면 온수리 500-28의 답(沓) 2,016평을 봉헌하게 된다.
당시 건축위원장을 맡았던 유성렬(76) 회장은 “내가 이다음에 교회는 꼭 지어놓고 떠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시더니 때가 되니까 정말 땅 2천여 평을 내어놓으셨다.
당시 시가로도 40억을 호가하는 가치였다.”고 회상했다.
1997년 4월 22일 제184차 서울교구 실행위원회의 건축승인을 받아 우방건축과 계약을 하고 1997년 7월 11일에 서울교구 성직자들과 지역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예배를 드렸다.
새 성전은 262평의 건축면적에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연면적 474평 규모로 설계됐다.
건축에 필요한 예상 금액이 18억 5천만 원 정도이니 성전을 짓고도 반이 남을 만큼 충분한 값어치였다.
1997년 7월 14일에는 1911년 건축된 기존의 한옥교회, 안드레 성당과 종루가 인천광역시 지방문화재 자료 1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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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완공된 성베드로 성당 |
IMF와 건축 중단 위기
박차를 가하던 새성전 건축은 IMF 경제위기로 잠정 중단에 이르렀다.
땅값이 하락한 것은 물론 살 사람도 나서지 않았던 것. 땅을 팔기 전 이미 건축을 시작한 터라 교회의 입장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기도는 계속 이어졌다.
신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건축헌금은 1차 1억 3천만 원, 2차 1억 2천만 원이 모였고, 무의탁 노인이 기거하는 ‘성 안나의 집’ 할머니들도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기초생활수급자가 받는 적은 돈을 모아 건축헌금에 봉헌했다.
1999년 1월 1일 부임한 석광훈(모세) 신부는 새성전 건축 중단으로 인해 흐트러진 교우들의 마음과 신앙을 모으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중단된 교회건축을 위해 특별기도회와 건축 재개를 위해 건축위원회와 시공자, 그리고 교구 실무자가 참석하는 간담회를 수차례 열어 2003년 4월 교회건축을 재개했다.
그러나 시공사의 약속 불이행으로 공사는 진전되지 못하고 답보 상태는 계속되었다.
석광훈 신부는 선교 초기 기와로 지어져 허물어져 가는 사제관을 보수, 복원하여 2002년 2월 24일에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41호로 지정받았다. 2003년 11월 18일에는 인천광역시 지방문화재 자료 15호로 지정되어 있던 성당과 종루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로 지정받아 훼손된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부단히 힘을 썼다.
2004년 3월 8일 주일미사 후 성당과 종루 복원 보수 공사 기공식을 갖고 성당해체 작업에 들어가 임시 예배소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새성전 건축과 문화재성당 복원
2004년 5월 16일 부임한 한자천(어거스틴) 신부는 2004년 6월 공사 재개를 위한 대책회의와 새성전 인테리어에 관한 회의를 갖고 안드레 침례일에 축성할 계획을 세웠다.
한옥성당 해체 작업도 차질 없이 진행되어 그 해 5월 31일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게 됐다.
8월 11일에는 새성전 건축이 재개 되었다.
한옥 성당 복원공사와 새성전 건축공사가 함께 진행되었다.
2004년 11월 28일에는 ‘새성전 축성식 및 문화재성당 복원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특히 새성전 제대 벽면의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성도인 김용철(홍익대 미대교수) 성도가 손수 제작해 온수리교회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했다.
성직자들과 성도들, 그리고 강화지역의 각계 인사 9백여 명이 참석하여 함께 기쁨을 나눈 뜻 깊은 날이 되었다.
새성전을 건축하면서 염려도 많았다.
“시골교회를 너무 크게 짓는 것이 아니냐.”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이냐.”는 걱정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새성전 건축을 통해 온수리교회는 세상을 섬기고 지역을 보듬는 장을 마련했다.
푸드마켓을 설치해 어려운 이웃에게 따듯한 밥과 생필품을 제공하고 온수리 주민들에게 건물을 개방해 결혼시 피로연이나 지역 행사 때 제공하는 등 지역과 교회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이들을 위해 놀이터를 만들고 강화군의 지원을 받아 족구장과 게이트볼장을 만들어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고, 성도들이 직접 잔디밭을 조성하고 보도블럭을 깔았다.
석축공사와 교회를 순환할 수 있는 도로 포장도 마쳤다.
온수리교회 주임 신부이자 새성전 축성식을 담당했던 한자천 신부는 성전 건축을 통해
“땅을 땅으로 보지 않고 땅의 값어치만을 생각하던 시기에 먼저 신앙적으로 땅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희년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둘째로 어려움에 처한 교회에 대해 교우들이 책임의식을 갖게 되었고,
셋째는 자손에게 믿음을 물려준다는 차원에서 유산의 십일조 운동의 첫 본보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2006년 1월 8일 김갑수 회장은 하나님 곁으로 갔다.
1월 10일 교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예식 뒤에 고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되어 온수리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에 발길을 돌렸던 부자청년의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유산으로 거저 받았으니 줄 수 있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로또 1등 당첨금을 내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람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온수리교회도 김용국 신부도 이런 미담을 굳이 알리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아시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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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국 신부 |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드립니다
김용국(70) 신부는 김갑수 교우의 장남이다.
3남 3녀의 자녀 중 유일하게 성직을 택했다.
그것도 46세 때의 일이니 진로 선택으로 보자면 많이 늦은 편이다.
어머니의 새벽기도, 아버지의 뒤늦은 회심과 강단 있는 믿음이 인생의 자양분이 되었다.
김용국 신부의 형제는 다 크리스천이다.
두 딸과 손녀까지 6대가 크리스천인 셈이다.
김 신부는 아버지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되 미화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조심스레 비쳤다.
늦게 성직을 택했다. 부모님의 영향인가.
회사도 다녀보고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다 실패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신학교 때 돌이켜보니 고등학교 시절 어떤 일에 실패하면 신부가 되겠노라고 다짐했던 기억이 났다.
그게 서원이 되어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생각을 했다.
회상해보면 당시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다니고 자녀들에게도 신앙을 심어주려고 애쓰는 등 열심이었지만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성직자가 되면서 아버지가 교회에 나오게 됐다.
그렇게 보자면 아버지의 신앙 공백은 꽤 길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내가 어렸을 때도 아버지가 교회 다니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다시 출석하기까지 한 50년 공백이 있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어떤 분
자수성가 하신 분이다.
아버지와의 추억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고관절을 앓았다.
서울 세브란스 병원을 다녔는데. 당시에는 강화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놓이기 전이라 인천까지 배를 타고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야했다.
그 먼 길을 나를 안고 다니신 기억이 생생하다.
올곧고 성실한 분이었다.
아버지가 교회에 큰 재산을 내놓았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하루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땅은 내가 벌어서 늘린 재산이 아니라 양할아버지가 가꾸신 땅이니 너희들한테 줄 수 없다.
이 땅을 교회 짓는 데 사용하겠다.”는 요지였다.
당시 나는 찬성했다.
집안에 크고 작은 잡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강경하게 밀어 붙여서 동생들도 결국 뜻에 따랐다.
재산이 있다고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로 본다.
신앙이 있으니까 땅을 기증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회를 멀리했던 50년 공백 기간을 회개하는 의미도 있지 않았겠나 추측해본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존경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