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골이 생긴 유래
(산청의 이야기 글)
김경임
차황면 소재지에서 서 북으로 조금가면 연동 이라는 마을
지동은 못골이라 하는데 김해 김씨 퇴은공이 무오사화 때 이곳에 터전을 잡아 연동이라 하였다.
동네 앞에는 사백 평 정도의 연화지가 있어서 연꽃이 가득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단다.
못골은 1914년에 지동으로 개명하고 1989년에 다시 지정으로 다시 고쳐 불렀다.
전하는 이야기는 ........
임란 때 당나라 장수 이여송이 산세가 좋아서 청룡백호의 능선에 모필을 끄어 인도가 났다고 한다.
또 인재가 많이 난다고 해서 마을 앞에 못을 팠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일설에는 못골에 있는 못은 원래는 집터였단다
이곳에 태어난 장군이 역모를 할까 두려워하여 나라에서 그를 죽인 뒤 못을 팠다고도 한다
둑에는 괴목 세 그루가 있어서 군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으므로 정자를 넣었다
그래서 지금은 지정마을이다
못골은 또 피막재라는 게 있다
옛날 이 고을에 벼슬을 하던 김 아무개란 사람이 있었는데 성품이 포악 하더란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재산도 착취하고 가관도 아니었나보다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나라에 상소문을 내자 사형을 받았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과객이 이 마을 북쪽에 있는 산중턱을 뚫으면 포악한 사람이 나지 않으리라 해서
그 곳에 길을 뚫었다는데 그 때
붉은 선지피가 흘러내려 피막재란다 지금도 피막재 자갈이 붉으려한 걸 볼수 있다.............
어머니는 논 밭이 있어서 넘어가면 비오는 날은 혼자는 무시시 했었다고 하셨다
이곳을 넘어서 양곡을 갔는데 한 고개를 더 넘어야 양곡이었다
지금도 오 육백 년된 정자나무가 있어서 내 자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돗자리 펴고 누워 낮잠을 즐기며
노 소 없이 놀았지만 여인들은 길삼 농사를 지워 껍질을 벗길 때
(삼굳이라며 마을의 삼을 모두 모아 한꺼번에 불을 때 익힘)만 그곳에 모였던 것 같다
피막재아래서 구덩이를 파 흙을 덥고 불을 때다 한꺼번에 물을 부으면 수중기가 펑펑 오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 자랄 때는 이곳 못 가에 코스모스랑 분꽃을 심어 가꾸기도 했는데
우리집 바깥마당을 베고 누운 낮으막한 연못에는 잠자리며 나비가 물풀 위에 노닥질을 해대고
보일락 말락한 물속에 앵금쟁이가 소금쟁이 방가재와 장난하면 나도 함께 시간 가는 줄 몰라
어릴때 별명이 앵금쟁이였다
지금 아이들이 컴푸터와 놀듯 없는 게 없는 연못은 겨울이면 우리마을 아이들에겐 놀이터이고
어른들은 낮은 못가로 한 평 두 평씩 나누어 미나리를 심어 가꾸기도 했다
몇 발 안되는 아담한 섬에 벽오동나무 열매가 많이 열려서 가을이면 주워 먹기도 했었다
깊은 가을이면 정자나무 낙엽이 소복하게 쌓여 달밤에 밟으면 그 소리 아~~~지금은 더 그리운
누가 불었던지 구성진 하모니카소리도 ...
말의 꽃
내 몸 속에 꽃을 피우리라
화려함 치장하지 않아도
그윽함으로 귀를 씻어주는
행복을 주는 향기
온누리 풀풀대는
다년의 꽃 선물하여
절망의 문턱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의 꽃잎 선사하리라
내 안의 비옥함 윤기나게 닦아
시야에선 보이지 않아도
오래 여운 남기는 향기로운 말
침묵보다 귀한
말의 꽃 피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