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福>이란 校名은 민족의 正宮인 <景福宮>의 '景福'에서 유래한 것으로, '큰 복', '큰 뜻', 또는 '幸福'을 의미한다. .... <시전(詩傳)> 주아(周雅)편에 '이미 술에 취하고 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경복(景福)을 도우리라'하였다.
2006.4.5.
교가 작사자
이병기 [李秉岐, 1891.3.5~1968.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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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시인 겸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는 등 큰 공을 세운 국문학자.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등을 역주(譯註) 간행했고, 백철(白鐵)과 공저로《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를 발간,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다. | | 호 | | 가람(嘉藍) | 활동분야 | | 문학 | 출생지 | | 전북 익산(益山) | 주요저서 | | 《한중록주해(恨中錄註解)》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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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병기선생생가 안채 /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전북기념물 제6호.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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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益山) 출생. 한성사범(漢城師範)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고문헌(古文獻) 수집과 시조연구에 몰두,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지에 《한강(漢江)을 지나며》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조시인으로 출발했다. 한편 한국고전(韓國古典)에 대한 주석 및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국문학자로서의 자리도 굳혔다. 1926년 최초로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고 《시조란 무엇인가》 《율격(律格)과 시조》 《시조와 그 연구》 등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고 1939년에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을 발간, 《문장(文章)》지 창간호부터 《한중록주해(恨中錄註解)》를 발표하는 등 고전연구에 정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검, 함흥(咸興) 형무소에 수감되어 l년 가까이 복역하다 1943년 가을에 기소유예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각 대학에서 국문학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 등을 역주(譯註) 간행했고, 1954년 학술원회원이 되었으며, 이 해 백철(白鐵)과 공저로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를 발간,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다.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적인 시풍을 확립하였고, 국문학자로서는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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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가 작곡 박태준 [朴泰俊, 1900~1986.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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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대표작으로 《오빠 생각》,《동무생각:사우(思友)》 등을 작곡하였다. 서울여자음대, 연세대 음대 교수로 역임하였다. 예술원상, 문화훈장 대통령장, 고마우신 선생님상, 소파상 등을 수상하였다. | | 활동분야 | | 예술 | 출생지 | | 대구 | 주요수상 | | 예술원상, 문화훈장 대통령장 | 주요작품 | | 《오빠 생각》《동무생각:사우(思友)》《집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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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출생. 1921년 숭실전문(崇實專門)을 졸업하고, 1928년 미국 터스칼럼대학, 1935년 미국 웨스트민스터음악대학을 거쳐 1936년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같은 해 귀국하여 숭실전문학교 교수, 1945년 오라토리오 합창단협회장 겸 합창지휘자, 1946년 서울여자음대 교수, 1948∼1966년 연세대이사장,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작곡)이 되고 후학양성과 음악계문화훈장 대통령장, 고마우신 선생님상, 소파상 등을 받았으며, 대표작으로 《오빠 생각》 《동무생각:사우(思友)》 《집 생각》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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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은암(大隱巖) 도화동(桃花洞)
경복고등학교는 북악 기슭 아름다운 산자락에 터를 잡았다. 현재 후문이 있는 동쪽의 길 건너까지 학교 땅이었다. 지금은 청와대 영역이어서 들어갈 수 없지만 그 안쪽 골짜기에 대은암(大隱巖)이 있다. '대은암'은 골짜기에 숨은 큰바위 이름이다. 이곳은 옛날부터 이름난 경승지였다고 한다. 복숭아꽃 흐드러져 도화동(桃花洞), 도화동천(桃花洞天)이라 했다는데, 아마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한 호명일 것이다.
18세기 유득공(柳得恭)은 '대은암 도화동'을 칠언절구로 이렇게 찬양하였다.
風風雨雨碧溪濱 비 바람에 맑게 씻긴 푸른 시냇가
忙趨桃花洞裏春 복사꽃 봄 속에 사람들 분주하네
洞裡桃花一千樹 깊은 골 숲속에 복사꽃 흐드러져
人隨蝶去蝶隨人 사람은 나비요 나비는 사람이네
16세기 초엽 당대의 계관시인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誾)과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자주 찾아 놀던 지정(止亭) 남곤(南袞)의 집 뒷동산의 대은암(大隱巖), 북악 기슭에 자리하여 한성 초기부터 이름 높던 대은암.........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남지정(南止亭)이 산기슭에 집을 앉혔는데 그 북쪽 동산이 돌과 물이 뛰어나서 박 읍취헌이 매양 용재와 함께 술을 들고 가서 놀았다. 그러나 주인 지정이 승지가 되어 새벽에 입궐하였다가 밤 늦게 돌아오는 것이 예사였기에 함께 놀 수 없었다. 이에 읍취헌은 조롱삼아 그 바위를 대은암이라 하고 그 여울을 만리뢰라 하였다. 대개 바위를 주인이 모르니 꼭꼭 숨어있기 때문이요,여울이 있다해도 만리 밖에 있는 셈이라 그렇게 이름지었던 것이다. 읍취헌이 크게 술에 취하여 대은암을 시제 삼아 이렇게 읊었다. .................. 대은암 앞에 쌓인 저 흰 눈아 / 봄이 오니 또다른 경치이로세 / 흥이 나서 놀러 왔나니 / 주인과는 기약없었네 / 혼자 서 있자니 우는 새소리 가깝고 / 길게 읊어보자니 붓 들기 더디고나 / 그대 집선 내 멋을 용납하오만 / 세상 사람들이 해괴이 여길까 두려웁네 //
........ '대은암'은 부귀영화나 권모술수에 능한 남곤의 집 뒷동산이기에 유명하였다기보다 연산군에게 기탄없이 바른 말로 간하다가 27세 어린 나이로 죽으면서 오히려 '봄하늘 음산한데 새들은 지저귀고 / 늙은 나무 무정코나 바람이 없네 / 바다의 저 안개 비가 되어 내리니 / 세찬 파도 하늘까지 바람을 이네 //.....이런 명시를 남긴 당대 시단의 천재시인 읍취헌 박은이 즐겨 찾아 놀던 곳이기에 오래오래 명소로 꼽히었었다. - 김영상 지음 <서울 600년>에서
* 천량
- '살림살이의 재산'을 뜻하는 말로 본디 '錢糧'에서 온 말이다. '돈과 곡식'은 '부(富)'의 상징일 것이니 요즘 개념으로는 '경제력'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유산(遺産)'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 제여금
- '제각각', '제각기'란 뜻의 예스런 말이다.
- 박재삼 시인의 <南海流水詩>를 비롯하여 여러 시편과 수필에 용례가 나타나있다.
동백을 피워올리고 있는 섬둘레마다
미향(微香) 어리는 것이 제여금 무리 일어
여기도 성좌 한 자락 도란도란 거리고나
첫댓글 2016년에 이렇게 자세히 쓴 글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교가 작사, 작곡자까지 자세하게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제라도 읽었으니 더욱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