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짓기
윤은숙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종방된 지 몇년 지났는데도 아직 그 이름이 기억난다는 점에서 명작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삼순이라는 촌스런 이름을 가진 여자가 이름처럼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파티세리로 성공한다는 내용이다. 만일 삼순이가 아니라 제니퍼였다면 파티세리로 성공한다는 것이 별로 극적이지 않았을테고 삼순이가 제빵사가 되었다고 말하면 그저 그런 여자가 빵순이가 되었다는 새마을 드라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삼순이와 파티세리--그 두 이름의 조화가 드라마 성공에 한 몫 한 것은 아닐까.
이름은 중요하다. 개인의 이름 뿐 아니라 회사 단체 교회 등도 예사로 이름짓지 않는다. 성 베드로 성당, 성 마르코 성당,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 같은 성인에게 바쳐진 유명한 이탈리아 성당을 보며 왜 예수 이름을 딴 성당은 없는지 궁금해 진다.
삼성이라는 이름은 이병철 회장이 젊을 적 대구 시장에서 하던 별표 국수에서 나왔다고 한다. LG의 전신은 금성사이니 사업가에게 ‘별'은 돈을 상징한 것일까. 별처럼 반짝이는 보석, 혹은 밤하늘에 수많은 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돈...그보다는 별처럼 반짝이는 기업 양심의 상징이라면 더 좋을 것 같다.
서양사람들의 이름짓기는 대체로 간단하다. 아기 이름은 전화번호부를 주욱 훑어보고 마음에 맞는 것을 고르면 될 것이고 회사 이름도 창업자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제이피 모간 체이스 맨해튼, 마샬필드, 월그린, 샤넬, 구찌, 크리스챤 디오르, 포드, 메르세데스 벤츠..
나는 한국 기업들이 부도덕한 일로 신문에 오르내릴 때마다 현대, 삼성, 대우 대신 정주영 건설, 이병철 전자, 김우중 그룹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아가서 자동차 번호판을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로 대치한다면 좀 더 책임있는 운전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자기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웬만하면 피하지 싶은 것이다.
상품에 이르면 그야 말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전장이 펼쳐진다. ‘포니'자동차는 시장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그 이름만은 남아있는, 아니 역사에 남을 이름의 명작이다. 한국 침구류에 ‘이브자리'라는 브랜드가 있는데 ‘이부자리'라는 보통명사에 ‘이브의 자리'라는 조금은 에로틱한 상상력을 덧붙여 성공한 상품명이다. 이불을 개어놓은 것 같은 e자를 로고로 하여 무릎을 치게 만들었는데 이런 이름은 작명하는 값도 엄청나다. 예전엔 미아리 고개 밑에 작명하는 점집들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요즘은 브랜드 네임에 사활을 거는 회사가 성업한다고 한다.
이름이 중요하기는 하다. ‘새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소설 제목도 있고(뻐꾸기는 뻐꾹뻐꾹, 기러기는 기럭기럭),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도 이름의 오묘한 맛을 보여준다. 말을 하고 보니 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에 걸맞는 제목 하나 짓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작품의 제목이 그 작품의 진수를 단번에 나타내어야 하듯이 모든 이름은 사물이든 단체든 문학이든 미술이든 그 본체에 걸맞아야 한다.
언젠가 과천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관람한 작품 중에 ‘비상(飛上)’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나무 곁에서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오르락 내리락 하는 비디오 아트였는데 원제목은 Fly였다. 아무리 현대 미술이라 해도 그건 ‘파리'일 뿐 결코 ‘비상'이라는 심오한 제목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시 분개했던 적이 있다.
이름은 그 본체를 나타내야지 감추어서는 안되고 왜곡해서도 안된다. 특히 어떤 목적에서 만들어진 단체라면 더구나 그 이름에 단체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 ‘박사모'라는 이름의 정치인 팬클럽이 시카고에서도 활동을 개시했다. 박 아무개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그 이름은 타당하다. 단순명료하고 솔직하다. 지난주 ‘민주평통 시카고지역협의회'에서는 어떤 단체를 들어 ‘우리 평통과 관계없음을 알린다'는 광고를 게재했다. 그 어떤 단체는 한국의 헌법기구의 하나인 ‘민주평통’과 흡사한 ‘민주평화통일 한인연합'이다. 그 단체 역시 어느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작명(作名)을 아주 잘못했다고 본다. 우선 너무 길다. 목적에 해당하는 정치인의 이름이 없으니 홍보 차원에서 많이 불리하다. 왜 그리 길고 모호한 이름을 붙였는지 의혹의 눈길이 있을 수도 있다. ‘민주평화통일'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몇몇 개인의 모임으로 너무 거창하다는 느낌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인연합’이라는 이름은 그곳에 관여하지 않는 한인들한테는 연합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한국 정치에는 공식적인 관심이 없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은 모두 떨어지니 절대로 아무도 지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글의 핵심은 제목 그대로 ‘이름짓기'이다. 이름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상징적이어야 한다.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포니'가 자동차 이름이었기에 성공했지 냉장고 이름이었으면 어땠겠는가. <2011. 6. 10>
첫댓글 당연한 말씀 잘지적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