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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우씨(丹陽禹氏) 월촌(月村) 마을
달서구 상인네거리 지하철 1호선 상인역에 도착하기 직전 경북기계공고 맞은편 송현주공 아파트 3단지 옆길을 따라 남쪽 대구의 앞산 가까운 데에 근접하는 곳, 지금은 공원으로 탈바꿈하였지만 옛 단양우씨(丹陽禹氏) 세거지였던 곳에 낙동서원(洛東書院), 월곡역사공원(月谷歷史公園), 월곡역사박물관(月谷歷史博物館) 등 단양우씨 연관 유적 등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 상인(上仁), 월촌(月村) 지역은 200여 년 전부터 단양우씨(丹陽禹氏)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도시화(都市化)의 가속(加速)으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한 때 우씨(禹氏) 300호가 넘게 모여 살았을 정도로 규모가 큰 마을이었는데, 앞산 기슭 송림(松林)이 정겨운 이 마을에 지금도 주위 일대에 160여 가호가 살고 있다.
우씨는 본래 중국에서 생긴 성씨로, 하(夏) 나라 우왕(禹王)의 후손이라 하는데 문헌이 전하지 않아 그 선대는 자세히 살필 수 없다. 후손 우현(禹玄)이 고려 초 중국에서 건너와 단양(丹陽)에 정착하였으며, 그 후 l0세손 우현보(禹玄寶)가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현(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단양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마을 단양우씨 입향조(入鄕朝)는 고려말(高麗末) 정략장군(定略將軍) 우전(禹奠)이다. 그는 공양왕(恭讓王)때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하다 조선(朝鮮) 개국 후 전라도(全羅道)에 유배되어 장살(杖殺)당한 11세(世) 우홍명(禹洪命)의 손자로 정도전(鄭道傳)등 구데타 주체세력의 보복을 피해 이 마을에 은신했다. 그는 단양우씨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派祖)로 후손들에게 ‘권력에 기대지 아니하는 선비정신’을 당부하며 초야에 묻혀 살았다. 그의 가르침으로 이 마을 출신은 권력에 의지하여 세도를 부린 인물도, 천석(千石)의 부자(富者)조차 없어 우무천석(禹無千石)이었다 한다. 진사(進士) 급제자가 8명 현감(縣監) 이상 관직에 등용된 인물이 24명으로 그저 양반의 신분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이 문중이 자랑하는 인물은 역동 우탁(禹倬, 1263.원종4-1342.충혜왕 복위3) 선생인데, 자는 천장(天章), 탁보(卓甫). 호는 역동(易東). 진사(進士) 천규(天珪)의 아들로 문과(文科)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한 뒤 민심을 현혹하는 요신(妖神)의 사당을 철폐했다. 1308년(충선왕 즉위)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충선왕(忠宣王)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하자 이를 극간, 뒤에 물러나 예안(禮安)에 돌아갔다. 충숙왕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 누차 불렀으나 듣지 않고 글을 벗하다가 뒤에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어 치사(致仕)했다. 당시 원(元) 나라를 통하여 정주학(程朱學)에 관한 서적이 들어왔으나 이를 해독할 자가 없자 한 달 동안 연구하여 처음으로 이를 해득, 후진을 가르쳤다.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은 물론 복서(卜筮)에도 통했다.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단양의 단암서원(丹巖書院), 안동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예안의 역동서원(易東書院)에 제향(祭享). 시호(諡號)는 문희(文僖)이다.
임진왜란 때 대구(大邱)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오른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은 이 마을이 배출한 명현(名賢)이다. 월곡(月谷)은 이 마을 우(禹)씨 가문의 신화적인 존재로 임진란 때 유격대장으로 종횡무진 전장을 누빌 때 갑자기 왜군의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자 그의 애마가 무릎을 꿇어 주인을 구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그 몇 해 후 월곡(月谷)이 별세하자 이 말이 또한 먹기를 거부하고 슬프게 울다가 3일 만에 죽었단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의마(義馬)의 순사(殉死)가 결코 전설이 아니라 월곡공(月谷公)의 창의록(倡義錄)에 기록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 말한다. 일제(日帝) 초까지만 해도 마을 야산에 의마총(義馬塚)이 있었는데, 일제말(日帝末) 저수지 확장공사로 수몰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가 1986년 저수지 가에 의마비(義馬碑)를 세웠다.
마을 중앙 울창한 수목 사이에 단청을 드리운 낙동서원(洛東書院)은 역동(易東) 우탁(禹倬)과 그의 수제자 신현(申賢), 그리고 우현보(禹玄寶)ㆍ우배선(禹拜善)등 명현들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지난 1963년 후손 우종식(禹鍾殖)ㆍ종묵(鍾黙) 형제가 사재를 털어 건립하여 이 지방 유림과 후손들이 봄ㆍ가을로 제사를 올린다. 이 서원은 1708년에 덕동(德東)서원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흥선대원군 집정시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던 것을 중건한 서원이다.
월곡역사박물관은 임진왜란 때 24세의 백면선생으로 의병을 일으켜 대구 성주지방 제일의 의병부대로 많은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된 월곡 우배선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우씨 종중에서 세워 2002년 5월 개관하였다. 철근콘크리트 석조 건물로 1층(200여 평)에는 옛날 농기구와 생활용품 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아울러 시청각실과 사무실이 있다. 2층(200여 평)에는 보물 제1334호인 성주화원우배선의병군공책 및 관련 자료 일괄 4종 15점 34건 외에 연원가(淵源家)의 서간문 등 400여 점과 역대 선조들의 교지, 과지, 분재기, 간찰 등 400여점 및 고서적 7천여 권이 전시되어있으며, 지하(20여 평)에는 수장고가 있다.
박물관 내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은 우씨 월촌 출신 현조(顯祖)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세거지이던 월촌 일대가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아파트단지 화하면서 이곳으로 밀려난 셈이지만 건물 한 층을 모두 전시장으로 하고, 기념관, 유적관, 유장각, 장서실로 구분하여 내부시설, 조명, 진열대 등을 정성들여 꾸민 현대화된 전시관이다.
기념관에는 임진왜란 당시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영남 일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공신(功臣)이 되었던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의 유물을 전시하고, 유적관에는 선조들의 유품, 호적, 토지문서, 분재기(分財記) 등을, 유장각(遺藏閣)에는 홍패, 백패, 교지, 장계 등 문중에서 이제까지 각기 소장해 왔던 문적(文籍)을 일괄 보관하고 있고, 장서실에는 각기 보관해 오던 경전, 문집 등을 소장하고 있었다.
세거지였던 중심에 월곡역사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고층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공원엔 노송이 몇 그루 남아서 오랜 마을이 있었음을 짐작케 할뿐, 도심의 큰 공원을 방불케 하는데,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정자와 사당, 서원, 유적비, 공적비 등이 다양하게 들어서 있다.
공원 왼편의 식물원 앞에는 정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정자 열락당(悅樂堂)이 있고, 기둥에는 ‘배워서 익히는 기쁨과 벗이 찾아 오는 즐거움’(學而時習進取之悅 有朋自來趨向之樂)을 뜻하는 주련이 걸려 있어서 ‘열락당’ 이라는 당호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열락당은 월곡 선생이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강학사(講學舍)를 짖고 후학을 가르쳐 왔으나 오랜 세월로 퇴락하였던 것을 지난 1995년에 중건한 것이다.
우배선 장군의 강학소인 월곡정사(月谷精舍)가 있다. 정사는 단양우씨 판서공파 후손 월곡 우배선(禹拜善·1562∼1620) 장군의 강학소(講學所)이다. 월곡 또는 월배는 상인동의 옛 이름이며, 정사(精舍)는 일반적으로 선비들이 학문을 가르치는 학당이나 공부하는 서재를 일컫거나,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공간을 일컫는 이름이다. 단양우씨 문중이 터를 잡은 이래 600년 정도 세거한 이곳은 무수한 인물을 배출한 길상지이다. 정사는 월곡역사박물관에서 비슬산 자락 방향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월곡정사의 처마에 행서체 글씨로 적어 걸어둔 월곡정사(月谷精舍) 외에, 대청에도 우배선 장군의 충절과 의리를 기린다는 뜻의 ‘충의당(忠義堂)’과 마을의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친 집이란 뜻의 ‘덕동서당(德洞書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정사를 짓게 된 내력을 적은 ‘월곡정사기’와 정사를 다시 수리하고 기록한 ‘월곡정사중건기’가 있고, 월곡선생의 죽음을 애도한 ‘만장시판’, 월촌주인에게 주는 ‘시판’도 걸려 있어 당시 교유한 인물을 알 수 있다. 정사 옆에는 ‘월곡우선생태지’라는 비석이 규모있게 서 있다.
정략장군(定略將軍) 단양우공(丹陽禹公) 휘(諱) 전(奠) 유적비(遺蹟碑)는 700년 전 정도전의 난을 피해 월촌 마을에 입촌하여 단양우씨의 뿌리를 내린 우홍명의 손자 정략장군 우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종중에서 건립하였다. 공원 안의 빗돌은 이 밖에도 ‘한국독립운동파리장서비, 의병장월곡우배선선생창의유적비, 월촌마을 연혁비, 월곡우배선태지비, 순국지사월해우병기추모비’등이 더 있다.
옛 우씨 세거지 아랫마을에 해당하는 상인동 600번지에는 ‘월평재(月平齋)’라는 건물이 있다. 단양우씨들이 학동들을 가르치고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던 곳이었다. 월평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924년 큰 화재로 인해 마을이 전소되는 바람에 월평재 건물은 물론 대부분의 자료가 불에 타 버린 것을 1975년 우씨 종중에서 재건한 것이다. 지금 월평재에서는 서당교육 대신 부녀자들의 예절 교육과 다도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 단양우씨 문중은 월평재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분기마다 모임을 가지고 선조의 역사와 선세 관련 유적지 탐방, 수련회 등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월평재 부녀회는 달서구청 예절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배례법, 다도교육, 예절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
대구 지역의 단양우씨는 또 동구(東區) 평광동(坪廣洞)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일파들이 더 있다. 세거조(世居祖)는 우익신(禹翊臣)이라는 분인데, 이 동리에는 문화재 건물로 첨백당(瞻栢堂)이 유명하다. 첨백당은 평광동(坪廣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묘(祠廟) 재실로 1984년 7월 25일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재실로 1896년(고종 33)에 세워졌다. 효성이 지극했던 우효중(禹孝重)과 절의를 지켰던 조선시대 말기의 선비 우명식(禹命植)을 기리는 사당이다. 건물은 동향이며, 중앙 5칸은 홑처마맞배지붕을 달고, 좌우 협칸은 박공면에 내림지붕을 달았다. 당호(堂號)에는 우명식의 묘가 있는 백전곡(栢田谷)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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