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납토성과 관련된 일 중 1997년 연초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신정 연휴를 마친 1월 4일 민속박물관에 출근하자 마자 이형구(李亨求) 선문대 교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교수는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 수도 유적의 하나라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었다. 이교수는 70년대 개발붐을 타고 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백제 유물이 완전히 멸실된 것으로 여겨왔던 풍납토성 안에서 백제시대 생활상의 일부를 확인했다는 놀랄 만한 얘기를 전했다.백제 토기들이 대거 발굴된 현장에서 기존 주택을 헐어내고 재개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에 빨리 손쓰지 않으면 백제 유물들을 영영 잃게 될것이라는 '비보(悲報)'도
함께 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94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장에서 국립민속박물관장으로 자리를 옮겨 '발굴 현장'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큰 도움을 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 때문에 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 담당관 윤근일(尹根一) 연구관에게 연락, 함께 현장으로 달려가 풍납토성에서
실측조사를 하고 있는 이교수를 만났다. 현장에서 수습한 몇점의 토기편들은 과연 백제시대에 사용된 토기편들이
분명했다. 정말 극적인 순간이었다. 30여년 전 대학시절 최초의 실습조사 이후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미처 손쓸 사이 없이 파괴되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백제 유구(遺構)가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돌아 온 것 아닌가.
전율마저 느껴졌다. 초기 한성 백제시대가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즉시 공사 현장 책임자를 만나 유구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공사를 중단하도록 했다.
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도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다음날 모 일간지에는 풍납토성 내 백제시대의 문화층이
연립주택 재건립 공사로 드러났다는 내용이 사회면에 크게 소개됐다.
문화재관리국이 즉각 재개발 아파트 사업을 중지토록 하고 현장 보존 조치를 취하는 한편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긴급 구제발굴에 들어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유적의 중요도를 감안해 긴급발굴조사단장은
당시 한병삼(韓炳三) 문화재위원회 제 6분과 위원장이 맡고
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을 주축으로 발굴조사가 1년 넘게 진행됐다.
학창시절 학생 신분으로 실습 발굴조사에 참여한 후 33년 만의 일이었다.
연립주택조합의 적극적인 협조로 긴급 수습 발굴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발굴조사 결과 부뚜막 시설을 갖춘 백제시대 집터 여러 동(棟)을 비롯해 많은 유물이 출토됐고,
나는 초기 백제의 역사를 다시 써야 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품게 됐다.
사라질 뻔한 백제 유물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풍납토성이 한성 백제시대의 왕성(王城)일 가능성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이교수의 집념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교수가 백제 유물을 발굴하게 된 과정은
지금 돌이켜봐도 대견스럽다.
90년대 토성 안은 공터를 찾아 볼 수 없는 인구 밀집지역으로 유적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교수는 96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불모지 같은 곳에서 잔존해 있는 풍납토성 성벽의 규모와
현황에 대한 실측조사를 우직하게 시작했다. 해가 바뀌고 신정 연휴가 이어졌지만 이교수는 쉬지 않고 조사를 계속 했다.
1월 3일 이교수는 재개발 공사 현장 안에서 대형 철제 빔을 박는 소리가 들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접근했으나
재개발 구역은 높은 가리개벽으로 가려져 있어 내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다음날 공사가 잠깐 중단된 틈을 타 몰래 현장 안으로 숨어들어간 이교수는 1천8백㎡ 면적을 지하 4m까지
터파기 해놓은 벽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하 2.5m~4m 사이에 수많은 토기 파편들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파편들이 백제시대 것임을 확인한 이교수는 황망히 토기 몇점을 수습해 공사장을 빠져 나온 후
곧바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만약 이교수가 신정 연휴 집에서 쉬었더라면 연립주택 공사장에서 백제 유물층을 발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천금 같은 유물들은 공사장 불도저의 차가운 삽질 아래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천행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475년 9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개로왕은 아들 문주에게 ‘피를 토하는’ 유언을 내린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 시대가 비극적인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한성백제의 500년 도읍지 풍납토성도 패배자의 역사 속에 파묻혀 1,400여년간이나 잊혀져 갔다.
그러던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이름조차 없었던 풍납토성의 서벽마저 대부분 유실된다.
하지만 그 순간 잠자고 있던 한성백제가 깨어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