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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天竺)의 난야(蘭若)가 꽃을 피운 영험기도도량
천축사(天竺寺)
1. 사찰개관
서울 천축사
천축사는 서울시민이면 한번쯤 들러본 명산 중의 명산 도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 누구나 한번쯤 서울의 정경을 보기 원하는 사람이면, 산중에 산, 아름다운 산, 영험있는 산 도봉산을 찾아 갈것이다.
천축사는 일찍이 의상이 창건한 천년고찰로서 알려졌으며, 고려 때 지공이 그의 제자 나옹에게 영축산의 난야(蘭若)와 같은 곳이라 하여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함흥에서 서울로 귀환하며, 절을 중창하고, 명종 때 문정왕후가 화류용상을 헌납할 정도로 왕실과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근대에는 부대부인 민씨가 상궁들과 합심하여 삼신탱과 신중탱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관음의 기도도량으로써 부녀자들에게 인기 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천축사는 천년고찰의 명성답게 수많은 역사를 가지며, 누구나 한번쯤 영축산의 난야에서 관음에게 기도드리러 찾는 기도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천축사는 옛 사명을 이어 가며, 수많은 참배객들이 현세의 기복과 관음의 자비를 바라며 축원드리러 찾아 가는데, 산길을 오르는 곳곳, 그리고 발길을 ?기는 자취마다, 옛 선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먼 옛날 동대문을 지나 도봉산을 찾아 가는 길은 지금의 길처럼 평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왕비가 직접 기도를 드렸던, 그의 종속이 기도를 드리러 길을 떠났던 천축사를 찾아 가는 길은 그 자체가 수행의 길이었을 것이다.
궁전에서 출발하여 발길을 ?기는 곳곳마다 마음속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관음보살을 외치며 발길을 옮겼을 것이며, 궁전에서 하사한 시주물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조마조마하던 마음은 오죽했을까?
이처럼 도봉산을 오르는 길마다 그녀들의 정성과 기복을 바라는 흔적들이 돌계단 구석구석마다 남아 있는 듯하다.
깍아 지른듯한 절벽을 올라 천축사 가람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한숨을 쉬며, 또 한번 읊조린 말 관음보살.....
지금도 그렇듯 언제나 힘들고 지칠때 누구나 찾는 그 한마디가 관음보살. 관세음보살일 것이다.
한발 한발 어렵게 내딛을때, 그리고 힘들고 지친 어깨를 따스히 감싸주는 자비의 손길을 느끼고 싶을 때 천축의 계단을 올라가 보자.
지금은 평탄한 등산로가 정돈되어 있어 힘들게 오르진 않지만, 입구에서 천축사의 기와와 모래를 짊어지고 오르는 보살들의 굽은 허리를 보면, 그 옛날 상궁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들이 바라는 마음은 예전의 상궁들의 마음과 다르겠지만, 현세의 기복
즉 우리가장, 우리가족,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관음의 자비를 입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일한 것일것이다.
쌀쌀한 겨울 바람이 불어오기 전, 흩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천축의 계단을 밟아 보자.
우리의 마음속 영원한 고향인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러....
2. 위치와 자연환경
1) 위치
천축사(天竺寺)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549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02-954-1474)
2) 교통편
서울에서 천축사를 찾아 가는 길은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 중 가장 찾기 쉬운 방법은 대중교통인 지하철을 이용하는 길이다.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1호선 의정부행을 타고 도봉산역에서 하차하거나 7호선 도봉산역을 이용하여 도보로 산행 길에 오르는 길이 있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서울 시내에서 도봉산역을 종점으로 하는 141번, 142번, 1127번, 1128번을 이용하면 쉽게 도봉산을 찾을 수 있다.
도봉산역에서 매표소까지는 도보로 20여분 거리이며, 도봉산 매표소에서 천축사까지는 1시간정도 소요된다.
하지만 천축사에 참배하거나 기도하러 가는 신도들은 도봉산 주차장에서 성도원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셔틀버스는 아침 마지시간인 오전 8시 40분부터, 오후 9시 20분까지 수시로 운행되는데, 성도원에서 천축사까지 느린걸음으로 30-40분이면 충분히 천축사까지 오를 수 있다.
이외 서울에서 천축사를 찾아 가는 자가운전자는 내부순환도로 길음체인지를 이용하거나 종로를 통과하여 의정부방면으로 뚫린 3번 국도를 이용하면 쉽게 도봉산 천축사를 찾을 수 있다.
자가운전일 경우 미아사거리 신세계백화점에서 미아사거리역을 지나 의정부방면으로 계속 직진하면, 우이동을 지나, 국립4.19묘지가 나오며, 대로를 따라 계속 의정부방면으로 길을 달리면, 도봉역을 지나 도봉산역이 나온다.
천축사가 있는 도봉산은 도봉산역 못 미쳐, 좌측으로 도봉산 등산로로 들어가는 표지판쪽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이 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명산 도봉산이 나온다.
자가용은 도봉산 주차장에 주차해야되는데, 주차장에서 도봉산 매표소에 이르는 길은 과연 서울 최고의 등산로답게 수많은 음식점과 등산용품점이 즐비해 있어 이 곳이 과연 등산객의 천국이구나 하는 찬탄이 나온다.
※ 등산코스
도봉산역-도봉산매표소(20분)-도봉서원(20분)-도봉산장(20분)-천축사-마당바위(30분)-자운봉(20분)
초보자라도 2시간-2시간30분이면 오를수 있으며, 자운봉정상을 오를 때 바위지대에서 조심하면, 나머지 구간은 어려움이 없다.
■ 코스 : 도봉매표소-광법사-다락원능선-헬기장-신선대우회-마당바위-천축사-도봉매표소
■ 거리 및 시간 : 산행거리 약6.5km, 산행시간 3시간19분, 총시간 4시간40분
■ 구간별 등산 코스
도봉매표소(29분)-다락원매표소갈림길(17분)-다락원능선(52분)-민초샘갈림길(19분)-신선대아래(20분)-구조대갈림길(6분)-마당바위(24분)-도봉산장(32분)-도봉매표소
3) 자연환경
천축사는 서울의 명산 도봉산 동쪽에 자리한 천년고찰로, 서울의 관음 영험기도도량으로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천축사의 지형은 깍아지른 듯한 만장봉(萬丈峰)을 배경으로 소나무ㆍ단풍나무ㆍ유목(?木) 등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어 마치 닭이 계란을 품은 포근한 정경을 연출하며, 계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연스런 가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에 보기 좋은 기도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천축사로 오르는 길은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는 평탄한 코스로 여름이면 울창한 수풀과 푸르른 수림이 산을 찾는 이들을 반기며, 가을이면 단풍나무들이 절경을 이룬다.
또 겨울이면 서울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설경이 암벽 곳곳에 펼쳐져, 정말 이곳이 지공이 말한 천축국의 영축산을 본딴 난야(蘭若)라는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또 본전인 대웅전 외곽으로 길게 뻗은 만장봉 가장자리에는 근대 고승들의 수행처인 무문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주위로 적송들과 더불어 거석이 자리하고 있어 무문관의 석조건물과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4) 가람배치
가람은 남쪽에서 시작되어 동북쪽으로 길게 뻗은 장방형의 가람으로 초입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원통전, 산신각, 독성각 등 법당을 비롯하여 요사채 2채가 중심가람을 형성하며, 언덕 너머 현대 선승들의 수행처인 무문관과 범종각이 별원의 형식으로 가람을 형성하고 있다.
부속암자로는 약 50년 전에 창건된 석굴암과 만월암, 관음암이 있었으나, 지금은 천축사와는 별개의 사찰로 독립되어 있다.
이외 천축사 초입에는 석문과 청동불보상입상이 가람을 수호하듯 사찰 초입에 자리하며, 맑고 깨끗한 석간수가 유명하여 사찰을 찾는 불자들 뿐만아니라 도봉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한번쯤 들러 가는 명찰로 알려져 있다.
3. 사찰의 역사
1) 연혁
천축사는 서울시 도봉구 만장봉 동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이 절을 천축사(天竺寺)라고 이름한 것은 고려 때 인도승려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에게 이곳의 경관이 천축국의 영축산과 비슷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천축사의 연혁은 신라 673년(문무왕 13)에 의상대사가 의상대에서 수도할 때, 제자를 시켜 암자를 짓게 하고, 옥천암(玉泉庵)이라 한 것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뒤 고려 명종 때에 근처 영국사(寧國寺)의 부속암자로 맥을 이었다.
이후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에 함흥에서 돌아오던 태조가 옛날 이곳에서 백일기도하던 것을 상기하여 절을 중창하고 천축사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한다.
또 1474년(성종 5)에 성종의 왕명으로 천축사가 중창되었고,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화류용상을 하사하여 불좌를 만들었다고 한다.
1812년(순조 12)에는 경학(敬學)스님이 절을 중창하였으며, 1816년(순조 16)에는 신도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절에 희사하여 절의 사세가 넓어졌다.
이후 1862년에는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량을 희사하여, 19세기 말 천축사는 수많은 신도들에 의해 중수ㆍ중창되었다.
1863년에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년에 화주 성암응부(星巖應夫)가 민왕후 및 상궁 박씨등의 시주를 얻어 후불탱, 신중탱, 지장탱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삼신불탱과 신중탱만이 전해진다.
근대에는 1911년에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을 봉안하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泰)가 천축사로 오르는 길을 확장하였으며, 이후 수많은 신도들이 천축사 도량에 불사하였으며, 1964년에 무문관을 신축하여 6년 수행결사의 장으로 만든 것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가람으로 조성되었다.
현공(玄公)스님이 2003년부터 대웅전을 비롯하여 독성각ㆍ산신각, 요사채를 중수하고, 공양간을 신축하여 옛 천축사 가람을 복원한 것이다.
근래 도봉산의 관음기도도량으로 알려지며, 수많은 신도들이 절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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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대 내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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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73년(문무왕 13) 의상대사가 옥천암(玉泉庵)으로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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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종 영국사(寧國寺)의 부속암자로 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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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태조 7) 태조가 절을 중창하고 천축사라는 사액을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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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4년(성종 5) 왕명으로 천축사 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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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화류용상을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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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순조 12) 경학(敬學)스님이 절을 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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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순조 16) 신도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을 절에 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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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 참판 (參判) 이장오 등이 불량을 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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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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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성암응부(星巖應夫)가 민왕후 및 상궁 박씨등이 후불탱, 신중탱, 지장탱을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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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ㆍ신중탱을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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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김용태(金瑢泰)가 천축사로 오르는 도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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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현재 천축사의 가람으로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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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05 주지 현공(玄公)스님이 대웅전 / 독성각 / 산신각 / 요 사 / 공양간 신축 및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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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도봉산 관음기도도량으로 발전 / 무문관 참선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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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현재 주지 유방(由昉)스님
2) 관련인물
※도봉산 무문관 제선선사
천축이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를 말한다. 도봉산역에서 1시간 가량 도봉산대피소를 거쳐 가파른 길을 따라 도봉산에 오른다. ‘천축’으로 가는 길이다. 인수봉 못지않은 미륵봉 기암 아래 천축사가 숨어있다. 천축사 안쪽 외진 곳엔 대리석으로 지은 3층 집이 있다. 무문관이다. 무문관이란 밥이 드나드는 구멍 외엔 출입문까지 봉쇄한 방이다.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수행자가 견성(깨달음)해 벽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천지를 활보할 대자유를 얻을 때까지 나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들어간 감옥인 셈이다.
2001년과 2002년 겨울 기자는 이곳에서 이 무문관의 마지막 수행자인 원공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무문관에선 1차로 1966~71년에, 2차로 72~77년에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뜬 정진이 있었다. 2차 때 유일하게 6년 정진을 마친 원공은 그 뒤에도 이곳 무문관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십여 년을 차 한 번 타지 않고 걸어만 다녔던 원공은 남들이 준 여비를 꼬박 모은 돈 1천여만 원씩을 두 차례나 통일을 위한 기금으로 써달며 기자를 통해 <한겨레>에 전했다. 그러나 원공 자신은 끼니 때가 되자 라면을 스프 없이 끓여 소금만으로 간을 해 아무런 반찬 없이 들고 있었다. 3년 전 홀연히 이곳을 떠난 원공의 소식조차 모른다는 이 절 소임자의 전언에 더욱 허허로워진 가슴팍을 무문관의 전설이 스치고 지난다.
1,2차에 걸쳐 무문관엔 내노라 하는 스님 100여명이 거쳐 갔다. 그러나 1차 때 6년 결사는 단 2명만이 마쳤다. 한 명은 지난해 2월 95살로 입적한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6년 결사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려 당시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의 가슴에 전설로만 남았다.
그가 무문관 선승들 사이에서 ‘가장 철두철미하게 수행했던 수행자’로 알려졌던 제선 선사다. 제선의 화신인가. 무문관 앞에 큰 바위가 산처럼 앉아있다.
어린 아들 갑자기 죽은 뒤 홀대한 개 ‘인과응보’ 깨우침
밥구멍 빼고 꽉 막힌 무문관 6년 정진 뒤 자취 감춰
제선의 전설을 찾아 다시 충남 공주 계룡산 갑사 대자암으로 향했다. 천축사 무문관을 지었던 정영 스님(83)이 다시 무문관을 세운 곳이다. 정영은 1940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포산 선사에게 제선과 같은 해 한 날에 출가했다. 제선이란 법명은 ‘제주도에서 참선하러 왔다’고 해서 주어졌다고 한다. 만공 선사로 부터 법(깨달음)인가를 받은 포산은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 삼아 몰려들었다. 정영은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제선이 “특출했다”고 회고했다. 키는 작았지만 목소리가 크고, 당차기 그지 없던 제선은 한 번 좌정하고 앉으면 움직이지 않은 독종이었다. 그러면서도 일 또한 남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해냈다. 훗날 성철선사가 머물다 열반한 백련암의 축대는 제선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한때 일본의 친척집에 묵으며 유학생활을 했던 제선은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해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나무랄 데 없이 잘 생기고 똑똑해 그는 식민조국을 독립시킬 제목으로 키울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뒤 갑자기 쓰러지더니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기가 막힌 제선은 아이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울부짖었다. 폐인이 될까 염려하던 어머니의 권유로 제선은 유람 길에 나섰다. 그는 묘향산에 이르러 감자밭을 일구며 토굴에서 정진하던 한 스님을 만났다. 제선이 “아이가 왜 그렇게 죽었는지 까닭을 모르고선 살 수가 없다”고 말하자 스님은 “7일만 잠 안자고 기도하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제선은 그 날부터 “관세음보살”을 염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을 부릅 뜨고 염불하는가하면 어느 샌가 밭두렁에 가꾸로 처박혀 코를 골고 있었다. 스님은 그 때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42일째 되던 날 드디어 잠이 사라져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7일이 지나도 아들이 죽은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화가난 제선이 불상의 목을 떼버리겠다며 가던 중 소매가 탁자에 걸려 넘어졌다. 바로 그 찰라 아들이 다가왔다. 너무 반가워 안으려 하면 아들은 도망갔다. 그는 겨우 ?아가 아이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아이는 “아야!”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데, 개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를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충견이 떠올랐다. 일본 친척집에 머물 때 개가 갑자기 병이 들자 친척아저씨는 그에게 개를 교외로 데려가 버리게 했다. 그러나 그를 애타게 좋아했던 개는 자전거에 매달리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개를 떼어내고 도망치다시피 집에 돌아왔는데, 그 개는 일주일 만에 집을 찾아 왔다. 그리곤 전과 다르게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대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제선은 인과응보를 깊이 깨달았다.
무문관 6년 정진을 마친 제선은 마중 온 제자와 함께 부산까지 간 뒤 혼자서 배를 탔다고 한다. 그 뒤로 그의 행적은 끝이었다. 누군가는 평상복을 입고 서울의 한 판자촌에 숨어 수행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남해의 외딴 섬에 산다고도 했다. 정영은 “소문을 ?아 남해의 섬에 찾아가보았지만 그는 없었다”고 했다.
문 없는 문을, 자취 없는 자취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3년 정진을 앞두고 공사 중인 대자암 무문관 방에 들어가 보니 가을 창공이 하나 가득 아닌가.
한계레 신문 /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3) 관련자료
『전통사찰총서 4 - 서울의 전통사찰』, 寺刹文化硏究院, 1994
『도봉산천축사사적(道峰山天竺寺事蹟)』
도봉산은 양주의 남쪽에 서 있는데, 그중에서도 萬丈峰이 가장 우뚝 솟았다. 만장봉 아래에는 蘭若가 있어 天竺이라 하니 옛날의 玉泉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절은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창건되었으니, 부석존(浮石尊-의상(義相))이 그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 노닐며 감상하다가 그 빼어난 산세에 감탄하여 그 제자들을 시켜서 암자를 세우고 머물게 하였다. 뒷날 옥천이라 이름한 것은 그 샘물의 맛이 시원한 것에 연유한 것이다.
조선 태조 7년(1398) 왕께서 함흥으로 행차할 때에 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만장봉을 바라보매 이상한 상서가 솟아 오르는지라 태조께서 이상하게 여겨 올라와 보니 만장봉이 있어??????구름은 만장으로 돌아가니 봉우리가 희고, 꽃은 삼문에 떨어지니 길이 붉다.??????라는 싯구를 읊고는 절에서 유숙하였다. 후에 함흥에서 돌아오는 길에 또 다시 이곳에 행차하여 백일동안 치성을 드리고는 옥천사를 중수하게 하였다. 고려 말 나옹화상이 일찍이 이곳에 노닐적에, 그 스승 지공이 이곳을 가리키며 이르기를??????인도 영축산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라고 하였던 까닭으로 천축도량으로 이름하였다. 오늘날 속칭 토굴헌성대라는 곳이 바로 태조의 기도처이다. 성종 경인년(1470)에 朝家에서 중수하였으며, 文定王后가 樺榴造龍床을 희사하여 佛座를 삼게 하니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뒤 수백년 동안 특별한 恩典을 입었으나 때에 따라서는 절이 피폐하고 승려가 없던 적도 있다. 순조 12년 신미에 경학(敬學)이 중창하니 이때에는 공양의 범절이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었을 것이로되 근래에 다시 절의 형편이 조락해지니 예불까지 거의 끊어지게 되어 늘 안타깝게 여긴 지도 오래되었다. 이제 다행히 여러 정승들의 혜택을 입어 공양 올릴 양식이 다시 갖추어졌으니, 어찌 한 마디로써 이를 다 기록할 수 있으랴. 삼가 몇 자를 새겨 누각에 걸어두니, 아침저녁으로 잊지 말기를 바라노라.
『천축사포시기(天竺寺布施記)』
4. 성보문화재
천축사는 만장봉을 배경으로 울창한 수목이 그 터를 아늑하게 지켜주는 명당터에 자리한 영험있는 기도도량이다.
당우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2004년에 지은 요사채와 공양간이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뒤로 축대를 쌓아 원통전과 토굴, 독성각, 산신각이 배치되어 있다.
이외 가람 동북쪽에는 현대 고승의 참선수행도량인 무문과과 범종각이 있으며, 서울시 보호수(10-6)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대웅전 우측편에 자리하고 있다.
성보문화재로는 명종 때 문정왕후가 하사한 화류용상이 있으며, 20세기 말 서울지역에서 활동한 화승 경선응석이 그린 신중탱과 삼세후불탱이 전해진다.
1) 대웅전(大雄殿)
도봉산 천축사의 주법당으로, 1812년에 건립된 ㄷ자형 팔작건물을 현공(玄公)스님이 20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신축하였다.
건물은 2층구조로, 1층은 콘크리트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목조건물을 올린 모습이다.
1층은 5칸의 규모로 종무소 겸 천축사를 찾는 이들의 쉼터 및 요사채로 사용되며, 2층은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연화초석 위로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다포를 얹은 모습으로 내외 2ㆍ3출목의 다포를 가지며, 특히 어칸에는 용두를 장식하고 있어 주법당으로서 웅장한 규모를 보여준다.
건물 외부는 아직 단청이 되지 않은 모습으로, 전면에 2ㆍ3ㆍ4분합의 꽃살창호를 단장하고 현공(玄公)스님이 쓴 편액과 주련을 달았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위로 ㄷ자형으로 형성된 불단을 가설하였는데, 불단 위에는 중앙에 석가ㆍ문수ㆍ보현보살을 중심으로 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화로는 2004년에 조성된 석가모니후불탱과 지장탱ㆍ신중탱이 걸려 있다.
이외 불구로는 1971년에 조성된 금구와 불단 우측으로 영단이 가설되어 있다.
2)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우측 축대 위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건물로, 현재 천축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은 가구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사각초석을 얹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운 모습으로 전면은 1ㆍ4분합의 띠살문을 삼면은 관음보살의 영험과 관련된 벽화를 장식하고 있다.
이외 건물 내부에는 ㄱ자형의 불단 위로 화려한 닫집을 가설하고, 그 아래 원통전의 주불인 관음보살을 조성하였으며, 불화로는 천수천안관음탱과 칠성탱을 봉안하였다.
특히 천수천안관음탱은 1980년에 주지 지형스님과 금어 조정우가 조성한 것으로, 천개의 팔에 천개의 눈을 가진 관음보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칠성탱은 1979년에 금어 김용회가 조성한 것으로 동시기에 조성된 산신각의 산신탱과 더불어 금대 천축사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다.
3) 독성각(獨聖閣)
원통전 우측 언덕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건물로, 현공(玄公)스님이 지은 전각이다. 건물은 콘크리트 기단 위에 연화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지붕 위로 절구형의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뒷벽에 맞닿아 불단을 가설하고 그 위로 2002년에 조성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을 봉안하였다.
독성탱은 면바탕에 채색을 입힌 모습으로, 주지 선응스님이 화주가 되어 금어 권성준이 조성하였다.
4) 산신각(山神閣)
천축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로, 2003년 현공(玄公)스님이 보수하였다.
건물은 연화초석 위로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공포를 올린 모습으로 어칸에는 4분합의 꽃살창호를 두고 편액을 걸었다.
건물은 아직 단청이 장엄되지 않은 모습으로 내부에는 1979년에 주지 지형(知亨)스님이 화주가 되어 금어 조정우(趙廷宇)가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5) 무문관(無門關)
서울 천축사 / 서울 천축사 무문관 / 서울 천축사 무문관 1ㆍ5ㆍ8ㆍ전경 1ㆍ외부 1ㆍ화류용상 1ㆍ편액 1
천축사 가람의 동북쪽에는 3층짜리 현대식 석조건물이 있다.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출입금지 구역으로, 무문관(無門關)이라고 부르며, 약 60여년 전에 참선수행도량으로 세워졌다.
특히 이 무문관은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아 한번 무문관에 들어가면 4년 또는 6년동안 문을 닫은채, 면벽수행하게되는데, 방문 밖의 출입은 일체 금지된다.
또 수행 중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하여 들여 보내는 등 수행의 규범이 매우 염격하다.
현대의 고승 중에도 이 무문관에서 수행한 이들이 많아 한국불교계에서 무문관의 수행을 최고로 알아주는데, 현재는 그 맥이 끊어져 수행하는 이들이 없다.
현재 무문관에는 한 노승이 정진하며, 옛 고승들의 법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법당 내부에는 문정왕후가 하사한 화류수목조용상(樺榴樹木彫龍床)과 천축사 편액이 전해진다.
6) 범종각(梵鐘閣)
서울 천축사 / 서울 천축사 범종각 / 서울 천축사 범종각 1ㆍ4ㆍ외부 1ㆍ편액 2ㆍ범종 1ㆍ3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건물로 가람의 동북쪽인 무문관 옆에 있다.
건물은 콘크리트 기단 위에 연화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이익공을 받친 모습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또다른 소형의 전각 1칸이 결구되어 있는데, 기둥 사이로 낙양각이 장식되어 있으며, 희망의 종이라고 부르는 대형범종이 걸려 있다.
7) 부속건물
천축사 가람에는 법당과 무문관ㆍ종각 외에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는 2채의 건물이 있다. 모두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 측면에 자리하며, 건물은 대웅전을 감싸듯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요사는 대웅전 좌측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건물로, 2004년에 현공스님이 대웅전 신축 때 함께 조성한 것이다.
건물은 모두 4칸의 지대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 외부는 2분합의 띠살문을 배치하여 요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외 대웅전 우측에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건물이 있는데, 사찰 초입의 석간수터와 맞닿아 있으며, 현재 공양간 겸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또 무문관으로 가는 길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해우소가 있는데, 사찰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목조건물로 신축되었으며, 도봉산의 자연환경을 위해 최첨단 위생정화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해우소는 사찰을 찾는 이들과 등산객들에게 깨끗하고 청결한 화장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100원의 유료요금을 받고 있다.
이를 두고 일반인들은 사찰이 화장실을 가지고 상업적인 행위를 한다고 불만을 호소하지만, 이를 왜곡하지 말고 다음세대를 위한 자연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8) 석조물 및 기타
천축사에는 당우 외에 석굴을 비롯하여 청동보살군상, 그리고 조선시대 부도 파편이 남아 있다.
석굴은 대웅전 뒤편에 있는 바위 동굴로 건물 내부에는 약합을 가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일광ㆍ월광 2구의 보살상이 감실에 봉안되어 있다.
또 사찰 초입 석문 한켠에는 수백구의 청동보살입상이 군상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데, 사찰을 찾는 이들의 원불로 모두 개개의 소원을 가지며 봉안되어 있다.
이외 무문관 앞에는 바위 틈 사이로 부도 파편이 남아 있는데, 옥개석을 비롯하여 중대석과 하대석이 순서와 상관없이 얹혀져 있다.
특히 맨 아래에 배치된 중대석은 팔각원당형의 부도파편으로 팔면에 돌아가며 사자와 코끼리 등 동물상이 새겨져 있어 옛 천축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첫댓글 나무 관세음 보살 ()()()
나무 보현 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