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aDPmEbLAAtQ
본문 열왕기상과 열왕기하는 다윗이 죽은 이후에 솔로몬이 왕이 되고 솔로몬이 죽고 난 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이 되는데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각각 멸망당하는 과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서나 다른 모든 성경은 열왕기상하의 스토리 안에 들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왕상하로써 구약의 스토리는 끝나는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성경에 처음 등장할 때 블레셋의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엄청난 강도의 인상을 남겼습니다만 말년의 모습은 정반대의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왕이었다 할 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상 29:28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성경이 진리요 거룩한 책인 이유가 바로 이런 말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실존, 인생의 현주소,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며 왜 사는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원벤치에 앉아서 저녁이 될 때까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습니다. 공원관리인이 와서 당신 누구십니까? 나도 모릅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나도 모릅니다. 어디로 가실 계획입니까? 나도 모릅니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허무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관리인은 육신적으로 이름이 무엇이며 누구이며 언제 공원에서 나갈지 물어보는 것이었는데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고민하던 것을 대답했던 것입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것이고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것이고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즉, 왜 사는지 모른다는 것을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른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만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삶의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해답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시작부분 창세기 3장에 인간의 범죄 이야기, 선악과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인간실존을 말씀하기 위함이고 본문 열왕기상 시작하는 부분에서 다윗의 늙은 모습을 부각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준비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필립은 부하 장수에게 한가지 일을 맡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폐하, 당신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이 말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있을 때 성실하게 살겠노라는 의미가 담긴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일반 세상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더욱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시 90:10-12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현대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가 기독교에 대해 그렇게나 비판하더니 죽기 두달 정도 광란의 괴성을 지르면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신문에서는 그가 돌아갈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나 힘든 임종을 맞이했다는 기사를 내 보낸 적이 있습니다.
■“보람 있게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주듯이 값지게 쓰인 인생은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삶을 준비하는 것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지혜로운 일인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 안에서 날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절부터 보시면 다윗의 몸이 허약함으로 온기를 느끼지 못하자 신하들이 아비삭이라는 젊은 처녀를 다윗에게 주는데 말하자면 잠잘 때 껴안고 자라는 의미로 준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비삭의 시중은 받지만 잠자리는 함께 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짐작컨대 밧세바와의 사건으로 인한 일종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고대세계에 이런 일로 왕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만 다윗은 사람 앞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아갔기 때문에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로 다윗의 한계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이 아비삭이라는 여인으로 인해 왕위계승에 있어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이 5절부터 나오는 아도니야의 반란사건입니다.
5절과 6절입니다.
아도니야는 압살롬 다음으로 태어난 자로써 다윗의 넷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얼마전에 살펴본 것처럼 요압장군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둘째 아들 길르압이라고 있는데 이도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일찍 질병으로 단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서열로 따지면 본문에 나오는 넷째 아들 아도니야인데 그가 왕이 되겠다고 하면서 9절에 보시면 아르노겔이라는 곳에 가서 스스로 왕이 되었노라고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과 함께 공포를 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6절에 보시면 아도니야는 외모도 출중하지만 사람 됨됨이도 부친 다윗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끔 한 일이 한번도 없을 정도로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가 부친 다윗이 공식적으로 지명한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노라고 선포하는 것을 보면 이 권력에 대한 매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정치권의 싸움이 보통 심각하게 벌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고 한결같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 최고의 목적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인간의 욕심과 교만은 끝이 없습니다. 이렇게 멀쩡한 사람도 권력 앞에서는 완전히 이상한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아도니야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범죄도 따지고 보면 권력욕으로 인한 범죄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의 뿌리가 바로 권력에의 의지인 것입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됨을 선포했을 때 이를 알게 된 나단선지지가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가서 빨리 다윗에게 가서 이 상황을 말하고 속히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공포할 것을 권면합니다.
밧세바는 나단 선지자의 말대로 다윗에게 가서 이 상황을 알리고 다윗은 즉시로 솔로몬을 다음 왕으로 세울 것을 공포하자 38절에 보시면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그리고 군대장관 브나야를 비롯해서 솔로몬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기혼이라는 곳에 가서 왕이 됨을 선포합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도니야가 왕위를 선포한 곳과 솔로몬이 선포한 곳이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1절에 보시면 솔로몬의 즉위식을 선포하면서 뿔나팔을 불었을 때 아도니야 무리가 놀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다윗이 왕으로 삼은 자는 자신이 아니라 솔로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열상으로 자신이 당연히 왕이 될 줄 알았는데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것으로 첫 번째로 놀랐고 두 번째는 만일 자신이 잘못하면 반역죄로 잡혀서 처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놀라게 됩니다.
49절, 50절입니다. 아도니야와 함께 한 무리가 뿔뿔이 흩어지고 아도니야는 처형당할까봐 두려워서 성막의 제단뿔을 붙잡는데 누구든지 제단 뿔을 붙잡으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처벌하지 말라는 율법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 제단 뿔을 잡은 후에 자신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솔로몬에게 부탁을 하자 이미 전세는 완전히 솔로몬에게 기울었기 때문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도니야를 죽일 이유가 없기 때문에 아도니야를 살려주게 됩니다.
본문에서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되는데 왜 굳이 다윗은 아도니야가 아니라 솔로몬을 왕으로 삼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도니야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서열상으로 당연한 순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은 이미 이전에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서열보다 앞서는 법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합니다.
13절, 17절, 30절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내용에 대해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다윗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대상 22장에 보시면 다윗이 어린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을 자신이 아니라 솔로몬이 완성해야 할 것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다윗이 성전건축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솔로몬이 후계자가 될 것에 대한 계시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는데 근거가 되는 말씀은
■삼하 12:24-25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하나님이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윗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정이 옳았다는 것은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은 것을 통해 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국강병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후기 모습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 만일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더라면 이런 엄청난 역사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들은 이루어져간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아도니야를 지지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요압입니다. 요압이 보이지 않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백성들도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도 결코 저항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인간의 뜻,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져간다는 것을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 길을 계획할지라도...
우리가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는 일마다 틀어지면 시간낭비 돈낭비 에너지낭비.. 바로 가면 될 것을 돌아간다는 것은 참 좋지 않은 일입니다. 요압처럼 인간의 뜻을 이룰려고 애를 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힘을 쓰는 나단선지자 같은 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게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