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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겸 지평(持平) 일록(日錄)--
〖초1일 계묘〗맑음.
좌상(左相=鄭仁弘240)이 내려갔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독히 유시하기를“우선 들어와서 나를 만나 본 뒤에 내려 가도록하라.”고 했다.
동궁전(東宮殿)에서는 겸사서(兼司書)인 오여온(吳汝穩=隆甫61)을 보내 돈유(敦諭: 돈독히 유시함)했다.
〖초2일 갑진〗맑음.
장의동(藏義洞:효자동과 청운동 일대)김첨지(金僉知)를 만나러 갔더니 판윤(漢城判尹),연안(延安)부사,
장단(長湍)부사도 다 와 있었다. 밤에 눈이 좀 내림.
〖초3일 을미〗맑음.
셋째 아들인 주우(金柱宇33)와 그 처(妻)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기에
안군소(安君邵243),황공직(黃公直85),박경승(朴敬承=朴守緖16),김중화(金仲和),조자백(趙子百=趙錫朋60),
이여첨(李汝瞻=李埁15)이 같이 먹었다.
한정국(韓正國109)은 다녀갔으나 형보(馨甫=李茳53)는 세 번이나 청(請)해도 오지를 않으니 괴상하다.
〖초4일 병오〗맑음.
형보(馨甫=李茳53)를 찾아갔더니 형보(馨甫)가 취해서 누워서 하는 말이
“유원숙(柳源叔=柳活43)이 지나가면서 들렀기에 술을 사서[沽酒]마셨다.”고 한다. 주우(金柱宇33)등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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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11월28일
침의(鍼醫) 허임·남영에게 경기 근처의 자리가 비면 수령직을 제수하게 하다.
병조에서 기한을 넘기는 회계(回啓)·도시(都試) 개장하는 일에 대해 아뢰다.
우의정이 여덟번째 사직소를 올렸는데 조리하고 나오도록 하다.
光海君 7년 11월30일
좌의정 정인홍에게 가을, 겨울 녹봉을 받아쓰도록 전교하다.
光海君 7년 12월1일
좌의정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인재 수습·백성 진휼 등에 대해 아뢰다.
전라 감사 이덕형이 겨울철의 이상기상에 대해 아뢰다.의금부가 황정열·이응성을 잡아가두는 일로 아뢰다.
光海君 7년 12월2일
태백이 낮에 나타나다. 좌의정 정인홍이 임금을 만나본 후에 돌아가기를 명하다.
내년 봄에 문정전 기둥을 원형으로 고쳐 세우는 일을 의논하게 하다.
영의정 기자헌의 차자에 대해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光海君 7년 12월3일
평안 감사 김신국이 삼값과 노비신공 명주의 작미일로 치계하다.
용인까지 내려간 좌의정 정인홍을 상경하여 임금을 만나고 가기를 당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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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5일 정미〗맑음.
완아(婉兒)어미가 가슴이 아프다기에 가 보았다.
융보(吳隆甫61)가 어제 아침에 피한 것은 형보(馨甫=李茳53)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며,
또 모든 친구들이 모여 마셔서 많이들 취해서 돌아갔기에 들러보지 못했노라고 말했다.
형보(馨甫)가 주과(酒果)를 베푼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해도 유독 나를 만나지 않은 오(吳隆甫) 또한 괴상하다.
〖초6일 무신〗맑음. 기일(忌日)이라 집에 앉아 있었다. 저녁에 이정랑(李正郞)을 만나러 갔다.
〖초7일 기유〗맑음.
경승(敬承=朴守緖16)이 좌의정(鄭仁弘240)에게
전향(餞享;주식(酒食)을 대접하여 가는 사람을 보내드림)하는 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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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12월4일
승지 정조가 좌의정 정인홍이 용인을 출발했음을 아뢰다.
고을 강등 여부를 영의정·우의정과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다
吏曹啓曰:“星州合屬事,議于大臣,則領議政奇自獻議,‘前者曾聞,逆賊所出之地,縣則合於他邑;州則降爲縣,
이조계왈:“성주합속사,의우대신,칙령의정기자헌의,‘전자증문,역적소출지지,현칙합어타읍;주칙강위현,
近日西原忠州是也。 如洪川,更無所降之事,故合於春川。星州, 嶺南大州也。合於他官,則賦役不無減縮之弊,且無前例,
근일서원충주시야。 여홍천,경무소강지사,고합어춘천。성주, 영남대주야。합어타관,칙부역부무감축지폐,차무전례,
降縣似當。但未詳格例,果如臣所陳。伏惟上裁。’領敦寧沈喜壽議:‘以大邑屬於小縣,似無前例,州府降爲縣監,
강현사당。단미상격례,과여신소진。복유상재。’영돈녕침희수의:‘이대읍속어소현,사무전례,주부강위현감,
如平時安東水原,近日忠原西原等例,未爲不可。若必永革本州,以附他邑,則附之於大丘稍巨之地,未知如何。
여평시안동수원,근일충원서원등례,미위부가。약필영혁본주,이부타읍,칙부지어대구초거지지,미지여하。
若全屬於一小邑,則土壤有偏重不稱之分,南北有乖,爭不便之患。臣實昏耗,未能的知處置之宜。伏惟上裁。’
약전속어일소읍,칙토양유편중부칭지분,남북유괴,쟁부편지환。신실혼모,미능적지처치지의。복유상재。’
右議政鄭昌衍議:‘臣全昧地形,難可遙斷。令本道監司,量其遠近,參以便否,啓聞然後定奪,未知如何。伏惟上裁。’
우의정정창연의:‘신전매지형,난가요단。영본도감사,량기원근,참이편부,계문연후정탈,미지여하。복유상재。’
左議政鄭仁弘榻前進啓之說,又不出於改號降縣,不使屬于高靈之意。自知不敢容議於其間,上裁施行何如?”
좌의정정인홍탑전진계지설,우부출어개호강현,부사속우고령지의。자지부감용의어기간,상재시행하여?”
傳曰: “依領,右相議施行。”
전왈: “의령,우상의시행。”
(이조가 아뢰기를,“성주(星州)를 합속시키는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해 보니,
영의정 기자헌은 의논드리기를 ‘예전에 듣기는 역적이 나온 땅이 현(縣)이면 다른 읍에 합하고,
주(州)일 경우에는 강등하여 현으로 삼았으니,근일의 서원(西原)과 충주(忠州)가 이 경우입니다.
홍천(洪川)의 경우에는 더이상 강등시킬 여지가 없으므로 춘천에 합했습니다만, 성주는 영남의 큰 고을이므로
다른 고을에 합한다면 부역 등의 일을 감축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고 또 전례도 없으니,
현으로 강등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다만 격례가 과연 신이 아뢴 바와 같은지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께서 재량하소서.’ 하였고,
영돈녕 심희수는 의논드리기를‘큰 고을을 작은 현에 소속시킨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듯하고,
주나 부를 강등하여 현감을 삼은 것은 평소의 안동,수원이나 근일의 충원,서원 등의 예가 있으니 안 될 것은 없습니다.
만약 반드시 본주를 영원히 혁파하여 다른 읍에 붙이시려면 좀 큰 지역인 대구에 붙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전적으로 작은 읍 하나에 소속시킨다면 토양이 편중되어 걸맞지 않은 점이 있고 남북이 괴리되어 다투는 불편한
근심이 있습니다.
신은 사실 혼미하여 처치할 방법을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상께서 재량하소서.’하였고,우의정 정창연은 의논드리기를
‘신은 지형에 대해 전연 어두워서 멀리서 결단하기 어렵습니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그 원근을 헤아리고
〈 사세상〉 편하고 불편한 점이 있는지를 참작하여 보고하게 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상께서 재량하소서.’ 하였습니다.
이번에 좌의정 정인홍이 탑전에서 아뢴 말도 호칭을 바꾸어 현으로 강등시키고 고령(高靈)에 소속시키지 말자는
뜻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그 사이에서 감히 의논드리지 못하겠으니, 상께서 재량하여 시행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영상과 우상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고 전교하였다.) 명정전 중건시 백관들을 참석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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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8일 경술〗맑음.
권경섭(權景涉)에게 가서 술을 마셨다.
〖초9일 신해〗맑음.
성주(星州)사람이 와서 아뢰길.고령(高靈)사람은 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관(景觀)에게 편지가 와서 경주인(京主人244)에게 빨리 출두하여 현신(現身)하기를 독촉[督現]했다.
여첨(汝瞻=李埁15)이 술을 갖고 와서 밤늦도록 얘기했다. 김참판(金參判87)도 왔다.
〖10일 임자〗맑음.
고령(高靈)사람이 와서 보이는데,그는 방주인(放主人=私主人245)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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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12월5일
하향하는 좌의정에게 궤장을 주게 하고, 감사로 하여 잘 호송하게 하다.
선수 도감에서 문정전의 원주 개조의 일에 대해 아뢰다.
의금부에서 이호민·이항복 논죄에 대해 대신과 의논한 것을 아뢰다.
光海君 7년 12월7일
좌의정 정인홍에게 궤장과 술·음악을 내리는 일로 도승지 윤선(尹銑), 주서 김구(金榘), 예조 정랑 박수서(朴守緖),
중사 최언준(崔彦俊)등이 (承命拜辭而行)명을 받들고 하직하고 떠났다.
명정전의 기둥 세우는 일이 임박하여 속히 상량문을 올리게 하다.
光海君 7년 12월8일
태백이 낮에 나타나다.
사관 추천의 일로 이조 정랑 박홍도와 봉교 윤상임이 서로 논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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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계축〗맑음.
여첨(汝瞻=李埁15)이 지나다가 들렀고, 황공직(黃公直85)도 왔다.
〖12일 갑인〗맑음.
대사간 유간(柳澗80)이 피혐(避嫌)하여 체차(遞差)되었다.
인사발령을 취품(取稟:윗사람에게 의견을 말하여 그의 대답을 기다림)했으나 아직 하교(下敎)가 없다.
〖13일 을묘〗맑음.
승문원(承文院)이 분관(分館)되어 지금은 7명뿐이다.
〖14일 병진〗맑음.
형원(馨遠=李苙),효사(孝思=李慕10) 및 한정국(韓定國),한급(韓昅)등은 모두 성균관(成均館)으로 돌아가고,
김륜(金崙)과 고부천(高傅川)은 교서관(校書館)으로 발령났다.
이는 승문원(承文院)의 점수는 다음이고,준거 점수로 인사(人事)이동을 한 까닭이다.
변무사(卞誣使)를 따라 갔던 강충립(康忠立)역관이 먼저 도성으로 들어와서 단보(端甫=許筠86)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15일 정사〗맑음.
이여첨(李汝瞻=李埁15)이 춘첩(春帖子:입춘 날 대궐 안 기둥에 써서 붙이는 주련인데 제술관(製述官)에게
명하여 하례하는 시(詩)를 모아서 연꽃 무늬의 종이에 써서 붙임)을 짓는 일로 왔다.
황공직(黃公直85)은 5언절귀(五言絶句)의 7언율시(七言律詩)를 짓고,
나는 7언절귀(七言絶句)의 5언율시(五言律詩)를 지었다.
밤에 오융보(吳隆甫=吳汝穩262)를 보러 갔더니 신응윤(申應允)과 이치원(李致遠)도 있었다.
내 5언율시(五言律詩)가 3중(三中)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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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12월9일
태백이 낮에 나타나다.
승지 임취정이 좌의정을 계속 따라갈 것을 아뢰다. 친잠 후 주연을 베풀 때 침향산 학무를 시행할 것을 전교하다.
光海君 7년 12월13일
우의정 정창연이 아홉번째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다.
날씨가 추워 의금부·전옥서의 죄인들을 구료하게 하다.
승문원에 송도남(宋圖南),이상험(李尙馦),김구(金榘),이계선(李繼先),김언(金琂),박조(朴簉),이기조(李基祚)등 급제자가
신래(新來)로 새로 들어왔다.
光海君 7년 12월14일
이병(李覮)을 대사간으로,박문준(朴文浚)을 예조 좌랑으로,이배원(李培元)을 평안 평사로,
황덕부(黃德符)를 예문관 검열로,원유남(元裕男)을 겸 분도총부 도총관으로 삼았다.
좌의정을 만나러 갔던 우부승지 임취정이 백성의 상소를 가져와 아뢰다.
비변사에서 백성 진휼하는 일에 대해 아뢰다.
이조에서 분관(分館)을 하였다.
권지 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에는 이상항(李尙恒),한급(韓昅),한정국(韓定國),박종주(朴宗胄),오익환(吳益煥),
박종윤(朴宗胤),이모(李慕),서국정(徐國楨),이립(李苙),이영식(李永式),허녕(許寗),최명헌(崔明獻),채계선(蔡繼善),
이유일(李惟一),신민일(申敏一),정립(鄭雴),나무송(羅茂松),김경후(金慶厚),오전(吳晪)이고,
권지 교서 부정자에는 조삼성(曺三省),김륜(金崙),고부천(高傅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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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무오〗맑음.
이일장(李日章164),이경문(李景文),신유성(愼惟誠),김광위(金光煒)등이 보러왔다.
달밤에 김택지(金擇之=金友益94)를 만나러 가서 들으니 여동생 상(喪)을 당했다고 한다.
황정자(黃正字=승문원 정자(正字) 황공직(黃公直)?)이 밤에 왔었는데 나를 못 만나고 그냥 돌아갔단다.
〖17일 기미〗맑음.
밤에 이일장(李日章164)이 방문했다.
〖18일 경신〗맑음.
입춘(立春).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19일 신유〗맑음.
치원(李致遠)을 만나고,또 형보(馨甫=李茳53)를 만났다.
또 이위경(李偉卿112)을 찾아 갔었으나 만나지 못했다.저녁에 안군소(安君邵=安聃壽243)가 와서 얘기했다.
〖20일 임술〗맑음.
주우(柱宇)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며느리를 데리고 왔다.
금언강(琴彦康=琴愷12),황공직(黃公直85),채낙이(蔡樂而),김중화(金仲和),박경행(朴景行),조자백(趙子百=趙錫朋60),
이치원(李致遠)등과 얘기했다. 낙이(蔡樂而)와 같이 잤다.
이형보(李馨甫=李茳53)에게 3번이나 말을 보내고 사람을 시켜서 오라고 했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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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12월16일
감사로 하여금 좌의정(정인홍)에게 음식물을 보내게 하다.
(左相處,歲時遣長吏存問,優致食物)
(좌상처,세시견장리존문,우치식물)
좌상에게 세시로 장리(長吏)를 보내 존문하고 음식물을 보내라고〈본도 감사에게 하유하라.〉
光海君 7년 12월17일
사간원에서 용인 현령 한양(韓瀁)·내자 주부 이장(李璋)의 파직 등을 청하다.
사헌부의 청에 따라 송도남(宋圖南)·이계선(李繼先)을 삭직하게 하다.
【이계선과 송도남은 이이첨의 당이 아니었고 또 다른 당도 아니어서 형세가 고립되어 약했으므로
특별히 공격해 제거한 것이었다.】
光海君 7년 12월18일
사간원의 청에 따라 동몽교관 남홍점을 파직하고 홍문록을 속히 작성하게 하다.
光海君 7년 12월20일
이호민 등의 일을 정계(停啓)하다.
光海君 7년 12월21일
홍문록 작성의 일로 해당 관원을 내일 부르게 하다.
사헌부이 대간이 아뢴 것을 감사에게 조사하도록 하는 것은 부당함을 아뢰다.
유인길(柳寅吉)을 대사헌으로,유대건(兪大建)을 승지로,이대엽(李大燁)을 응교로,박자흥(朴自興)을 전한으로,
유효립(柳孝立)을 필선으로,이정험(李廷馦)을 승지로,유충립(柳忠立)을 사인으로 삼았다.
전교하여 “병조 참판 이충(李沖)을 판윤에 제수하라.”고 하였다.
光海君 7년 12월22일
영의정 기자헌이 우의정의 출사를 기다려 같이 도당록에 참여할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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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계해〗맑음. 맑음. 인사 발령이 있었다.
이조(吏曹)에서 입계(入啓)하여 (내가)성주(星州)현감으로 바꿔서 하비(下批;단독 낙점)받았는데,
그 새로운 이름이 신안(新安)이다.
이여첨(李汝瞻=李埁15)의 영상시(迎祥詩:상서로운 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와
자백(子百=趙錫朋60)의 오언(五言絶句)를 내가 대신 지었다.
〖22일 갑자〗맑음.
사은(謝恩)을 했다.
한경서(韓景瑞)공이 나를 불러서 만나러 갔더니 황덕부(黃德符246),김잠(金埁)과 서로 만났다,
〖23일 을축〗맑음.
오봉(五峯=李好閔99)을 찾아뵈니 김창일(金昌一247),박지술(朴知述),김경선(金慶先)등이 다 모였다.
돌아오는 길에 오여용(吳汝勇)과 김도원(金道源)부자와 윤정평(尹正平)을 차례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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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12월25일
염초 비축이 우수한 안변 부사 이시발에게 가자하다. 사헌부에서 마량 첨사 이문창의 파직을 청하다.
사간원에서 과천 현감 정양의 파직을 청하다.
光海君 7년 12월27일
우의정 정창연이 열번째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에서 훈련도감 대장 변응성·청하 현감 전득우의 치죄를 청하다.
光海君 7년 12월28일
사헌부에서 호조의 색낭청·비인 현감 최영문의 치죄를 청하다.
사간원이 변응성을 잡아다 심문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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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병인〗맑음.
박경행(朴景行)이 와서 만났다.채낙이(蔡樂而)는 양주(陽州)로 떠났다.
〖25일 정묘〗맑음.
저녁에 유원숙(柳源叔=柳活43)을 만나러 가서 술 3잔을 마셨다.
이위경(李偉卿)도 와 있었다.돌아오는 길에 박경정(朴景靜=朴守謙102)을 만났다.
〖26일 정묘〗맑음.
아침에 이여첨(李汝瞻=李埁15)을 방문하고 밥을 먹고 조판서(趙判書=趙挺63)를 찾아가니
백대형(白大珩199)도 와 있어 만났다. 또 한산군(韓山君=趙振142)을 만났는데,
(퇴계선생이)떠난 시기를 삼가 밝히면서(퇴계선생의 문인인)한산군(漢山君)이 말하기를
“퇴계(退溪=李滉248)년보(年譜)중에 정미(丁未:1547년)년 8월에 응교(應敎:응교가 아니라 校理임)에 제수되었다가
12월에 사직(辭職)한 걸로 되어있던데, 봉성군(鳳城君249)을 믿었던 일로 사퇴(辭退)한 것이란 말은 잘못 같소.
봉성(鳳城君)이 9월에 복죄(伏罪: 죄상에 따라 법의 조치를 받음)되었으니 퇴계선생은
그해 8월에 사직한 걸로 해야 될 것이오. 이 한 조목(條目)은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오.
또 근년에 좌상(左相=정인홍)이 퇴계선생이 봉성군(鳳城君)의 논의에 참여했다기에
내가 모든 동각(東閣:현인을 맞이하는 작은 문) 잡기(雜記)를 고찰해보니
그 당시 논차(論箚:차자로 논한)한 사람들이 부제학(副提學)이하 모두 그 이름들이 나열해서 적혀있었으나,
퇴계선생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었소. 이로써 내 생각이 밝혀진 것이오.”라고 말한다.
또 말하기를
“정묘(丁卯: 乙卯1555년이 맞다)년에 도산서당으로 가서 정한강(鄭寒岡=鄭逑184)과 김학봉(金鶴峯=金誠一250)과 함께
생활하면서 한강(寒岡=鄭逑184)이 계몽(啓蒙傳疑251)를 배웠는데, 퇴계선생이 말씀하시길
“정모(鄭某=鄭逑184)는 침잠(沈潛: 마음을 가라 앉혀 생각을 모음)
함양(涵養:학문 견식이 차차 몸에 배도록 양성함)하는 습관이 없는 게 병통(病痛)”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네.
그 당시에 성주 사람(星人?)이 상제(喪祭)의 절목(節目)을 죽 벌려 적어서 물은 적이 있는데,
한강(寒岡=鄭逑184)의 타고난 성품대로, 마침 퇴계선생이 병이 들어 아직 답을 못하고 있자,
한강(寒岡)이 스스로 빠진 글자를 보충해서 답사를 써 주었는데, 내가 웃자, (寒岡은)이미 떠나가고,
학봉(鶴峯+金誠一250)이 말하길,
“우리들이 친구를 대함에 성의가 없었습니다.모야(某也=鄭逑184)의 일은 심히 잘못되었어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입니다.”
즉시 책망하는 편지를 써서 달려가니 한강(寒岡)이 10리 밖에서 그 편지를 보고 즉시 감복하여
허물을 고침이 이처럼 빨랐다[如流]”고 말했다.
〖27일 기사〗맑음.
서경(署經252)을 마쳤다.
사헌부 집의(執義) 손척(孫倜1)과 지평(持平) 조국빈(趙國賓108)에게 서지(署紙)를 돌려보냈다.
〖28일 경오〗맑음.
영의정(領相=奇自獻5)과 우의정(右相) 심일송(沈一松=沈喜壽253)댁에
투자(投刺:명함을 내 놓아 면회를 신청하는 일)했더니 모두들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조판서(吏判)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명함만 두었고, 이조참의(吏議)는 첩의 집으로 이사 갔다고 했다.
조국이(趙國耳)를 만났고,
이조참판(吏參=柳夢寅89)은 병이 나서 만나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약(柳瀹114)이 나와서 만났다.
그리고 이상(貳相)박홍구(朴弘耈65)를 만나서 도배(桃杯)술잔으로 5순배를 마시고,
조대이(曹大而)공을 만나 한 잔 마셨다.
정규(鄭逵254)를 만났고,
참의(參議) 유간(柳澗80)을 만났지만 그의 아들인 여항(柳汝恒13)은 술병이 났다고 해서 못 만났다.
낮 동안에 영상(領相=奇自獻5)을 만나고,
저녁에 김참판(金參判=金尙雋255)과 지사(知事=金相容78)가 만나자고 해서
송별연에 그의 아들인 광위(金光煒)와 이여첨(李汝瞻=李埁15)이 같이 참석해 얘기했다.
〖29일 신미〗맑음.
노득준(盧得俊)과 정행지(鄭行之)를 만나고 예판(禮曹判書=李爾瞻49)에게 투자(投刺)했더니 병을 핑계로 못 만나고
그의 아들인 문보(文甫)대엽(李大燁42)이 나와서 맞이한다.
홍문관의 익엽(李益燁256)은 명함만 넣어두고 이미 오래되어 되돌아 나왔다.달려서 돌아오니 내가 젖었다.
정이지(鄭履之)를 만났고, 이어서 이중인(李仲仁)을 방문했지만 못 만났다.
박홍도(朴弘道14)네 집에 가서 만나고, 한정국(韓定國9)에게도 갔었다.
저녁에 손집의(孫執義=孫倜1)를 가서 방문했으나 이위경(李偉卿112),박자정(朴子挺),
박정길(朴鼎吉4)은 다 만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형보(馨甫=李茳53)을 만나러 가니 정국(韓定國9)이도 거기 있었다.
들으니 임금이 시상(施賞)에 관한 규정대로 상(賞)을 주라고 해서
전한(典翰)박자흥(朴自興75),직제학(直提學)유희발(柳希發71),사복시정(司僕寺正)희량(柳希亮73),
영천군수(永川郡守)남벌(南橃257),사인(舍人)정호선(丁好善258),흥해군수(興海郡守)
호관(丁好寬259)이 통정대부(通政大夫255)에 올랐고,경승(朴敬承=朴守緖16)은 예조좌랑(禮曹佐郞)의
은혜를 입어 가자(加資)되었다고 하기에 밤에 이치원(李致遠)과 같이 가 보았다.
정경임(鄭景任)과 박경정(朴景靜=朴守謙102)이 와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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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12월29일
고명을 받든 내관·예조 당상 등에게 가자하다. 역옥 추국의 공로자에게 차등있게 포상하다.
화기 도감 도제조·제조 유근 등에게 포상하다. 부묘 도감 도제조·제조 이상의 등에게 포상하다.
장악 도감 도제조·도청 조명욱 등에게 포상하다. 비변사로 하여금 서북의 오랑캐에 대비하게 하다.
역적의 집안을 잘 살피도록 의금부에 전하게 하다. 이명·정세미·이준상을 풀어주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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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공13세손 김 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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