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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서 남창 한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野丁
5, 諸葛亮이 농사를 지은 까닭은?
三顧草廬의 현장을 찾아서 ⑤
20세기 한국에서 출판된 책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것이 이문열의 “삼국지”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1988년에 출판된 이 책은 10년간 자그마치 1,130만권이 팔렸고 10년간의 인세만도 40억원쯤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삼국지”란 도대체 무엇인가? 20년간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인기작가인 이문열 때문인가? 그러나 그의 대표작 “젊은 날의 초상” 등은 각 100만권이 팔렸지만, 그의 전공이라고 할 수 없는 “삼국지”는 1,000만권이 넘게 팔렸다니 가공할 판매부수인 것이다. 이런 판매량 뒤에는 대학입학시험에서 논술이 중요해지면서 그 바람을 타고 청소년의 필독서처럼 되었다는 시류 혹은 이문열의 독특한 문체, 즉 설화적인 “삼국지”에 소설적인 그리고 비평을 가미한 그의 능력에 기인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팔려도 너무 많이 팔렸다. 평생 큰돈 구경 제대로 한번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문열에게 내 전공을 빼앗긴 피해의식에 젖어들곤 하여 꼭 섯다판에 곁다리로 끼어든 친구에게 전 재산을 다 잃어버린 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괘씸하기 짝이 없다. 봉급이라고 해야 병아리 눈물만큼이어서 마누라 덕분에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허울뿐인 서울대 교수직을 집어던지고 나의 전공을 찾아 당장 “박한제 삼국지”를 쓰고 싶으나 가만히 따져보니 그럴 시기가 아닌 것이 분명한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사람에게는 운때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거작 “박종화 삼국지”가 나온 지 20년만에 “이문열 삼국지”가 나와 10년간이나 그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가만히 따져 보니 그 터울이 20년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독자들이 “이문열 삼국지”에 식상할 시기가 대강 내가 교직에서 정년할 즈음인 것 같으니….
“삼국지”란 원래 서진(西晉)시대 역사가인 진수(陳壽 233∼297)가 쓴 위·촉·오 삼국의 역사서다. 일반 독자들이 주로 접하는 책은 진수의 정사(正史) “삼국지”가 나온 지 1,000년이 지난 14세기 중엽, 원말(元末) 명초(明初)의 소설가인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다. ‘연의’란 ‘의의를 풀어낸다’는 뜻으로,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를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 쓴 것이다. 정사 “삼국지”를 읽지 않고 “삼국지연의”만 읽은 독자들은 유비와 관우·장비 그리고 제갈량이 이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 간 주역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많다. 사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근래 조조에 대한 재평가 운동이 일어나 그 평가가 약간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이런 현상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정사 “삼국지”보다 훨씬 많이 읽혔다는 이야기일 터이지만, 정작 나관중은 어느 시대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그 생애마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베일에 쌓인 인물이다. 이 책을 써냄으로써 후세에 원저자인 진수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그 책을 내 인세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삼국지”로 횡재한 사람은 아마 이문열 한사람 뿐 아닌가 한다.
“삼국지”의 배경이 된 삼국시대는 통일왕조였던 후한(後漢)왕조가 황건적(黃巾賊)의 난으로 혼란에 빠지자 각처에서 일어난 군벌들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황제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온갖 지혜를 동원해 경쟁을 벌이는 영웅의 시대였다. “삼국지”하면 독자들이 느끼는 몇 차례의 모멘트가 있다. 유비와 관우·장비가 의형제를 맺은 도원결의(桃園結義), 조조군이 원소(袁紹)의 대군을 격파한 관도지전(管渡之戰), 유비가 제갈량을 찾은 삼고초려(三顧草廬), 4만명의 오·촉 연합군이 80만명의 조조군을 괴멸시킨 적벽대전(赤壁大戰), 사마의(司馬懿)의 계책에 의한 맥성(麥城)에서의 관우(關羽)의 죽음,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유비가 치른 이릉지전(夷陵之戰), 백제성(白帝城)에서의 유비의 죽음과 유촉(遺囑), 제갈량의 북정(北征)과 출사표(出師表) 그리고 오장원(五丈原)에서의 그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삼고초려는 인재 초빙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지금도 상용되는 말이다.
도원결의(桃園結義)
‘관도의 전쟁’ 이후 원소를 떠났던 유비는 지금의 하남인 여남(汝南)에서 조조에게 다시 패한 후, AD 201년 동족으로 명망가였던 형주(荊州) 군벌 유표(劉表)에게 투신했다. 유표는 내심 유비를 경계해 형주의 북쪽 요충지인 신야(新野)로 보내 조조에게 대항하는 최전선을 방어하도록 했다. 남양(南陽)에서 70km 떨어진 신야는 남양분지의 남부로, 당시 형주 세력권에 속해 있었다. 마침 조조는 원소의 잔존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북방쪽에 신경쓰고 있었으므로 남하하여 형주를 공격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 유비에게는 다행이었다. 유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야에서 널리 인재를 모집하고 군용을 가다듬어 정권 건립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관우·장비와 같은 날쌘 장수는 확보하였으나 지략이 풍부한 참모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 곁에 있던 모사의 한 사람인 서서(徐庶)가 제갈량을 추천하였다. 그는 제갈량을 얻는 것은 주(周)나라가 여상(呂尙·太公望)을 얻고 한(漢)나라가 장량(張良)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또 양양의 명사인 사마휘(司馬徽)도 제갈량이 춘추전국시대 제(齊) 환공(桓公)을 보좌하여 패업을 이룬 관중(管仲)이나 연(燕) 소왕(昭王)을 도와 강국 제나라를 물리친 악의(樂毅)보다 더 뛰어나 굳이 견준다면 ‘흥주(興周) 팔백년의 강자아(姜子牙·呂尙 太公望)와 왕한(旺漢) 사백년의 장자방(張子房·張良)’이라 하였다. 모두들 제갈량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인재가 아니어서 그냥 부른다고 해서 올 사람이 아니니 공손하게 친히 가서 청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聖經” 다음으로 많이 팔린 “三國志”
제갈량(181∼234)의 자는 공명(孔明)으로 원래 산동 낭야군(琅邪郡) 양도현(陽都縣)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諸葛珪)와 어머니를 잃고 숙부(諸葛玄)를 따라 형주 지역으로 피난해 있었다. 17세 되던 해에 숙부가 죽자 몇채의 초려(草廬)를 짓고는 농사를 짓는 한편 친구와 만나 교류하면서 천하사를 담론하고 있었다.
유비가 제갈량이라는 당대 최고의 전략가를 얻기 위해 관우·장비를 대동하고 세차례나 그의 초려를 방문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제갈량은 유비의 예우에 감동한 나머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천하통일을 위한 계책을 제시한다. 이것을 ‘융중대’(隆中對) 혹은 ‘초려대’(草廬對)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탁(董卓)이 낙양에 진격해 들어온 이후 천하군웅이 각처에서 일어나 그 세력이 주(州)와 군(郡)에 걸쳐 있는 자만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조조를 원소(袁紹)와 비교하면 명망도 낮고 병력도 적지만 결국 원소를 타파한 것은 그의 지모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조조가 100만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면(挾天子而令諸侯) 그와 다툴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손권(孫權)은 장강의 천험(天險)에 기대어 있은 지 3대가 지났으니 백성들이 그에게 귀부하고 있고 재사들도 그가 힘을 발휘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와 연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를 타파하기는 어렵습니다. 형주의 지세는 험요하여 북에는 한수(漢水)가 있고, 남으로 남해와 통하고, 동으로 오회(吳會)와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는 파촉(巴蜀)에 도달할 수 있으니 이곳은 군대를 일으킬 만한 지방입니다. 그러나 형주의 주장 유표는 이 지방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이 지방을 장군에게 주는 것이니 유표를 대신해 이 땅을 차지하십시오. 또 익주(益州)는 이수난공(易守難攻)의 천연요새이고 토지가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니 종래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는 칭호가 있었습니다.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이곳을 근거로 하여 끝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했습니다. 장군께서 만약 형주를 선점하시면 이곳을 바탕으로 유장(劉璋)의 익주를 취하고 힘써 정치를 하여 국력을 충실히 한 연후에 손권과 연합하고, 서남 각 민족과 결호(結好)한 연후에 시기를 기다려 중원으로 발전하면 통일천하의 대업을 성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
그 대책의 내용은 곧 북으로는 조조에게 양보하여 천시(天時)를 차지하게 두고, 남으로는 손권에게 양보하여 지리(地利)를 차지하게 하고, 유비는 인화(人和)로형주를 취하고 뒤에 서천(西川·益州)를 취하여 조조·손권과 더불어 정족(鼎足)의 형세를 이룬 연후에 중원을 도모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유비는 그의 대책을 듣고 그 내용이 투명철저하여 자기를 도와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제갈양은 유비의 행동에 감격한 나머지 “장군께서 이다지 나를 대우해 주니 적은 힘이나마 다하여 장군을 돕겠습니다” 하고 산을 나와 유비를 따라 신야에 도착했다.
당시 제갈량이 몸소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던 초려가 어딘가 하는 것, 즉 궁경지(躬耕地) 문제가 현재 중국 사학계에서는 중요한 논쟁거리로 되어 있다. 사실 이 논쟁은 이미 원대(元代)부터 시작된 것이어서 최근에 비롯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논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논쟁의 초점이 되는 곳은 현재의 하남성 남양(南陽市 臥龍崗 武侯祠)과 호북성 양번(襄樊)의 고융중(古隆中)이다. 즉, 궁경지가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남양군 소재지인 완현(宛縣·남양시 서남)인가 아니면 남양군 등현(鄧縣) 융중(隆中·양번시 양양 융중)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남양은 현재 하남성 서남부에 위치하여 호북(湖北)·섬서(陝西) 두 성과 접경하고 있다. 독산옥(獨山玉)의 명산지로서 전국 4대 명옥 산지로 유명하다. 남양시는 완성(宛城)이라 칭해지기도 하며 진한(秦漢)시대 이후 남양군의 중심 도시였다. 후한 창업주 유수(劉秀)가 여기서 기병하여 낙양에 도읍을 정한 이후 남양은 남도(南都) 혹은 제향(帝鄕)으로 칭해졌으며, 당시에는 상업과 문화가 최고의 번성을 누려 전국 2대 중심 도시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남양의 와룡강은 당대에 무후사가 세워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승지가 되었다. 반면 호북성 북서부에 위치한 양번은 장강 최대의 지류인 한수(漢水 혹은 沔水·북방인들은 한수를 면수라 부르고, 남방인들은 한수라 부른다. 혹은 삼국 이전에는 면수라 불렀고, 삼국 이후에는 한수라 칭하는 경우가 많다)의 중류에 위치하여 강 남쪽의 양양(襄陽)과 북쪽의 번성(樊城)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합쳐 만들어진 고도이다. 남서쪽에는 산이 있고 북동쪽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옛부터 남북 교통의 중요한 길목으로 병가필쟁(兵家必爭)의 땅이었다.
중국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전개 상황에 무지했던 필자는 1995년 호북성 양번에서 열린 ‘중국위진남북조사국제학술토론회’에 참석하여 뜻하지 않은 일을 접하게 되었다. 국제학술토론회라고 해도 중국·한국·일본 학자들이 참석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중국 학자 4명과 일본 학자 2명 그리고 필자가 이 문제를 두고 이른바 ‘기자회견’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다. 이 회견은 당시 거시적으로 국제회의를 마련한 양번시측에 의해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다. “양번일보”(襄樊日報)와 “호북TV방송”(湖北電視臺) 양번분국의 기자 앞에서 나는 이런 민감한 질문을 받게 되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모두 양번의 융중이 제갈량의 궁경지라는 주장에 찬동하고 나섰다. 이런 조작된 분위기를 보면 갑자기 불끈하는 고약한 버릇을 가진 나는 주체측이나 기자들이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답변을 하게 된 것이다.
“제갈량의 궁경지가 어디인가가 뭐 그리 중요한가. 그 문제는 잘 살펴보아야 할 일이지만, 중국인들이 역사적 진실에 의거하지 않고 지역적 자존심에 근거해 학자들을 동원하여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는 좀 곤란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이다.”
기자들의 의아해하는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이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한 양양사범전문학원(현재는 양번대학)의 삼국사 전문가인 Y교수의 난감해 하는 모습이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그날 저녁 텔레비전 뉴스에는 다른 학자들의 인터뷰는 방영되었으나 나의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울러 다음날 “양번일보”에도 필자의 발언은 소개되지 않았다. 더욱 기막힌 것은 고융중 앞에서 찍은 전체촬영에서 나는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된 것이다. 몇차례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한국 대표로 지정하고는 꽃을 달아주고 제일 앞줄의 의자에 앉히던 대접은 사라지고 일반 참석자와 같이 제일 뒷줄에 서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괘씸죄를 범한 나에 대한 의도된 보복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내가 굳이 챙겨 대접할 만한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했다.
사실 나는 당시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바도 없었던 데다가, 최근 논문을 작성하면서 중국인들이 사리에 맞지 않는 이유를 대면서 역사상의 유명한 인사를 특정지역과 연관시키려는 작태를 발견하고는 고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현상을 ‘명인효과’(名人效應)라 한다. 근래 개혁 개방(改革開放) 이후 경제의 급속한 발전 결과 나름으로 여행사업(旅游業)이 흥성하다 보니 기존의 특정 명인들과 연관된 명승고적지를 정사(正史), 야사(野史), 필기소설(筆記小說) 혹은 민간전설(民間傳說) 등에 근거해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각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열기를 띠는 논쟁만 열거해도 ‘편작(戰國시대의 名醫)의 보적이 어디인가 하는 논쟁’(扁鵲籍貫之爭), ‘동윤(三國시대 蜀人으로 北征時 제갈량이 추천한 자)의 옛집이 어디인가 하는 논쟁’(董允故居之爭), ‘서시(春秋시대 越의 미인으로 吳王 夫差의 寵姬)의 고향이 어디인가 하는 논쟁’(西施故里之爭) ‘방연(戰國의 兵家)이 잡혀 자살한 지점이 어디인가 하는 논쟁’(擒龐涓地點之爭) 등이 그것들이다.
궁경지 논쟁은 지역이기주의의 대표적 산물
나는 2,000년 1월21∼23일 양번과 남양 두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제갈량의 고거에 대한 나의 ‘이고초려’(二顧草廬)인 셈이었다. 북경에서 출발하여 무한∼형주로 남향하던 나는 형주를 기점으로 방향을 북쪽으로 틀었다. 전날 묵었던 형주빈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형주∼양번의 길에도 무한∼형주에서의 그것처럼 우리나라 금호고속(株)에서 마련한 호화버스인 한광고속(漢光高速)버스를 탔다. 장거리 버스여행을 하다 보면 괜히 화장실 걱정을 하는 필자인데, 이 버스에는 상냥한 안내양과 화장실이 있는 것이 이 문제를 다룬 사료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 서진(西晉) 시대 왕은(王隱)이 지은 “촉기”(蜀記)와 동진의 습착치(習鑿齒)가 쓴 “한진춘추”(漢晉春秋·後漢 光武帝부터 西晉 愍帝까지 281년간의 역사서. 54권. 청대에 일부분이 수습되었다) 등인데 이들은 약간 다른 내용을 싣고 있다.
“촉기”에는 ‘진 영흥(304~306)중에 진남장군 유홍이 융중에 이르러 (제갈)량의 고택을 보고 … 면수의 북쪽에…’(晉 永興中 鎭南將軍劉弘至隆中 觀亮故宅 …. 於沔水之陽)운운하고 있고, “한진춘추”에는 ‘(제갈)량의 집은 남양의 등현으로 양양성의 서쪽 20리에 있고 (그 지역을) 융중이라 한다’(亮家于南陽之鄧縣 在襄陽城西二十里 號曰隆中)고 기재되어 있다.
6세기 초에 편찬된 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 권 28 ‘면수’에서도 ‘면수는 다시 동쪽으로 흘러 융중을 통과하여 공명의 옛집 북쪽을 거쳐간다’(沔水又東逕隆中 歷孔明舊宅北)고 되어 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165에서도 ‘옛날 낭야 제갈량이 양양 융중에 우거하고 있었다’(初 瑯邪諸葛亮寓居襄陽隆中)고 되어 있다. 이것들을 정리하면 제갈량 사후 50여년 후인 서진시대부터 송나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쓰여진 사서에는 제갈량의 궁경지는 양양 융중이고, 그곳은 행정적으로 당시 남양군 등현에 속해 있었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양번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도 눈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다. 융중은 양양 서쪽 13㎞ 지점의 조용한 산 속에 있다. 양번대학 교문과 융중의 패방(牌坊)은 길을 사이로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있다. 양번대학 학술교류중심에 짐을 풀고 Y교수에게 전화를 하니 반색이다. 이미 북경의 역사연구소 L씨가 우리가 올 것이라고 전화해 주었단다. 9시40분 형주발 고속버스를 탔지만 벌써 날도 어둡다. Y교수는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모든 일정은 자기에게 맡기란다. 내년이면 60세 정년을 맡는 노교수의 이런 대접에 우리는 황송하여 말렸으나 별 수가 없었다. 이튿날 오전 학교에서 내준 미니버스로 시내관광을 끝낸 후 오후 융중을 답사하게 되었다. 융중의 입구에 세워진 패방에는 ‘고융중’(古隆中)이라는 세 글자가 커다랗게 세로로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두보의 싯귀가 가로로 문 양편에 새겨져 있다. 내가 고등학교 학생시절 사용한 국어 교과서에 실린 ‘두시언해’ 중 ‘촉상’(蜀相)의 일부분이라 옛 고등학교 시절이 문득 떠올라 읊조려 본다.
‘세번 돌아봄을 어지러이 함은 천하를 위하여 헤아림이니’(三顧頻煩天下計)
‘두 조를 걸침은 늙은 신하의 마음이로다’(兩朝開濟老臣心)
이곳에는 소위 ‘융중 10경’이라는 것이 있다. 양번대학 관광학과(旅游系)를 졸업한 Y교수의 제자인 W양이 가이드(導游)가 되어 우리를 안내하고 Y교수가 보충설명을 곁들인다. 제갈량은 유비의 부름을 받기 전에 이 산 속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 명사 방덕공이 그를 ‘와룡’(臥龍)이라 불렀는데 명대에 세워진 초려비에는 전면에 ‘초려’, 후면에는 ‘와룡처’(臥龍處)라는 큰 글씨가 쓰여져 있다. 즉, 제갈량이 거주했던 곳이라는 의미다.
‘위장취업’으로 ‘때’를 기다린 제갈량
습착치가 쓴 “양양기”(襄陽記)에 나오는 제갈량의 집 우물인 육각정(六角井)도 있다. 그리고 궁경전(躬耕田) 옆에 궁경정(躬耕亭)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안에 청(淸) 강희(康熙·1662∼1722)시기에 세워진 비가 있다. 이 비에는 ‘제갈량의 궁경전은 160무(畝)였는데 현재는 약 20무만 보전되고 있다’고 되어 있다. Y교수는 실제로 궁경지는 현재 양번대학 부지일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말한다. 1995년 학회 참석 때는 9월 초순이라 당시 40년만에 찾아온 늦더위에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여 가이드의 설명보다 그늘만 찾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대로 공부를 한 셈이었다.
양번에 온 목적은 달성하였으니 다음 방문지는 남양이다. 양번에서 남양은 열차로 2시간 거리지만, 버스로는 3시간여가 걸린단다. Y교수가 굳이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북경 L씨와 통화했는데 요즈음 ‘차비’(車匪·차를 노려 금품을 뜯는 비적)가 득실거리니 아무래도 동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형주에서 양번으로 오는 길에 차비를 만났다. 양번 시역(市域)에 들어서자마자 차가 몇십대 밀려 있었다. 알고 보니 앞서 가던 어떤 차가 횡단하던 동네 사람 두사람을 치고 달아난 것이었다. 유족은 시체 옆에서 울고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든 차를 가로막고 통행세를 징수하는 것이었다.
시간은 지체되었지만 이런 중국의 현실을 목격하게 된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남양으로 가면서 실제로 이용한 차량은 버스가 아니라 열차였다는 점에서 Y교수의 배려는 반드시 우리의 안전과 직결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Y교수가 베풀어 준 깊은 후의에 감사해 마지못하는 우리로서는 그런 것을 의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Y교수와 함께 8시50분발 열차를 타고 남양역에 도착하니 10시50분이었다. 남양 와룡강 무후사(武侯祠) 박물관 Z관장과 젊은 여자 복무원이 차를 갖고 대기하고 있었다. Z관장은 이미 두차례나 만난 적이 있는 구면이다. 중국인들은 잘 알다시피 먹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궁경지도 식후경’인 셈이다.
와룡강은 남양시 옛 성내에서 서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지만 지금은 시내에 있다. 남양 와룡강의 유적도 제갈량의 고사에 나오는 그대로 복원해 두고 있어서 양양 융중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산문(山門)에는 ‘천고인룡’(千古人龍)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한소열황제삼고처’(漢昭烈皇帝三顧處)라고 쓴 석문을 지나면 소나무와 측백나무에 뒤덮인 건축물들이 집중되어 있다. 대배전(大拜殿)·초려(草廬)·삼고당(三顧堂) 등 소위 ‘와룡십경’이다. 무후사 건물 안팎으로 편액(扁額·가로로 거는 액자)과 영련(楹聯·기둥에 붙이는 글씨첩)들이 그득하다. 눈에 띄는 것은 벽면에 붙어 있는 300개가 넘는 비석편들이다. 대부분 제갈량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쓰여진 글들이다. 간혹 이곳이 제갈량의 궁경지임을 나타내는 글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송나라의 민족영웅 악비(岳飛·1103∼1142)가 이곳 무후사에서 눈물을 흘리며 썼다던 전후 두개의 “출사표”(出師表)에 대한 제발문(題跋文)이다. 당시 북방 이민족인 금(金)나라가 침입하여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악비는 군대를 이끌고 분전하여 이 지역 양양·신야 등 6군을 회복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화의파(和議派) 진회(秦檜) 등의 무리가 주전파(主戰派) 악비의 군사행동을 막으려고 그에게 누명을 씌웠다. 악비는 이런 상황을 제갈량이 여섯번이나 기산(祁山)으로 나아가 위군을 공격하여 연전연승하고 있는데 오히려 후주 유선의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고 승리를 눈앞에 둔 채 퇴군하여 촉한이 잃어버린 중원땅을 회복할 수 없는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된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악비는 제갈량의 두 출사표의 말미에 당시의 심경을 토로하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우리의 산하를 돌려다오’(還我河山)란 커다란 글씨를 써서 후세에 남겼던 것이다. 남양에서는 이 출사표와 악비의 제발문 등을 들어 이쪽이 궁경지의 본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Z관장은 나에게 “박선생은 역사학자로서 객관적 입장에 서 주기를 바란다”는 말로 압박한다. 참관이 끝나자 차가 준비된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Z관장이 세권의 책을 내놓는다. 그 가운데 두 책은 이미 Z관장이 서명하여 나에게 준 책이어서 나의 연구실에 소장되어 있었다. 양번으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Y교수에게 이미 두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했더니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지만 서로 상대편에서 출판한 책을 보지 않고, 또 서로 교환하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응접실에서 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나중에는 학문 외적인 것으로까지 옮아갔다. 최근 대부분의 학자들이 양번 융중을 궁경지로 보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던 Z관장은 호북성이 최근 들어 경제발전으로 성세(省勢)가 부유해지자 학자들을 돈으로 매수하고 있다고 했다. 논쟁이 뜨거워지면 언쟁이 되고, 더 심하면 욕설이 오가는 법이다. Y교수는 우리를 동행하면서 “양측은 관점은 다르나 관계는 좋은 편”이라고 했는데, 나의 뜻하지 않은 방문으로 이들 양측의 관계가 나빠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토론을 중지시켰다. 역시 이 문제는 양측이 양보하기 힘든 문제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남양측의 주장은 왕은의 “촉기”와 “한진춘추” 등의 사료는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수경주”는 믿을 수 있는 전적이지만, 그것도 삼고초려의 시대로부터 3세기가 지난 시대에 나온 자료여서 그 관련 부분을 그대로 믿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남양설의 주된 논거가 되는 것은 이백(李白)·두보(杜甫)·유우석(劉禹錫) 등 당대 시인들의 시 속에 나오는 제갈량의 10년 은거지에 대한 기술이다. 예컨대 유우석의 ‘누실명’(陋室銘)에는 ‘남양에는 제갈의 집이 있고 서촉에는 자운(揚雄)의 정자가 있다’(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라 한 것을 볼 때 남양이야말로 궁경지라는 것이다. 사료보다 시와 같은 문학작품을 중시하는 것은 좀 궁색하다는 느낌이다. 남양측의 주장 가운데 그런 대로 설득력 있는 논거는 현재의 융중이 후한말 당시 남양군 등현에 속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즉, 현재의 융중은 한수 이남에 있어 진한시대 남양군은 한수 이북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남양군 등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양측에서는 강이란 항상 흐름이 바뀌는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했지만 사실 양양설의 가장 큰 약점은 여기에 있다.
후한시대 남양군은 매우 큰 군이었지만, 당시 남양군의 대부분의 영역은 면수 이북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현재의 융중은 면수(한수) 이남에 위치해 있다. 군(郡)이나 주(州) 등 지역구분의 경계는 산이나 강 등 자연적인 것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융중이 후한대의 남양군 등현에 속했다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남양 와룡강의 무후사에는 면수를 경계로 남양군과 남군을 나눈 지도를 만들고 현재의 융중을 남군에 소속시키고 있다.
이 궁경지 문제를 두고 여러 차례 학술회의가 열렸는데, 그 가운데 저명한 역사지리학자이며, “중국역사지도집”의 편찬자인 상해 복단대학 담기양(譚其塗) 교수가 내린 결론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제갈량이 남양군 등현의 융중에서 몸소 농사를 지었으니(그곳은) 양양성 서쪽 20리에 있었다. 북주시대에 들어 등현을 없앴다. 이 이후에 융중은 마침내 양양에 속하게 되었다. 1990년 3월 담기양’(諸葛亮躬耕於南陽郡鄧縣之隆中在襄陽城西二十里北周省鄧縣此後隆中遂屬襄陽- 1990年 3月 譚其塗)
양양 융중에는 이 문구를 크게 새긴 비를 세워두고 있다. 담기양은 현재의 융중은 북주시대까지는 남양군 등현에 속하였지만 이후 등현이 없어지고부터 양양현에 속하게 되었다고 정리한 것이다.
양번 vs 남양
제갈량의 궁경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은 원조(元朝)때부터였다. 육조(六朝)에서 당송(唐宋)까지의 사료 가운데에서 남양이 궁경지라고 보는 것은 없다. 현재의 남양시내가 와룡강, 즉 남양 완현(宛縣)이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원조(元朝)에 들어 “남양현지”(南陽縣志) 및 “남양부지”(南陽府志)가 출현함으로써 개시된 것이다. 원조에 이르러 이런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북방 이민족의 침략으로 화북 땅을 빼앗기고 강남에 우거했던 남송의 입장이 촉한과 비슷한 데 이를 계기로 주희(朱熹)를 비롯한 이학가들이 촉한을 존숭하고 아울러 제갈량을 유가 이상정치의 모럴인 왕도를 실행한 하·은·주 삼대(三代)의 명상 부열(傅說)과 강태공에 비견하는 과정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제갈량의 활동무대가 된 곳에 사당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양양·남양 두곳에 궁경지 유적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특히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남양에서 몸소 농사를 지었다’고 하였지, ‘남양 등현 융중’이라는 구체적 언급이 없는 점이 궁경지로서 남양이 출현하게 된 사유다.
양번측의 주장은 남양측에 비해 구체적이다. 제갈량의 궁경 10년 동안 사귀었던 사우(師友), 예컨대 서서·최주평(崔州平)·석광원(石廣元)·방통(龐統)·마량(馬良)·및 사마휘(司馬徽)·방덕공(龐德公)·황승언(黃承彦) 등이 양양 혹은 양양지구에서 활약했던 인사들이고, 제갈양 본인은 양양의 명사인 황승언의(추녀로 이름난) 딸을 아내로 삼았을 뿐 아니라, 큰 딸은 양양의 대족(大族) 괴기(剌祺)의 아내가 되었고, 둘째 딸은 방덕공의 아들 산민(山民)의 아내가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제갈량이 현재의 남양, 즉 당시 완현에서 궁경하고 있었다면 양양과의 거리는 120km나 되는데 그 거리는 보행일 경우 3일, 왕복에 6일(혹자의 주장은 4일)이 걸린다. 친구를 만나고 구학(求學)을 위해 6일이나 걸리는 길을 오고간다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닌데, 이렇게 빈번하게 접촉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또 유비가 있었던 신야에서 제갈량이 있던 양양의 융중까지는 약 60km로서 그 거리가 그리 멀지 않지만 신야에서 남양까지는 70km로 먼 곳이라 하루에 왕복하기가 어려운 거리다. 당시 남양은 장수(張枯)·조조·유표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른 지역이었는데 이런 정황 하에서 제갈량이 한가로이 농사나 짓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현재 중국 역사학계 대부분의 학자들이 양양의 융중을 궁경지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곽말약(郭沫若)이 쓴 “중국사고”(中國史稿)(북경, 인민출판사, 1979)를 제외한 대부분의 개설서에서 양번 융중이 제갈량의 궁경지라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국무원의 건설부 및 문화부가 비준 공포한 문건(國發 1986-104호 및 1994년 4호)도 양번 혹은 융중을 ‘중점문화명성’(重點文化名城) 내지 ‘중점국가급중점명승구’(重點國家級重點名勝區)로 지정하고 있다. 남양측에 가장 아픈 부분은 같은 하남성에 소속돼 있는 정주대학 G교수와 하남대학 Z교수 등 두 사학계의 원로가 양번측에 가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학계 및 국가기관에서 양번 쪽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 현재까지의 대체로 본 경향이다.
그러나 제갈량의 궁경지가 양양 융중이라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오랜 친구인 북경사대 C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사료인 “삼국지” 제갈량전 주에 인용된 왕은의 “촉기”에 나오는 이흥이 찬한 ‘제갈승상고택갈표’(諸葛丞相故宅碣表)에 서는 제갈량의 고택을 ‘면지양’(沔之陽)으로 쓰고 있다. 고전의 용례로 볼 때, 양(陽)이란 ‘물의 북, 산의 남(水之北 山之南)’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면수 이남에 위치한 현재의 융중은 고택의 위치로 부적당하다. 당대에 편찬된 지리서인 “원화군현도지”(권 21 襄陽縣條)에는 면수 대신 양양현 서쪽 11리에 있는 만산(萬山)을 등현과 양양의 분계선으로 잡고 있다. 명 만력시기에 나온 “양양현지”에도 ‘만산 서쪽 한수 이북은 남양 등현의 관할이다’(萬山以西 漢水以北爲南陽鄧縣所轄)라 하고 있다. 그런데 습착치가 ‘양양성 서쪽 이십리에 융중이 있다’고 했으니, 당시의 융중은 면수 이북의 어느 지점으로 보아야 한다. 현재의 융중이 궁경지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남양의 와룡강이 궁경지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양번시 경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현재의 융중은 아니다. 현재의 융중은 강희년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필자도 이 해석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융중에 가면 명 양양왕(襄陽王) 주첨선(朱瞻礪)의 묘가 경내 육각정 바로 뒤에 있는데 그곳이 만약 제갈량의 궁경지였다면 그곳에 묘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청대 호북 사람인 고가형(顧嘉勾)이 남양 지부(知府)로 취임하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공명이 은거한 곳이 양양이냐, 남양이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마음은 조정에 둘 뿐, 본래 선주·후주를 구별하지 않았으니(心在朝廷 原無論先主後主) 이름이 천하에 드높으니 양양이냐 남양이냐를 굳이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名高天下 何必辨襄陽南陽)” 라 하였다. 그의 응대는 이렇게 절묘했다. 이 글귀를 남양 와룡강 무후사 앞에 걸어 둔 반면, 양번 융중에는 걸려 있지 않은 것이 이 논쟁에 있어서 우열의 현주소이다.
제갈량은 중국인, 아니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는 왜 10년이나 농사를 지었던 것인가? 1991년 여름방학 중 나는 당시 대학생 연수단 인솔교수의 한 사람으로 중국에 갔다.
귀국 길에 북경 남부 비내리는 남원(南苑)비행장에서 산동성 위해(威海)로 가는 프로펠러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게 비가 그치기를 하루 종일 기다린 적이 있다. 그 비행장 대합실에서 단 한장밖에 남지 않은 제갈량 화상 그림을 두고 같이 동행한 시내 K대 교수와 서로 사겠다고 작은 승강이를 벌였다. 전공 때문에 나에게 양보하라고 했지만, 그는 중학교 시절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면서 나에게 양보하기를 강요했다. 결국 내가 포기하고 말았지만, 제갈량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슴 속에도 이렇게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가 이렇게 제갈량에 매료된 것은 사실 송대 이후 역사가 혹은 소설가들에 의한 과대포장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물론 제갈량의 군사전략가로서의 탁월한 능력 혹은 흔히 평가되듯 ‘하·은·주 3대 이후 가장 위대한 재상’(三代下一人)으로서의 면모가 전혀 사실과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작금 그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궁경지 논쟁도 따져 보면 허상을 뒤쫓고 있는 기분이다. ‘제갈량의 고거’ 정도면 몰라도 굳이 ‘궁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본말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몸소 농사를 지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가 농사를 어디서 지었는가가 그렇게 중요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가 농사지은 것은 일종의 ‘위장취업’이었다. 즉, 강태공이 낚시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 현실정치에 더 관심을 두었던 것처럼, 그도 농사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양양 근방에 살고 있던 인사들과 어울려 천하사를 다룬 책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집에 붙어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던 사람이었다. ‘삼고초려’도 어쩌면 그의 바쁜 일정 때문에 생겨난 일인지도 모른다.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出師表’
47세의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은 제갈량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제갈량은 날이 개면 농사짓고, 비가 오면 글을 읽는(晴耕雨讀) 생활을 10년이나 보냈지만 그렇다고 농사를 주업으로 삼았던 사람도 아니었고, 은거를 최상의 생활태도로 삼는 은사(隱士)와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공명은 은거한 것이 아니라 각지의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고 혼란한 정치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의탁할 수 있는 주군을 찾고 있었다. 농사일로 생활을 꾸리면서 고금의 서적을 읽고 선배를 방문해 이야기를 듣고 뜻이 맞는 친구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스스로 남양야인(南陽野人)이라 자칭했지만, 그도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는 요즈음의 ‘재야인사’처럼 평생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사람처럼 처신했을 뿐이다.
그는 결코 도연명(陶淵明)처럼 강호에 병이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 두번째 갔을 때, 초려에서 흘러나온 소년(동생 諸葛均)이 부른 노래의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들에 나가 몸소 밭을 갈고(樂躬耕於 畝兮)
… … … … … … …
가만히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는도다(以待天時)
그는 분명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를 써줄 사람이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유비가 그를 찾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유비의 삼고초려시에 제갈량은
낮잠을 즐기다 깨어나 큰 꿈을 누가 먼저 깨울 것인지(大夢誰先覺)
평생 내 스스로 알고 있노라(平生我自知)
초당에 봄 잠이 족한데(草堂春睡足)
창 밖에 해는 길기도 하구만(窓外日遲遲)
이라 하였다. 별 능력은 없으면서 착하기만 한 유비가 세 번이나 찾아온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봄잠에 빠졌고, 잠에서 깨어나서도 의관을 정제한답시고 몇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는 유비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넉두리인 것이다. 그는 유비가 삼고초려하자 “량이 오래 전야에 파묻혀 지내 세사에 게으른 터라 존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능청을 부리지만 유비 이상의 사람이 그를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유비에게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할 것을 약속하고 나서면서도 “비록 나 없는 후라도 네 게을리 말고 논밭을 잘 거두거라. 공을 이루어 유황숙(劉皇叔)의 은혜를 갚는 대로 내 다시 돌아올까 한다”고 하면서 전업 농사꾼처럼 위장한다.
사실 “삼국지연의”에서 발원된 유비와 제갈량의 아름다운 군신관계, 그리고 그의 탁월한 책략 등에는 과대포장된 면이 적지 않다. 우선 그 스토리의 절정인 삼고초려도 그들만의 가화(佳話)가 아니었다. 유표가 방덕공(龐德公)을 초빙하려고 몇차례나 찾아갔으나 결국 탄식하면서 물러났다. 손책(孫策)이 장굉(張紘)을 여러 차례 방문한 끝에 초빙한 것도 그 예다.
궁경지 논쟁은 제갈량의 또다른 계략?
융중대의 천하삼분의 계책도 일찍이 괴통(剌通)이 제왕(齊王) 한신(韓信)에게 진언한 내용 그대로다. 즉, 초와 한이 둘로 나누어 다투는 마당에 한신이 독립하면 천하는 솥의 세발처럼 서 있게 되고 어느 누구도 먼저 움직이기 어려운 형세가 될 것이며,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史記” 淮陰侯列傳)고 한다. 만약 한신이 괴통의 말을 따랐다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융중대의 내용도 당시 명사들의 정세분석에서 이미 공론화된 것이었으니 노숙(魯肅)이 손권(孫權)을 만났을 때도 이런 것을 건의한 사실이 있다.
유비가 죽음에 임하여 어린 아들 유선(劉禪)을 부탁하면서 여의치 않으면 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해도 좋다고 한 것은 유비와 제갈량 사이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이미 도겸이나 유표가 유비에게 비슷한 당부를 했으며, 손견(孫堅)이 장소(張昭)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사실 당시 유비쪽이 더 다급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조에게 쫓긴 후 형주 유표에게 몸을 의탁한 그는 이미 나이 47세였다. 50을 목전에 둔 이 시기를 이렇게 빌붙어 일없이 빈둥거리며 밥만 축내고 덧없이 살아가기에는 하루 하루가 너무 아까운 시절이었다. 말을 타지 않아 군살이 붙어버린 자기의 허벅지를 바라보니 탄식(蝦肉之嘆)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던 제갈량이 유비의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특히 관우와 장비같은 훌륭한 장군은 확보하였으나 자기와 같은 유능한 참모를 구하지 못한 유비의 약점과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했던 결과가 이른바 삼고초려다.
제갈량도 그럴 처지는 아니었다. 흥정의 경우 세번 이상 튕기는 것은 무례하고 또 성공 가능성도 없는 법이다. 사실 유비는 두번째 방문부터 관우와 장비의 불평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두번째 방문 때 장비는 “그까짓 촌놈을 무얼 형님이 몸소 가 보려고 그러오 아무나 하나 보내서 불러오면 그만일 걸” 하고 제갈량을 비하하고 있다. 삼고초려에 나서려 하자 관우도 “형님께서 몸소 두번이나 찾아갔으니 그 예가 지나치게 후하다 하겠는데 종시 몸을 피하고 만나보려 하지 않는 모양이 그가 허명만 있을 뿐이지 실학이 없는 까닭이 아닐까 생각됩니다”하고 불평한다. 유비는 불평하는 관우에게 “옛적 제 환공은 동곽(東郭)의 야인(野人)을 보려 할 때도 다섯번이나 찾아가 겨우 한번 만났는데 하물며 공명 같은 대현(大賢)을 찾아보는 것이랴”하고 말했다. 아무리 인내심 있는 유비라 하더라도 그 이상의 인내는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제갈량도 10년이나 전공을 찾지 못하고 농사를 짓고 있었지 않았던가? “위략”이라는 책에는 공명이 유비를 만나러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사실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제갈량도 마냥 여유를 부릴 입장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제갈량을 당시 ‘와룡’ 혹은 ‘복룡’이라 지칭한 것은 금세라도 하늘에 오를 수 있지만 때를 기다리며 못에 가라앉아 있는 용이란 뜻이다. 하늘을 날아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려야 진정한 용이지, 그렇지 못하면 뱀(凡夫)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가 유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농사꾼으로 그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사람의 만남은 한쪽의 짝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났으니 그들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을 고기가 물을 만났다는 의미의 ‘수어지교’(水魚之交)라 한 것이다.
제갈량이 그의 주전공이랄 수 없는 농사를 10년이나 지은 까닭에는 이렇게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작금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어들여 그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궁경지 논쟁이라는 것도 제갈량이 쳐놓은 계략에 빠진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떤 때는 전공으로 밥을 먹고 기회가 닿으면 부전공으로 돈은 버는 자가 진짜 유능한 사람이 아닐까? 이문열이 그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