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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 목사 세 번째 시집 접시꽃을 심으리라 작품 해설
시련과 고통 속, 하늘을 바라보는 수직적 응시로써 만든 박노진의 시세계
조신권(문학평론가 / 시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고석(鼓石) 박노진은 『문학의 봄』 에서 “밤낚시”로 시 부문 신인상을 받아 등단한 목사 시인이다. 그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고, 계명대 영문학과를 졸업하는 동시에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박사를 받은 집단 상담전문가다. 또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으면서 청소년 사역으로 소년 분류 심사원, 교도소 사역을 통해 뒤안길을 걷는 인생들의 삶을 사색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강의로 순회 선교를 하면서 외로운 이들을 돌보다가 캄보디아에서 국민훈장을 받았다.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삶과 죽음, 신학과 철학, 교육학과 인문학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흔들리는 갈대의 울음에 잠이 깨어, 그분이 계신 곳을 향하여 길 떠나는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 첫 번째 시집 『걷는다는 것은』, 두 번째 시집 『우리 엄마』, 세 번째 시집 『접시꽃을 심으리라』가 있고, 그의 저서로는 『비전형 인간』 등이 있다.
현재는 대구 온세상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기독교 인문학에 심취하여, 가지는 공부보다 버리는 공부를 하고, 거꾸로 가는 시간을 경험하며, 여러 곳에서 집회 인도와 세미나와 특강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며 그르치지 않는 대화로 아름다운 시간들을 가져오고 있다. 물론 지금도 매일 걸으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기하고 걸으며 해답을 찾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박노진의 첫 시집 『걷는다는 것은』 에 대해 그의 스승이신 파이데이아 신득렬 원장은 그 해설에서 “박노진의 시에 대한 첫 인상은 누구나 쉽게 이해되고 감정이입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주변에 널려 있는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 무화과나무들을 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듯이, 시인은 일상적이고 친숙한 사물에서 심오한 통찰을 하고 그것을 시어로 형상화 해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신득렬 교수가 지적한 바대로, 박노진 목사 시인은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가 또는 걸어서 자연을 찾고, 목회생활의 일상을 겪으며 갖는 깊은 통찰을 통해 그 나름의 독창적인 소재와 주제를 얻고 그에 밀접하게 조응되는 객관적인 상관물인 이미지와 시적인 언어로써 형상화해 낸다. 박노진 목사 시인 자신이 첫 번째 시집 발간의 의미를 머리글을 통해 “깊고도 신비한 여행은 아픔과 눈물과 고통을 수반하였으나 그 여정에서 여러 편의 깨달음을 획득했다. 여기 묶은 시들은 바로 그 파편 같은 깨달음이다.
이제 나는 말한다. 인생의 많은 경험들은 슬퍼야 오래가고 오래 익어서 장엄하다고 그렇게 갈대처럼 울면서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술회한 것처럼, 이번에 상재하는 세 번째 시집 『접시꽃을 심으리라』의 소재와 주제도 그가 지난날 겪은 ‘아픔’과 ‘고통’, 그가 입은 ‘상처’와 ‘멍듦’ 이 잦아저 마음의 저장소에서 묻어나오는 것들이 많다고 여겨지며, ‘아픔’과 ‘눈물’이 수반되는 내면적 여행 중에 얻은 깨달음에서 연유되는 것이 많은 듯하다. 이런 시집을 내는 것은 복음을 모르고 뒤안길 인생을 살아가는 필리핀의 아이따 영혼을 위하여 시집 수익금전액을 선교헌금으로 사용하고, 이역만리 슬프고 아픈 마음을 한아름 안고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울고 아파하면서 인생 방정식을 찾아보고자 하는 데 있다할 것이다.)
[중략]
고석 박노진 목사 시인의 시 몇 편을 실례로 해서 그의 시창작과 상처 치유의 미학을 살펴보겠다.
햇볕에 그을려서
외톨이가 되었는가
가시가 돋혀서
버림을 받았는가
외로운 광야에서
홀로 서 있는 너는
광야를 지키는
초병(哨兵)이 되었구나
모래바람에
몸서리쳤고,
타는 목마름에
생명을 절규했지
제 가시가
제 몸을 지르며,
아픔이 무늬 되고
고통으로 살아남은 생명
검은 너의 얼굴이
영광의 화관(花冠)되고
쓸모없는 너를 다듬어
네 속에 보배를 담았구나
아픔을 참아 기쁨이 되고
고통을 견뎌 보람이 되며,
외로움을 삼켜 자랑이 되었으니
이것이 조각목 신앙의 영광이구나
“조각목(角本)” 전문
이 시는 6연으로 구성된 광야의 조각나무와 시인의 대유인 화자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형상화한 시다. 제목의 소재가 되는 ‘조각목’은 라이프 성경사전에 보면, “광야에서 자생하는 아카시아 나무로서, 가볍고 견고하여 잘 썩지 않는다”(출 25:5, 37:15)고 한다. 길쭉한 가시들이 달린 아카시아 나무의 일종이다. 이 나무는 물이 없는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뿌리를 깊이 멀리까지 뻗고 있으며,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라서 그런지 목질이 아주 단단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과 '법궤'를 만들 때 이 나무가 사용되었다. 서상한 바와 같이, 조각목은 시나이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볼품없고 쓰임새가 그리 많지 않은 나무다.
제1연에서는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까무잡잡하며 보통은 광야에서 군생(群生)하는 것이 아니라, 물도 없는 메마른 광야에서 외롭게 생장하는 가시가 돋친 마치 버림받은 듯한 나무가 조각목' 이라고 묘사한다. 이 묘사는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박진감(life-likeness)을 느끼게 한다. 이 조각목은 화자인 시인 자신을 비유하는 은유다. 이 비유는 조각목의 현존적인 처지를 묘사한 것이지만, 상징적으로는 타는 듯한 뜨거운 햇살이나 ‘가시’는 모진 고통'과 '시련'을 표상하고, '외톨이라든가 버림을 받았다든가 하는 표현은 그런 ‘시련’으로 인해서 받게 된 '괴로운 실존적인 상황'을 표상한다.
조각목은 태생적으로 괴롭고 외로운 소외된 입지를 갖고 있다. 고석 자신의 태생적인 입지와 유사한 것으로 연상된다. 고석도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나며 많은 고생을 했으며 외롭고 소외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고 있기때문이다.
제2연에서는 ‘조각목’이 인적도 드문 외로운 광야에서 홀로 생장하는 나무지만, 시인의 눈에는 마치 부대 진입로에 있는 위병소, 무기고와 탄약고 같은 중요 시설을 지키는 초병 곧 병사와 같아 보인다고 한다. 외로운 나그네 길에 광야에서 종종 맹수와 같은 적을 만나면 생명이 위험한 데, 만일 그런 외지에 초병이 있다면 위험에 직면한 여행객을 지켜줄 것이다. ‘광야’는 ‘고통’과 ‘시련’과 ‘유혹’이 많은 ‘세상’을 가리킨다. 여기서 시인의 대유인 조각목이 ‘초병’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나무토막’ 처럼 ‘볼품없고’ ‘쓸모없는’ 그런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선택된 사람이 되면, 이 악의 꽃들이 만발한 ‘화원’ 곧 ‘세상’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연은 제1연의 함축적으로 외연된 시연이라 할 수 있다. 외로운 광야란 실제적인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괴롭고 외로운 세상'과 '인생' 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조각목’은 태생적인 환경과 여건이 오히려 계기가 되어 자기가 태어난 지역이나 세상을 지키는 ‘초병’과 같은 ‘파수꾼’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조각목’,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이 어떻게 광야를 지키는 ‘초병’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이 ‘초병’은 다른 무엇을 표상하는 상징임이 틀림없다. 그러면 여기서 ‘초병’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광야 같은 세상’을 지키는 ‘초병’ 또는 ‘파수꾼’, 즉 목양자인 ‘고석 자신’을 두고 한 비유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제3연 “모래 바람에 몸서리 쳤고 타는 목마름에 생명을 절규했지” 라는 묘사는 ‘광야’ 의 생태적인 악조건을 묘사한 것이지만, 상징적으로는 고석 자신이 당한 모진 ‘시련’과 ‘모함’과 ‘실존적인 위협’으로 인해서 ‘몸서리치도록 아프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절규했던 과거의 실제적인 삶의 정황’ 곧 그 삶의 자리'를 진술한 묘사라 할 수 있다. 제3연은 제4연으로 이어지면서 '가시' 로 표상되는 '시련'과 '고통' 에 몸이 찔려서 몸 아프게 입은 상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입은 '상처'가 오히려 '가시밭의 백합화' 처럼 '예수 향기를 더 날리게 하고 영적인 생명을 더 굳세게 살아남게 한다는 것이다.
제5연에서는 '검은 얼굴'로 은유된 '악조건' 또는 '시련' 곧 '십자가가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 이 되었다고 한다. 화관'은 승리자에게 씌워주는 '월계관' 이다. '조각목에 비유된 '쓸모없고 볼품없는 존재'를 '광야' 에서 시험 당하신 예수님께서 그 시험을 물리치고 '생명 구원 사 역자'로 나셨던 것처럼, 석판(石板)에 기록된 ‘십계명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를 담은 ‘법궤’와 같은 ‘보석함’이 되게 하셨다고 한다. 구원과 영생의 복음을 증거하는 권능의 지팡이를 든 사역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제6연에서는 아픔을 참아 기쁨이 되고 고통을 견뎌 보람이 되며 외로움이 삼켜져 자랑이 되었는데, 이것이 ‘조각목 신앙’이라 한다. ‘상처’와 ‘고통’은 찌르기도 하고 아프게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참고 견디고 버티면, 그런 ‘고통’과 ‘상처’가 ‘영광과 치유와 위로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광야’(미드바르)는 단순히 빈 들이 아니며, 고난과 고통과 고독의 자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기도 하다. 너무나 살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이 이어지는 곳이기에 ‘광야’ 또는 ‘황무지’나 ‘빈 들’은 성경에서 심판의 결과를 묘사하는 말로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 ‘광야’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는 곳이요, 또한 ‘구원의 말씀’이 임하는 곳으로도 종종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우리에게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구원의 말씀’을 기대할 만한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길을 걸어가면서도 감사할 수 있고 찬양할 수가 있다. “십자가를 생각하니” 라는 시를 가지고 좀 더 이 문제를 천착해 보겠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오르신 주님/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주님을 바라보며/내 삶이 힘들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에 닿은 십자가 위에서/고통하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나의 고통을 하소연할 수가 없었습니다 //녹슨 세 개의 못이 박힐 때/꽝꽝꽝 망치소리 들으면서/나는 눈을 감았고 귀를 막았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눌러 씌울 때/주님의 붉은 꽃밭 얼굴 바라보며 나의 소원을 부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옆구리 창에 찔려 물과 피 왈칵 쏟아질 때/나의 몸은 하얀 대리석이 되었습니다 //일곱 마디 절규에 혼절(昏絶)했고/용서를 선포하실 때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주님이 죽으실 때 내 욕심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때 나는 사명 인생으로 거듭났습니다.
- “십자가를 생각하니 ”
전문이 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늘 듣는 사건이기도 하고 고난 주간에는 늘 묵상하며 '아가페적인 사랑'을 체험해 보는 사건이어서 일일이 해설을 가하지 않아도 너무나 익숙한 소재를 다룬 시다. 그러나 너무나 익숙해서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대하기도 하고 심사숙고나 깊은 내성적인 성찰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고석 박노진 목사 시인은 이런 익숙하고 친숙한 소재와 주제를 박진감 넘치게 형상화하고 묘사해서 말라가는 '눈물' 을 자아내기도 하고 가슴에 감동적인 전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 시에서도 보듯이, 십자가는 중죄인들이 지는 가장 밉고 가장 처참한 사형을 집행하는 '고통의 도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통해 나무막대기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서 '영광'과 '구원'의 상징이 되고 인간에게 참된 길을 열어주는 아가페를 구현해주는 '영광의 십자가'가 된다. 고석 박노진 목사 시인은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하면서 골고다를 오르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시인 자신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만 어렵고 힘들다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고 한다(제1연).
예수가 ‘십자가의 길’ 곧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한 것이지 권력자들의 ‘강요’나 무력적인 ‘억탁’에 의해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원수 마귀’가 들끓어도 주님께서는 그 ‘위협’과 ‘유혹’에 유인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며 자진하여 고통을 걸머지셨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시인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제2연), 녹슨 세 개의 못을 박을 때의 ‘꽝꽝꽝하는 망치소리’를 들으면, 그 현장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서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고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제3연), 머리에 가시관을 눌러 씌울 때 주님의 얼굴은 가시에 찔리고 할퀴어서 붉은 피를 흘리시는데, 그런 분께 감히 시인 자기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제4연),
예수의 몸 옆구리가 창에 찔려 물과 피가 왈칵 쏟아질 때, 시인 자신의 몸은 '하얀 대리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5연), 여기서 '하얀 대리석' 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하겠다. 앞뒤 문맥 속에 놓고 볼 때, 이 말은 돌덩어리' 처럼 싸늘해졌다는 말인 듯 한데, 돌덩어리'라 하질 않고 '대리석'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제6연에서 진술하는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시는 주님과 함께 하얀 대리석, '싸늘한 시체가 욕심을 무덤에 다 묻고 다시 살아나면, '영광스러운 대리석 조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시사해 준다. 그것을 맨 마지막 행에서 “나는 사명 인생으로 거듭났습니다.” 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시의 앞부분에서는 고통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 절규를 한 후 혼절하시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이때의 ‘톤’(tone) 즉 ‘자세’는 절망적이었지만, 죽으면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 사명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를 할 때 시인이 취하는 자세는 희망차고 역동적이다. ‘주님’과 ‘하나’가 되기 전까지는 단순히 하나의 나무막대기에 불과하던 것이 주님의 피에 적셔져 일치를 이루면서부터는 그 막대기가 변하여 구원을 이루어 승리 하는 '영광의 십자가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Cross) 없으면 ‘면류관’(Crown)이 없고 ‘죽음’(Death)이 없으면 ‘부활’(Resurrection)도 없다. 여기서 고통과 상처의 미학이 이루어지게 된다. 일곱 마디 가상 칠언을 절규처럼 외치고 혼절했다가 죽으시는 모습을 보던 시인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명을 놓고 울부짖던 주님의 모습처럼 너무나 아름답다 아니 할 수가 없다. ‘눈물의 미학’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돌아가신 것은 '사형' 이 아니라 자발적인 구원 사역에 참여하신 것이요 지극한 '사랑의 행위' 이다. 이 행위가 완성된 것은 죽음을 통해서다. 그러니까 죽음은 단순한 '절명'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전제요 계기인 것이다. ‘사라짐’이 있을 때(초림의 종막), 다시 오심 (재림의 서막)도 있고, 겨울이 와야 봄도 멀지 않게 된다. '새로운 꽃을 보려면 ‘낙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단 하나 밖에 없는 ‘명품 대리석 조각’이 되려면 ‘하얀 대리석’이 되는 과정, ‘원석’(原石) 그대로가 아니라, 깎이고 닦이는 과정을 거쳐야만 된다. ‘옥돌’도, 잘라,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지 않으면 ‘빛’이 나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잡된 요소들이 많이 섞여 있는 우리 ‘인격들’이 찬란한 ‘빛의 도구’가 되려면 ‘시련’과 ‘고통’, ‘상처’와 ‘할퀸 흔적’이 있어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런 변증법적인 ‘시련’과 ‘고통’ 없이 인격이 '정련'(精鍊)되질 않고 '신생 (new life)과 새로 남 (rebirth)도 이루어지질 않는다. ‘시련’과 ‘고통’과 ‘상처’는 ‘인격’을 단련시키는 ‘훈련도장’이요. ‘빛의 도구’를 만들어내는 ‘제련소’(製鍊所)다. 시험은 곧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성숙시켜 주는 '교육의 한 과정' 일 뿐이다.
삶의 슬기 · 기술 · 방법을 가르쳐주는 아포리즘 돋보여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 전에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면서 생각한다. 물론 말없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사람은 각기 여러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바로 위에서 말한 것들 중에서 어떤 한 패턴만을 강요하거나 내세우는 것은 매우 억지스럽고 독선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범주들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지혜로운 것은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기 전에 생각한 것을 사람들은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간결하고 힘찬 문학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속담이나 격언의 형태로 표현했던 것이다. 속담이나 잠언의 구성단위는 단순하고 경구적인 것들이 보통이지만 그것이 좀 더 발전하면 공통된 주제를 다루는 보다 복잡한 강론형의 문학의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구약의 『잠언』의 양식과 유사한 형식을 취한 시들이 고석 박노진 목사 시인의 시집에는 유독 많다. 이런 시들을 통해 고석은 지혜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비법’(knowhow)이나 또는 기술을 감동으로 익혀주 려 한다. 그래이(Gray)라는 학자에 따르면, “(이런 금언은) 인간 본성의 원리에 깊이 뿌리를 박고 또한 인간의 영원한 관심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모든 시대의 예절과 일치하여 모든 입장과 환경에서의 처신술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변모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는 구약의 『잠언』을 두고 한 말이지만 고석의 시집에도 해당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노만 패턴은 그의 『신약 : 서설』에서 “잠언의 본질은 그것이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한다는 점이다. 『잠언』은 인생 속에서 반복하여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번쩍이는 통찰이다. 『잠언』의 격언 형식은 통찰을 제시할 뿐 아니라 이를 행할 것을 강요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잠언이 인생 속에서 반복되는 진리를 다루고 있는 아주 짧지만 심오한 책으로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에 이를 행하고 적용해서 살면 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고석의 시가 노만이 지적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고석의 시를 반복해서 읽으면 그 속에 담긴 ‘처세술’을 익숙하게 터득하게 되어 ‘말’과 ‘행동’을 삼가게 되고 진위를 잘 분별' 하고 선악을 잘 구별해서 바른 것을 행하게 하는 통찰력'과 '판별력을 갖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고석 박노진 목사 시인의 시 몇 편을 들어 그의 시 속에 나타나 있는 '도덕적 및 윤리적 생활 윤리들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겠다. 맨 처음으로 다룰 시가 “딴딴한 인생”이라는 시다.
설익은 열매는 배탈을 나게하고
부족한 연습은 패배를 안겨준다.
생각이 짧으면 부끄러움을 당하고
각성이 없는 인생은 후회만 남긴다.
육신은 훈련으로 딴딴해지고
생각은 고민으로 딴판해진다.
정신은 고통으로 딴딴해지고
삶은 실수와 도전으로 판판해진다
인격은 고난과 인내로 단단해지고
신앙은 연단으로 딴딴해진다.
사라질 재물보다 사라지지 않는 생을 원하고
깨어질 명성보다 깨어지지 않는 영성을 기대한다.
눈물 없는 인생은 죽음 냄새 풍기고
판판한 인생은 생명 냄새를 풍긴다.
- “딴딴한 인생” 전문
이 시는 7연 대구법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윤리적인 교훈시’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장 독창적인 시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대구법 또는 평행법(parallelism)에 대한 통찰과 숙달훈련이 필요하다. 이 시법을 흔히 문학에서는 ‘사고의 음율’(thought rhythm) 또는 의미의 음율(thythm of sense or idea)이라고 한다. 이 시법(詩法)은 문법구조의 반복 또는 단어의 반복 등에도 나타나지만, 중심적으로는 사상 또는 의미의 반복을 말한다. 뜻이 유사하거나 보완적이거나 상반적인 둘 혹은 그 이상의 단위사상이 유사한 문법적 구조로 나열되어 있는 시법을 말한다. 대구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의 귀절체(verse-members)인데, 그 귀절체의 기본적인 평행 양식에 따라 여섯 가지의 기본 형태, 즉 ‘동의적 대구법’, ‘대조적 대구법’, ‘종하적 대구법’, ‘단계적 대구법’, ‘상징적 대구법’, ‘내성적(내측 전위적) 대구법’ 등으로 구분된다. 이 시에는 주로 ‘동의적 병행법’이 가장 많이 적용되었고 일부 연에 있어서는 종합적 병행법이 적용되어 있는 것도 눈에 띄인다. 이 시는 아주 잘 짜진 교훈시다.
제1연으로부터 제5연까지는 동의적 대구법(synonymous parallelism)을 운율로 하여 쓴 시연들이다. '동의적 대구법'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유사한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단어는 다르지만 유사한 구문을 사용하여 그 의미를 강조하는 시법이다.
설익은 열매는 배탈을 나게하고
부족한 연습은 패배를 안겨준다.
제1연에서는 ‘설익은’과 ‘'부족한’ 이, ‘열매’와 ‘연습’, ‘배탈을 나게 한다’와 ‘패배를 안겨준다’가, 표현은 다르지만, 각기 ‘동일한 이념’ 또는 ‘의미’를 지시하고 있다. ‘설익은 열매’가 ‘배탈’을 나게 하듯이, ‘부족한 연습’은 ‘패배’를 안겨준다는 것이다. ‘연습 부족’은 ‘패배’를 가 져온다는 ‘이념’을 동일한 패턴의 다른 이념과 병행 시켜서 의미를 강화한다. 즉 연습을 충분히 하여야 성공한다는 말이다.
생각이 짧으면 부끄러움을 당하고
각성이 없는 인생은 후회만 남긴다.
제2연도 제1연과 같은 동의적 병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이 짧은 것’과 ‘각성이 없는 인생’ 이 병행을 이루고, ‘부끄러움을 당한다’와 ‘후회만 남긴다’가 병행을 이룬다.
생각이 짧으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성이 없는 인생’은 오래 살아도 ‘후회’ 만 남길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많은 각성'을 가져야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육신은 훈련으로 딴딴해지고 생각은 고민으로 딴딴해진다.
제3연도 반의적인 동의적 대구법' 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신'과 '생각' 이, '훈련'과 '고민' 이 서로 반립 되는 이념이면서도 전개하는 패턴은 같고 강조하는 점도 같다. 첫 귀절체의 마지막 어구 '딴딴해진다' 와 둘째 귀절체의 마지막 어구 '딴딴해 진다'는 '같은 이념'을 반복한 것이다.
'육신'이 '훈련'을 통하여 딴딴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은 '고민'을 통하여 딴딴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고민을 많이 해야 '사상'이 ‘성숙’해진다는 말이다.
정신은 고통으로 딴딴해지고, 삶은 실수와 도전으로 딴딴해진다.
제4연에서는 '정신'이 '고통'으로 딴딴해지는 것과 마 찬가지로 삶은 '실수'와 '도전' 으로 딴딴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격은 고난과 인내로 딴딴해지고 신앙은 연단으로 딴딴해진다.
제5연에서는 '인격'은 고난과 '인내'로 딴딴해지고 '신앙'은 '연단'으로 딴딴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제6연은 종합적 대구법(synthetic parallelism)을 적용한 교훈시구다. 종합적 대구법은 하나의 단위 사상을 유사한 다른 단위 사상으로 보완 확장하는 시법이다. 이 논리의 연속은 원인-결과 또는 결과 원인으로 나타난다.
이 유형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낫거나 서로 비슷함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보다 더 낫다.” “과 같이,” “도 그러하다” 라는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고석 박노진 시인은 후자의 경우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라질 재물보다 사라지지 않는 생을 원하고 깨어질 명성보다 깨어지지 않는 영성을 기대한다.
제6연에서는 '사라질 재물 보다 '사라지지 않는 생'을 원하는 것이 더 낫고 깨어질 명성' 보다 '깨어지지 않는 영성'을 기대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종합적 대구법에 가장 가깝다.
눈물 없는 인생은 죽음 냄새 풍기고, 딴딴한 인생은 생명 냄새를 풍긴다.
제7연에서는 반의적 대구법을 적용하고 있다. 반의적 대구법(antithetic parallelism)은 첫 귀절체와 둘째 귀절체의 사상이 대립되거나 첫 귀절체는 긍정적으로 말하나 둘째 귀절체는 부정적으로 말하여 서로 사상이 반립되는 평행법이다. 이 유형은 서로 대조적으로 비교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대조되는 두 부분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연결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눈물 없는 인생과 딴딴한 인생' 이 반립 되고, '죽음'과 '생명'이 반립되며, 냄새를 풍긴다는 병행은 동의적이다. 이 연은 엄격히 말하면 '반의적인 동일 병행' 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 옳다. '눈물 없는 인생' 이 '죽음의 냄새를 풍기듯이 딴딴한 인생'은 '생명 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것이다. 의미를 구태여 해설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교훈성은 놀라운 울림을 주고 가슴에 새겨져 오래오래 간직하게 한다. '눈물'로 표상되는 '회개'가 이루어지면 그 신앙 인격'은 딴딴해져 '생명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용하는 “빈 손 인생" 이라는 시는 종합적 대구법을 적용해서 쓴 시다. 여기 적용된 종합적 대구법은 원인-결과 또는 결과 - 원인으로 나타나는 논리의 연속성을 취하고 있다.
사랑을 받는 것은 어진 마음 때문이고 존경 받는 것은 정의로움 때문이지 // 친구가 많은 것은 배려가 많기 때문이고 웃음이 많은 것은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칭찬을 못 받는 것은 교만함 때문이고감사가 없는 것은 욕심 때문이지 // 나이는 더해 가는데 나눌 게 없으니 빈털터리 주머니는 나그네의 서러움이구나 - “빈 손 인생, 전문
이 시는 4연 결과 원인의 관계로 이어진 시다. 제1연에서는 '사랑을 받는 것은(결과) 어진 마음 때문이고(원인), 존경 받는 것은(결과) 정의로움 때문이라고 한다(원인), 제2연에서는 '친구가 많은 것은 (결과) 배려가 많기 때문이고 (원인), '웃음이 많은 것은 (결과)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원인)라 한다. 제3연에서는 '칭찬을 못 받는 것은 (결과) 교만함 때문이고 (원인), 감사가 없는 것은(결과) 욕심 때문이지 (원인)라는 것이다. 제4연에서는 '나이는 더해 가는데 나눌 게 없으니' (원인) '빈털터리 주머니는 나그네의 서러움이구나' (결과)라고 한다.
“목이(木耳) 버섯” 이라는 시도 종합적 대구법을 적용한 시다.
이런 대구법을 원용하여 쓴 시들은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기술과 방법을 가르쳐주는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포리즘이 담긴 시들을 많이 읽으면 기억력에 녹이 쓸지 않을 뿐만 아니라 뇌세포를 깨어 있게 하여 알츠하이머에 걸릴 확률을 감소시킨다고 한다.
자연의 서정 : 그 아름다움과 심원함 묘사 뛰어나
시는 모든 문학 중에서도 가장 사적(私的)이고 주관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시는 개인의 ‘감정’과 ‘정서’를 그리는 서정문학이다. ‘그린다’(묘사한다)라는 것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이나 정서를 구체적이고 개성적인 것으로 형상화 해서 보여주는 시의 가 장 근본적인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석 박노진 목사 시인은 '자연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인 정서'를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이미지'를 통해 응축해내는 '창작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를 통해서 이를 검증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시가 “유월의 숲 이라는 시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푸르던 산천을
검게 만든 유월이 되었고,
나지막하던 수풀은
깃발 세운 유월이 되었다.
연악하던 산천이
장정된 유월이다.
화염을 막아주고
피곤을 씻어 주는 유월
신록의 유월은 계절의 청년이요
검푸른 숲은 사명에 피가 끓는다
-“유월의 숲” 전문
이 시는 6연으로 구성된 '유월의 숲 에 대한 정서를 이에 상응하는 이미지와 시어로써 그려낸 자연을 노래한 시다. 제1연은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한 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연을 한 행으로 이루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아주 돌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했다는 것 자체 또한 경이롭다 아니 할 수 없다. 이 질문은 '자연' 특히 유월의 숲'을 보면서 너무 신비로워서 자기도 모르게 외치는 ‘설의적인 탄성’이다. 시인은 기독교 목사이다. 목사 시인이 '유월의 숲'으로 제유한 '자연'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는가? 그런 어리석은 목사를 어떻게 목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은 몰라서 묻는 물음이 아니다. 너무도 놀랍고 신비하고 경이로워서 내뱉는 '탄성' 이요 독자들에 내놓는 담론 발제'인 것이다. ‘창조했나’ 하질 않고 ‘만들었나’ 라고 표현한 것도 의도적인 작위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보통 만든다'는 것은 어떤 정해진 ‘모형’이나 틀 또는 디자인에 맞추어서 생산해 내는 것을 말한다. 아무렇게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웅장한 전체적인 계획과 ‘질서의 틀’,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섭리에 맞추어서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설의' (rhetoric question) 속에 는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경탄하는 교감과 감동과 경이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 솜씨' 에 대한 신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서 ‘야!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하고 외치는 것이다. 제2연서부터는 그 경탄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과 정서를 이미지로 그려낸 것이다.
제2연에서는 5월까지만 해도 푸르던 산천이 유월이 되어 찾아와 보니 신기하게도 푸르다 못해 '검푸르게 보이지 않는가? 자연의 변화무쌍한 형형색색의 변용'에 대한 경이심을 '색깔 이미지 로써 그려낸 것이다. 제3연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수풀은 나지막했는데 유월에 와보니 깃발을 세운 것처럼 수풀들이 높게 뻗고 무성해져서 새삼 놀라워하는 것이다. 제4연에서는 다 자라지 않아 아이들처럼 여리고 연약하던 산과 빗물이 장정처럼 우람하고 커 보인다는 것이다. 제5연에서는 '뜨거운 태양의 햇살'의 대유인 '화염을 막아줄 만큼 숲이 무성해서 도시생활에 찌들고 지친 피곤을 말끔히 씻어주는, 요즈음 흔히 쓰이는 말로하면 ‘힐링’(healing)해주는 6월의 자연이 되었다는 것이다. 새롭게 녹음이 우거진 6월을 숲을 통해 '청년의 기상'을 그려보는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검푸른 숲을 한창 때인 ‘장년’으로 의인화시켜서 '자연의 신비로운 창조와 그 경륜을 널리 세속에 물든 사람들에게 고지하는 ‘피 끓는 사명’을 부여한다. 이는 시인 자신의 ‘사명적인 각성’ 이라 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신비'와 '찬탄' 그리고 '사랑'으로 멈췄다면, 이 시는 낭만시에 불과할 터인데, '낭만'을 형이상학적으로 승화 시켜 더욱 깊음과 ‘심원함이 있는 시가 되었다. 이런 '서정'을 그려내는 솜씨가 뛰어난다. “봄비” 라는 시를 가지고 좀 더 세찰해보자.
하늘이 나지막이 다가오니 하늘이 친구로다 //겹겹이 다가오는 안개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아름으로 던지는 바람은 얼굴을 어루만진다 //간만에 찾아와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봄비는 내 마음까지 간지럽힌다 I/안개 바람 봄비는 발걸음을 채전으로 이끌고 새싹들은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 - “봄비” 전문
이 시는 4연으로 구성된 친구처럼 다가오는 다정한 봄비를 노래한 시다. 제1연은 “하늘이 나지막이 다가오니/하늘이 친구로다" 로 되어 있다. 높은 하늘이 나지막이 다가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어떻게 무생물인 ’하늘‘이 그 높은 데서 아래로 내려와 다가올 수가 있겠는가? 문자대로만 보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하늘을 의인화 시키면 말도 할 수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며 다가오기도 할 수가 있다. 멀리 떠났던 친구가 어느 날 불쑥 나타나 화자인 시인에게로 다가오는 것으로 체감한다. 하늘로 제유된 자연과 친구와 같은 교감이 이루어지고, 우정도 공감하게 되며, '하늘과 땅' 이 친구가 되는 합일이 이루어진다. 이런 황홀한 순간적 체험을 ’신비주의‘라 한다. 이런 신비 속에서는 ’땅의 존재‘가 ’하늘‘로 ’비상‘(flight)하게 되고 '하늘과 하나 곧 친구가 되는 것이다.
제2연에서는 '하늘'로 대유된 '봄 비가 겹겹이 내리지만 빗줄기가 매우 가늘어서 '안개' 처럼 부옇게 보이는 데, 그 의인화된 ‘무우(霧雨)가 화자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두 팔을 둥글게 모아 던지는 봄바람으로 암시하는 그 훈훈한 정감어린 숨결 이 화자의 '얼굴'로 제유된 '신체'를 어루만진다는 것이다. '봄비'와 '안개', '하늘'과 '땅', ‘예수’와 ‘인간’이 교류(交流)·교감(交感)·교합(交合)하는 우정으로 표현되는 순애(純愛)를 '안개'와 '어께', '두 팔'과 '바람' 그리고 '얼굴'과 같은 자연 이미지와 신체 이미지를 섞어서 경이롭게 그려내고 있다.
제3연에서는 '봄비'로 황유된 친구가 떨어져 있다가 한참 만에 찾아와 얼굴을 만지작거리는데, 그로 인해 화자의 마음까지 간지럽다는 것이다. 성애적인 표현 같지만 너무나 순수하고 더없이 깊은 관계적인 표현' 이고 만지작거리다' 라던가 '간지럽힌다' 라던가 하는 표현은 격의 없는 순수한 교류와 교감, 교합과 일치를 이루는 순간의 감동과 전율을 표현한 것이다.
제4연에서는 '안개비'에 섞여 부는 ‘봄바람'을 담은 '봄비'가 화자의 발걸음을 채전(菜田) 즉 '채소밭으로 이끌어 가자, 그 채소밭에 심은 '채소의 새싹들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어 화자를 반겨주더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채소'로 제유된 '자연'과 '화자' (시인)가 '새싹' 이라는 사명의 시작을 대유한 '새싹'을 매체로 해서 ‘하나 됨’(합일)을 보여주는 교합일치의 표현이다. 이처럼 자연을 통한 초월자' 와의 교류·교감·교통·교합의 순수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놀랍다 아니 할 수 없다. '일상'과 '자연'을 통해 영원이나 '초월'과 만나고 교류·교감·교통·교합하게 되면 지상적인 존재가 초월 공간으로 비상하게 되어 영육을 아우르는 존재'로 확대가 된다. 이런 시가 한 두 개가 아니어서 여기서 일일이 매거할 필요성도 느끼질 못한다. 직접 읽어 보면 이 평자의 진심을 곧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언 : 수직적 응시를 통한 자연과 초월의 만남 추구
시인은 누구나 일상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일상과 자연의 존재양식은 순환과 변화다. 시간 아래 매여 있는 존재와 생명체는 예외 없이 순환을 거듭하고 돌고 돌면서 섭리에 따라서 변용을 이루며 질서를 유지해 간다. 끝없는 변용을 이루기에 자연 만물의 양상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대극적이거나 양극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자연은 끝없이 변화하지만 직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곡선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자연은 서로 양극적인 구조, 특성, 경향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실체다. 그러나 그 역동성이 자아내는 모순과 갈등이 오히려 자연의 생태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양극성이 이질적이고 다양한 전체를 통합하여 유기적인 생명체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인데, 저절로 이루어지거나 진화하면서 이루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이며 초월자인 신에 의해서 부여된 법칙이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직선적인 응시’의 눈이 뜨이면 투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석 박노진 목사 시인은 일찍 이런 응시의 눈, 즉 ‘투명한 맑은 눈동자’를 시련과 고난 중에서 갖게 되었다.
이런 눈으로 그려내는 시의 세계는 아무리 작은 것 하찮은 것을 그려도 그 속애 ‘우주의 전체가 웅축’ 되기 마련이다.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접시꽃을 심으리라』 라는 시를 가지고 그의 이러한 시 정신을 살피는 것으로 평설을 마무리 짓겠다.
접시꽃을 심으리라
온 동네가 빨강도록
골목골목 골목따라
접시꽃을 심으리라
접시꽃을 키우리라
키 크고 빨간 접시꽃을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동구 밖까지 심으리라
출근할 때
삽짝까지 따라오며 배웅하고,
퇴근 때는
골목까지 마중 나와 날 반기는 꽃
접시꽃을 심으리라
그리워서 빨간 꽃을
부끄러워 빨간 꽃을
삼천리 골목마다.
접시꽃을 심으리라
당신 닮은 빨간 꽃을
접시꽃은 지고 없어도
접시꽃 당신은 내 곁에서 빨갛다
-“접시꽃을 심으리라” 전문
이 시는 5연으로 이루어긴 흔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본식물인 걸시꽃 에 빗댄 당신에 대한 애모와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단심(心)을 그려낸 시다. 이 시길의 게목이기도 한, 이 시의 제목 소개가 된 '겉시꽃' 에 대해 알아보기 위하여 인터넷을 열어 탐색해 본 기록을 먼저 소개하겠다.
접시꽃(Attaea rsea)은 아시아가 원산지이며 2m까지 자란다. 심강 모양인 잎은 크고 솜털이 났으며, 가장자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톱니가 있다. 접시꽃은 주로 울타리나 담을 따라서 심는다. 꽃은 둥글고 넓은 접시 모양이다. 꽃 색깔은 다양해서 흰색, 노란색, 분홍빛이 섞인 붉은색, 가주색 따위를 띤다. ‘단순’과 ‘편안’, ‘풍요’와 ‘대만’이라는 꽃말을 가진 겁시꽃은 대문을 지키는 꽃이라는 건설을 가지고도 있다. 경원의 경계부분이나 토담 밑, 바닥이 죽인 시골 길가 등에서 잘 어울리는 꽃이다. 아무데거나 갈 가라기만 거름기가 충분하고 물기가 많으며 배수가 잘 되고 별이 잘 드는 곳에서 더 잘 자란다.
제1연에서는 빨간 색깔의 '접시꽃'을 온 동네 골목골목마다 김어 빨갖게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빨간 ‘접시꽃’을 온 동네 골목골목마다 심어 그 온 동네로 제유된 세계를 붉게 물들이고 싶다는 사명을 선포한 엉뚱하고 기발한 발상으로 어우러진 시다. ‘수평적인 희미한 시선’으로만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언(言表)다. 동네 어구나 돌담 밑이나 대문 안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꽃을 온누리에 심고 싶다니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그러나 꽃의 모양이 둥글고 넓은 접시 모양이라는 것과 색깔은 다양하지만 시인이 심고 싶어 하는 꽃의 색깔은 빨갛다는 것,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는 것, 꽃말의 신성한 의미 등을 수평이 아니라 수직적인 응시의 투명한 눈으로 보면 고석이 심 고자 하는 '접시꽃'은 단순한 본초식물인 아욱과 식물이 아니라 원으로 표상되는 '영원하시고 완전하시고 포괄적' 이어서 인간으로 땅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려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살리셔서 갈라졌던 하늘과 땅을 잇는 '중보자 예수'를 표상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온 누리에 '접시꽃'으로 표상되는 '하늘나라 복음'을 심고 싶다는 신학적인 의미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