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와 허영숙 -
만남, 그 영원한 이별
그는 대학을 1918년 여름에 그만둔다. 성적은 우수했다. 그런데 그 시절 이광수는 애정문제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광수가 두 번째 부인이 된 허영숙(의사, 1897~1975)과 알게 된 것은 1917년이었다. 도쿄여의전에 다니던 허영숙은
도쿄의 유학생 모임에서 처음 이광수를 만났다. 이광수보다 다섯 살 아래다. 이광수는 허영숙이 의학교에 다닌다고 하자,
“폐병에 무슨 약이 좋으냐?”라고 물었다. 며칠 후 허영숙이 약을 사들고 이광수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이 무렵 이광수는 소설 쓰기와 학교 공부 등 과로로 인해 폐병을 앓고 있었다. 허영숙은 이광수를 극진히 돌봤고
그는 허영숙의 정성스런 간호 덕에 건강을 회복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차츰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광수는 한때 미술공부를 하던 나혜석(화가 겸 소설가, 1896~1948)과도 사귄 적이 있으나 결국 허영숙에게 기울어졌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이광수는 아무 정도 없이 지냈던 첫 부인 백혜순과 1918년 9월, 얼마 동안 생활비를 보내 주는 조건으로 이혼에 합의했다.
이광수가 이혼을 했다고는 하나 자식까지 딸린(아들 진근) 그와의 결혼을 허영숙 집에서 승낙할 리가 없었다. 당시 허영숙의 부친은 이미 세상을 떠나 집에는 모친뿐이었으나 모친은 완강하게 결혼을 반대했다. 1918년 7월 허영숙은 도쿄의전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런데 모친이 끝내 승낙하지 않자 허영숙은 이해 10월 모친의 돈 거금 2천 원을 훔쳐 이광수와 북경으로 애정 도피행각을 벌였다. 허영숙을 따라 북경까지 가긴 했지만 이광수의 심중은 난처하고 복잡했다.
그러던 중 이광수는 이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약소민족의 독립과 자주적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소식을 들었다. 그는 11월 북경에서 급거 귀국한다. 이어 12월에 일본으로 돌아가 이듬해인 1919년 초, 2•8독립선언서(조선청년독립선언서)를 기초한다. 2•8독립선언서에는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백관수, 이광수 등 11명이 서명했고, 2월 8일 도쿄의 한국YMCA에서 많은 유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표되었다.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독립선언서였다.
현재 도쿄의 한국YMCA 건물 앞에는 2•8독립선언기념비가 서있고, 10층에는 조그만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이 있으며, 자료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는 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1명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광수의 사진도 물론 여기에 있다.
국내에서 3월 1일 낭독된 기미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10여 년 전 일본 유학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최남선이 기초했다.
최남선이 이광수의 2•8독립선언서를 참고했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를 쓴 직후 동료들의 권유로
상해로 탈출했다. 그후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아 일했다.
그러다 1921년 상해로 찾아온 허영숙의 설득으로 귀국한다. 귀국 도중 체포되었으나 바로 불기소 석방되어
민족진영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이광수는 이해 5월 허영숙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계속)
[출처] 이정식, 〈시베리아 문학기행〉 중에서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 수감」 되는 일화를 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