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4.29. 울산두레교회 수요예배
하나님의 지혜(고전 2:6-9) 고린도전서 강해 08
고린도는 헬라 문명이 중심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아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앎, 곧 본질적인 앎에 도달하려고 애를 썼고 그 덕분에 철학이 발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구원도 앎이라는 차원으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이 되는 것, 곧 본질적인 앎이란 무엇입니까? 바울은 고전 2:2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앎에 있어서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 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아는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과 철학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곧 서양정신사의 토대인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을 두루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바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바울에게는 절대적인 앎의 목표였습니다. 바울은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도움을 받아서 구원받는다고 믿는 기독교 신앙은 한 단계 낮은 가르침이며, 미련한 구원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율법을 알고, 헬라인들의 철학을 아는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인간적인 앎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로운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 3:7절 아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래서 이 말씀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해서 먼저 생각해 보려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라는 표현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의 지혜는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의 지혜는 진정한 지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혜에 대한 역설적인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지혜롭게 보이지만 어리석은 것이 있고, 어리석게 보이지만 지혜로운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지혜는 지혜로워 보이지만 어리석다는 말씀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혜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진정한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볼 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를 따르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아쉽게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더 큰가?”라는 문제로 서로 편을 나누고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세상에서 그런 것처럼 “누가 더 큰가?”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분열된다면 교회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불과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런 문제에 휘말리게 된 것은 그들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이나, 사건을 평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손해를 보는 일입니까? 우리들 가운데 이렇게 손해를 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손해를 보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더 큰 이익이 있어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것이 세상 적으로는 지혜로운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 어리석은 것이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는 길이요,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의 지혜로 인간이 생각해내지 못할 일을,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가 가진 인간적인 가치들을 포기할 경우에만 얻을 수 있는 축복의 길을, 구원의 길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의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인간의 지혜는 드러나 있고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8절, 9절에서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이 가진 세상의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노력과 지혜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람의 노력과 지혜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얻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노력의 산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거나, 발견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드러나 있다는 것은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히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가진 계획에는 밝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데에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특별한 도구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가까이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보입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하나님의 지혜가 깨달아집니다.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발견하기 위해서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식사를 하는데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 발아래 엎드려서 식사중인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빵을 집으면 빵을 보고 고기를 집으면 고기를 보고, 빵이 입으로 올라가면 입을 바라보고 식탁으로 내려가면 식탁을 바라보고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열심히 쳐다보는 겁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애타게 보이든지 루터는 고기 한 조각을 들어서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른 물고 제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본 루터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애완견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것 같이 내가 주님을 쳐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는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만 바라본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께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우리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들의 지혜가 되고, 우리들의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지혜는 온전한 사람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혜로운 것을 말해도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성숙한 사람들은 어떤 심오한 지혜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정신적인 자세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는 성숙한 사람들이라야 듣고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 우리는 온전히 성숙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줌으로서 받는 것을 모릅니다.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사탕을 주면 더 크고 더 많은 사탕을 주겠다고 해도 자기 손에 쥔 것을 내어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인색해서가 아닙니다. 달라는 사람을 못 믿어서도 아닙니다. 손에 쥔 것을 주면 그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존개념이 없다”고 말합니다. 긴 원통에 들어 있는 물을 넓은 대야에 부었을 때 그 물은 서로 다른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온전히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정신이 온전히 성숙했다는 것은 줌으로서 받고, 희생함으로서 다른 것이 생성된다는 것을 이해 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는 줌으로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고 죽음으로서 다른 것이 생성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을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들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십자가의 삶, 양보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아직 세상적인 지혜를 의존하고 있는 모습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한 삶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에 감추어진 이 놀라운 지혜를 발견하고자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에 집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