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12 : 백제 부흥 운동
04.10.07
몽골군의 3차 침략 때 일어난 중요한 사건으로 '백제부흥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백제부흥운동은 1236년 겨울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1237년 봄에 평정된 민란이다. 이 민란의 중심 인물은 담양(전남) 출신의 이연년 형제였다.
이연년이 맨 처음 거병한 곳은 원율현(담양군 금성면과 용면 일대)인데, 이곳에는 현재까지 금성산성이 남아 있다. 이 금성산성에서 이연년 형제는 인근의 초적들을 끌어모으고 세력을 키워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라 자칭했다.
'백제'라는 옛 국호를 거론한 것은 그 부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인데, 옛 백제 지역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명분으로 백제란 이름을 내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왕조는 최이 정권의 횡포에 눌려 그 무력함이 극에 달해 있었고, 왕실은 최이 정권을 지탱해주는 장식품에 불과할 정도로 그 위상과 권위가 추락했다. 이런 와중에서 백제란 국호를 내세운 것은 어느 정도 시의적절했다고 본다.
게다가 몽골군은 이 무렵 최초로 그 공격 방향을 전라도로 향하고 있었다. 몽골군의 3차 침략 중 두번째 공격인 1236년 10월 10일에는 몽골군 선발대가 전주와 고부(전북)에 나타났고, 10월 29일에는 부녕(전북 부안)에도 출몰했다. 이연년 형제가 거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몽골군이 이제 전라도를 향하여 쳐들어오고 있는데도 최이 정권은 항상 그러했듯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연년 형제가 거병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무력해진 고려 왕조와 백성들의 위기를 외면하는 최이 정권에게 운명을 맡기지 않고 몽골군의 침략을 직접 방어하면서, 대몽항쟁보다 정권 안위에만 신경을 쓰는 최이 정권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세력은 '이가당李家黨'이라고 불렸다. 이연년 형제를 추종하는 무리라는 뜻인데, 이들이 반란의 핵심세력으로 보인다. 이들은 최이 정권에 불만을 품고 초야에 묻혀 있던 지방의 토착세력이나 중앙에서 낙향한 전직관리들로 보인다. 이런 이들을 '산림山林'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이 반란세력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한 세력을 '초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대개 군대에서 이탈한 군인들에게 붙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 지방군대에서 이탈한 자들은 다름 아닌 농민들이었다. 즉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한 대다수 무리는 농민과 전직군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반란세력의 하층부를 이루고 있었다.
전직군인들이나 농민들이 반란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군제의 문란과 가혹한 수탈이었다. 기존 상비군 체제가 와해되면서 새로운 별초군을 조직하여 상비군으로 활용했지만, 기존의 상비군을 모두 흡수할 수는 없었다. 군대에서 이탈한 군인들이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이 안주할 곳은 농업밖에 없는데,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경작지 확보가 힘들었고, 더구나 몽골의 침략은 미미한 토지의 경작마저 의미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들 농민들은 대부분 거주지나 토지에서 유리된 유랑 농민들이었다.
게다가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는 최이의 아들인 만전이 쌍봉사(전남 화순)에 거주하면서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있었다. 만전은 훗날 환속하여 최항으로 개명하고, 최이를 이어 최씨 가문의 3대 집권자가 된다. 그는 쌍봉사를 중심으로 전라도 각지에 농장을 개설하고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농민들을 혹독하게 착취하고 있었다. 이연년 형제의 거병에 참여한 농민들은 이러한 수탈에 못 이겨 들고 일어선 것이 아닐까?
그런가 하면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한 자들 중에는 승려들도 있었다. 반란에 참여한 승려들도 최이 정권에 불만이 많은 자들이었다. 이 역시 출가한 최이의 개망나니 자식 만전의 횡포 때문인데, 만전은 농민에 대한 수탈뿐 아니라, 유명한 사찰을 점거하는 등 인근 사찰들에 대한 탄압과 행패도 심하게 부렸다. 비록 자신도 승려였지만, 최고통치자의 아들이었으므로 제지할 자가 없었고, 성품마저 고약해 인근 사찰과 승려들에게 가한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한 승려들은 이런 만전에 횡포에 피해를 입은 사찰의 승려였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민란세력의 선봉장을 맡기까지 했으니, 참여한 승도들이 반란에 매우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연년 형제가 주도한 민란은 1236년 10월, 담양의 금성산성에서 시작되었다. 몽골군이 처음으로 전라도 북부까지 쳐들어올 무렵이었다.
최이 정권은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는 한 방법으로 산속으로 백성들을 도피시키는 산성입보를 농민들에게 강요했었다. 몽골군이 전라도로 향하자 금성산성에는 산성입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이연년 형제는 바로 이 금성산성에서 거사를 시작하였다. 산성에 들어온 사람들 중 최이 정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민란을 일으킨 것이다.
두 형제는 민란세력이 형성되자 산성에 근거하면서 인근의 여러 주현에 격문을 띄웠다. 격문의 내용은 사서에 없지만 아마 몽골군의 침략 위협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최이 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두 가지 대목이 뒤섞여 있지 않았을까? 이들은 격문을 띄우면서 백제부흥을 외쳤던 것이다.
격문은 의외로 효과가 커서 인근 지방에서 더욱 많은 군사와 농민들이 몰려들었다. 세력을 키운 이연년 형제는 이제 금성산성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산성에 웅거하는 수세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정도로 세력이 커져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연년 형제가 산성을 나와 민란세력을 이끌고 향한 곳은 해양(광주)이었다. 금성산성을 나와 광주로 향하면서 이연년 형제는 비로서 백제도원수라 칭했다. 민란세력이 광주로 진출하자 인근 주현의 관리들 중에는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지만, 민란세력을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관리들도 많았다. 광주로 향하는 길에서도 많은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백제도원수란 칭호를 내세운 것은 광주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생각보다 고려 왕조에 대한 불만이 컸으며 또한 옛 백제에 대한 향수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때까지 최이 정권은 민란의 발발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모르고 있었을 리는 없었을 테고, 몽골군의 침략이 전라도를 향하고 있던 전란중이라 별다른 수를 쓰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최이 정권이 전라도에서 몽골군과 민란세력 모두를 적으로 삼아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민란세력은 광주를 점령한 후,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다시 나주로 향했다. 때는 1236년 11월 말이나 12월 초 무렵이었고 이듬해인 1237년 정월에 나주에서 관군과 접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주는 당시 전라도의 거점이 되는 대읍으로서 민란세력이 이곳을 점령한다면 백제부흥의 향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백제부흥이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연년 형제는 나주를 점령하기 위해 달려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