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저에겐 글자 그대로 추억의 작곡가입니다. 요즘엔 베토벤을 그리 즐겨 듣는 편이 아니지만(그래도 아직 뜻밖에 새로운 감동을 받는 순간들이 있긴 합니다), 나도 음악가가 되어 보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모델이 되어 준 인물입니다.
그의 음악은 실제로 많은 매력을 지녔고, 그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알아 가면 젊은 음악도의 피를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 보다 직관적이고 자연스럽게 되어 가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끼지만, 전에는 베토벤과 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형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베토벤의 작품 번호 1에서부터 마지막 138까지 순서대로 나열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작은 노트에다가 순서대로 번호를 적고 아는 곡부터 하나씩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무슨 그로브 사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자료가 널려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무척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몇 년에 걸쳐 작품63과 114를 제외한 모든 작품을 찾아내었습니다. 그 때 번호를 하나 하나 채워 가는 일은 정말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을 주었습니다.
작품번호 순서가 꼭 작곡 순서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목록은 한 작곡가의 삶을 음악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그 곡들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결국 그의 삶을 상당히 꼼꼼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제 목록을 여러 분께 하나 씩 보여드리겠습니다. 제 기억에 들어있는 베토벤의 여러 곡들에 대해 이야기해 가면서, 또 필요한 부분은 다시 사전을 찾아가면서 베토벤을 다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지요.
제 노트에 아직 작품 63과 114는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부터는 그 노트를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거든요. 적어가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작품 1 피아노3중주곡 제1번~3번
Op.1-1, 1번 내림 마장조(E-flat), Op.1-2, 2번 사장조(G),
Op.1-3, 3번 다단조(c)
베토벤의 작품들 중 가장 처음 출판된 곡들은 아시다시피 3곡의 피아노3중주곡입니다. 1794년에서 1795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 되어 있군요. 출판은 1795년. 흔히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많이 엿보인다고 합니다.
1번과 2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베토벤의 첫 곡이 피아노3중주다, 이런 식으로 알고 있을 따름이었지요. 두 작품은 실제로 음악 자체가 평이하고 온건한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3번은 한 동안 즐겨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라디오를 끼고 살다시피 했는데, 돈이 별로 없으니까 음반을 많이 사지는 못하고 FM에서 녹음해 가지고 듣곤 했습니다. 이 곡도 한 동안 제 테이프 안에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1악장과 끝악장의 테마가 멋지거든요.
베토벤에게는 다(c)단조가 상당히 중요한 조성인 듯 싶습니다. 다단조의 곡들이 무척 많지요. <운명> 교향곡을 비롯해서, <비창>소나타, <코리올란> 서곡, 피아노협주곡 3번, 바이올린소나타 7번 등등, 마치 베토벤을 상징하는 듯한 조성입니다. 최초의 피아노3중주곡에서 베토벤의 미래가 보이는 듯 하지 않습니까?
이 곡을 들은 지는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곡을 연습하는 것을 잠깐 동안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테마 부분 외에는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다시 정색을 하고 들어보면 옛날 느낌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작품 2 피아노 소나타 제1번~제3번
Op.2-1, 1번 바단조(f), Op.2-2, 2번 가장조(A), Op.2-3, 3번 다장조(C)
두 번째 출판된 곡들은 역시 잘 알려진 3곡의 피아노 소나타입니다. 피아노 배우는 학생들이면 이 중에서 한 곡 이상 꼭 거쳐가는 중요한 작품들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피아노 소나타 제1번에서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영향을 거의 느낄 수 없습니다. 베토벤의 개성이 팍팍 튀는 곡입니다. 1악장은 특히 아주 정돈된 곡이라서 음악분석 자료로 아주 좋습니다. 소나타 형식의 전형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악장입니다. 2악장이 조금 성격이 약하지만, 3악장이나 4악장이나 젊은 베토벤의 면모를 유감없이 느낄 수 있습니다. 3악장도 분석하기에 아주 좋은 곡입니다. 20대 초반에 이런 곡을 써냈다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습니다.
2번은 저와 별로 인연이 없는 곡입니다. 배워 본적도 없고 혼자 열심히 들여다 본 적도 없습니다. 1악장 주제도 좀 이상한 느낌이 들고. 전개 과정은 그런 대로 들을만한데, 왠지 정이 안가는 곡이어요.
3번은 초기작품 중에는 걸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곡의 규모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빼어난 작품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상당히 좋아했던 곡으로 모든 악장이 다 매력 넘치는 기막힌 곡입니다. 1악장의 테마는 단순하지만 아기자기하면서 품위가 있고. 반면 전개과정은 호탕한 면도 느껴집니다. 2악장은 초기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굉장히 깊이가 있고 감정의 폭이 넓은 곡입니다. 듣고 있으면 정말 푹 빠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3악장은 언뜻 듣기에 상당히 복잡합니다. 대위법적인 스케르쪼는 독특한 느낌이 드는데 중간에 트리오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음계를 타고 오르는 4악장 주제도 단순한 아이디어에 비해서 아주 인상적입니다. 피아노 음악의 화려함을 만끽할 수 있는 악장입
니다. 이 곡은 연주도 많이 되니까 들어보신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모르시는 분들은 한 번 들어보시기를.
작품 3 현악3중주곡 내림 마장조(E-flat)
이 곡은 대곡입니다. 특이하게 5악장으로 되어 있고 연주시간도 무척 깁니다. 악상은 아주 안정감있고 친근한데, 전개 과정은 약간 지루한 느낌도 있습니다. 너무 기니까. 작곡 연대는 불확실한데 1794년 이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작품1번의 피아노3중주곡보다 먼저 쓰여졌다는 이야기지요. 사전에는 그 전에 써놓았던 피아노3중주곡의 편곡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곡 전체를 아우르는 솜씨는 부족함이 느껴지는 게 사실인데, 각 악장의 주제들에 상당히 끌리는 데가 있습니다. 현악3중주곡 레퍼토리로는 아주 중요한 곡입니다.
학생 때 현악3중주곡을 작곡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베토벤도 현악3중주곡은 초기에만 주로 쓰여졌고,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현악3중주곡들도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디베르티멘토나 가벼운 여흥 음악이 대부분입니다. 서양악기는 고음 악기에 비해 저음 악기가 음량도 크고 음색적으로도 풍부한데, 서양음악은 음의 균형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한 대의 바이올린이 비올라와 첼로가 지닌 음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현악3중주는 중저음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걸 읽었기 때문인지 저도 현악3중주를 써 본 적이 없습니다.
작품 4 현악5중주곡 내림 마장조(E-flat)
이 곡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또는 제가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제 수첩에는 "Op.108의 편곡"이라고 적혀 있는데, 실제는 작품103의 편곡입니다. 사전에는 편곡이 아니라 재 작업(recomposed)을 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작품 103은 관악기를 위한 8중주곡입니다. 현악5중주곡을 작업한 연도는 1796년이고, 작품103의 작곡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1793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