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콤 달콤 새콤한 맛집에 얽힌 사람 이야기(12)
박정희 시인과 인사동 '포도나무집'
서라벌예술학교의 남산 캠퍼스 시절 얘기이다. 1955년이던가.
나는 한 학급 아래의 병약한 최모 여인을 짝사랑했는데, 그 여인은 극작가 이광래 교수의 외조카로 효자동 그녀 집에 가면 그 어머니의 접대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글쟁이’는 이광래의 초라한 가정 형편으로 벌써부터 넌더리가 났던 어머니인지라 반가워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어느 날 병원(마산 결핵요양원)과 서울 생활이 반반이던 그녀의 상경 소식에 나는 막 피기 시작한 개나리 한 묶음을 들고 그녀를 찾아가 전달하고 어깨가 처져 명동으로 나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명동으로 직행하던 때였다. <창>다방에 앉았던 박정희가 기운 빠진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참 딱도 하셔라. 하필 노랑꽃이라니. 개나리의 꽃말은 어쨌던든, 노랑은 이별을 뜻하지 않아요.”
사리 분별이 명확하고 따뜻하고 감미로운 목소리의 박정희는 최모 여인과 한 학급이었지만, 그 애리애리하고 난 체하는 서울내기(진명여고)의 꼴을 마땅치 않아 했다.
서라벌은 니혼대학(日本大學)의 예술학원을 본떠 만든 전문학교로 박정희가 이 학교에 온 것은 전적으로 유창열(서라벌 3회생 청주고 문예반장 출신으로 경향신문 장편 현상에 <흑묘(黑猫)>로 당선)의 강력한 권유 탓이었다. 박정희는 청주여고 문예반장 출신이어서 둘 사이가 고교시절부터 각별했는데, 그 뒤에 소설의 김문수까지 이 학교에 가세하여 이른바 ‘서라벌의 청주 퍼워’를 형성한다.
나는 한 반의 김춘배(시)에게 그녀와의 접근을 충동질했다. 아, 그런데 김춘배의 답답한 접근법이어ㅡ. 집안(한약방) 내력 탓인지 그에게서는 언제나 한약 냄새가 났고 때로는 순진함이 지나쳐 촌스럽기까지 했다.
청주 바닥이 알아주는 멋쟁이요 고2때(1953), <수험생>의 전국 문예 콩쿠르에 가작 입선한 만만치 않은 콧대의 그녀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수험생>에 같이 가작 입선한 손장순(이화여고), 당선작을 낸 남녘의 윤삼하를 알게 되고, 이미 청주에서는 신동문을 멘토로 한 문학청년 활동의 중심권에 있던 그녀였으니 말이다.
누군들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으리오.
여고 시절, 성가대 뒷자리에서 울려 나오던 소년의 맑고 티없이 고운 테너의 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데야 어찌할 거나. 채워지지 않는 그 빈 가슴을!
그녀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분)의 못 이룬 첫사랑 애슐리 윌키스(레슬리 하워드 분)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 안쓰러워 했다. 클라크 케이블(레드 버틀러 역)의 진한 사내 냄새보다 애슐리의 지고 지순한 사랑ㅡ, 그런 눈동자를 그리워하고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 어디에도 그런 눈동자는 없었다. 김춘배도 아니었고 잠깐 눈길이 마주쳤던 재기 발랄하고 색채 현란한 홍대 회화과의 강록사도 그 테너가 아니었고 더욱 애슐리의 눈동자일 수가 없어서 속앓이는 깊어만 갔다.
서라벌의 일년은 보람은 있었지만 기대에는 못 미쳐 잠시 청주로 내려가 1학기를 쉰다. 56년, 그녀는 <여원> 문학상(시부문 당선작 <노을>/ 심사위원 서정주)을 수상한다. 그리고 복학을 한다.
온 누리가 / 핏빛 눈물에 젖는다 //어디서 //입술을 / 깨물어 뜯는 / 서러운 결심이 있나 보다 //꿈이 / 재가 되어 버리는 / 무서운 불길에서 // 이제 / 그 긴긴 울음은 / 끊어져 가고 // 깊은 골짜기 / 구비구비로 // 빠알갛게 / 傳說이 핀다 <노을> 전문
그리고 서라벌에서 조효송, 김종원, 구석봉 등 <학원> 문예 출신의 재사들과 교류가 활발했고, 다시 만난 서정주 선생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의 관문을 통과한다(1958).
온통 / 밤을 녹인 窓 넘어로 / 運命보다 영롱한 이슬 길이 있고 //꼭 짜는 명주수건 안에 / 말 없는 가슴이 있다(이 대목을 황금찬 선생이 극찬함) // 안개빛 흙벽에 꿈 꾸듯 기대면 / 휘몰려 간 파도가 / 하늘 저 편에 쏟아진다 추천작품 <새벽> 도입부
1958년, 미아리 캠퍼스의 서라벌을 졸업하고 같은 해에 동국대학 영문과 3학년에 편입한다. 편입생으로는 김종원도 있었다. 동대는 학문적 풍토가 좋았고 <동국시집>의 동인으로도 활약했다. 재학 중에는 이창베, 오석규, 이근삼, 오국근 교수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60년, 졸업과 동시에 <동대신문>(주간 송혁)의 기자로 취직, 학생기자이던 윤청강, 장문평등과 함께 4. 19형명의 취재 현장에도 선다. 이런 현장감은 나중에 <여성중앙>(‘73~’77) 기자로의 도약대가 되기도 했다.
‘62년, 그녀는 <현대문학>에 주목할만한 작품 <歸路>와 <겨울 노래(2)>를 발표한다.
강물이 저토록 소리내어 울지만 않았어도 // 난 아무 것도 / 아무 것도 모르고 // 살았을 뻔 했다 <歸路> 결구
바람 부는 문턱에 / 끌리우듯 매달려 / 아름다운 말을 하고 싶어요 // 역시 울고 잇네요 / 당신도 <겨울 노래(2)> 결구
이런 작품은 1968년에 펴낸 첫 시집 <내실>에 실려 있다.
대학 졸업 이듬해, 그녀는 KBS 아나운서로 입사한다. 그 방송 업무는 20대 후반기(‘61~’70) 10년의 그녀를 지배한다. 춘천방송국, 원주뱡송국을 거쳐 주월 한국방송국으로까지 그 맑고 투명한 목소리는 전파를 탄다.
이 기간의 중간토막이던 ‘67년, 그녀는 청주지역 방위군 소위로 만났던 高소령을 재회, 결혼한다. 시 속에 묻혀 헤매는 사이 이미 그녀는 서른살이었다. 고소령은 든든하고 따듯한 가슴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리고 이듬해, 아들 憲을 얻는다. 고소령은 그녀의 제2 시집 <주둔지>(1972) 출판기념회에 약장(훈장)이 빛나는 육군장교 정장을 하고 나와 손님맞이를 했다 해서 ‘참새들의 구설에 오르긴 했어도 그 꿋꿋한 기상이 그녀를 버텨내게 했다. 월남에서는 현장 체험시 <여자 베트콩>으로 뭉클한 서글픔을 낳기도 했다..
우리네 淑이만 할까 // 총에 맞아 / 죽어 있다 / 두 다리 벌리고 입 벌리고 // 몸매는 파닥파닥 비늘 튕기며 / 새파랗다 // 귀신도 풀지 못하는 / 정글 속 독초를 뛰어 넘어 / 나비 날개 파닥이더니 // 가는 숨 / 숨쉬다 / 흙에 누웠다 // 한국군 군인들이 말한다 / “우리네 淑이만 할까” <여자 베트콩> 전문
박정희는 1936년 크리스마스 새벽에 함경북도 길주 외가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원산. 그 뻣속에는 매운 함경도 기질이 살아 숨쉰다. 건국대학에서 석사(‘78~’80)에 이어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김기림론>(지도 교수 정한모)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생활하랴, 아이 키우랴, 글쓰랴 하는 분주함 속에서도 이런 학업을 마친 것은, 그 유전자에 삭풍에도 꺾이지 않은 북녘 기질의 있어서일 것이다
본인의 말로는 <여성중앙>(‘73~’77) 만드느라 동분서주하다 “그 화려함 속의 속 빈 강정 같은 감정이 너무 허전하여” 다시 학교를 찾았단다.
‘93년에는 버팀목이었던 남편과 사별한다. 그 빈 자리를 메우듯, 중앙일보 미술대상에 빛나는 아들 화가 憲이가 발레리나 며느리와 결혼한다. ‘99년에는 이 둘 사이에 꽃 같은 손녀가 태어난다. 아, 새월의 덧없음이여. 코스모스 같던 소녀가 망팔(望八)의 할머니가 되다니...
그녀는 ‘80년부터 청주대, 상명대에서 강단에 서더니 ‘89년부터 2002년까지 한양여대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했는데, 특히 해학 넘친 재주꾼인 고향(청주) 후배인 소설의 김문수와 함께 명교수로 이름을 남긴다. 그 덕택인가. ‘97년부터 2010년까지 선문대 외래교수로 강단을 떠날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시집 <문풍지>(1981), 네 번째 시집 <술래의 편지>(1987)을 펴내는데 시인 이형기는 <백지>에 대해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슴뼈가 맞물리는 / 아프고 고운 소리 / 구경꾼은 모여들어 / 눈물을 흘렸다 // 종이는 추웠지만 / 신들리듯 떨었다 // 피리보다 고운 소리는 / 죽도록 떨어야 나온다
<백자> 부분
제5 시집 <푸르른 날의 그리운 점 하나>(1990), 제6 시집 <다시 만날 그날까지>(1992)의 <풀자루 어멈>은 시인 신경림이 주목한 시가 되었다.
밝은 날/ 얼굴을 볼 수 없는 숨소리 / 발자국의 임자는 / 묵은 눈이 녹을 무렵 발을 끊었다 <풀자루 어멈> 부분
임선달은 / 어멈이 지은 밥을 / 오래 먹고 살았다 <풀자루 어멈> 결구
“위의 표현이야말로 평이하면서도 사람 사는 모습을 더 없이 보여 준다.” ㅡ신경림
제8시집 <그에게만 들키고 싶다>(1999) 그리고 제9시집 <꽃 웃음>(2002)의 연작시 <아아, 두만강>의 다음 대목은 예리한 안목의 독자들 사이에 회자된다.
엄마 무꾸 좀 주오 / 간나새끼 개 소리 친다 / 따뜻한 방안에서 / 고운 딸은 꾹꾹 웃는다 / 엄마 무꾸 좀 주오 / 간나새끼 개 소리 친다 <아아, 두만강> 부분
“이와 같은 모녀의 대화에서 방언은 토속의 깊은 정서를, 모녀에게 마치 성감대처럼 자극하고 환기시켜 준다.” ㅡ시인 홍신선
그리고 어머니의 선종(2004) 뒤의 자리걷이가 작품의 밑그림인 <결핍>도 주목의 대상이다.
장판지 밑에 / 겹겹 / 신문지를 들치자 // 아아 / 첫 아기가 울던 / 원유(原油)의 / 얼룩이 있다 <결핍> 전문
그녀는 강계순, 김윤희, 김송희, 김지향, 박명성, 박현령, 최선령, 신동춘과 함꼐 60년대 말에 주목할만한 동인지 <여류시>에서 활약했다.
뛰어난 패션감각과 미식가로도 이름이 났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분위기 메이커로 더 평가 한다. 동부 이촌동 시절, 그녀는 <여류시> 동인 최선령과 함께 우리 시대의 미식가로 꼽히는 시인 성춘복의 미각 답사의 동료이기도 했다. 박동규 교수도 자주 만났고, 영화감독 문여송, 그 부인 김이연 작가, 정현종 시인, 이석봉 작가, 한남철 작가, 그리고 언제나 사색적이던 김영태 시인 등의 실루엣이 동부 이촌동에 어려 잊지 못한다. 그녀는 말한다.
“김영태는 커피를 제대로 마실 줄 아는 시인이었다.”
그 큰눈에는 남을 배려하는 눈물이 있다. 소설가 김문수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입원해 있을 때, 박정희는 강민과 나와 함께 문병을 간 적이 있다.
“김 교수! 제발 일어나요. 어서요.” 그리고는 하염없이 그 큰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김문수의 부인이 밖으로 데리고 나가 겨우 달랬을 정도다. 그날, 그녀는 우리 둘과 함께 인사동의 조촐한 카페 겸 주점인 '포도나무집'에서 술에 취했다. 그 젖은 골목을 걸으며 그녀는 그녀의 십팔번을 낮게 흥얼거렸다.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네 / 눈물을 삼키며 술을 마신다 / 옛사랑을 마신다 / 정주던 사람은 모두 떠나고 / 서울 하늘 아래 나 홀로 / 아~ 깊어가는 가을 밤만이 …
<59년 왕십리>(이해민 작사 작곡) 에서
충북문학상(1960), 동국문학상(1990), 한국문학상(1992)을 수상했다.
첫댓글 정희여사, 정희 시인,청주의 화려한 그러나 조용한 정희 체네. 문수의 누님 부르는 소리가 그립지? 청주의 문사들 거의 떠났고 두어 사람 곧 떠나겠네......
김승환 작가님의 글은 단단하고도 씹는 맛이 깔끔하고 뒷맛이 아주 좋아요, 뒤 쫓아 다니며 챙겨야 할 듯합니다.
청주 출신 선배 문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고향집에서 감나무를 바라보는 착각 속에 섰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번도 참 맛갈나게 썼네. 이런 글을 한자리에 모으면 우리 문단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겠는데, 그럴 때는 언제 쭘 오려나.
선생님, 저도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참,.. 언제일까요.
역시 선생님의 글을 읽어야 정신이 든다니까요.
선생님 몸도 불편하신데 이렇게 좋은 글로 저를 채찍질 하시는군요.
빨리 쾌차하시길 빕니다.
감기 뒷끝에 폐렴기가지 있다더니 원만하신가. 휴대전화로 비쭉 안부만 묻고... 잘 정돈된 기억력이 세월에 익어 맛난 밑반찬 같습니다. 정모에서 뵙지요.
아프지 말아요. 낭만의 바다에서 헤염치던 그 열정을 오래 오래 풀어 내셔야지요. 밋밋한 내용에 맛을 더 하시느라 고생하신것 같아 부끄럽고 민망하고... 빨리 일어나 한잔 하요!
한잔 하고 그 구수한 59년 왕십리를 들어야 하는데 왜 정모에는 못 오신다는 거요?
어쩜 그렇게 기억력이 특출합니까. 그 고려쩍 얘길, 그것도 외간 여류의 이런저런 얘기까지, 또 해를 거듭하는 역사까지 소상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큰 왕눈 때문인지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요.
호호호호 김영감 !! 또 발작증이 나왔구려 구석구석 잘도 찾어내고 들추어 내구 ... 영감은 우리시대 문단에 큰 보배이구려 오래오래 건강한 모습으로 더 많은 옛이야기를 찾어보시구려...옛날 그시대 낭만이 정말그립구려....고맙소 영감...언제 인사동 나드리 한번하시구려 한잔 거 하게 대접하리다....
훗날 박정희 시인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도 귀중한 자료가 될 글입니다. 이렇게 쓰신 글들이 모아져 자칫 소실될 수 있는 문단사가 묶어지기를 독자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건강은 좀 어떠신가요? 아프지 마세요. 눈이 오면 소주 한 잔에 맥주 섞어서 석 잔 대접할 시간을 기다립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백일장엘 다녀오던 중 어머니와 함께 처음 뵈었던 박정희 선생님..어린 제 눈에 선생님은 마치 신라시대 여인처럼 고운 모습이셨지요..김선생님의 글 속에는 이처럼 과거속의 모든 것을 현재로 불러내시는 아름다움의 힘이 있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