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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能:능할 능. 書:글 서. 不:아니 불. 擇:가릴 택. 筆:붓 필.
[출전]《唐書》〈歐陽詢傳〉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 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저수량(褚遂良)‧유공권(柳公權)‧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不擇筆紙]’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能書]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또 ‘능서불택필’은 ①《왕긍당필진(王肯堂筆塵)》과 ②주현종(周顯宗)의 《논서(論書)》에 각각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②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니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隸書)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다기망양(多岐亡羊)
多:많을 다. 岐:가닥나뉠 기. 亡:잃을 망. 羊:양 양.
[동의어] 망양지탄(亡羊之歎). [유사어] 독서망양(讀書亡羊).
[출전]《列子》〈說符篇〉
달아난 양을 찾는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려서 양을 잃었다는 뜻. 곧 ① 학문의 길이 다방면으로 갈려 진리를 찾기 어려움의 비유. ② 방침이 많아 갈 바를 모름.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楊子:이름은 주(朱), B.C.395?~335?]와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은 물론 양자네 집 하인들까지 청해서 양을 찾아 나섰다. 하도 소란스러워서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 찾는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섰느냐?”
양자의 하인이 대답했다.
“예, 양이 달아난 그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 현명한 제자가 선배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스승인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그 선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큰길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고 학자는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에 와서 이같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시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다다익선(多多益善)
多:많을 다. 益:더할 익. 善:착할‧좋을‧잘할 선.
[동의어] 다다익판(多多益瓣) [출전]《史記》〈淮陰侯列傳〉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뜻.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명장으로서 천하 통일의 일등 공신인 초왕(楚王) 한신(韓信)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회음후(淮陰侯)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長安)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고조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예, 신(臣)은 ‘다다익선’이옵니다.”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오라 장수의 장수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단장(斷腸)
斷:끊을 단. 腸:창자 장.
[유사어] 구회지장(九回之腸).
[출전]《世說新語》<黜免(출면)> 채염(蔡琰)의 <胡笳歌(호가가)>
창자가 끊어졌다는 뜻. 전하여,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의 비유.
진(晉:東晉, 317~420) 나라의 환온(桓溫)이 촉(蜀) 땅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자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三峽)을 통과할 때 있었던 일이다.
환온의 부하 하나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배에 실었다. 어미 원숭이가 뒤따라왔으나 물 때문에 배에는 오르지 못하고 강가에서 슬피 울부짖었다. 이윽고 배가 출발하자 어미 원숭이는 강가에 병풍처럼 펼쳐진 벼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배를 쫓아왔다. 배는 100여 리쯤 나아간 뒤 강기슭에 닿았다. 어미 원숭이는 서슴없이 배에 뛰어올랐으나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안 환온은 크게 노하여 원숭이 새끼를 붙잡아 매에 실은 그 부하를 매질한 다음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주] 삼협 : 사천(四川)‧호북(湖北) 두 성(省)의 경계에 있는 양자강(揚子江:長江) 중류의 세 협곡(峽谷). 곧 구당협(瞿塘峽)‧무협(巫峽)‧서릉협(西陵峽). 예로부터 유명한 경승지(景勝地). 현재 큰 댐을 건설하는 공사가 진행 중에 있음.
당랑거철(螳螂拒轍)
螳:버마재비 당. 螂:버마재비 랑. 拒:막을 거. 轍:수레바퀴 자국 철.
[동의어] 당랑지부(螳螂之斧), 당랑당거철(螳螂當車轍), 당랑지력(螳螂之力).
[유사어] 당랑규선(螳螂窺蟬). [출전]《韓語外傳》<卷八>,《文選》
사마귀[螳螂]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가로막는다는 뜻. 곧 ① 허세. ② 미약한 제 분수도 모르고 강적에게 항거하거나 덤벼드는 무모한 행동의 비유.
①《한시외전(韓時外傳)》〈권팔(卷八)〉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B.C.794~731)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가던 도중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螳螂之斧]’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허, 맹랑한 놈이군. 저건 무슨 벌레인고?”
장공이 묻자 수레를 호종하던 신하가 대답했다.
“사마귀라는 벌레이옵니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은 모르는 놈이 온데, 제 힘도 생각지 않고 강적에게 마구 덤벼드는 버릇이 있사옵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말했다.
“저 벌레가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천하 무적의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수레를 돌려 피해가도록 하라.”
[주]《한시외전》에서의 ‘당랑지부(螳螂之斧)’는 사마귀가 먹이를 공격할 때에 앞발을 머리 위로 추켜든 모습이 마치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과 흡사한데서 온 말이나 ‘당랑거철’과 같은 뜻으로 쓰임.
②《문선(文選)》에 보면 ‘당랑거철’은 삼국 시대(三國時代)로 접어들기 직전, 진림(陳琳)이란 사람이 유비(劉備) 등 군웅(群雄)에게 띄운 격문(檄文)에도 나온다.
“조조(曺操)는 이미 덕을 잃은 만큼 의지할 인물이 못된다. 그러니 모두 원소(袁紹)와 더불어 천하의 대의를 도모함이 마땅할 것이다. ……지금 열악한 조조의 군사는 마치 ‘사마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는 것[螳螂拒轍]’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대기만성(大器晩成)
大:클 대. 器:그릇 기. 晩:늦을 만. 成:이룰 성.
[대응어] 대방무우(大方無隅). [동의어] 대기난성(大器難成).
[유사어] 대재만성(大才晩成). [출전]《三國志》〈魏志 崔琰傳〉.《後漢書》〈馬援傳〉.《老子》〈四十一章〉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뜻. 곧 ①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의 비유. ② 만년(晩年)이 되어 성공하는 일. ③ 과거에 낙방한 선비를 위로하여 이르던 말.
① 삼국 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란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 하고 일가 친척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②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25~57)때 마원(馬援)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까지 된 인물인데, 복파장군이란 전한(前漢) 이후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 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崔況)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대기만성’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재목으로 다듬어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自重)하라.”
③《노자(老子)》에도 ‘큰 네모[四角]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方無隅 大器晩成]’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 긴 안목으로 봐 주자는 자애어린 이 말이, 요즈음에는 각 분야에서 ‘늦되는 사람’에게 위로 겸 농담조로 얼버무릴 때에도 쓰임.
대의멸친(大義滅親)
大:클 대. 義:옳을 의. 滅:멸할 멸. 親:친할‧육친 친.
[출전]《春秋左氏傳》〈隱公三‧四年條〉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한다는 뜻으로, 국가나 사회의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의 정도 돌보지 않는다는 말.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환왕(桓王) 원년(元年:B.C.719)의 일이다. 위(衛)나라에서는 공자(公子) 주우(州吁)가 환공(桓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후의 자리에 올랐다. 환공과 주우는 이복 형제간으로서 둘다 후궁의 소생이었다.
선군(先君) 장공(莊公) 때부터 충의지사로 이름난 대부 석작(石碏)은 일찍이 주우에게 역심(逆心)이 있음을 알고 아들인 석후(石厚)에게 주우와 절교하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석작은 환공의 시대가 되자 은퇴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석작이 우려했던 주우의 반역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반역은 일단 성공했으나 백성과 귀족들로부터의 반응이 좋지 않자 석후는 아버지 석작에게 그에 대한 해결책을 물었다. 석작은 이렇게 대답했다.
“역시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왕실을 예방하여 천자(天子)를 배알(拜謁)하고 승인을 받는 게 좋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천자를 배알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주왕실과 각별한 사이인 진(陳)나라 진공(陳公)을 통해서 청원하도록 해라. 그러면 진공께서 선처해 주실 것이다.”
이리하여 주우와 석후가 진나라로 떠나자 석작은 진공에게 밀사를 보내어 이렇게 고하도록 일렀다.
“바라옵건대, 주군(主君)을 시해한 주우와 석후를 잡아 죽여 대의를 바로잡아 주시 오소서.”
진나라에서는 그들 두 사람을 잡아 가둔 다음 위나라에서 파견한 입회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했다고 한다.
도외시(度外視)
度:법도 도. 外:바깥 외. 視:볼 시.
[유사어] 치지도외(置之度外). [반의어] 문제시(問題視).
[참조] 오합지중(烏合之衆), 정중지와(井中之蛙).
[출전]《後漢書》〈光武記〉
① 가욋것으로 봄.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함. ② 문제삼지 않음. 불문에 붙임.
후한의 시조 광무제(光武帝)때의 일이다. 광무제 유수(劉秀)는 한(漢:前漢)나라를 빼앗아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현(劉玄)을 세워 황제로 삼고 한나라를 재흥했다.
대사마(大司馬)가 된 유수는 그 후 동마(銅馬)‧적미(赤眉) 등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으나 천하 통일에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윽고 제(齊) 땅과 강회(江淮) 땅이 평정되자 중원(中原)은 거의 광무제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벽지인 진(秦) 땅에 웅거하는 외효(隗囂)와 역시 산간오지인 촉(蜀) 땅의 성도(成都)에 거점을 둔 공손술(公孫述)만은 항복해 오지 않았다.
중신들은 계속 이 두 반군의 토벌을 진언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이렇게 말하며 듣지 않았다.
“이미 중원은 평정(平定)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문제시할 것 없소[度外視].”
광무제는 그간 함께 많은 고생을 한 병사들을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쉬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청도설(道聽塗說)
道:길 도. 聽:들을 청. 塗:길 도. 說:말씀 설.
[유사어] 구이지학(口耳之學), 가담항설(街談巷說), 유언비어(流言蜚語).
[출전]《論語》〈陽貨篇〉,《漢書》〈藝文志〉,《荀子》〈勸學篇〉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한다는 뜻. 곧 ① 설들은 말을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옮김. ②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뜬소문.
①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논어(論語)》〈양화편(陽貨篇)〉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道聽塗說]’은 덕을 버리는 것과 같다[德之棄也].”
길거리에서 들은 좋은 말[道聽]을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수양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길거리에서 바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리는 것[塗說]은 스스로 덕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좋은 말은 마음에 간직하고 자기 것으로 하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고, 천도(天道)를 지상(地上)에서 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는,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억제하고 인덕(仁德)을 쌓으며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덕을 쌓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논어》에서 이르고 있다.
② 후한시대, 반고(班固)가 엮은《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체로 소설이란 것의 기원은 임금이 하층민의 풍속을 알기 위해 하급 관리에게 명하여 서술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세상 이야기라든가 길거리의 뜬소문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道聽塗說]’ 무리가 지어낸 것이다.”
소설이란 말은 이런 의미에서 원래는 ‘패관(稗官:하급 관리) 소설’이라고 일컬었으나 나중에 그냥 ‘소설’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③《순자(荀子)》〈권학편(權學篇)〉에는 다언(多言)을 이렇게 훈계하고 있다.
“‘소인배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 곧바로 입으로 흘러나오고[口耳之學]’ 마음 속에 새겨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귀와 입 사이는 불과 네 치[口耳四寸].’ 이처럼 짧은 거리를 지날 뿐이라면 어찌 일곱 자[七尺] 몸을 훌륭하게 닦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학문을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닦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배운 것을 금방 다른 사람에게 고하고 자기를 위해 마음 속에 새겨 두려고 하지 않는다. 군자의 학문은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하지만 소인배의 학문은 인간을 못쓰게 망쳐 버린다. 그래서 묻지 않은 말도 입밖에 낸다. 이것을 ‘잔소리’라 하며, 하나를 묻는데 둘을 말하는 것을 ‘수다[饒舌]’라고 한다. 둘 다 잘못되어 있다. 참된 군자(君子)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다.”
어느 세상에도 오른쪽 귀로 들은 것을 왼쪽 사람에게 털어놓는 수다쟁이 정보통이 많다. 더구나 그 정보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이에 점점 꼬리를 끌게 마련이다. ‘이런 무리는 해가 있을 뿐’이라며 공자, 순자는 경계하고 있다.
독안룡(獨眼龍)
獨:홀로 독. 眼:눈 안. 龍:용 룡.
[출전]《五代史》〈唐記〉,《唐書》〈李克用傳〉
애꾸눈의 용이란 뜻. 곧 ① 애꾸눈의 영웅 또는 용맹한 장수. ② 애꾸눈의 고덕(高德)한 사람.
당나라 18대 황제인 희종(僖宗:873~883)때의 일이다. 산동(山東) 출신인 황소(黃巢)는 왕선지(王仙芝) 등과 반란을 일으킨지 5년만에 10여 만의 농민군을 이끌고 마침내 도읍인 장안에 입성했다. 그리고 스스로 제제(齊帝)라 일컫고 대제국(大齊國)을 세웠다.
한편 성도(成都)로 몽진(蒙塵)한 희종은 돌궐족(突厥族) 출신인 맹장 이극용(李克用:856~908)을 기용하여 황소 토벌을 명했다. 당시 4만 여에 이르는 이극용의 군사는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사정없이 맹공을 가했기 때문에 반란군은 '갈가마귀의 군사[鴉軍]가 왔다 !‘며 심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19대 황제인 소종(昭宗:883~903)이 즉위한 그 이듬해 마침내 반란군은 토멸되었고 황소도 패사(敗死)하고 말았다. 이극용은 그 공에 의해서 농서[隴西:감숙성(甘肅省)] 군왕(郡王)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극용은 숙적 주전충[朱全忠:852~912,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귀순한 뒤 황소 토멸에 공을 세워 동평군왕(東平郡王)이 됨]과 정권을 다투다가 패하고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주전충은 20대 황제인 애종(哀宗:903~907)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량(後梁:907~923)을 세웠으나 16년 후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李存勗:후당(後唐)의 초대 황제인 장종(莊宗)]에게 멸망했다.
맹장 이극용에 대해《오대사(五代史)》〈당기(唐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극용은 젊고 효용(驍勇:사납고 날쌤)했는데 군중(軍中)에서는 이아아(李鴉兒)라고 일컬었다. 그의 눈은 애꾸눈이었다. 그가 귀한 자리에 오르자 일컬어 ‘독안룡’이라고 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同:한가지 동. 病:앓을 병. 相:서로 상. 憐:불쌍히 여길 련.
[유사어] 동우상구(同優相救), 동주상구(同舟相救), 동기상구(同氣相救), 동악상조(同惡相助),동류상구(同類相救), 오월동주(吳越同舟), 유유상종(類類相從).
[참조] 와신상담(臥薪賞膽).[출전]《吳越春秋》〈闔閭內傳〉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딱하게 여겨 동정하고 돕는다는 말.
전국시대인 기원전 515년, 오(吳)나라의 공자 광(光)은 사촌 동생인 오왕 요(僚)를 시해한 뒤 오왕 합려(闔閭)라 일컫고, 자객을 천거하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한 오자서(伍子胥)를 중용했다.
오자서는 7년 전 초나라의 태자 소부(太子少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아버지와 역시 관리였던 맏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실은 유능한 광(합려)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초나라 공략의 길이 열릴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 해 또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비(伯嚭)가 오나라로 피신해 오자 오자서는 그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여 대부(大夫) 벼슬에 오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자서는 대부 피리(被離)에게 힐난을 받았다.
“백비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鷹視虎步],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惡相)이오. 그런데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인물을 천거하였소?”
피리의 말이 끝나자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하상가(河上歌)에도 ‘동병상련’ 동우상구(同憂相救)란 말이 있듯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그로부터 9년 후 합려가 초나라를 공략, 대승함으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자서는 불행히도 피리의 예언대로 월(越)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모함에 빠져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주] 오자서 : 춘추 시대의 초(楚)나라 사람. 이름은 원(員). 초나라의 태자소부(太子少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아버지 오사(吳奢)와 형 오상(伍尙)이 초나라 평왕(平王)에게 처형당하자 오나라로 망명함. 9년 후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의 도읍 영(郢)으로 쳐들어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300대나 매질하고 나서야 원한을 풀었다고 함.
[참조] 일모도원(日暮途遠).
동호지필(董狐之筆)
董:동독할 동. 狐:여우 호. 之:갈 지(…의). 筆:붓 필.
[동의어] 태사지간(太史之簡).
[출전]《春秋左氏傳》〈宣公二年條〉
‘동호의 직필(直筆)’이라는 뜻. 곧 ① 정직한 기록. 기록을 맡은이가 직필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음을 이름. ②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적어 역사에 남기는 일.
춘추 시대, 진(晉)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대신인 조천(趙穿)이 무도한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당시 재상격인 정경(正卿) 조순(趙盾)은 영공이 시해되기 며칠 전에 그의 해학을 피해 망명 길에 올랐으나 국경을 넘기 직전에 이 소식을 듣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사관(史官)인 동호(董狐)가 공식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조순, 그 군주를 시해하다.’
조순이 이 기록을 보고 항의하자 동고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대감이 분명히 하수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감은 당시 국내에 있었고, 또 도읍으로 돌아와서도 범인을 처벌하거나 처벌하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감은 공식적으로는 시해자(弑害者)가 되는 것입니다.”
조순은 그것을 도리라 생각하고 그대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훗날 공자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었다. 법을 지켜 올곧게 직필했다. 조선자(趙宣子:조순)도 훌륭한 대신이었다. 법을 바로잡기 위해 오명을 감수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국경을 넘어 외국에 있었더라면 책임은 면했을 텐데…….”
득록망촉(得隴望蜀)
得:얻을 득. 隴:땅 이름 롱. 望:바랄 망. 蜀:나라 이름 촉.
[준말] 망촉(望蜀). [동의어] 평롱망촉(平隴望蜀), 망촉지탄(望蜀之歎). [유사어] 계학지욕(谿壑之慾), 차청차규(借廳借閨), 거어지탄(車魚之歎), 기마욕솔노(騎馬欲率奴). [참조]계륵(谿肋). [출전]《後漢書》〈光武記〉〈獻帝記〉.《三國志》〈魏志〉
농을 얻고 나니 촉을 갖고 싶다는 뜻. 곧 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 ② 한 가지 소원을 이룬 다음 또다시 다른 소원을 이루고자 함을 비유. ③ 만족할 줄 모름의 비유.
①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A.D. 26)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적미지적(赤眉之賊)의 유분자(劉盆子)를 비롯하여 농서(隴書:감숙성)에 외효(隗囂), 촉(蜀:사천성)에 공손술(公孫述), 수양(睢陽:하남성)에 유영(劉永), 노강(盧江:안휘성)에 이헌(李憲), 임치(臨淄:산동성)에 장보(張步) 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중 유분자‧유양‧이헌‧공손술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수호(修好)하고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僭稱)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建武) 9년(32), 광무제외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아들 외구순(隗寇恂)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得隴望蜀].’”
그로부터 4년 후인 건무 13년(37),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 평정의 숙원을 이루었다.
② 광무제 때로부터 약 200년 후인 후한 헌제(獻帝:189~226)말, 즉 삼국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의 일이다. 헌제 20년(220), 촉을 차지한 유비(劉備)가 강남의 손권(孫權)과 천하 대사를 논하고 있을 때 조조(曹操)는 단숨에 한중(漢中:섬서성 서남쪽 한강 북안의 땅)을 석권하고 농(隴) 땅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조조의 명장(名將) 사마의[司馬懿:자(字)는 중달(仲達), 진(晉)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의 할아버지]가 진언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진격하면 유비의 촉도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만족할 줄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농을 얻었으니 촉까지 바라지 않소.”
이리하여 거기서 진격을 멈춘 조조는 헌제 23년(223), 한중으로 진격해 온 유비의 촉군(蜀軍)과 수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계륵(鷄肋)’이란 말을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다.
등용문(登龍門)
登:오를 등. 龍:용 룡. 門:문 문.
[반의어] 점액(點額). 용문점액(龍門點額).
[출전]《後漢書》〈李應傳〉
용문에 오른다는 뜻. 곧 ① 입신 출세의 관문을 일컫는 말. ② 영달의 비유. ③ 주요한 시험의 비유. ④ 유력자를 만나는 일.
용문(龍門)은 황하(黃河) 상류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의 경계에 있는 협곡의 이름인데 이곳을 흐르는 여울은 어찌나 세차고 빠른지 큰 물고기도 여간해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오르기만 하면 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따라서 ‘용문에 오른다’는 것은 극한의 난관을 돌파하고 약진의 기회를 얻는다는 말인데 중국에서는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입신 출세의 제일보라는 뜻으로 ‘등용문’이라 했다.
‘등용문’에 반대되는 말을 ‘점액(點額)’이라 한다. ‘점(點)’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고 ‘액(額)’은 이마인데 용문에 오르려고 급류에 도전하다가 바위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고 하류로 떠내려가는 물고기를 말한다. 즉 출세 경쟁에서의 패배자, 중요 시험에서의 낙방자를 가리킨다.
후한(後漢) 말, 환제(桓帝:146~167)때 정의파 관료의 지도적 인물에 이응[李應:자는 원례(元禮)]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청주자사(靑州刺史)‧촉군태수(蜀郡太守)‧탁료장군(度遼將軍)을 거쳐 하남윤(河南尹:하남 지방의 장관)으로 승진했을 때 환관의 미움을 받아 투옥 당했다. 그러나 그 후 유력자의 추천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경찰청장)가 되어 악랄한 환관 세력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그의 명성은 나날이 올라갔다. 태학(太學)의 청년 학생들은 그를 경모하여 ‘천하의 본보기는 이원례’라 평했으며 신진 관료들도 그의 추천을 받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알고, 이를 ‘등용문’이라 일컬었다.
[주] 황하 : 청해성(靑海省)의 암네 마친 산맥에서 발원하여 황토 고원을 침식하면서 동쪽의 발해만(渤海灣)으로 흘러 들어감.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 길이 4100Km. 황하(黃河)의 큰 지류인 위수(渭水) 유역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임.
마부작침(磨斧作針)
磨:갈 마. 斧:도끼 부. 作:지을(만들) 작. 針:바늘 침.
[동의어] 철저성침[鐵杵成針(鍼)]. 마저작침[磨杵作針(鍼)].
[유사어] 우공이산(愚公移山). 수적천석(水滴穿石).
[유사어]《唐書》〈文藝(苑)傳〉.《方與勝覽(방여승람)》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 곧 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계속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함의 비유. ② 노력을 거듭해서 목적을 달성함의 비유. ③ 끈기 있게 학문이나 일에 힘씀의 비유.
시선(詩仙)으로 불리던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자는 태백(太白), 701~762]의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백은 아버지의 임지인 촉(蜀) 땅의 성도(成都)에서 자랐다. 그때 훌륭한 스승을 찾아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가 수학(修學)했는데 어느 날 공부에 싫증이 나자 그는 스승에게 말도 없이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집을 항해 걷고 있던 이백이 계곡을 흐르는 냇가에 이르자 한 노파가 바위에 열심히 도끼(일설에는 쇠공이[鐵杵])를 갈고 있었다.
“할머니,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바늘을 만들려고 도끼를 갈고 있다[磨斧作針].”
“그렇게 큰 도끼가 간다고 바늘이 될까요?”
“그럼, 되고 말고.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이백은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생각을 바꾼 그는 노파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 후 이백은 마음이 해이해지면 바늘을 만들려고 열심히 도끼를 갈고 있던 그 노파의 모습을 떠올리곤 분발했다고 한다.
마이동풍(馬耳東風)
馬:말 마. 耳:귀 이. 東:동녘 동. 風:바람 풍.
[유사어] 우이독경(牛耳讀經). 오불관언(吾不關焉). 대우탄금(對牛彈琴). [출전]《李太白集》〈券十八〉
말의 귀에 동풍(東風:春風)이 불어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뜻. 곧 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대로 흘려 버림의 비유. ②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느끼지 못함의 비유. ③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음의 비유.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李白)이 벗 왕십이(王十二)로부터〈한야독작유회[寒夜獨酌有懷(추운 방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라는 시 한 수를 받자 이에 답하여〈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라는 시를 보냈는데 ‘마이동풍’은 마지막 구절에 나온다. 장시(長詩)인 이 시에서 이백은 “우리네 시인들이 아무리 좋은 시를 짓더라도 이 세상 속물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울분을 터뜨리고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
세인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흔드네
[世人聞此皆掉頭(세인문차개도두)]
마치 동풍이 쏘인 말의 귀처럼
[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
[주] 동풍은 봄바람의 뜻. 그 동풍이 말의 귀를 쏘아(스쳐) 봤자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 것임. 즉 세인들이 시인의 말이나 걸작에 기울이는 관심도가 그 정도로 낮다 - 무관심하다고 이백은 비분(悲憤)하고 있는 것임.
만가(輓歌)
輓:수레 끌 만. 歌:노래 가.
[출전]《古今洼》〈音樂篇〉,《晉書》〈禮志篇〉,《古詩源》 〈薤露歌〉〈蒿里曲〉
상여를 메고 갈 때 부르는 노래.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이 즉위하기 직전의 일이다. 한나라 창업 삼걸(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에게 급습 당한 제왕(齊王) 전횡(田橫)은 그 분풀이로 유방이 보낸 세객(說客) 역이기(酈食其)를 삶아 죽여 버렸다. 이윽고 고조가 즉위하자 보복을 두려워한 전횡은 500여 명의 부하와 함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지금의 전횡도(田橫島)로 도망갔다.
그 후 고조는 전횡이 반란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그를 용서하고 불렸다. 전횡은 일단 부름에 응했으나 낙양을 30여리 앞두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포로가 되어 고조를 섬기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전횡의 목을 고조에게 전한 고조에게 전한 두 부하를 비롯해서 섬에 남아있던 500여 명도 전횡의 절개를 경모하여 모두 순사(殉死)했다.
그 무렵, 전횡의 문인(門人)이 해로가(薤露歌)‧호리곡(蒿里曲)이라는 두 장(章)의 상가(喪歌)를 지었는데 전횡이 자결하자 그 죽음을 애도하여 노래했다.
부추 잎의 이슬은 어찌 그리 쉬이 마르는가 [薤上朝露何易晞(해상조로하이희)]
이슬은 말라도 내일 아침 다시 내리지만 [露晞明朝更復落(노희명조갱부락)]
사람은 죽어 한 번 가면 언제 다기 돌아오나 [人死一去何時歸(인사일거하시귀)] -해로가-
호리는 뉘 집터인고 [蒿里誰家地(호리수가지)]
혼백을 거둘 땐 현‧우가 없네 [聚斂魂魄無賢愚(취렴혼백무현우)]
귀백은 어찌 그리 재촉하는고 [鬼伯一何相催促(귀백일하상최촉)]
인명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못하네 [人命不得少踟躕(인명부득소지주)] -호리곡-
이 두 상가는 그 후 7대 황제인 무제(武帝:B.C.141~87) 때에 악부(樂府) 총재인 이연년(李延年)에 의해 작곡되어 해로가는 공경귀인(公卿貴人), 호리곡은 사부서인(士夫庶人)의 장례 시에 상여꾼이 부르는 ‘만가’로 정해졌다고 한다.
[주] 해로가 : 인생은 부추 잎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음을 노래한 것.
호리 : 산동성(山東省)의 태산(泰山) 남쪽에 있는 산 이름. 옛 중국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넋이 이곳으로 온다고 믿어 왔음.
만사휴의(萬事休矣)
萬:일만 만. 事:일 사. 休:그칠‧쉴 휴. 矣:어조사 의(…이다).
[유사어] 능사필의(能事畢矣). [출전]《宋史》〈荊南高氏世家〉
모든 일이 끝장났다(가망 없다)는 뜻으로, 어떻게 달리 해볼 도리가 없다는 말.
당나라가 망하고 송(宋:北宋, 960~1127) 나라가 일어날 때까지 53년 동안에 중원에는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의 다섯 왕조가 일어났다가 쓰러지곤 했는데 이 시대를 오대[五代:후오대(後五代)의 준말]라 일컫는다.
또 다시 중원을 벗어난 각 지방에는 전촉(前蜀)‧오(吳)‧남한(南漢)‧형남(荊南)‧오월(吳越)‧초(楚)‧민(閩)‧남당(南唐)‧후촉(後蜀)‧북한(北漢)등 열 나라가 있었는데 역사가는 이를 오대 십국(五代十國)이라 일컫고 있다.
이들 열 나라 중에는 형남과 같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도 있었는데 이 나라의 왕인 고종회(高從誨)는 아들 고보욱(高保勖)을 분별없이 귀여워했다. 그래서 고보욱은 남이 아무리 노한 눈으로 쏘아보아도 싱글벙글 웃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일이 끝장났다[萬事休矣].’
과연 고보욱의 대(代)에 이르러 형남은 멸망하고 말았다.
망국지음(亡國之音)
亡:망할 망. 國:나라 국. 之:갈 지(…의). 音:소리 음.
[동의어] 망국지성(亡國之聲). [유사어] 정위지음(鄭衛之音).
[출전]《韓非子》〈十過篇〉.《禮記》〈樂記〉
나라를 망치는 음악이란 뜻. 곧 ① 음란하고 사치한 음악. ②망한 나라의 음악. ③ 애조(哀調)를 띤 음악.
① 춘추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던 도중 복수[濮水:산동성(山東省) 내] 강변에 이르자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멋진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영공은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잠시 넋을 잃고 듣다가 수행중인 사연(師涓)이란 악사(樂師)에게 그 음악을 잘 기억해두라고 했다.
이윽고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 평공(平公) 앞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들은 새로운 음악’이라고 자랑했다. 당시 진나라에는 사광(師曠)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는데 그가 음악을 연주하면 학이 춤을 추고 흰 구름이 몰려든다는 명인이었다. 위나라 영공이 새로운 음악을 들려준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입궐한 사광은 그 음악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급히 사연의 손을 잡고 연주를 중지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망국의 음악[亡國之音]’이오.”
이 말에 깜짝 놀란 영공과 평공에게 사광은 그 내력을 말해 주었다.
“그 옛날 은(殷)나라 주왕(紂王)에게는 사연(師延)이란 악사가 있었사옵니다. 당기 폭군 주왕은 사연이 만든 신성백리(新聲百里)라는 음미(淫蘼:음란하고 사치함)한 음악에 도취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속에서 음일(淫佚)에 빠졌다가 결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주벌(誅伐)당하고 말았나이다. 그러자 사연은 악기를 안고 복수에 토신 자살했는데, 그 후 복수에서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국의 음악’이라고 무서워하며 그곳을 지날 땐 귀를 막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사옵니다.”
②《예기(禮記)》〈악기(樂記)〉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복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망국지음’이다.”
망양지탄(望洋之歎)
望:바랄‧바라볼 망. 洋:바다 양. 之:갈 지. 歎:탄식할‧감탄할 탄.
[참조] 정중지와(井中之蛙). [출전]《莊子》〈秋水篇〉
넓은 바다를 보고 감탄한다는 뜻. 곧 ① 남의 원대함에 감탄하고, 나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 ② 제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탄식.
먼 옛날 황하 중류의 맹진(孟津:하남성 내)에 하백(河伯)이라는 하신(河神)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럼, 황하보다 더 큰 물이 있단 말인고?”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해 뜨는 쪽에 북해(北海)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강이 사시 장철 그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 넓이는 실로 황하의 몇 갑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 큰 강이 있을까? 어쨌든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겠네.”
황하 중류의 맹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하백은 늙은 자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가을이 오자 황하는 연일 쏟아지는 비로 몇 갑절이나 넓어졌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지난날 늙은 자라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강 하류로 내려가 북해를 한번 보기로 했다. 하백이 북해에 이르자 그곳의 해신(海神)인 약(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잘 왔소. 진심으로 환영하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은 이제까지 세상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다.
“나는 북해가 크다는 말을 듣고도 이제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의 단견(短見)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북해의 신은 웃으며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였구려. 대해(大海)를 모르면 그대는 식견이 낮은 신으로 끝나 버려 사물의 도리도 모를 뻔했소. 그러나 이제 그대는 거기서 벗어난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