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정려각정비명三綱旌閭閣庭碑銘
『사회생활의 기본도덕이 삼강三綱이요 인간생활의 기본규범이 오륜五倫이니 중忠은 오늘에 와서는 국민이 국가에 대한 공민도덕公民道德이며 효孝와 정렬貞烈은 국가의 단위사회인 일가一家의 도덕이다. 인간이 국가에 대하여 도리道理를 다하면 충이요, 아들이 양친에 대하여 지성至誠을 다하면 효요, 부부가 서로 애정愛情을 다하면 정렬이다. 우리는 삼강없이는 살 수 없으되 삼강의 수범垂範되기는 어렵다. 자고로 국민이 충으로 나라에 공(功)을 세우면 표정表旌하여 만고에 이름을 빛에게 하며 아들이 효를 다하면 또한 표정하여 후세에까지 이를 창현彰顯케 하며 부인이 정렬을 다하면 이를 또한 표정하여 영구히 만인의 귀감으로 삼나니 이는 삼강이 국가 사회생활의 기본윤리인 소이所以이다.
일가에 충신 효자 정렬忠臣孝子貞烈이 하나만 나와도 일문이 영광이거늘 하물며 서흥김씨가문에 일충 일효 이열一忠一孝二烈이 연이어 상승전계相承傳繼하여 표정되었으니 강기 부식綱紀扶植의 공이 크고 높아 참으로 영예로운 일이다.
서흥김씨는 신라 경순왕 제四자 보국대안군 평장사輔國大安君平章事 휘(諱 은열殷說 공의 후예로서 시조는 금오위정용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 휘諱 보寶 공이며 그 손에 광정대부도첨의시랑匡靖大夫都僉議侍郞 찬성사상장군贊成事上將軍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천록天祿공이 충절로서 서흥군瑞興君으로 봉(封)해 짐에 서흥 관명이 불려졌다.
서흥세가에는 서흥군의 순정 충훈(純正忠勳)과 현손 자헌대부 예조판서공資憲大夫禮曺判書公 중건中乾의 청백 정직淸白正直 그리고 통정대부 예조참의공通政大夫 禮曺參議公 중곤中坤의 염결 문아廉潔文雅 및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선생의 성리대유性理大猷 등 명인을 배출하였으므로 나여羅麗 이래로 명문인데 충요 이열(忠孝二烈)이 남으로 더욱 빛나게 되었다.
판서공의 六대손 김공 충수忠守의 자는 여문汝文이요 호號는 창죽헌蒼竹軒이며 부父는 정략장군 행충무위부사과定略將軍行忠武衛副司果 인嶙이며 모母는 청주한씨 참찬관參贊官 경면慶綿의 따님이고 명종4년 己酉(1549)에 양지현 월노동陽智縣月老洞에서 태어났다. 부친에게 글을 배우니 6세에 이미 성현의 자질이 드러나 달을보고 다음 시를 지었다.
半鉤掛西山 望圓復出東 點檢人間事 盈虛彼月中
반 갈구리 서산에 걸렸더니
둥근 달 동쪽에 다시 솟네
인간사도 살펴보면
모두가 저 달과 같구나
공은 임진왜란 때 죽산부竹山府에 왜적이 침입하자 포의한사布衣寒士로서 의병을 모아 적과 싸워 백여명이나 무찔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하고 총기불급銃器不及으로 적에게 잡힌 몸이 되니 같이 분전하던 아들 함涵은 부군을 구출하고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마침내 부자가 선조25년 壬辰(1592) 10월19일 동시 순절하니 부(父) 창죽헌공蒼竹軒公은 44세로서 충절을 다했고 자(子) 금제공錦齊公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충절과 효절을 다했으니 충효이강忠孝二綱이 일시에 빛났다.
창죽헌공 부인은, 진주류씨로 부호군 륜倫의 따님이다. 함의 字는 경현敬賢이요, 호는 금재錦齊이며 부인은 남양홍씨 부제학副提學 경유慶裕의 따님이다. 선조39년 병오(丙午 1606) 먼저 금제공의 효절을 듣고 명정命旌했으며, 창죽헌공의 충절은 숙종26년 경진(庚辰 1700)에 증손진사曾孫進仕 후垕의 상소로 명정命旌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표절表節이 없어서 영조16년 경신(庚申 1740)에 5대손 대영大榮과 7대손 동현東賢의 상소로 창죽헌공蒼竹軒公은 증봉정대부 사헌부장령贈奉正大夫司憲府掌令으로, 금제공錦齊公은 증조산대부 사헌부지평贈朝散大夫司憲府持平으로 각각 추서追敍되었다.
금제공의 1남 통덕랑通德郞 백려伯礪가 있고 훈塤, 감堪, 배培, 지墀 등 네 손자가 있었다. 3손 통덕랑 배培의 부인 온양 정씨는 인조13년 병자(丙子1636)에 호란胡亂을 당하여 어린 두 딸을 업고 안고 이천 거마산巨馬山 속에 피신했으나 호적의 추적을 받아 욕을 면키 어려움에 이르자 두 어린 딸과 함께 못에 빠져 순절하니 그 칭송이 일세에 빛났으며 이천 자래동子來洞에 지금도 일구一丘에 삼총三塚이 당시의 처참함과 정렬貞烈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 뒤 영조16년 경신(庚申 1740)에 손 대영大榮과 5대손 동현東賢의 상소로 명정命旌되었다.
또 금제공錦齊公의 5대손 통덕랑 익성通德郞益聖의 부인 청주한씨는 영조 辛亥년에 부군夫君이 위독危篤하자 단지수혈(斷指垂血: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먹이는 것)로 부군을 소생시켰으나 수일 후 끝내 임종하니 자식이 없는 것은 부도婦道)를 다하지 못함이라 하여 부군을 따라 순절하니 또한 정렬을 칭송하는 소리가 일세에 높았다. 6세 후(六世後) 영조13년 정사(丁巳 1737)에 후손 동현東賢의 상소로 명정命旌되었다. 이렇게 부자 양대父子兩代가 충효忠孝로 표정表旌되고 또 표절表節되어 품계와 증직이 내려지고 이어서 일가一家에 두 정렬貞烈이 표정되었다.
선조 39년 병오(丙午 1606)에 처음 금제공의 효절로 월노동月老洞 소구옥小舊屋에 효자정문이 서게 되고 이어서 숙종26년 경진(庚辰 1700)에 창죽헌공의 충절忠節로 충신정문忠臣旌門이 한 집에 겹쳐서 세워졌다. 여기에 영조13년 정사(丁巳 1737) 청주한씨淸州韓氏부인의 정렬정문貞烈旌門이 삼중三重)으로 세워지고 이어서 영조16년 경신(庚申 1740)에 온양정씨溫陽鄭氏부인의 정렬정문貞烈旌門이 사중四重으로 가加해지니 참으로 만고萬古에 드문 일이다.
일찍이 신라 때에 박씨 제상朴氏堤上 일가에 삼강이 있어 세인이 추앙한 바이나 여기 서흥 일문에 또한 삼강이 빛나니 실로 백세의 고표高標이다. 이에 삼강속록三綱續錄을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하고 또 영조 30년(1754)에 종손 시집時集과 현손 순구舜九 등이 상의구재相議鳩財하여 일간정각一間旌閣을 짓고 민참판閔參判 우수遇洙의 기문을 받아 사면에 사현판四懸板을 걸었다.
그 후 고종 27년 경인(庚寅 1890)에 정문이 너무 구석진데 있다하여 수백보 밖에 새로 이건移建 하였다.
그러나 세태의 변천과 고삼지古三池 수리관개공사로 다시 옮기지 않을 수 없어서 광복후 병신(丙申년 1956)에 사손嗣孫 택수澤洙와 종인宗人 석렬錫烈) · 석홍錫洪 · 준浚 · 필泌 · 동식東埴 등이 상의, 성금을 모아 원본가元本家에서 수백보 상거相距한 응본산鷹峰山 밑에 터를 바아 네칸四間으로 크게 확장 이건하여 충효 정렬의 삼강정신을 높이 받들어 길이 부식扶植되기를 기약한 것이다.
아아? 충절과 청백지가淸白之家에 또한 충효가 빛나고
충효지가忠孝之家에 또한 두 정렬이 빛나도다
높고 장한 응봉산 아래 삼강정려각이 우뚝 솟아 사방을 비추니
만국민의 사표師表로다.
정포旌褒가 황황하여 만세토록 이어지니
서흥세가의 영예榮譽로다.
후손 도유사都有司 석렬錫烈과 족후손族後孫 양산군수梁山郡守 홍식弘埴이 찾아와 비문碑文을 간청하므로 배재非才를 무릎쓰고 사실事實을 적어 삼가 기문記文을 짓는다.
乙卯 1975년 4월
국회도서관장 법학박사 강주진姜周鎭 지음
양진니楊鎭尼 씀
첫댓글 삼강정려각 안에 모셔진 네분의 정표旌表 사진을 올립니다.
(충신 김충수金忠守, 효자 김함金涵, 열녀 온양정씨溫陽鄭氏, 열녀 청주한씨淸州韓氏)
관리주체가 안성시라 항상 문이 잠겨있어 찍지 못했던 귀한 사진을 올려주셨습니다
보감(133-138쪽)에 수록된 삼강정려각정비명三綱旌閭閣庭碑銘 전문 올립니다.
전문은 부록용입니다
앨범 본문 내용은 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