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의 샴페인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름의 비유를 갖고 있다. 특히 서양에선, 북유럽의 아테네는 영국의 에딘버러, 북유럽의 베니스는 암스텔담과 같은 비유를 갖고 있는데, 맥주에도 이와 비슷한 비유가 있다.
1809년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과 그의 병사들은 고향에서 나는 샴페인과 비슷한 맥주를 발견한다. 베를린 일대에서 생산되던 베를리너 바이스(Berliner Weisse)였다. 시꺼먼 맥주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특이할 정도로 색이 옅고 따르면 격렬하게 거품이 일다가 이내 꺼지는 이 특이한 맥주는 신맛에 가볍고 상쾌해서 병사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데 그만이었다. 이에 병사들은 베를리너 바이스에 '북구의 샴페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베를린의 서민들 사이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스파클링 와인'으로 불린 걸 보면 베를린 밀맥주의 와인같은 특성에 공감대가 넓었던 것 같다.
나폴레옹과 병사들이 베를린에 있었을 당시 베를린 밀맥주는 3리터 들이 대형 유리에 담겨 제공되었는데, 맥주를 제대로 마시기 위해서는 유리를 붙잡아줄 별도의 받침대가 필요할 정도였다. 용기는 좀더 다루기 편리한 크고 평평한 고블릿(Goblet)으로 발전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쓰이는 잔이 되었다.
가장 상쾌한 여름 맥주
대부분의 밀맥주가 여름 맥주로 사랑 받고 있지만 베를린 밀맥주에 필적할 상대는 없을 듯 하다. 낮은 알코올 함량(2.5∼3.0%), 아주 가벼운 바디, 높은 탄산 함량에 신맛이 두드러진 베를린 밀맥주는 밀맥주 가운데 가장 상쾌한 맥주로 손꼽힌다.
호프의 쓴맛을 거의 느낄 수 없는 것(3∼12 IBU)도 한 특징이다. 이는 호프를 당화솥에 넣기 때문이다. 자비솥에 넣어 쓴맛과 향을 우려내는 보통의 맥주와는 달리 보존과 청징만을 목적으로 호프를 사용한다. 단맛은 극히 적은 편이다.
하지만 베를린 밀맥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중해 연안의 갓 짜낸 레몬즙을 연상시키는 강한 신맛이다. 잔에 따랐을 때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나다 금방 사라지는 것도 이러한 특징과 관련이 있다. 다른 와인이나 샴페인과 마찬가지로 강한 산(Acidity) 때문에 거품을 유지하는 단백질 조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베를린 밀맥주의 신맛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일단 맥주에 신맛을 주는 원재료인 밀 몰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25∼30%의 밀몰트를 사용하는데, 최근에는 밀의 비율이 높아져서 60%가 사용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는 남부 바이젠(Weizen)과 비슷하거나 약간 높은 함량이다. 거기에 베를린 일대의 경수(Hard water)도 신맛에 한몫 한다. 그러나 밀과 경수만으로 그 비밀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젖산 발효의 비밀
베를린 밀맥주는 발효에 독일의 다른 밀맥주처럼 상면발효 효모를 사용한다. 하지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젖산균(Lactic cultures)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알코올 발효와 젖산 발효가 상호보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와인이나 샴페인에서 볼 수 있는 2차 발효과정(Malolactic fermentation)과 유사한데, 와인의 경우 사과산이 젖산으로 변하면서 신맛이 보다 부드럽고 복잡미묘한 맛으로 발전한다.
젖산 발효에 사용되는 배양균은 락토바실러스 델브뤽키(Lactobacillus Delbruckii)로 20세기 초 막스 델브뤽(Max Delbruck) 교수에 의해 분리되었다. 막스는 베를린 공대의 양조 공학 과정(V.L.B.)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베를린 밀맥주의 강한 신맛은 이러한 젖산 발효 덕분이다. 갓 짜낸 레몬즙처럼 강렬하지만 우유처럼 부드러운 신맛의 비결은 여기에 숨어있다.
베를린에서 꽃피운 신의 은총
이러한 베를린 밀맥주의 발효방법은 언제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특히 밀맥주 양조와 젖산 발효가 유독 베를린에서 만나 지금의 독특한 스타일로 꽃을 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맥주가 보헤미아에서 기원해서 1572년에는 베를린 일대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최초의 양조관련 기록이 1680년인 점을 들어 80년대 이후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타일의 초기 역사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현재로서는 위그노(Huguenot)설이 가장 유력한 가정으로 얘기된다. 16세기 초부터 프랑스에서 확산된 교회개혁운동은 정부의 탄압으로 많은 망명자를 낳았는데, 1562년 바시의 학살이 발단이 되어 위그노전쟁이 일어났다. 1572년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로 정점을 이룬 탄압은 1598년 위그노의 신앙자유를 보장하는 이른바 '낭트칙령'의 발표로 일단 정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에 의한 1685년 '낭트칙령'의 파기로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으로 망명한 자가 많았는데, 그 수가 무려 40만 명에 달했다. 신교도는 거의가 근면한 상인, 기사, 공예인, 군인 등이었으므로 이로 인한 프랑스의 국부 유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다. 프랑스의 선진 기술과 문화가, 또는 그들의 대이동에 따른 문화의 전파가 유럽을 살찌웠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베를린 밀맥주의 경우가 그러하지 않나 싶다.
당시 이들 망명자들이 정착한 곳 가운데 하나는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일대였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북부 독일로 이동하는 와중에 플랑드르 지방을 거치는데, 이때 그곳의 밀맥주 제조방법을 배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플랑드르 지방은 밀맥주의 일종인 랑비크(Lambic)로 유명한 곳으로 야생 이스트를 이용한 자연 발효 방법을 사용한다. 남부의 바이젠보다 벨기에의 랑비크와 스타일면에서 유사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싶다. 베를린 밀맥주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긴 여정에 대한 신의 은총이었는지도 모른다.
북부 독일에서의 밀맥주 스타일의 인기와 명성은 확고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베를린 일대에만 700여 곳의 밀맥주 양조장이 있었고 비룬스비크, 하노버, 브레멘은 오늘날에도 브레머 바이스(Bremer Weisse)라는 이름의 밀맥주를 갖고 있는데, 벡스사에서 만든다.
맥주 칵테일 : 슈스로 연출하는 다양한 맛과 색
"Red or Green?" 여름철 베를린에서 밀맥주를 달라고 하면 주문 받는 사람이 되묻는 말이다. 무엇을 골라야할까? 빨간색은 나무딸기 슈스(Schuss), 즉 나무딸기로 만든 시럽을 넣은 것을 가리킨다. 빨간색이라기보다 복숭아 색에 가깝다. 녹색은 선갈퀴(Woodruff) 추출액으로 매우 향이 짙고 레몬풀 맛이 난다. 나무딸기와 선갈퀴는 모두 베를린 인근의 숲에서 자라는 것으로 소프트 드링크를 만들거나 미네랄 워터에 맛을 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근데 맥주에 왜 과일이나 허브로 만든 시럽을 넣는 걸까? 무엇보다 맥주의 강한 신맛 때문이다. 시럽은 맥주의 신맛을 어느 정도 죽이면서 달콤함을 더하는 역할을 한다. 처음엔 시럽의 단맛을 맛보고 끝엔 맥주 본래의 강렬한 신맛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슈스가 안겨주는 즐거움은 맛에 머물지 않는다. 앞서의 나무딸기와 선갈퀴 이야기로 이미 짐작을 했겠지만 넣은 슈스의 종류에 따라 맥주의 색, 특히 거품 색깔까지 달라져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때로는 캐러웨이 슈냅스(Schnapps, 증류주의 일종)을 첨가해서 마시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신맛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다. 맥주의 신맛을 베이스로 슈스를 이용해 맛과 색을 다양하게 연출하는 베를린 밀맥주는 일종의 맥주칵테일이라 할 수 있다.
겨울에는 레몬주스와 함께 뜨겁게 마시기도 하는데, 베를린 토박이들 사이에선 고뿔의 특효약으로 통한다. 감기 특효약으로 여겨지는 것은 감기에 걸렸을 때 보통 비타민 C와 같은 신 것을 먹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신맛의 음식은 간을 보해서 피로회복을 돕는다.
도자기 용기 : 탄산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
베를린 밀맥주는 병 숙성, 즉 2차 발효를 거치기 때문에 묵힐수록 맛이 좋아지고 복잡미묘한 맛을 낸다. 2차 발효를 하는 대부분의 병맥주들이 묵힐수록 맛이 좋아지긴 하지만 베를린 밀맥주는 창고에서 수년간 묵힐 수 있는 몇 안되는 맥주 가운데 하나이다. 평균적인 비중의 헤페 바이젠을 2년 간 저장하는 일은 좀처럼 생각하기 힘들지만 베를린 밀맥주의 경우 저장한지 최소한 18개월이 지나야 제 맛이 나기 시작한다.
과거 퍼브의 주인들은 밀맥주를 담은 도자기를 지하저장고의 바닥에 묻고 모래로 덮어 숙성시켰다. 온도를 낮춤으로써 '폭발'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유리병이 사용되기 이전에는 도자기로 만든 병에 맥주를 담아 팔았는데, 이때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막고 끈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 모두가 맥주의 높은 탄산 함량, 특히 발포성과 연관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베를린 밀맥주의 르네상스를 기다리며
베를린의 밀맥주는 바바리아의 밀맥주와는 달리 심각한 몰락을 격고 있다. 한때 번성했던 베를린 일대의 맥주 양조장들은 지금은 베를리너 킨들(Berliner Kindle)과 슐타이스(Schultheiss), 두 곳만을 남겨놓은 채 모두 사라졌다. 독일을 둘로 갈라 놓은 계기가 된 2차 대전 이전에 이미 필스너에 시장을 빼앗기긴 했지만 무엇보다 베를린의 분단이 밀맥주의 몰락을 재촉했다. 장벽은 동독 편에 위치한 밀맥주 양조장을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했다. 그리고 독일과 베를린의 재통합은 베를린 밀맥주의 영화를 되살리기에는 너무나 늦게 온 감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독일 남부 바이젠이 부활했듯이 언젠가는 베를린 밀맥주에도 르네상스의 행운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아마도 그것은 베를린이 다시금 이전의 유럽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되찾는 때와 함께 할 것이다.
킨들과 슐타이스의 맥주를 비교한다면 슐타이스의 베를리너 바이스는 좀더 가볍고 보다 상쾌하고, 꽃과 같은 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첫 맛의 신선함이 특징적이다. 킨들의 맥주는 좀더 절제된 듯한데, 신맛과 복합적인 맛이 덜하고 과일맛이 풍부하다.
신맛의 맥주는 역시 신맛의 음식이 어울린다. 베를린 밀맥주엔 딸기와 같은 신맛의 제철 과일이 알맞다. 그리고 피클을 넣은 세이버리(Savory)나 피클을 얹어 그릴에 구운 청어도 좋다. 신맛의 요구르트도 잘 어울릴 것이다.
첫댓글 너무 좋은 글이네요.
흠... 꼭 먹어보고 싶은 맥주인데...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