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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08
디모데전서 3:14-16
하나님의 집
목회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직분자를 잘 세우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 발전한다고 말한다. 교회에는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소위 말하는 항존직으로 세워 조직적으로 더 튼튼하게 한다는 것이다. 평소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적극적이지 않는 사람도 서리집사로 세우면 열심히 하는 경우들이 있으니 직분이 주어진 것을 계기로 더욱더 교회에 충성 봉사하게 만드는 일이 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장로나 안수집사는 안수식을 하며, 권사는 취임식을 하는데 이를 계기로 교회에 필요한 것을 구비하도록 일정 금액을 하게 하였는데 직분자들 입장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관행이 오늘날에는 아주 당연한 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상당한 금액을 헌금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러 상대적으로 넉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직분을 돈으로 산다는 말도 나오는 실정이다.
물론 교인 수가 많아짐으로 서로를 돌아보며 말씀으로 위로하고 진리를 나누는 일을 위해 직분자를 세우는 것을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 그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어떤 자들에게는 짐이 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에는 반드시 이런 직분이 있어야 조직적으로 안정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고, 더욱이 목회자 입장에서 성도들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기 위한 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감독, 집사에 대한 말씀이 목사나 감독 혹은 장로, 집사의 직분을 세우는 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때 “나도 가수다”라는 TV프로가 있었는데 그 말을 차용해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가 되었다면 ‘나도 감독이다, 나도 집사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감독과 집사의 직무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교인 수를 많이 모아야 한다든지 안정적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것을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감독과 집사에 대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른 교훈을 가진 거짓 선생들이 교회의 감독과 집사의 역할로 앞에서 인도하고 가르치려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직분을 잘 세워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함으로 진리의 아들이 된 자들이 진리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감독과 집사에 대한 말씀에 이어 교회가 더욱 성장, 부흥,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말함으로 더욱 분명하게 복음을 나타내고 있다.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14-15a절). 우리 성경에는 어법상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라는 말을 먼저 할 수밖에 없는데 헬라어로는 ‘이것을 너에게 쓰는 것은’이라는 표현이 먼저 나온다. “이것을”이라는 표현은 우리 성경에서 단수의 의미로 느껴지는데 ‘이것들’이라고 복수이다. 이제까지 앞에서 말한 것, 즉 감독과 집사에 대해 말한 것이고, 다른 교훈을 경계하고 거짓 선생들이 성도들 앞에서 인도하고 가르치도록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쓰는 것”이라는 표현은 현재형이다. 가지 못할 것 같으니까 편지를 써서 보냈다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쓰고 곧 갈 것이라는 현재의 의미로 나타낸 것이다. 바울 사도의 입장에서 거짓 교사들로 인해 에베소교회가 다른 교훈에 휩쓸려 흔들리게 될지도 모르니 편지를 보내고 또 가서 얼굴을 보며 함께 진리를 나누겠다는 의미를 담고 “속히 가기를 바라나”라고 쓴 것이다. 그래서 뒤에도 이렇게 썼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만일 내가 지체하면”이란 속히 가기를 원하지만 혹시 지체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라고 번역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집 안에서’라는 말이다. 여기 하나님 앞에 관사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된 자들의 집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아들들이 된 자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초대교회에는 교회가 모이는 특별한 장소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개인의 집에서 모였다. 그런데 그 집을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들의 집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본문에서도 이렇게 말씀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행하여야”라는 말의 ‘아나스트레포’는 ‘아나’(위로, 위를 향하여)와 ‘스트레포’(돌아서다, 방향을 바꾸다, 변하다)의 합성어로 ‘뒤집어 엎다, 되돌아 오다(가다), 거꾸로 하다, 회전시키다, 행동하다’라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위에서, 위를 향해 돌이키다’라는 뜻인데 성경적으로 땅의 것에서 뒤집어 엎어야 되는 일이라는 의미로 하늘을 향해 또는 하늘에서 돌이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돌이키는 일로 하늘에서 뒤집어 엎어시는 것이 하나님의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15b절)라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교회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나?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사도가 이미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향해 이렇게 강론했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세워진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려주심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살아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에 더 이상 죽은 자는 없다. 그러기에 죽은 자, 곧 육의 존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집이 된 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넘쳐나는 교회이다. 그래서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둥과 기초가 된 것 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들이 성전 곧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진 것이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 11: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9-22)
흔히 직분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살아서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살려주시는 은혜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야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기에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못하니 인간이 직분을 가지고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둥”이란 든든하게 버티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터”는 기둥을 든든하게 버틸 수 있도록 견고한 바탕이요 기초이다. 그러므로 다른 교훈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에 견고하게 서 있는 상태가 하나님의 집이요 교회라는 의미이다. 주성교회는 얼마든지 와해 되고 무너질 수 있다. 아니 무너져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십자가 죽음 안에 진리의 말씀으로 늘 든든히 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집이요 교회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16a절). “크도다”라는 말은 ‘강력하고 위대하다’라는 뜻이다. “경건”이란 ‘유세베이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함, 경외함, 경건, 신앙심’이라는 뜻이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경외함이고 곧 경건이다. 그러므로 “경건의 비밀”이란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 자체를 비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는”이라는 표현의 헬라어 ‘호몰로구메노스’는 ‘호몰로게오’(시인하다, 약속하다, 고백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 찬미하다)에서 온 단어로 ‘논쟁 없이, 공동합의로, 이의 없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말씀으로 화답한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위대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의 말씀으로 함께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한몸된 교회라는 의미이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16b절). 이 말씀을 쉽게 정리하자면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성령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셨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에게 보이셨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고, 세상 안에서 믿어졌고, 영광 안에서 집어 올리셨다’라는 말이다. 전부 수동태로 표현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의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교회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경외함의 비밀 안에 있는데 그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고, 성령 안에서 의롭다 하심으로 드러난 것인데 이는 구약에서 이미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이루어진 일을 보내심을 받은 자들에 의해 전해졌다. “천사”는 메신저이고 사신, 사자이다. 복음을 드러내는 모든 자가 다 천사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에 의해 진리가 세상에 선포되고 그것을 이방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다. 바울 사도는 감독과 집사에 대한 말을 하고서는 그 직무에 대해서 관심가질 것 같으니까 노파심에 이 모든 일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복음을 강조하였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1-7)
(2024111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