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으로부터 『소학』 공부의 중요성을 계도(啓導) 받고 소학동자로 자처하며 진지한
실천의 체험을 거쳐 높은 덕성을 성취하여 당대의 사우들과 후학들로부터 도학(道學)의 모범으로 존중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연산조의 사화에 화를 당하였지만 중종조 이후 엄연히 조선 도학의 연원(淵源) 정맥(正脈)으로 존숭되었으므로, 그의 학문 사상과
언행과 처신과 사업은 그 당대의 사우와 문도는 물론 이후의 조선조 학술 문화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훤당이 남긴 문헌과 언행에 대한 주요한 진술과 관련 사적은 조선 도학 연원의
근거로서 선현들의 진중하게 여겨 대대로 수집 보완을 거쳐 『경현록(景賢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훤당의 시문 저술은 그다지 많지 않다. 『경현록』에서는
한훤당의 도학 성취의 실상을 한훤당 자신의 시문보다는 당대 사우들의 증언과
전문(傳聞)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도덕의 성취는 그 인물의 덕행과 사업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의 증언과 전문을 통하여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조선중기에 퇴계 이황 등이 한훤당의 시문과 사적을 수습하여 편찬한
『경현록』의 편찬 체례(體例)에 감발 받아서, 한훤당에 대한 전문과 행적에 나타나는
정제(整齊) 정좌(靜坐)의 수양법과, 『소학(小學)-대학(大學)』의 학문 규모, 그리고
가범(家範)과 강회(講會) 의식 절차 등 세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한훤당의 도학과
그 학풍이 후학들에게 계승 파급되어 조선조의 학문과 사회 기풍의 형성에 끼친
경과를 대략 추정하여 보았다.
성리학의 이념과 『소학』 규범의 이해와 실천을 근간으로 하는 도학의 불씨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와 점필재
김종직을 통하여 한훤당에게 전해졌다.
조선의 도학은 한훤당에 이르러 『소학-대학』 의 학문 규모를 정립하고,
성리학의 학문 신념에 입각한 철저한 자기 규율과, 인간관계의 미덕을 진지하게
실천함으로써 인격 감화를 통해 도덕 문명을 구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범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범은 한훤당의 문도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에게 파급되어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지고, 더욱 깊고 넓게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한훤당은 조선 도학의 수현으로서 존숭될 당위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Ⅰ. 서설
조선조의 학문 사상과 사회 정치 문화의 근간은 공맹정주(孔孟程朱)의 선성(先聖)
선현(先賢)을 전형으로 하여 인륜 도덕을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하는 가치로 숭상하는
유학이었고, 조선시대 사람으로서 그 학문 이념을 실현한 모범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최초의 인물이 한훤당선생 김굉필이다.
한훤당이 조선 도학 연원의 수현으로 존숭되고 문묘에 종사된 것은 그가 성취한 학문
도덕이 그 당대의 사우(師友)와 문도에게 큰 반향을 일으켜 한 시대의 학문과 사회
기풍을 일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거니와, 그런 가운데서도 특히 그는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하면서, 성리학의 실천 규범으로서 『소학』에 기반한
도학의 학문 규모와 차서를 정립하여 스스로 실행하고, 그 학문을 뒤쫓아 탁월한
성취를 보인 문도들을 문하에 배출함으로써 도학의 학풍이 계승 확산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동안 한훤당의 학문 도덕의 성취와 도학의 전수 및 문묘 종사에 대하여 그 철학적
역사적 의의를 밝히려는 논의가 적지 않게 지속되어 왔고, 이들 논의를 통하여
한훤당 도학의 특성과 그 사상적 사회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상당 부분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었고, 한훤당 도학의 근간을 이루었던 『소학』과 그 실천의 교육학적
윤리학적 의의에 대하여도 일반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저술이
매우 적어 그 학문 실체의 정밀한 부분을 논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세상에 썩어 없어지지 않을 사업에 대하여 숙손표(叔孫豹)는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의 삼불후(三不朽)를 나누어 말하였고, 공자(孔子)는 그 문하
제자의 도덕과 학문을 논하면서 덕행(德行)과 언어(言語)와 정사(政事)와 문학(文學)의
순서로 공문사과(孔文四科)를 나누어 말하였는데, 모두 덕행을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나 좋은 말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미덕이 있는 것은 아니듯이, 사공(事功)과
언어 문자의 저술은 어느 정도 그 형태를 남겨 전할 수 있지만, 사람이 이룬 덕성은
언어와 문자의 저술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덕성은 그것을 보고 듣고 감발 받은 사람들의 견문(見聞)과 전문(傳聞)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고 확산되고, 이에 고무된 사람들이 이어져 나타남으로써 사회 문화와
풍속을 바꾸어 나가는 법이다. 따라서 조선 도학(道學) 연원(淵源)의 수현(首賢)으로서
한훤당의 도학에 대하여는, 그가 저술한 문자는 물론, 그에 대한 전문(傳聞)을 신중하게
점검하여 그 근원을 추적함으로써, 그 성취한 학문과 도덕의 윤곽을 그려내고,
그의 언행과 사적과 관련하여 후대에 계승 연역 파급된 자취를 찾아내어 그 근원을
유추함으로써, 한훤당 도학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근년에 이루어진 한훤당 연구의 성과를 살펴보면,
『소학』으 로 덕성을 성취한 한훤당을 조선조가 지향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설정하였던 그 당초의 의도에 대한 사상사적 정치사적 배경과 의의에 대한 논의는 제법 여러 갈래로
제시되었지만, 한훤당이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그 도덕과 언행과 사적이 조선조 학술과
사회 문화 전반에 끼쳤던 영향과 그 의의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한훤당이 성취한 도학의 모범과
관련하여 당대와 그 이후에 심학(心學)과 경학(經學) 및 예학(禮學) 등 몇 분야에 걸쳐
전승 파급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간략하게 논평함으로써,
한훤당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라는 소임을 색책해 보고자 한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