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정 물’
이 호 성
‘구정물’
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빨래나 설거지 따위를 하여 더러워진 물”
로 표현 되어 있다.
구정물의 어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정거리다’
라는 말은 경상도에서
‘휘정 거리다’
로 쓰이는데 따른 말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세상의 감정 표현이 더 적극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많이 써지게 되는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일상의 언어 표현이 경음화 현상으로 많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자기의 작은 누나를 부를 때도 작은 누나가 아니라
‘짜근 누나’
라 부르고, 구정물도 그냥 구정물이 아니라
‘꾸정물’
이라 불러 더러워진 물을 표현하는 강도가 세어지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경음화 현상을 따져 보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일상에서의
‘구정물’
과의 생활을 잠간 되 짚어 보고 싶은 생각이다.
나는 여기에서 빨래를 하고 난 뒤의 구정물이 아니라 설거지 따위를 하고 난 뒤의 허드렛물을 좀 생각 해 보자는 것이다.
허드렛물은 별로 중요치 않아 함부로 쓸 수 있고 함부로 버릴 수 있는 물이 허드렛물이며 그 물이 바로 설거지를 다 하고 함부로 버려도 될 물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구정물도 마구 버리거나, 그렇게 함부로 다루지 않은 것 같다.
끼니마다 소중히 모아 가축을 기르고, 거름 터에 버리어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되 돌아 오도록 하는 알뜰함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다.
설거지물에 버려진 오이 껍질이나, 무웃잎, 배춧잎과 함께 소나, 돼지들이 한 점 버림 없이 우리의 가축들이 먹는 모습을 보며 우리 조상들은 생활의 만족을 느낀 듯 싶다.
자기네 집에 소나 돼지를 기르지 못 할 때도 그 구정물을 모아 가축을 기르는 이웃집이나, 옆집에서 걷어다 짐승을 먹이던 생활을 우리는 얼마 전까지의 우리 조상들의 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돌이켜 생각 해 보면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60년대의 우리 농촌 생활은 정말로 너, 나 없이 어려운 때가 많았다. 4~5월 봄이 되면,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식량 사정이 많이 어려웠던 고비를 우리 조상들은 춘궁기(春窮期)라 했고, 햇보리가 수확 될 때까지 보릿고개를 넘기는 동안을 보릿동 이라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농촌에는 봄이면 장리곡 또는 장리쌀 제도가 있어 곡식이 떨어진 사람이 있는 집의 곡식을 빌어 가을에 농사를 지어 본전의 절반이나 되는 높은 이자를 따지는 변리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없는 사람이 노동으로 대신하여 있는 집의 논일을 해 주기로 하고 쓰던
“고지쌀”
등 어려움의 애환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 봄이면, 어려움을 당하곤 하였다.
한번은 이웃집 할머니가 아침 일찍 우리 집에 구정물을 걷으러 왔다가 아침 때 거리가 없어 아침밥을 먹지 못하여 학교를 가지 못한 내 얘기를 듣고, 그 할머니의 중학교 다니는 외동딸(그 당시 여자를 중학교에 보내는 집은 가정 형편이 좋은 집이었음)이 학교에서 돌아와 먹을 점심밥을 우리 집에 보내 와 내가 아침을 먹고 학교를 간 옛일이 생각난다.
그 집에서 보낸 밥 한 그릇은 쌀이 반 정도 섞인 밥에 조금 양은 적었지만 밥 위에 누룽지까지 긁어서 얹어 둔 그 밥 한 그릇은 내가 일생 중 가장 맛있게 먹었던 잊혀 지지 않는 아침 밥 인 것 같다.
지금은 어머님, 아버님도 모두 돌아 가시고, ‘구정물’에 얽힌 애환을 생각 해 보며, 옛날 어려운 살림에 4~5 남매 자식을 키웠던 우리 부모님의 어려움에 새삼 눈시울이 적셔 진다.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우리 남매들 배나 골리지 않기 위해 산비탈 밭에 고구마를 많이 심으시고 늦은 가을이면 캐온 고구마를 통가리로 엮어서 갈무리 하여 놓고, 겨우내 자주 끼니 대신 먹던 생각이 난다.
가을날 학교에서 늦게 돌아온 나는 들에서 오시지 않은 어머님을 찾아 산비탈 밭을 찾았을 때 어머님께서는 어둑어둑 어둠 속에서도 늦가을 고구마를 캐시던 우리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르며 나에겐 아직도 가끔 무언지 모를 애환을 느끼게 하곤 한다.
두분 부모님이 모두 돌아 가시고, 찌든 살림 속에서 우리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시던 부모님께 뒤 늦게나마 두 분의 은덕을 기리면서, 끝으로 원나라 英 宗황제께서“나해(那海)”라는 이름과 직성사인 벼슬까지 받은 우리 집안(陽城 李氏)의 시조(始祖) 상주국공(上柱國公) 6세손인 석탄공(휘 守邦 ~고려 충숙왕때 인물)할아버지께서 자손들을 위해 염려 하시던 칠언(七言)詩 8줄을 적어 보며 끝을 맺는다.
北風號怒雪飄揚(북풍호노설표양), 念汝飢寒感歎長(염녀기한감탄장)
狂妄結友終無益(광망결우종무익), 驕慢輕人反有傷(교만경인반유상)
色必敗身須戒愼(색필패신수계신), 言能害己更商量(언능해기갱상량)
萬事不求忠孝外(만사불구충효외), 自然名譽達吾王(자연명예달오왕)
“북풍이 울부짖고 눈보라 치는 겨울날, 너희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리지나 않는지 걱정 되어 탄식 하누나.
망녕되게 좋지 못한 친구를 사귀면 끝내 이익 됨이 없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 한다면 해를 입는 법.
색은 반드시 몸을 망치니 모름지기 삼가야 하고, 말은 자칫하면 자기를 해치기 쉬우니 깊이 생각하여 말할지어다.
우리가 할 일은 충효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충효를 몸소 실천하면 그 명예 자연히 온 나라에 알게 되리.”
이 호 성(李鎬成)
충북 진천 출생
1964년 청주교육대학 졸업․2004년 교육 인적 자원부 교단수기공모 수상
2005년‘문학예술’수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2006년『조그만 뜨락에도 햇살 하나 가득』수상집 발간
현재 한국 문학예술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진천지부 창립 회원(1980년대),
충북 글짓기 지도회 회원
양성이씨(陽城李氏) 대종회 이사
2008.1 : 진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