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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으로 이건하여 매봉서원이라 이름함 매봉서원은 현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 칠봉(七峰)에 있었던 七峰書院(1612∼1868)의 복원을 뜻하기도 하지만 서원면의 뿌리를 찾는 데 큰 보람을 갖고 1997년 10월 29일 세운 것이다. 매봉서원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최성침은「書院의 復元」이란 論文을 江原日報紙上에 발표(1992년 2월 22일)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게하고 당시의 金明東 면장, 원용식 군의원의 적극적인 협조와 郡守의 깊은 배려에 의해 약 10坪의 본관과 부속시설을 준공하였다. |
❏소 재 지: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 산 52(칠봉서원)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창촌리(매봉서원) ❏배향인물: 원천석(元天錫) 원 호(元 昊) 정종영(鄭宗榮) 한백겸(韓百謙) ❏창건연도: 1612년(광해군 4) ❏사액연도: 1673년(현 종 14) |
칠봉서원은 1612년(광해군 4)에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 산 52번지에 서당으로 건립되었다. 12년 뒤인 1624년(인조 2)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고려 말, 조선 초의 절의(節義)의 선비인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을 제향하고 운곡서원이라고 하였다. 1638년(인조 16)에 항재 정종영(恒齋 鄭宗榮)과 구암 한백겸(久菴 韓百謙)을 배향하였고, 1704년(숙종 30)에는 관란 원호(觀瀾 元昊)를 배향하였다. 칠봉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은 모두 원주 사람으로 대의(大義)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운곡 원천석과 관란 원호는 원주에 은거하며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고, 정종영은 사화의 격랑 속에서도 청백리로 살았고, 한백겸은 실학(實學) 개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칠봉서원의 사액은 1673년(현종 14)에 받았다. 규모가 26간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철되고, 토지와 노비․전결․서책 등은 원주향교로 이관되었다. 칠봉서원은 17세기 초부터 19세기 후반까지 260년 동안 존립하면서, 원주 지역민의 정신적으로 표상(表象)하는 고향 역할을 해왔다.
1)주벽-원천석(元天錫, 1330∼? )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정용별장(精勇別將) 열(悅)이며, 아버지는 종부시령(宗簿寺令) 윤적(允迪)이다.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어릴 때부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해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방원(芳遠 :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가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 :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쇠망의 왕조를 애석하게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 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린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 前摠宰六道都統使崔瑩>과 우왕·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해 읊은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 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 있다. 여기서 그는 만일 왕씨의 혈통으로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느냐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 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2)원호(元昊,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여러 청관·현직(淸官顯職)을 차례로 지내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觀瀾齋)라 하고 강가에 나가서 시가를 읊기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멀리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앉을 때 반드시 동쪽을 향해 앉고,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는데, 단종의 장릉(莊陵)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조카인 판서 효연(孝然)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 밖에 와서 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에 임명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다.
손자인 숙강(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疏章)을 모두 꺼내어 불태운 후 아들들에게 다시는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
1699년(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고향에 정려가 세워지고, 1703년 원천석(元天錫)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1782년(정조 6)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성담수 成聃壽)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3)정종영(鄭宗榮, 151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인길(仁吉), 호는 항재(恒齋). 온(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겸(允謙)이고, 아버지는 현감 숙(淑)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김계훈(金季勳)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40년(중종 35) 사마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154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검열이 되고, 1547년(명종 2) 호조정랑·헌납 등을 거쳐 뒤에 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552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공조참판이 되었다.
강원도관찰사 때는 도민들을 안무(安撫)하고,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여서는 서북지방인이 무예를 좋아하고 문교(文敎)를 싫어하는 지방이라는 형세를 감안하여 평양에 서원과 서적포를 설립하여 학문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팔계군(八溪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562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여 부정행위를 자행하는 수령들을 응징하고, 내전의 힘을 빌려 발호하는 요승(妖僧)을 제거하였다. 1567년 한성부판윤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으로 사직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항재집≫이 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4)한백겸(韓百謙, 1552∼16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정선군수 승원(承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천군수(文川郡守) 여필(汝弼)이고, 아버지는 판관 효윤(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鄭逑)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 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선릉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재직 중 병으로 사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하였다. 그러나 뒤에 그 사실이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을 갔다.
임진왜란 때 대 사면령으로 석방되었는데, 귀양지에서 적군에게 아부해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로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청주목사, 1607년 판결사·호조참의 등에 기용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어 상례(喪禮)를 주관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강원도안무사(江原道安撫使), 1611년 파주목사에 기용되었다가 사임하고 양주의 물이촌(勿移村)에 거하였다. 역학(易學)에 해박해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주역전의 周易傳義≫의 교정을 보았다. 그리고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다.
또한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수정해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고양하였다. 그 결과 ≪동국지리지≫의 저술과 ≪기전고 箕田考≫ 가운데 실린 <기자도 箕子圖>·<기전설 箕田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 밖에 저서로 ≪구암집≫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칠봉서원 하마비
이 칠봉서원 하마비는 칠봉서원 입구에 세워 두었는데 칠봉서원이 허물게 되어 행방을 몰랐는데 1960년대 봄에 칠봉마을 논둑에서 발견되어 이곳 산현초등학교 교정에 현재 세워져있다.
2) 칠봉서원터
참고-강원도지, 원주시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논문 : 칠봉서원과 원주문화의 재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