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독으로 46세에 귀머거리가 되다
젊은 시절의 고야는 무분별하리만큼 사랑에 대한 정열과 집념이 강해 많은 여성들을 가까이 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미술 공부를 할 때에는 수도원에 몰래 들어가 그곳에서 공부하던 상류 사회의 처녀를 유괴하기도 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Josè de Goya y Lucientes)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의 사라고사 가까이에 있는 펜테토도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많은 불후의 명작들을 남겨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제작 당시 외설적이라고 고발까지 당했던 관능적인 작품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가 바로 고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은 스페인 궁정의 공식 초상화에서부터 전쟁이나 고문 등의 피투성이 장면, 그리고 종교적 테마, 스페인 사회를 풍자하는 작품 등 매우 다양하다.
고야는 어린 시절을 그가 태어난 마을의 이웃 마을인 사라고사에서 지냈는데 어릴 때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고 본인도 커서 화가가 될 것을 희망했다.
고야의 생애는 착실하게 출세한 인물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큰 기복도 없었고 핍박받는 생활도 없었다. 초기엔 왕실의 직물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뒤에는 마드리드의 생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회원, 그리고 궁정의 수석 화가로 카를로스 3세 및 카를로스 4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고야는 1792년 46세 되던 해에 큰 병을 얻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한동안 전신이 마비되기도 했고 눈도 보이질 않았다. 의사의 진단으로 이 병은 매독이었다. 1년쯤 치료를 받은 뒤에야 겨우 완치가 됐었다. 그러나 이 매독의 후유증으로 그는 영영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프랑스가 스페인을 점령(1808~1814년)하고 있었던 때와 그 뒤의 정치 격변 시대에도 고야는 궁정 화가로서 수난을 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고야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1824년 프랑스의 보르도로 피신을 했다. 이 때 이미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그리고 그 뒤 다시는 스페인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4년 뒤인 1828년 4월 16일 82세를 일기로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29세 때 첫 결혼
젊은 시절의 고야는 닥치는 대로 여자를 손에 넣었다. 처녀를 유괴하러 로마 수도원에 침입했던 고야는 처음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 뒤 끈질기게 그녀에게 접근해 결국은 그녀를 자기의 여자로 만들어 잠시 짧은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1766년 20세 때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마드리드로 진출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당시의 유명한 화가 F 바이에우(1734~1795년)의 제자가 됐다. 처음에는 스승의 밑그림 따위를 그리다가 곧 실력이 인정되어 궁정에 들어가게 됐다.
마드리드에서의 생활이 안정된 1773년, 27세의 고야는 여행 중에 프란시스코 바이유란 친구를 알게 됐다. 바이유는 당시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전속 궁정 화가였다. 그리고 바이유에겐 호세파란 여동생이 있었는데 바이유는 여동생을 새로 사귄 고야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호세파란 아가씨는 금발의 미인인데다가 온순하고 순진했다.
고야는 한 눈에 이 아가씨에게 빠져 그녀를 끈질기게 유혹했다. 그러나 호세파는 쉽게 고야에게 끌리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깨어질 듯 했으나 고야의 집념은 대단해 결국은 그녀를 이겼다. 그래서 만난 지 2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억지에 가까운 결혼식을 올렸다. 그 때가 1775년 7월 25일이었고 호세파는 이미 고야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다.
결혼한 6개월 뒤 호세파는 첫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이 고야의 장남은 태어나자마자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사람은 결혼 기간 동안 5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불행하게도 하비에르라는 아들 한 명만 빼고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부녀를 만나다
궁정에서 일하고 있는 고야에겐 자연스럽게 많은 귀부인들과 접촉 할 수 있었다. 상류 사회 귀부인들과 어울리면서 고야의 부인 호세파는 조금씩 조금씩 고야에게서 망각의 존재로 되어 갔다. 고야의 전 작품을 통해 부인이었던 호세파의 초상화는 단 한 점 밖엔 없다.
고야와 교제했던 부인들 가운데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부인은 개방적이었던 앨버 공작 부인이었다. 이 앨버 공작 부인은 당시 겨우 20세였으나 앨버 공작과는 그나마도 재혼이었다. 그녀는 이미 13세 때에 비리야브랑카란 후작과 결혼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불행이도 비리야브랑카 후작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앨버 공작과 재혼을 했다.
첫 눈에 서로의 바람기를 알아본 고야와 앨버 공작 부인은 곧 사랑의 감정에 빠져들었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비밀스런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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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분에 eye님이 매우 즐거웠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봐주시는 분이 계시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