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丙寅年(1986년)
① 丙寅年(1986년 초) 박성구 선감은 포항에 회관을 건립하기 위해 회관부지를 알아보게 되었는데, 처음 알아본 곳이 용흥동(龍興洞) 도립병원 옆에 '절을 지으려고 터를 닦아놓은 후 사고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부지'가 있어서 그것을 매입하려고 도전님께 보고를 드리니, 도전님께서 "용머리에 집을 지으면 용이 등천할 수 있느냐?"하시며 "그 지형을 잘 알아 보라"하셨다. 그래서 그 지역을 알아보니 그 마을이『용댕이』였고 그 터 있는 곳은『용머리』부분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을 알아보던 중, 당시 상대동에 있던 '김일남씨의 땅'을 매매한다고 하여 흥정을 하였다. 흥정에서 김일남씨가 평당 30만원을 제시하고 부전 정대진 선감이 20만원을 흥정하였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김일남씨의 꿈에 그 땅에다 똥을 퍼붓는 꿈을 여러 날 꾸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니‘땅값이 똥값이 되겠구나'싶어서 그 땅을 팔려고 전화를 걸었다. 정대진 선감이 다시 20만원에 흥정하자, 조금만 더 올려 달라 하여 평당 235,000원에 820평이 계약되었다.
② 그리하여 86년에 별관을 짓고, 87년에 회관이 완공되어 87년 11월 9일에 회관 개관치성을 올리게 되었다.
회관을 건축할 때 도전님께서 그 때까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공법으로 건축하게 하셨는데, 외벽을 벽돌로 쌓고 비닐을 한 겹 넣고 또 스티로폼 한 겹을 넣은 다음, 내벽을 벽돌로 한 겹 쌓아 마무리 짓게 하셨다. 박성구 선감은 일을 지시해놓고 도정업무기간이라 도장에 출근하고 있었는데, 도전님께서 정대진 선감과 박성구 선감에게 "빨리 회관 짓는 현장으로 내려가 보라."는 명이 계셔서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그 당시 별관공사를 하고 있던 인부들이 "이렇게 집을 짓는 데가 어디 있느냐?"며 시킨대로 하지 않고 기존의 방식대로 벽을 쌓아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벽을 모두 깨부수게 하고 다시 지시한 방식대로 벽을 쌓아올리게 하였다.
몇 년이 지나자 모든 건축규정이 이 공법대로 바뀌어 시행되었고, 그리고 현재는 이 공법대로 하지 않으면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다.
1987년 회관 본관을 짓고 도전님께서 직접 납시었는데, 이때 도전님께서 큰길로 오시지 않으시고 회관 앞의 하수천 갓길의 좁은 길(100여 미터)로 오셨는데, 이 길은 평소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이 길은 이후 하수천이 복개되어 회관 앞으로 도로가 생겼다
③ 원래 포항에는 상도(上島), 대도(大島),죽도(竹島), 해도(海島), 송도(松島)의 5개 섬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섬 주위가 모두 염전 및 갯벌과 갈대밭이었다. 그 후 포항제철이 건립되면서 매립이 되어 현재 포항시의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다. 회관주위는 원래 '섬 안 마을'이었는데 매립 후 상대동이 되었고, 회관이 완공되어 현판식을 하기 전에 상도동과 대도동으로 나뉘어져 회관이 있는 지역은 현재의 '상도동(上嶋洞)'이 되었다.
6.丙寅年(1986년) 5월 14일
도전님께서는 상급임원 189명을 대동하고 호남일대를 순행하셨다.
오전6시에 출발하여 이리·군산을 거쳐 김제 만경(萬頃)에 이르러 정읍 휴게소에서 조식(朝食)을 한 후 광주 무등산을 차로 순행하셨다. 이때 한가지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 외국인 헌병(M.P) 두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아래서부터 위의 주차장까지 계속 에스코트(Escort : 호위)를 하고 올라갔다.
그리고 내려올 때도 그 헌병(M.P)이 아래까지 에스코트를 하고 내려왔다. 무등산에서 점심식사를 양식으로 하였으며, 도전님께서 임원들에게 전부 껌 하나씩을 나누어 주셨다.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은 상제님께서 이마두(利瑪竇)를 초혼하여 장사지낸 곳이다.(예시 66절) 그리고 교운 1장 9절에 보면「이마두는 지상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박은 유교의 폐습을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유교의 폐습이 바로 남존여비, 적서차별, 반상구분의 불평등이므로, 도전님께서 '무등산(無等山)'에 오르셔서 이마두의 원을 푸는 공사로 '평등공사'를 보심으로써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룩하시는 공사를 보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음 순행지인 목포 유달산(儒達山)을 가셨다가, 다시 광주를 거쳐 남원에서 숙박을 하셨다. 다음날 아침에 임원들과 함께 남원 광한루(廣寒樓)를 순행하셔서, 여러 곳의 전경을 둘러보셨는데 그곳에는 전라감사 이서구 선생의 비(碑)와 춘향의 사당(祠堂)이 있었다. 그리고 연못 안에 섬모양의 산이 세 개가 나란히 있는데, 팻말에 각기 영주산, 봉래산, 방장산이라 써 붙여져 있었다.
도전님께서 연못 속의 그 '삼신산(三神山)'을 배경으로 임원들과 기념촬영을 하셨다. 그리고 남원을 떠나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를 거쳐 쌍계사(雙溪寺)에 도착하여 불일(佛日)폭포를 둘러보시고, 진주 촉석루를 거쳐 부곡 온천에서 일박을 하시고, 다음날 오후 1시에 출발하여 논산 관촉사 '은진 미륵'을 참관케 하셨으나 임원들은 도전님의 뜻을 깨우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순행을 마치고 저녁 8시에 도장으로 환궁하셨다.
7. ①박성구 선감은 십년 가까이 부전 정대진 선감과 수도하여 오면서 도전님을 받들기에 진심전력을 다하여 왔었다.
박성구 선감은 남달리 포덕에 열성적이었으며 월성율(月誠率)과 유공(有功)면에서도 남다른 특출함을 보여, 정대진 선감은 박성구 선감을 매우 신임하고 있었다. 박성구 선감은 이렇게 하는 것이 도통을 하는 방법이며, 양위상제님과 도전님을 잘 받드는 것이라고 배워왔었다.
그르던 중 박성구 선감 앞에 한 도인이 유공(500만원)을 하였는데, 부모가 고발을 하여 문제가 생겼었다. 도전님께서 정대진 선감을 불러놓고 그 연유를 물어보자, 정대진 선감은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그 도인은 박성구 선감 앞입니다."라고 상고드렸다.
그러자 도전님께서 박성구 선감을 빨리 불러오라는 명을 내리셨다. 그리하여 정대진 선감이 포항에 있는 박성구 선감에게 연락하여 "도전님께서 찾으신다"고 전하였다.
박성구 선감은 연락을 받고 급히 비행기를 타고 와서 도장에 도착하여, 도전님을 배알하고 인사를 올리자 도전님께서 "어떻게 이리도 빨리 왔느냐?"고 하시기에 박성구 선감이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도전님께서 "그렇지……" 하시고는 "내수도인에게 돈을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박성구 선감이 "예, 받았습니다."라고 하니 도전님께서 "부모가 돌려달라고 하는데 돌려줘야지"하셨다. 그러자 박성구 선감이 "20세가 넘으면 자신이 사리판단을 할 줄 알고, 또 상제님께 모셔 달라고 하였는데 제가 어찌 돌려 줄 수가 있겠습니까?"라며 돌려줄 마음을 보이지 않자, 도전님께서 비유를 들어 "어린아이가 가게에 만원짜리 돈을 들고 왔을 때, 만원어치 과자를 다 주면 법으로는 하자가 없지만 악덕상인이라고 하지 않느냐? 그러면 우리 도(道)가 이런 악덕상인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설명하시면서 3시간에 걸쳐 도전님께서 독대(獨對)로 교화를 하셨다. 그러자 박성구 선감은 도전님의 교화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되어 "돌려주겠습니다."라고 하며 그 돈을 돌려주게 되었다.
②교화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박성구 선감은 그 후 대성(代誠)을 없애고, 유공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정대진 선감과 주훈재 선감, 이채원 선감, 박춘균 선감이 있는 자리에서 박성구 선감이 "포항에서는, 도인들이 물질이 말라버렸습니다. 행주를 비유하면, 짜고 또 짜서 나올 물도 없고 터지기 직전입니다."라고 하자, 정대진 선감이 "터질 때까지 짜라."고 하였다. 또 "우물에 물이 말라 쪽박이 깨어질 상황입니다."라고 하자, 정대진 선감이 "쪽박이 깨질 때까지 물을 퍼라."고 하였다. 박성구 선감은 도전님으로부터 교화를 듣고 이미 '도(道)'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터라, 그 후로는 대성을 하지 않고 유공도 하지 않자, 이때부터 정대진 선감과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대진 선감의 포덕 방향과는 달리 박성구 선감은 도인들이 잘 살아야 상제님의 덕을 펼칠 수 있다고 교화하면서, 도인들에게 사회사업이나 상점 등을 경영하도록 도와주며 포덕과 사회활동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박성구 선감이 정대진 선감의 요구대로 응해주지 않고 계속해서 서로 뜻이 달라지자, 정대진 선감은 박성구 선감에게「도전님의 명이시다. "박성구 선감은 일체 교화를 하지 말 것이며 수반도인을 보살피지 말라"고 하셨다.」며 도전님의 명을 전달하자 박성구 선감은 도전님을 배알하고 "도(道) 만이라도 닦게 해주십시요!"라고 상고드리자, 도전님께서 "알았으니 내려가 있으라."고 하셨다. 그런 후 부전 1방면에서 부전 11방면까지 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 3월에 박성구 선감 앞으로 부전 8방면과 부전 9방면이 나게 되었는데, 부전 8방면은 김태호 선감이 맡고, 부전 9방면은 김호봉 선감이 맡게 되어 박성구 선감은 어디도 보지 못하게 된 입장이 되었다. 더구나 부전 정대진 선감과는 뜻이 맞지 않아 정대진 선감은 박성구 선감에게 수반들을 돌보지 못하게 하고, 일체 교화를 못하게 따돌리니 박성구 선감은 이때부터 1988년 12월까지 거의 일년 가까이 수반도인들을 만나지 않았고, 일체 교화를 하지 않았다.
③그러자 이정지 차선감이 도전님을 찾아 뵙고 독대를 하여 "박성구 선감을 용서하시고, 도(道)를 닦게 해주십시요"라고 상고드리자, 도전님께서 "그것이 무슨 말이냐?"라고 물으시므로, 이정지 차선감이“부전 정대진 선감이 박성구 선감에게, 도전님 명이시니 '수반들을 보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하고 자초지종을 상고드렸다. 그러자 도전님께서 이정지 차선감에게 "박성구 선감이 치성 때 술을 마시고 취해서 주정을 부리며 도인들 앞에서 행패를 부려서 그렇게 하였다고 정대진 선감이 말하던데, 그런 사실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이정지 차선감이 "박성구 선감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나 도인들 앞에서 술이 취해서 행패부린 사실은 한번도 없으며, 그럴 사람도 아닙니다."라고 상고하였다. 그러자 도전님께서 "알았으니 내려가 있어라"하셨다.
그리하여 다음달 1월 6일 "박성구 선감 앞의 선 • 교무이상 전 도인들은 중곡동 도장으로 모이도록 하라"는 도전님의 명이 하달되었다. 그래서 선 • 교무이상 모두 200여명이 중곡도장 종무원 사무실아래 식당에 모였다. 이때 도전님께서 먼저 강릉방면을 내시고, 전체 임원들을 정각원에 모이게 하셨다. 그리고 전체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박성구 선감에게 방면을 내셨는데, 그때 조영배 선감이 방면 호를 영일로 건의드리자, 도전님께서 "그러면 영일방면으로 하라"고 하셨으나, 박성구 선감이 "영일보다는 회관이 상도동에 있으므로 상도(上嶋)로 하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상고드리자, 도전님께서 "그럼 상도(上嶋)방면으로 하도록 하라"고 전체임원들이 모인 가운데서 명하셨다. 대순진리회 창설이후 전체임원들이 모인 공식석상에서 발표된 방면은《상도(上嶋)》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89년 1월 6일(陰 戊辰年 11월 29일) 박성구 선감은 3000호를 가지고 '상도방면'으로 나왔다. 이때 정대진 선감이 도전님께 말씀드리기를 "포항에 제가 보아야 할 도인이 있는데 제가 포항에 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도전님께서 "정대진 너는 이제 포항에 발도 들여놓지 마라!"고 말씀하시면서 "박성구 너, 방면 내어주면 너 배짱껏할 수 있느냐?"고 물으시자, 박성구 선감이 "예!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전체임원들 앞에서 다짐하였다. 그러자 도전님께서 박성구 선감에게 "주훈재 선감하고는 괜찮아?"라고 물으셨다. 박성구 선감이 "예"라고 대답하니, 도전님께서 주훈재 선감에게 "너는 가서 도인들을 잘 이해시키고 화합시켜! 그런 게 아니야!"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상도방면이 난 후 경석규 종무원장이 '도전님께서 하명하신 내용'을 받들고 내려와서, 박성구 선감 앞의 선 • 교무 이상 전 도인들이 종무소 2층 구(舊)예식장에 모인 자리에서 전달하였는데 "부전 정대진 선감이 잘못해서, 박성구 선감을 상도방면 수임선감으로 임명하니, 박성구 선감 앞의 전 도인들은 박성구 선감과 화합하여 도를 잘 닦아 나가도록 하라."는 도전님 명이 하달되었다. 그리고 경석규 종무원장이 "도전님의 분부니 잘 이행하도록 하라."며 지방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④도전님께서 당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훈재 선감은 포항에 오면 도인들을 회관 밖에서 개별적으로 만나 면담하는 등 상도방면 도인들의 화합을 시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도인들간에는 위화감만 조성되어 갔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된 오연자 선사가 주훈재선감에게 말하기를 "도전님께서 화합을 시키라고 하셨으면 화합을 시켜야지 왜 도인들간에 위화감을 조성시키고 다닙니까?"하며 따지자, "오 선사는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면서 묵살해버렸다. 그리하여 결국 89년 2월에 김태호는 성산방면으로, 김호봉은 용흥방면으로 나게 되어 주훈재 선감이 2개방면을 데리고 나가서 부전방면에 월성(月誠)을 모시게 됨으로써 상도 박성구 선감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8. 己巳年(1989년)
①1989년 1월 6일(陰 戊辰年11월 29일)도전님께서 납향치성을 발표하셨다. 도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주님께서도 납향치성(臘享致誠)을 한번 받으시고 화천하셨다."하시고, "납향치성을 각 방면 회관·회실에서 올리도록 하라. 납향치성은 제후가 천자께 드리는 치성이다. 납평일(臘平日)은 동지로부터 셋째 未일이고, 이날 치성을 납향치성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각 방면 선감들은 지방회관·회실에서 치성을 올리게 되었다.
②戊辰年 납향치성(88. 12. 16 陽 89. 1. 23) 납향치성 후 상도 박성구 선감은 음복을 진상하고, 폐백으로 향을 도전님께 올렸는데, 그 향은 이후에 영대(靈臺)에 올려져 있었다.
9. 己巳年(1989년) 9월 19일
도전님께서 훈시를 내리실 때 "절 할 때도 예법에 맞아야 한다. 과거에 석가모니도 세 번 절을 받았다. 도주님 재세시에 네 번 절을 받으셨다. 불교에서 절의 주지도 절을 여러 번 받는다."라고 하셨다. 그 후 도전님께서 분부하시길 "임원들이 지방회관에서 봉심전에 배례를 올릴 때는 원위(元位)에만 올리도록 하라"고 지시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