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주는 신비로움은 그 산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다'
1> 대상산 : 옛 신라의 자취
2> 일시 : 2017년 4월 23일
3> 산행코스 : 신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4> 산행거리 및 산행시간 : 역사 속으로 200리 길(80KM, 10시간 소요)
5> 참가자(존칭생략) : 나홀로
언젠가는 한 번 해 봐야지 마음먹고 있었던
경주 문화 하이킹 답사...
오늘 그 칼(?)을 뽑았다
산에 대한 그리움은 잠시 뒤로 잊은 채~~
태화강 출발 08시34분 무궁화 열차에 잔차를 싣고서~~^^*
열차 까페 칸이 자전거를 실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다른 승객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혼자 차창을 내다보며 셀카 놀이 중....ㅋㅋ
9시 14분 경주역 도착
김유신묘를 항해 출발을 한다
김유신 장군 묘 가는 길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으로
신라 삼국통일의 공로를 인정 받아 태대각간이라는 최고의 관직에 봉해졌고
사후 흥덕왕 10년 835년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한다
묘 앞에 서니 장군의 기가 훅 들어오는 듯 하다...^^*
김유신 묘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길을 따라 무열왕릉으로 달린다
무열왕릉은 선도산 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산자락에는 서악서원과 도봉서당 그리고 서악동 고군분이 흩어져 있다
무열왕릉도 서악동 고군분 중의 한 곳이다
서악서원
조선 명종 16년 1561년 경주 부윤 이정이 김유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라 한다
(부윤은 조선 시대 종이품 문관의 외관직(外官職)으로
지방 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라고~~^^*)
당시 경주 지역의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함께 모시자 하여
이정이 퇴계 이황과 의논하여 함께 모셨다고 한다
서악정사는 퇴계 이황이 이름하고 현판을 달았는데
아쉽게도 임란 때 모두 불타고 이후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도봉서당
조선 성종 대의 학자였던 불권헌 황정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45년(중종 1년) 지금의 위치에 추보재라는 묘사재실로 건립되었다.
이후 전란과 긴 세월을 거치며 훼손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불권헌 황정의 후손들이
1915년 추보재가 있었던 자리에 도봉서당 일곽을 중건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 한다
서악동 삼층석탑
선도산 산행 길에는 여러 왕릉이 있다
서악서원과 도봉서당을 둘러보고 내려오며 본 무열왕릉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유일한 능이라 한다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으며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열왕릉을 포함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들...
유료 입장하는 무열왕릉과 고분군을 둘러보고 입구를 나와
무열왕릉 능역의 밖에 있는 김양의 묘와 김인문의 묘를 둘러본다
김양 묘(왼쪽 묘)
김양은 태종 무열왕의 9세손으로 김주원(金周元)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여(貞茹)이다.
그는 828년(흥덕왕 3)에 고성군(固城郡) 태수를 지낸 후 중원소경(中原小京)의 장관과
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하였다
흥덕왕이 적장자가 없이 죽자 왕의 사촌동생 "균정"과
다른 사촌동생의 아들인 "제륭"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다투었는데
김양이 균정을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바로 신무왕이라 하네요...^^*
김인문 묘(오른쪽 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서
어미인 무열왕비가 김유신의 여동생이니 김유신은 김인문의 외삼촌이 된다
김양 묘와 김인문의 묘
무열왕릉 능역은 사진 오른쪽 끝 소나무 아래 기와 지붕이 있는 곳이다...^^*
무열왕릉을 둘러보고 형상강을 따라 신나게 달리다
경주 톨게이트 옆 하천인 대천(네이버지도에선 고현천이라고도~^^*) 새마을교를 건너
서라벌대로를 따라 가다 금성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오릉으로 달린다...^^*
톨게이트 옆 고현천 새마을교...
경주 톨게이트
증축(?)하는 경주 톨게이트
오릉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시조의 시체가 승천한 후 7일 만에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었다 한다.
이에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 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알영정 신라 시조 왕비의 비각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알영정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이와 같은 정천신앙에 따른 탄생설화는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현재 알영정의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동경잡기≫에 따르면, 경주부의 남쪽 5리에 있었다고 한다
오릉과 알영정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오릉 내에 있는 숭덕전이 시끄럽다
알고 보니 참봉도임식 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참봉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박씨 후손들이 경주 내의 11개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을 뽑는(?) 그런 행사란다
우연찮게 생전 처음 보는 행사도 보게되었다
넓은 풀 밭엔 어린 후손들이 마냥 신났다...^^*
오릉을 나와 교촌 마을 가는 길에 '경주 한방 병원'도 둘러 보고....^^*
경주 교촌 마을
교촌마을의 역사는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82년(신라 신문왕 2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세워진 곳이다
‘교촌’이라는 이름은 ‘향교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마을 가장 안쪽에 들어선 향교는
국학이 세워진 682년부터 오늘날까지
1,300여 년간 나라의 인재를 길러온 교육의 산실이다
만석꾼 최씨 고택과 교동 법주
향교 옆에 있는 고가는 경주 교동 최 씨 고택(중요민속문화재 27호)이다
만석꾼으로 이름난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지어져 30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곳이다
12대를 이어온 최부잣집의 창고는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목조 곳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곳간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행한 공간이다
보릿고개 때나 흉년이면 쌀 100석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준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의 현장인 셈이다
최씨 고택 내부
곳간 앞에는 최부잣집에서 대대로 이어온 ‘육훈’이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가훈이 한 자 한 자 가슴에 파고든다
최씨고택을 나서면 경주교동법주를 판매하는 고택과
독립 유공자 최완 선생의 생가가 이어진다
교동법주(중요무형문화재 86-3호)는
조선 숙종 때 최국선이 처음 담근 술로
최부잣집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다
경주 향교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신문왕 2년(682) 국학(國學)이 설치되었던 곳이라 한다
계림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또는 신월성(新月城) 사이에 있는 숲
왕버들,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의 고목(古木)이 울창하게 서 있는
신라 건국 당시부터 있던 곳이다
시림(始林)이라 부르다가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이후
계림(鷄林)이라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60년(탈해왕 4)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月城)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의 시림(始林)이 온통 환한 광명(光明)으로 차 있어
가보니 자주 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 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櫃)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나무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이 광경을 탈해왕(脫解王)에게 고(告)하자
왕(王)이 거동하여 궤(櫃)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나
아이를 ‘알지(閼智)’라 했다고 한다
‘알지’란 순우리말로 ‘아기’를 뜻한다
탈해왕이 ‘알지’를 안고 궁으로 돌아와 태자(太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王位)를 파사(婆娑)에게 양보했다
‘알지’는 금궤(金櫃)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姓)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 후 ‘알지’의 13대손인 미추(未鄒)가
김씨로서는 최초로 신라왕이 되었다.
황남동 대형건물지
계림 뒤에 있는 곳인데
뒤로 보이는 고분군에는 내물왕릉이 있다는데
어느 능인지 모르겠다...ㅋㅋㅋ
첨성대
국보 제31호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나오며
〈고려사〉에도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1960년대까지 정설이었지만 반론도 제기된다
구조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 관측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경주 지진의 피해로 현재 보수 중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바로 이웃에 있는 대릉원으로 향한다
대릉원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신라 고분군으로
유명한 천마총, 미추왕릉, 황남대총 등이 바로 이 대릉원 안에 있다
경내가 공원처럼 되어 있어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은데
특히 이곳 주변은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미추왕릉과 천마총 가는 길의 풍경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마저 정가해지는 기분이다
미추왕릉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을 모신 곳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신라 제13대 미추왕(재위 262~284년)을 모신 곳이다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이라고도 한다
천마총 가는 길...^^*
천마총
5~6세기경에 축조된 어느 왕의 무덤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5~6세기경에 축조된 어느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 당시
금관을 비롯한 유물 11,50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 그림(天馬圖)이 그려진 말다래가
나와서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 천마총은 무덤의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천마총 입구
대릉원 풍경
대릉원을 둘러 보고 다시 계림을 보게 된다
비단벌에 전기자동차 내도에서 보듯
교촌마을과 경주 향교, 계림과 내물왕릉, 첨성대 대릉원과 반월성 석빙고는
옹기종기 한 곳에 모여 있어 걸어서 모두 둘러 볼 수가 있다
많은 인파로 인해 자전거를 끌고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이제 반월성과 성 위에 있는 석빙고를 향해 간다
반월성 오르는 길
주변 상인들에게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느냐 물으니 가능하단다
지금까지 들른 모든 곳은 거의 자전거를 끌고 들어 갈 수가 없어
매표소 입구에 자전거를 거치해 두고 구경을 하였다
석빙고
일종의 천연냉장고로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에 의해
신라 때의 빙고로 알아왔으나
현재의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빙고는 입구가 월성 안쪽으로 나 있으며
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성의 경사를 따라 안이 깊어지며
내부는 길이 12.27m, 폭 5.76m, 높이 5.21m 규모로
모두 가공된 석재로 되어 있고
굴은 다섯 개의 아치형 기둥 사이에 장대석이 걸쳐 있다
이 장대석을 친 위치 세 군데에 외부와 통하는 환기공이 뚫려 있다
바닥 중앙에는 배수로가 있어
경사를 따라 성 밖으로 흘러나가게 되어있고
외부는 장대석위에 흙을 덮어 환기공만이 노출되어 있다
보물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2부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