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이라고 하면 잔인한 폭력집단으로 대변된다. 우리 나라에 일진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일진을 처음에 만든 사람은 송병준이다. 그는 을사능약을 지지하며 고종 앞에 헤이그 밀사에 고종에 관여했다고 칼을 차고 들어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제 자리를 내 놓으시죠! 당신은 이또 앞에 무릎을 꿇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자결하세요!" 라고 한다. 신하였던 그의 이 말은 조선 역사 최악의 식겁이다. 그는 조직적으로 조선의 영혼을 없애고 일제에 협력하기 위하여 조선 반도 곳곳에 일진회를 확장한다.
일진회가 주장한 것은 정부는 국민들에게 예산을 거두거나 집행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세계사의 중심은 일본이기에 조선이 살 길은 일본의 우산아래 있어야 하며 언론과 경찰을 동원하며 저항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찾아 신고하고 고문을 하고 언론을 통해 친일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난 번 글에서 이완용 송병준이 조선일보의 설립자였다는 것과 송병준이 남대문시장을 조선 총독부에서 불하받아서 물품과 돈과 조직을 동원해 친일행위를 한 것을 말하였다.
일진회는 돈과 정보력 조직력 군사력을 다 갖추고 있었고 나팔언론인 국민신보를 후에는 조선일보를 이용했다.
사진1은 송병준이 일본 황태자의 조선방문을 지지 환영한다는 아치를 일진회이름으로 남대문에 설치한 모습이고 사진2는 일진회에 대항했던 구연영 열사 (1864~1907)가 공개 처형되는 장면이다.
동학혁명에 참여했고 의병장이었던 구연영은 남대문에서 상동교회의 청년 전덕기를 만나서 스크랜튼 선교사의 큰 뜻과 진정성을 소개받고 10살이 어린 전덕기 에게 큰 감동을 받아 후에 목사가 되어 이천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한다.
구연영 열사를 체포 처형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일진회는 이용진이란 첩자를 통해서 그와 그의 아들을 체포해 고문을 가하며 구국회 명단을 이름을 대라고 말하자 구연영은 조선에서 일진회 빼고는 다 항일자이며 독립운동가라고 말하고 45살 때 25살 아들인 구정서와 함께 사진처럼 공개 처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