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빛고을 향토사이야기 8> 영남의 호랑이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
이 글은 일월산을 근거지로 하여 의병 활동을 한 신들석 장군의 이야기 입니다.
장군은 1874년 영덕군 축산면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장군은 고려 창건 때 왕건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신순겸
장군의 후손으로서 어릴 때 부터 씩씩한 기상이 남달랐으며 담력이 매우 커서 동리 사람들은 저 아이가 자라면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들 기대 하였습니다.
장군이 일찌기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 부터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 형편이 어지러워 어린 소견으로서도 매우 걱정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 세에 이미 벌써 의병 대장 김 하락 장군 밑에 들어 가서 동서 사방으로 말을 타고 달리며 많은 활약을
하였습니다.
장군이 청도 지방을 지날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철도를 놓는 것을 보고 분한 마음이 용솟음쳐서 전봇대를 뽑아 일하는 일본
공병대원 45명을 한꺼번에 몰살시켰습 니다.
그 길로 부산에 내려가서 일본군함 한 척을 때려 부수는 등 동에 번쩍 했다가 서에서 나타나곤 하여 일본 군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1905년 을사 보호조약이 이루어지자 장군은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가정의 재산을 모두 털어 군량을
준비하고 무기를 만들고 300명의 의병들을 모았습니다. 이것은 장군의 부친도 한 마음으로 나라 구하기에 애썻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로 부터 장군은 동해 방면에서 백성을 죽이고 곡식을 뺏는 등 행패를 일삼는 일본군을 상대로 평해, 영덕, 삼척,
울진 등에서 의병으로 대항을 했습니다. 장군이 의병을 지휘할 때 특별히 주의한 일은 나라를 일으켰으므로 백성을
아끼며 절대로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일월산과 평해의 백암산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대와 싸우면서 많은 성과를 올리자 신문에서는 잇달아 장군의
활약을 보도 했고 점차 그 이름이 알려져 원주, 평양 등지에서도 병사들이 찾아와 그 수는 날로 늘었습니다.
충북 청주에서 일본군 대 부대를 만나 모조리 무찔러 크게 이기고 많은 무기와 탄약을 빼앗았으며 오래도록
일본군대에 시달림을 받던 그곳 백성들을 해방시켜 준 공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워낙 바람과 번개 같이
전쟁터에서 빠르게 활약하므로 왜적은 장군의 말만 들어도 겁을 낼 지경이 었습니다.
한편 총독부에서는 끈질기게 장군의 마음을 돌려 일본에 협조할 것을 권해 왔습니다. 도지사의 전갈이니, 천황의 명령
이니, 총독의 친서니 하면서 여러차례 사람을 보내 왔으나 장군은 받는 대로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습 니다. 도저히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자 장군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많은 돈을 준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이 광고를 보고 돈에 탐이
난 친척 몇 사람에 의해 장군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니 아깝게도 서른 다섯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장군의 출생지는 영덕 이었으나 주로 일월산을 의병 기지로 삼고 많은 활약을 했으므로 향토의 충신이라 하여도
틀리지 않는 분으로 지금도 위대한 업적을 모든 국민이 기리며 얼마 전 텔레비젼에서도 업적을 소개된 바 있었
습니다.
*자료정리 : 향토사연구회 박원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