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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병오박해와 성인들과 김대건 신부
[성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 기도문]
많은 순교자들을 통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주신 아버지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특별히 김대건 안드레아를 사제로 뽑으시어 순교의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나이다.
하느님과 이 민족의 화해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정신을 묵상하며 순교자의 후예답게 살지 못한 저희의 잘못을 뉘우치며 청하오니
한국교회의 초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박해 중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얼을 이어받게 하소서.
주님, 저희 모두가 순교자들의 뜨거운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여
이 민족 안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가게 하시며 남북으로 갈라져 고통 중에 있는
이 겨레에게 화해와 일치를 가져오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순교자의 모후이신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정진석 추기경 인준/ 2006.4)
1) 병오박해와 순교성인
1839년 기해박해 이후 국경감시가 엄해졌기에, 선교사들이 육로를 통해 입국하기가 어려웠다. 1845년 10월 12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 나바위로 입국. 페레올 주교는 1846년 봄 김 신부에게 중국에 있는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입국할 수 있도록 새로운 해로 개척 지시. 김 신부는 마포, 연평도, 백령도를 항해하면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해로도(海路圖) 등을 전달.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어 10일 해주감영으로 이송, 임치백 등이 체포되어 14일에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금위영의 군인으로 남대문 안에 살고 있었던 남경문(세바스티아노), 앵베르 주교의 복사였던 이재의(토마스), 회장 현석문(가를로) 등. 현석문은 김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우물골(소공동)에 있던 신부 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그곳에 있던 여신자들을 잣골(혜화동)의 이간난(아가다) 집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사포서동(통인동)에 새로 산 김임이(데레사)의 집으로 피신. 그러나 7월 15일 이들과 정철렴(카타리나) 등이, 은이에서 한이형(라우렌시오)을 체포. 김 신부는 7월 19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 임치백에게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줌.
1846년 8월 9일 프랑스 함대 세실 함장이 군함 세 척을 끌고 충청도의 외연도에 나타났다. 조정에서는 9월 5일, 15일 회의, 헌종은 사형판결을 내렸다. 세실의 원정이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고,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 김 신부는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19일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20일 포도청에 있던 임치백과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과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이 순교하였다.
신자들은 박해 소식을 듣자마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안전한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김 신부의 유해는 여러 신자들에 의해 와서(瓦署, 군종교구청 자리)에 안장되었다가 미리내로 이장. 임치백의 유해는 가족들에 의해 안장되었을 뿐 다른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들의 순교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조사되었고, 1846년 11월 3일자의 서한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라틴어로 옮겨져 최양업 부제가 번역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더불어 1847년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그 결과 9명의 순교자들은 1925년 7월 5일 기해박해 순교자 70명과 함께 시복되었고, 1984년 시성되었다.
2) 김대건 신부님의 활동과 업적, 그리고 순교
서울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2006년도 사목교서를 통해 “조국과 민족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부르심에 순명하며, 젊은 나이에 순교로써 믿음을 증거한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역동적 삶이 교구민 전체의 삶 안에서 길이길이 살아 숨쉬기를 염원한다”고 하였다. 그의 삶을 보면서 ‘아직도 약관의 나이에 어떻게 그 험난한 길을 용감하게 걸어갈 수 있었으며, 자신의 어깨 위에 놓여진 엄청난 짐을 짊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하게 된다.
(1)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① 생애와 활동
1821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뫼)에서 김제준(이냐시오, 1790-1839)과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종조부(從祖父) 김종현이 신앙을 받아들인 뒤 가족들에게 전교하였고, 증조부 김운조(즉 진후,1738-1814, 해미 옥사)를 비롯하여 조부인 김택현, 김한현(종한, 1815년 대구 순교), 김희현이 입교.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는 김택현과 혼인하였다.
가족은 서울 청파동으로 이주하였다가 용인의 한덕동(이동면 묵리)을 거쳐 골배마실로 이주해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발육상태가 좋지 않았다. 리브와 신부가 1839년 5월에 쓴 서한에서 “안드레아는 자주 복통과 두통과 요통을 앓습니다. 그는 마카오에서 칠면조 집의 대들보들을 들어 올린 후부터 허리에 고통을 느낍니다.”고 하였고, 그해 8월에 쓴 서한에서 “불쌍한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위병과 두통과 요통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털만 보더라도 큰 두통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18세) 그의 머리털은 회색이며 흰색이고, (얼굴빛은) 노랗고 거의 모든 색깔입니다. 저는 일찍이 이렇게 추한 머리털을 보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훗날 그는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터전한 조국애로 극복해 나갔다.
1836년 7월 모방 신부가 교우촌 순방차 나섰다가 김제준의 집을 방문하고 열심과 조숙한 지능을 보이고(서 야고보의 증언) 지혜가 비범하고(이 베드로의 증언) 신심과 정신이 어려서부터 뛰어난(최 베드로의 증언) 아들 대건을 본 뒤 제자로 삼고자 하여 데리고 갔다(최양업은 2월 6일, 최방제는 3월 14일 모방 신부댁에 도착).
모방신부는 신학생들을 12월 3일 서약을 받고 여항덕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정하상, 조신철(가를로), 이광열(요한) 등에게 신학생들을 인도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신학생들은 요동에 있던 샤스탕 신부가 정해준 2명의 중국 밀사들과 함께 마카오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갔는데, 1837년 6월 7일(양)에 도착하였다(최방제는 위열병(胃熱病)으로 1837년 11월 27일 선종). 1839년 4월 필리핀 마닐라로 가서, 롤롬보이 수도원에 가서 약 6개월 반을 생활한 뒤 마카오로 귀환하였다.
처음 책임자가 되어 라틴어와 성가를 가르친 칼레리 신부는 1837년 10월에 쓴 서한에서 “르그레즈와 신부가 그 교육을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데 위로를 주고, 그 수고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데플레슈 신부는 라틴어를, 리브와 신부는 교리를 가르쳤다. 마카오로 귀환한 뒤 르그레즈와, 리브와 신부가 라틴어와 프랑스어, 교리 등을, 베르뇌 신부가 철학을, 메스트르 신부는 신학을, 1844년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가 신학을 가르쳤다.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날 무렵, 프리깃함 에리곤호의 함장인 세실이 조선 해안을 방문할 의사를 표명하였으므로 리브와 신부는 중국과의 교섭에서 통역으로 이바지하도록 안드레아를 파견하였다. 그해 2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세실 함장이 이끄는 에리곤호를 타고 입국로 탐색 여행을 나서게 되었다. 팅해, 상해, 그 밖의 항구에서 겪은 어려움을 통해 그는 점차 그의 마음에 대담성이 발전하여 그의 앞날에 하느님의 섭리가 계획한 것을 완수하게 만들었다.
첫째, 요동에 도착한 뒤 그해 12월 27일 책문에서 밀사 김프란치스코를 만났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박해의 위험으로 조선에 안전하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신품을 받지 못했으므로 교우들에게 무슨 봉사를 할 수 있느냐고 만류하였다. (젊은 혈기에 슬기로운 경험도 없으면서) 새벽 1시쯤 떠나 입국한 이후 하루 동안 전진하였다. 첫째 주막에서 언어와 이상한 옷차림과 그의 모발이 그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였다. 결국 도둑으로 몰릴 위험이 있어 되돌아와야만 했다. 낮에는 눈으로 덮인 산속에 숨었고 밤에는 여행을 계속하였다. 3일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 피곤과 잠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눈 위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려 하였다. 그는 잠이 들자마자 ‘일어나 가라’는 소리에 깨어났다. 그의 발은 얼어서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고 그의 입술은 추위로 얼어서 말을 발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신력이 그를 구해 주었다. 1843년 4월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이 있던 소팔자가로 되돌아갔다.
둘째, 1844년 2월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2천리 떨어진 훈춘을 거쳐 3월 경원에서 밀사들을 만난 뒤 소팔자가로 되돌아왔다. 그해 12월 10일 경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그의 산 신앙과 성모님께 대한 깊은 의뢰심으로 이 모든 여행의 피로를 큰 인내로 이겨냈다.
셋째, 1845년 1월 밀사를 만나 의주를 통해 입국하여 활동을 하다가 상해에서 8월 17일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이다. 입국한 뒤 그는 1) 선교사들이 장차 거처할 집을 석정동에 마련하고 페레올 주교를 모시러 가시 위해 배를 구입하였다. 2) 14세 된 두 명을 선발하여 가르쳤고, ⌜朝鮮全圖⌟를 작성하여 마카오로 보냈다. 3) 현석문 등이 수집해 온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4) 사제품을 받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제주도를 거쳐 10월 12일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그는 조선 선교지의 유익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위험을 용감히 무릅쓰고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가 체포되어 순교하기까지의 3개월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극적이면서도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1846년 6월 서해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주교의 명에 따라 〈임치백(43), 임성룡(23), 김중수(78), 엄수(44), 김성서, 이의창(베난시오), 박성철(베드로), 노언익, 안순명) 등과 같이〉마포를 출발하여 해주 연평도로 가서 백령도 근처에서 중국 배에 서한과 지도를 전달하고 오다가 6월 5일 등산진에서 체포되었고, 10일 해주에 있는 황해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13일 그곳에서 문초를 받았다.
등산진에서 그는 배교하라는 말에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믿는 거요. 우리 종교는 하느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관장 나으리, 하느님의 사랑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니 감사하오.”라고 대답하였다. 이로 인해 목에 칼을 쓰고, 손⋅발⋅목⋅허리를 결박당하여 걸을 수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이때 해주의 황해감영에서 있은 첫 문초에서 김대건은 자신의 이름은 于大建이며, 중국 광동성 오문현(마카오)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책자는 천주교회의 중요한 책자이며, 인물상은 아기 예수와 성모상임을 밝혔다. 2차 문초에서 관련자를 대라는 심문에 “만일 누구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앞으로 저와 연관되어 해를 받을 것이므로, 비록 갖가지로 악형을 가하고 즉시 머리를 벤다고 해도 제가 계율로 삼는 바로는 결코 지목하여 말할 리가 없습니다.”고 진술을 거부하였다. 3차 심문에서 배주인 임성룡은 김대건이 가는 곳마다 지도를 그렸음을 밝히자, 김대건은 선교사들의 입국시 도움을 주려고 한 것임을 부인하고 개인적인 취미로 그렸다고 진술하였다. 4차 심문에서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인간이면 면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 천주를 위해 죽게 되었으니 도리어 이것은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묻고 내일 묻는다 해도 오직 마땅히 이와 같이 할 뿐이오. 때리든 죽이든 또한 마땅히 이와같이 대답할 뿐입니다. 빨리 때려 빨리 죽이십시요.”고 하였다.
황해감사는 4차례의 심문결과를 토대로 체포경위와 그가 신자임을 지적하고 중국 광동사람인 것 같다고 보고하면서, 압류한 물품을 동봉한다고 밝혔다. 그는 외국인과 관련되었으니 이 문제의 처리를 중앙에 위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엄중히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게 되었고, 14일 비변사에서는 이 죄인을 잡아 올리도록 건의하였다. 18일 해주를 떠나 21일 포도청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이 압송된 그 다음날 황해감영에서는 중국 배에 맡겼다는 지도 1장과 편지 6장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해왔다.
23일 포도청에서 첫 문초가 있었고, 그의 진술은 11회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6번째의 진술에서 용인에서 태어났음을 밝혔고,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배교하라는 말에 “임금님 위에 하느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공경하라고 명하시오. 그러니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은 임금님의 명령이라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큰 죄악이오”라고 대답하였다. 9째 진술에서 “저의 천주학에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는 것을 법계로 삼고 있으니, 비록 교우가 있다 하더라도 차마 털어놓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천주학을 전한 곳이 없는데, 어찌 다른 교우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헌종은 중국 배에 편지와 지도를 부쳐 보낸 의도를 철저하게 밝히라고 명령하였다. 26일 2차 문초에서 협력자에 대한 진술을 강요당하자, 자신과 연루된 다른 역관은 없다고 하였다. 또한 편지도 단순한 문안 편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답변하였다. 이미 자신과 관련설로 추적을 당하고 있는 이재용 이외의 누구의 이름도 밝히지 않으면서, “저의 사정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을 따름이니,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합니다.”고 진술을 거부하였다. 관리들은 그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말을 대지 않으므로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30일 3차 문초에서는 14차례에 걸친 심문과 답변이 있었다. 우선 서양어로 된 편지를 직접 쓴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필적을 조사하였으나, 그의 재치로운 답변이 있었다. 이때 그는 여러 명의 선교사를 죽이고 또 이번에 자신을 죽인다 해도 서양에서 계속 성직자가 파견될 것이므로, 영원히 천주교를 금할 수 없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관련자를 대라는 질문에, “천주교인이 체포된 것은 모두 교우들이 고발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에 내력과 거주를 서로 묻거나 듣지 않으므로” 알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이에 포도청에서는 “여러 차례 엄히 추궁하였는데도 갈수록 입을 다무니 엄히 가두었다”고 하였다. 이후 7월 19일까지 계속된 6차례에 걸친 문초에서 40차례 진술을 계속하였다.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하였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관련자를 대거나 신부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모두 세 통의 편지를 썼다. 19번째 서한은 4명의 신부님들 앞으로 작별인사를 겸하여 보낸 것이다. 20번째 서한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것으로, 등산지에서 체포되어 해주를 거쳐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고 옥중에서 처분을 기다리던 전 과정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마지막에 다시 한번 그의 어머니를 부탁하였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10년이 지나 며칠 동안 아들을 볼 수 있었으나 다시 곧 아들과 헤어져야 하였습니다. 부디 슬퍼하실 어머니를 위로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21째 서한은 신자들에게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어떠한 경우가 닥치더라도 신앙을 잃지 않도록 당부하는 마지막 서한을 보냈다. 그에게 9월 15일 군문효수의 형이 확정되었다. 새남터 형장으로 가실 때 보라색 저고리를 입고 들것을 타고 머리를 풀고 결박을 당해 가셨습니다(변 아나타시아 증언). 들것을 타고 두 다리는 들것에 묶여 결박되었으며, 상투는 풀어 앞으로 묶여졌고, 보라색 겹저고리와 굵은 삼베로 짠 여름 홑바지를 입으셨으며, 안색이 태연하게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박 글라라 증언). 죄인이 서소문 밖에서부터 새남터까지 따라갔으며, 당고개에 이르러 한참 지체할 때 신부께서 들것에 앉아 있는데, 땀이 흐르고 상투가 풀어지자 운반하던 사람이 다시 상투를 틀어주던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보라색 겹저고리를 입으셨고, 머리를 들어 좌우를 살펴보셨습니다. 형장에 이르러 군문 효수형의 법식대로 하다가 팔방을 돌릴 때 매우 기뻐하는 모양으로 바삐 돌아다니셨고, 칼을 받으실 대 두 번 만에 머리 베어지던 생각이 납니다(박순집 베드로 증언). 형장에 이르러 군사들이 결박한 팔에 주장을 꿰어 들고 팔방을 돌릴 때는 즐거운 빛을 나타냈습니다.
(옷을 반쯤 벗기었다. 관례에 따라 그의 양쪽 귀를 화살로 뚫고 화살을 그대로 매달아 두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다 회를 한줌 뿌렸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이 그의 겨드랑이에 몽둥이들을 꿰고 그를 어깨에 맨 채 그 원 둘레로 빨리 세 번을 돌았다. 그런 다음 그의 무릎을 꿇리고 머리채를 새끼로 매어 말뚝 대신 꽂아 놓은 창 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그 끝을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하였다. 이런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조금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머리가 여덟 번 째 칼을 맞고야 떨어졌다)(페레올 주교). 새남터로 가는 동안 그의 목숨을 구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한 후에, 죽음에 직면하게 될 지 모른다는 놀라움 때문이었는지 좀 슬픈 기색이었다. 그러나 형지에 이르러 군인들이 신부를 묶고 그의 두 팔 밑에 막대기 하나를 끼우고 광장을 한바뀌 돌게 하였을 때 신는 다시 즐거운 기색이 되었고, 군사에게 하는 “나는 하늘로 올라가 당신들을 지금처럼 보게 될 것이오. 교우가 되어 나와 같이 있도록 하시오”고 하신 뒤 참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최 베드로).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요.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페레올 주교).
하루는 비가 붓듯이 오며 뇌성이 요란하자 동리의 교우들이 이상히 여기고 신부께서 순교하셨는가 하고 짐작하였는데, 교우가 전하기를 ‘김 신부께서 뇌성 치던 날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셨다’는 소문이 퍼졌다 했습니다(임 루치아⋅오 바실리오). 외교인 말이 새남터에서 죽일 때에 상서로운 기운이 기묘하게 공중에 나타났다고 했습니다(김 가타리나). 신부님의 시체를 박 바오로와 다른 교우들이 찾으려 할 때 말을 들은즉 ‘신부님의 손에 강아지에게 물린 흔적이 있다’ 하므로 그 상처를 보고 의심없이 찾아 장사지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김 마리아). 그때 어느 교우가 신부님의 머리털을 조금 가져온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박 글라라).
그의 죽음 이후 교회 장상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그의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만큼 유창한 말씨는 대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는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 더 나았고, 몇 해 동안만 실천을 하였더라면 지극히 유능한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그에게는 어떤 일이라도 맡길 수가 있었으니 그의 성격과 태도와 지식은 그 성공을 확실히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포교지가 지금 처해 있는 처지로 보아서 그를 잃는 것은 엄청나고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1857년 9월 23일 가경자로 선포된 후 김대건 신부의 순교에 관한 신앙 보호관의 진술에서 “그는 조국 전체의 그리스도교의 영광을, 조선 전체의 영적 해방을, 조선 전체의 초자연적 부활을 원했습니다. 조선 전체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봉헌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전심전력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나라를 조선 전채에 확장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자원하여 기쁘게 참아 받았고, 그 밖에도 많은 것을 행하고 감수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재인식하고 선포하여야 합니다. 김 안드레아의 영광은 특히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원의와 서원으로써 뿐만 아니라 실제와 사실로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참되고 착한 제자로서 하느님과 교회의 왕국을 조선 전체에 확장하기 위하여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짊어졌습니다. 우선 이것을 말해야 합니다. 모든 이가 신자들 중에서 빛나는 복자 안드레아의 진정한 최상의 영광의 칭호를 인식해야 합니다.”고 하였다.
순교 후 박 바오로, 서 야고보,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요한, 이 빈첸시오 등이 시신을 홑이불로 싸 갖고 3리 떨어진 와서(현 군종교구청)에 임시 매장, 미리내로 이장하였다. 그 후 1886년 시복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 1901년 5월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고, 10월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9월 밀양 성당으로, 1951년 혜화동 소신학교로, 1960년 7월 혜화동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1971년 3월 12일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에 대한 계측이 가톨릭 의대 정일천, 권흥식 박사의 주도로 있었다. 1998년 조용진 교수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측정 기록에 근거하여 복원상(復元像)을 제작하여 발표한 바 있고, 명동성당에서는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으로 김대건 신부님 상 제작을 위해 가톨릭 의대 해부학과 한승호 교수를 주축으로 한국과학기술원, 건국대 의대, 연세대 치대, 울산대 의대, 국립과학수사 연구소 등이 참여하였다. 2001년 6월 제작되어 복원된 흉상은 조각가 구본조 씨가 제작하였고, 명동성당 사제관 앞에 전시되어 있다.
② 저술과 업적, 사목활동
그가 남긴 서한은 모두 31통인데, 수취인에게 도달한 것은 22통 뿐이다. 그 중 리브와 신부와 고틀랑 신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은 유실되었고, 9통은 압수되었다. 현재 19통이 남아 있다(라틴어 16통, 프랑스어 역본 2통, 한글 필사본 1통). 저술은 ⌜라틴어 작문⌟2건, 7개월간 작성한 ⌜훈춘 여행기⌟, ⌜조선전도⌟(1845),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들 수 있다.
1845년 11월에 서울에 도착한 이후 이듬해 5월까지 6개월만 사목활동을 할 수 있었다. 6월 5일에 체포된 후 3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다. 처음에는 석정동(小公洞)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고, 외교인들은 그를 소공동 집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때 복사 이의창(베난시오)이 그를 도왔다. 이어 고향 골배마실에서 모친과 상봉하였다. 서울에서는 미나리골 김회장의 집, 무쇠막(서강의 수철막) 심사민의 집, 쪽우물골 등지를 방문하고 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다음해 까지 서울을 오가면서 용인의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터골(용인군 내사면 大垈里의 한터골), 이천의 동산밑, 단천 등지를 찾아가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성사 집전에는 엄격하였고, 교리를 설명하고 교우들을 가르치는 데 기쁨과 열성을 다하였으며, 큰 열성으로 성사를 집전하였다(박 글라라, 이 베드로). 이에 모든 교우들은 김 신부를 사랑하고 그들은 오로지 신부를 칭찬할 뿐이었다(김 프란치스코). 1846년 은이 마을 위쪽의 어머니 집에 와 있었다. 곧 떠나야 한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적어도 부활첨례까지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다. 부활이 지나자, 월요일에 떠나 서울로 갔다(임 루시아). 옥에 갇혀서는 남경문(세바스티아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고, 임치백(요셉)과 다른 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 시복시성 경위*
페레올 주교는 1846년 현석문(가를로)이 기록한 1839년(기해박해)의 73명 순교자들과 이재의(토마)가 기록한 1846년(병오박해)의 9명의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하여 프랑스어로 기록하였다. 이를 상하이에 머물던 최양업 부제에게 보내어 라틴어로 번역하게 했는데,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전기는 메스트르 신부가 번역하였다. 이는 교황청으로 보내어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을 촉진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문헌은 파리를 거쳐 1847년 10월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었고, 82명이 1857년 9월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교황청 조사를 위한 위임장이 조선교회에 전달되었으나 박해로 교구장이 모두 순교한 후였으므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교황청 조사는 1883년부터 1887년까지 있었는데, 16명의 증인이 김대건 신부에 대해 증언하였다. 1922년에 뮈텔주교는 관변측 자료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최후의 전체 회의에 제출되었고, 교황청 심사를 거쳐 79위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황청에서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1866년부터 1873년까지 있었던 병인박해의 순교자 26위에 대한 시복청원서를 1918년에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시복을 위한 심사가 계속되었고, 1968년 10월 6일 바오로 6세에 의해 24위에 대한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지난 1984년 5월 6일 103위 시성식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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