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대리는 요즘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바쁘다. 다음주에 있을 전국노래자랑에 출전하기 위해서이다. 회사에서 퇴근하면 미리 계약해둔 노래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물론 혼자가 아니다. 듣기 거북한 발음을 교정해주고, 노래부르면서 간단한 제스쳐들을 지도해줄 사람과 같이 간다. 바로 직장 상사인 박과장이다.
박과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신입사원 회식이랍시고 기획부 모두가 회식자리를 가졌을 때였다. 김대리는 5차까지 계속된 지옥의 술자리를 모두 소화해냈다. 김대리가 속한 4과의 과장은 중간에 이미 자리를 떴고 3과 과장인 박과장이 4과 신참들을 인솔해서 가라오케로 향했다. 거기서 김대리는 자신의 18번인 “무조건 무조건이야~~”를 열창했고 박과장은 그 노래실력에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한달 전 박과장은 업무에 지쳐있는 김대리에게 전국노래자랑 출전을 권유했고, 마침 삶의 낙을 서서히 잃어가던 김대리는 흔쾌히 승낙한 것이다. 지금의 마누라도 결혼하기 전에 내 노래실력에 반해서 결혼했다고 농담조로 말하곤 하지 않는가. 노래는 회사일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었기에 박과장과 의기투합해서 매일같이 노래방으로 향한다.
“이 부분 부를 때 새끼손가락 살짝 들어주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란 말야.”
박과장은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김대리가 스타가 된다면 당장에 회사 때려치우고 김대리 매니저를 자청하겠단다. 김대리는 박과장의 진심어린 지도 속에 무대 매너까지 연습하고 있다.
두 사람은 회사에서 눈을 찡긋 주고받으며 그 누구보다 들떠 있다. 이제 내일이면 전국노래자랑 예심이 시작된다. “무대가 노래방이라 생각하고 너 평소 하던대로만 하면 무조건 딩동댕이야. 중간중간에 손 살짝 들어주는거 잊지말고. 오케이? 낼보자. 푹 쉬어라.” 박과장은 3과 회식 때문에 일찍이 자리를 비운다. 덕분에 오늘 연습은 없다. 퇴근하자마자 여느 가수들처럼 목에 좋다는 날계란을 두 개나 까먹고, 며칠 전에 온라인으로 구입한 가발을 써본다. 30대라는 나이 답지 않게 머릿속에 허옇게 다 보일정도로 탈모 증상이 심각한 김대리였지만, 가발을 쓰니 10년은 젊어보인다. 기분이 좋아진 김대리는 아이들에게 내일 식사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할 테니 뱃속을 깨끗이 비워놓으라고 엄포를 놓는다.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한다는 긴장감은 전혀 없이 평소처럼 야릇한 꿈을 꾸면서 푹 자고나니 예심있는 날 아침이 되었다. 가족들은 벌써부터 들떠있다. 내가 노래자랑 나가는 것이 좋은건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외식하는게 좋은건지는 알 수 없다. 동네 목욕탕에서 시꺼먼 때를 밀고 돌아와 가발을 쓰고 오랜만에 무스도 바르고 차려 입으니 가수가 따로 없다. 점심은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거하게 해결하고 예심대회장으로 향했다.
“무슨 차가 이렇게 많아. 이게 다 후보자들이야?” 김대리는 대회장 앞에 밀려있는 수십 대의 자동차들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겨우겨우 주차를 시키고 가족들에게 차안에 있으라고 말한다. “까짓거 금방 통과하고 올거니까 그냥 여기 있어. 사람 많아서 복잡한데 괜히 갔다가 이산가족 될라.” 김대리는 저쪽에 길게 늘어서있는 줄이 어떤 줄인가 살펴보더니 안내원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83번인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안내원은 말없이 저쪽 줄을 가르킨다. 한숨을 내쉬며 이동한 그는 번호를 물어가며 겨우 자기 자리를 찾았다. 김대리 앞에 다섯사람 남았을 때 쯤 저쪽 방 안에서는 “땡”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동시에 김대리의 휴대폰이 울린다. “김대리, 난데 이거 차가 무지 막히네. 지금 가고 있으니까 이따 보자구.”
드디어 김대리가 방안에 들어섰다. 생각했던 관객들은 없고 텅빈 강당에 노래방 반주기, 심사위원 5명이 전부였다. 날카로운 눈빛을 한 다섯 사람 앞에 서니 촉각이 곤두서고 입안에 침이 마르기 시작한다. 인사를 하기도 전에 자신이 선곡한 노래 간주가 시작된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첫소절의 박자를 놓쳐버렸다. 초겨울의 한기가 엄습해 오면서 가사도 놓쳐버리기 시작한다. “땡” 1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떻게 그 방에서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문을 열고보니 박과장이 저만치서 달려오는게 보인다. “어떻게 됐어? 합격이지?” “아니요” 이 말 한마디를 하면서 눈물을 흘릴뻔 했다. 허탈한 표정의 박과장과 멋들어지게 머리를 빗어넘긴 김대리가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 후유증일까 한동안 두 사람은 회사에서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못했다.
몇 달 뒤, 한 사회봉사원에서 구성진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무조건 무조건이야~” 넥타이를 머리에 둘러매고 마이크를 잡고있는 사람은 김대리다. 그 옆에 탬버린을 흔들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박과장도 있다. 노인들은 박수를 치며 김대리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임시로 설치된 무대의 두 사람 위에는 ‘사회봉사원 노래자랑’ 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