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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시작한 종로를 따라 걷는 한양답사
보신각까지 둘러보았다.
계속 종로 2가, 3가 방향으로 걷다보면 종로2가 사거리를 지나 왼쪽이 파고다 공원이다.
소위 말하는 탑골공원이다.
파고다는 뭐고 탑골은 뭔지?
그런데 이곳이 서울에 들어선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걸어서 한양 답사 (8) 종로를 따라서 (2편)
ㅇ 서울 탑골공원 (사적 제354호)
원각사터 십층석탑 (국보 제2호), 원각사비 (보물 제3호)
塔(탑)이란 산스크리트어 stupa, 팔리어 thupa의 음사인 塔婆(탑파)의 준말로, 공양하고 예배하기 위해 일정한 형식에 따라 흙, 벽돌, 나무, 돌 등을 높게 쌓은 구조물을 말하는데 원래는 부처의 유골을 안치한 그 구조물을 탑이라 하고, 그것을 안치하지 않은 것을 지제(산스크리트어 caitya)라고 하였으나, 보통 구별하지 않고 모두 탑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이나
탑골공원은 서울에 들어선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사바틴 설계로 세워진 인천 자유공원보다 약 9년쯤 늦은 1897년에 총세무사로 근무하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세워졌으며, 이때 팔각정도 함께 지었다.
초기에는 황실공원으로 제실, 음악연주 장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나, 1913년부터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구한말 주한미공사 알렌의 메모... 아래 중앙 Public Park라고 쓴 곳이 탑골공원이다.>
공원이 되기전에는 탑과 비만 우뚝 솟은 빈터였고, 그 이전에는 조선시대 도성안의 3대사찰로 손꼽히던 圓覺寺(원각사)가 여기 있었다. 원래는 고려 때부터 興福寺(흥복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태종의 억불정책으로 없어졌다가 세조 10년 (1464)에 원각사를 창건하였는데 당시 원각사는 구리 5만근으로 주조한 大鐘(現 보신각 종)과 刊經都監(간경도감)에서 번역한 圓覺經(원각경), 그리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나누어 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십층석탑등이 유명하였다.
그러나 원각사는 성종대부터 강화된 억불정책으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연산군 10년(1504) 마침내 폐사되고 만다. 연산군은 이곳에궁중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掌樂院(장악원)을 옮겼다가 그마저도 이름을 聯芳院(연방원)으로 고쳐 전국에서 뽑아올린 기생과 악사들을 관리하도록 했으니, 사찰이 임금의 유흥을 위한 기생방으로 전락하고 만것이다.
연산군이 반정으로 축출된 뒤에는 3년쯤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었으며 중종 9년(1514)에는 건물의 재목을 여러 공용건물 보수에 사용해버림으로써 원각사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 자리에는 탑과 비만 남게 되었다. (원각사 종은 7편 보신각 참조)
삼일문 현판
원래 탑골공원 삼일문에는 광복직후 서예가 김충현씨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가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을 달았다.
그러나 2001년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일본군 장교 출신이 쓴 현판을 걸 수 없다”며 뜯어냈으며, 이에 서울시 종로구는 그동안 서울시 및 문화재청과 현판 재설치에 관해 협의하여 2003년 2월 가로 1.2m, 세로 0.9m로 기존 것과 동일한 크기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여 달았다. 현판의 글씨체는 '삼'자와 '일'자는 독립 선언서의 글자를 그대로 사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는 다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만들었다.
<파고다 공원 정문... 파란 많았던 현판 '삼일문'>
원각사터 십층석탑 (국보 제2호)
우리나라 석탑 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탑이다.
1348년에 세워진 경천사터 십층석탑(現 중앙박물관 1층 실내에 세워져 있음)과 층수, 형태, 크기, 재료, 세부조각에 이르기까지 매우 흡사하여 아마도 이 탑을 범본으로 만들어진 듯하며, 재료는 흔히 쓰이는 화강암이 아니라 회백색 대리석이다.
탑의 상륜부는 사라져 없는 상태이며, 사실 위로부터 3개층도 언젠가부터 땅에 놓여져 있었는데 1946년 미군 공병대에 의하여 지금 상태로 복구된 것이라고 한다.
높이 12m의 탑은 흔히 보는 이중기단이 아닌 삼중기단이며 각 단의 폭과 높이가 동일하다. 평면 또한 큰 십자형의 한 가운데 작은 정사각형을 겹쳐놓은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각 단의 면석에는 온갖 동식물과 인물상을 빈틈없이 현란하게 조각하였으며 갑석에도 아래위로 연꽃받침을 돌리고 당초무늬를 빠짐없이 수놓았다. 제일 위층 기단부는 난간무늬를 돌려 아래 두층의 기단과 구분하면서 탑신부를 받도록 한 점이 눈에 띤다.
탑신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1층부터 3층까지는 평면이 기단과 동일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4층부터 10층까지는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일반 석탑의 경우와 같다. 3층까지는 몸돌과 지붕돌의 폭이 일정한 비율로 체감하다가 4층에서 급격하게 줄어든 후 다시 밋밋한 체감을 보인다. 몸돌 가장 넓은 면마다 부처님이 여러 보살과 제자를 거느리고 설법하는 장면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돼 있으며, 면이 꺾이는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들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어서 기왓골이나 마루, 추녀는 물론 공포의 작은 부재들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원각사터 십층석탑은 아마도 조선은 물론 우리나라를 통틀어서 가장 우수한 석탑 가운데 하나 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유리 보호각을 씌워놓아서 자세히 살필 수 없는 상태이다.
<폐허 상태에 십층 탑만 덩그라니 남았던 옛 모습과 유리 보호각을 덧씌운 현재 모습...>
<유리 보호각 속의 원각사터 십층석탑... 보기도 불편하고 어른거리고 비치는 현상으로 사진찍기도 불편하다.>
원각사비 (보물 제3호)
원각사의 창건내력을 새긴 비로서, 성종 2년(1471)에 세워졌다. 대리석으로 만든 몸돌과 지붕돌은 단일석이며, 거북받침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다. 현재 풍화가 심해 비문을 알아보기 힘들며, 지붕돌은 두 마리 용이 뒤엉켜 정상의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정교하게 새겼다. 높이 4.9m의 원각사비는 보물 제3호이다.
거북받침은 크고 두툼한데다 거북의 목이 머리보다 굵고 짧으며 코는 마치 돼지코처럼 뭉툭하게 잘려있어 둔해보인다. 발도 크기만 할뿐 힘없이 놓여있으며 등 무늬도 육각형이 아니라 가느다란 선을 여러개 겹친 사다리꼴 모양이다. 몸돌 상단 지붕돌 아래에 大圓覺寺之碑라고 두줄로 새긴 전액이 뚜렷한데 이 글씨는 강희맹이 쓴 것이다.
<원각사비... >
<大圓覺寺之碑라고 두줄로 쓴 篆額(전액)... 강희맹 글씨라고 한다.>
<귀부... 거북 받침은 둔중한 모습이나 네발과 꼬리는 사실적이다.>
<팔각정...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3호>
이렇게 탑골공원을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와서 잠시 옆길로 빠져보자.
인사동과 낙원상가가 보이는데 낙원상가 아래로 터널 지나듯 빠져나가면 오른쪽에 운현궁이 있으며 왼쪽으로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있다. 운현궁 뒷편으로는 높게 솟아있는 운현궁 양관이 보이는데 모두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이다.
<탑골공원 왼쪽 뒷편의 낙원 상가... 지하도를 빠져나가면 운현궁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운현궁 洋館(양관) (운현궁 : 사적 제257호)
운현궁 洋館(양관)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 건물로 흥선대원군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이준용의 양자인 의친왕 차남 이우의 소유였다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이우가 사망하고 8. 15 광복이 되자 미군정청에 접수되었고 한때 운현궁가 유족들이 사용했으나 1948년에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면서 덕성여대 본관이었다가 쌍문동으로 캠퍼스를 옮기자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사무처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학교측 간섭으로 출입, 견학이 쉽지 않다.
<운현궁 못미처 덕성여대(유치원, 초등학교) 정문...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작은 건물, 한때 이곳에 헌병대가 상주했을때 위병소라고 한다.>
<왼쪽으로 굽어진 길을 따라 다소 높은 지형에 운현궁 洋館이 보인다.
프렌치 르네상스식 건물로 완전 대칭형이며 궁전의 느낌이 들어 영화, 드라마 촬영도 자주 찍는 곳이다.>
<지붕위 굴뚝이 보이고 피뢰침 철제부분은 대한제국 황실 상징 오얏꽃을 표현하였다.>
운현궁의 주인
흥선대원군 이하응, 사저 터를 잘 일구어 운현궁을 만들었고 이를 확장한 영원한 주인이다.
흥선대원군은 장자 이재면과 차남 명복(고종)을 두었는데 이재면이 7살 위 형으로 운현궁의 2대 주인이다.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청나라에 피랍된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3회 방문하고 환국을 배종한 뒤 약 10여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하였다.1900년에 完興君에 책봉되었고, 1910년 興親王에 봉해진 뒤 1912년에 사망하였다.
이재면의 장자이자 흥선대원군의 嫡孫은 永宣君 이준용이다. 후에 이준으로 개명하였다.
대원군이 권력투쟁 과정에서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국왕에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반일 행각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국왕의 특사로 10년 유배형으로 감형 후 석방되었다. 그후 일본에 유학을 갔지만 귀국이 허락되지 않다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귀국하였다.
1908년 귀국하여 운현궁의 송정을 헐고 그곳에 洋館을 짓기 위해 100칸이 넘는 건물들을 철거해 목재를 팔아 재원을 마련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한 뒤 永宣君에 봉해지고 1912년 부친 재면이 세상을 떠난 뒤 5년 후인 1917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사가 없어 고종의 다섯째 의친왕의 아들 이우를 양자로 들였다.
의친왕의 차남 이우는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 운형궁의 4대 종주가 되어 재산과 公位의 칭호를 상속하였기에 ‘이우공 전하’로 불렸다. 公으로 불린 사람은 이우와 의친왕뿐이다.
이우는 일본의 정략적 음모술책으로 10살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황족과 결혼 강요를 뿌리치고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의 딸 박찬주와 결혼했으며, 아들 둘을 낳은 그는 1945년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한 후 그 유해를 조국으로 운구하여 8월 15일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12시에 장례식을 치룰 예정이었으나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으로 연기되어 오후 3시에 거행되었다.
이우의 큰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의 5대손, 고종의 4대손이 되는데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주 마케트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서 생활하다 귀국, 운현궁의 소유(관리)자가 되었으나 어려움이 있어 1993년 서울시에 운현궁을 매각하게 된 것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천도교의 총 본산이다. 3대 교주 손병희는 1904년 이용구가 일진회와 합하여 친일 행위를 자행하자, 이와 구별하기 위해 1905년 천도교로 개칭하였으며, 중앙대교당 또한 제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건립이 추진되었으며, 300만 교도 한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성금을 모아 당시 화폐 22만원을 들여 지었다.
건물 설계는 1920년 숙명여고와 조선상공회의소를 설계한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 (中村與資平), 시공은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맡아서 1918년 착공하여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지체되다가 1921년 2월에 준공되었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고풍스럽게 지은 4층 건물이다. 맞배지붕집인데, 철근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하였다. 또한 앞면에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풍으로 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함께 서울시내 3대건물의 하나로 꼽혔으며, 교회당의 구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다. 연면적 280.68평으로 약 800명에서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400평 규모의 대교당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조선총독부에서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등의 트집을 잡는 바람에 축소된 것이라고 한다.
<중앙대교당 전경...>
<내부 모습...>
그런데 이곳 천도교 대교당 앞에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기념비가 서있다. 왜일까?
그것은 바로 최초로 어린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으며, 어린이날을 제정하였고 33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어린이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은 애국지사이자 위대한 교육자인 동시에 아동 문학의 선구자 소파 방정환 선생...그가 19세에 천도교 교주이며 독립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천도교 안에서 이러한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교당 옆... 손병희를 기리며 세운 수운회관 앞의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비석>
<소파 방정환 선생은 세종문화회관 뒷편...에서 태어나 기념비가 서있다.>
종로를 따라 걷는 한양답사...
종로2가에서 잠시 창덕궁쪽으로 올라와버렸다.
기왕 이쪽으로 온김에 창경궁 앞 서울대학병원에 잠시 들러본다.
이곳은 대한제국시대에 근대식 병원이 시작된 곳이다.
ㅇ 서울 대한의원 (사적 제248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대한의원 건물
1907년 창경궁의 外苑(외원 : 바깥 정원)인 含春苑(함춘원) 언덕에 지었다. 이곳은 1764년 순화방에서 옮겨온 사도세자의 사당인 垂恩廟(수은묘)가 있었는데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敬慕宮(경모궁)으로 개칭되었다. 정조는 창경궁 북쪽에 월근문을 세워 한달에 한번 경모궁으로 참배를 다녔다 하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서는 경모궁이 바라다보이는 창경궁의 북서쪽 언덕에 자경전을 지어드렸다는 말이 전한다.
대한의원은 일본인 기술자의 설계로 1907년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08년에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병동과 부검실, 의학교가 지어졌으나 1979년 서울대병원 신관이 개원함에 따라 1978년 부속건물이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오직 본관건물만 남아 있다.
1908년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었고, 1911년에는 부속 의학강습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6년에는 경성제국 대학에 포함되면서 대학병원으로 되었다. 광복 뒤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의 본관이 되었고, 1970년대말 새 건물이 세워진 뒤에 부속건물이 되었고, 현재는 서울대학교병원 부설 병원연구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지상 2층으로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형으로 되어 있으며, 본관의 지붕은 앞면에서 봤을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중앙에 높이 솟은 시계탑은 바로크양식을 하고 있어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내부는 현재 일부 사무용도로 사용중이며, 의학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서울 대한의원 전경... 서울대학교 병원 본관과 대비된다.>
<정중앙에서 바라보니 서울대학교병원 건물이 그냥 지은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중앙점에 일치한다.>
무심코 돌아서려던 발견한 비석하나...
건물 뒷편으로 화단에 평범한 비석이 하나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일제 강점기때에 이곳병원에서 동물실험으로 숨져간 동물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731부대 만행을 떠올리며 동물의 죽음을 기리는 비석을 바라보노라니 참으로 묘한 느낌이다.
요즘도 실험동물 위령제를 올린다는데 직접 본 일은 없다.
<실험동물의 죽음을 위로하는 비석으로 보인다.>
답사코스
걸어서 한양답사, 종로를 따라서 1, 2편을 지도로 보면 아래와 같다.
A : 광화문 교보빌딩 옆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B : 보신각
C : 탑골공원 (원각사터 십층탑, 원각사비)
D : 운현궁 양관
E : 천도교 중앙대교당
F : 대한의원
곳곳에 개방화장실과 휴식공간이 있으며, 시내구간으로 어렵지 않게 걸어볼 수 있는 곳이다.
< 계 속 >
첫댓글 오래된 일 같이 느껴지지만 다시한번 다녀온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세한 기록 감사합니다
언제 날씨 좋은 날 한번 걸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