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상급에 대한 연구 류재룡
2005학년도 박사(Ph.D) 학위 청구논문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천국상급에 대한 연구
총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조직신학 전공 류재룡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천국상급에 대한 연구 지도교수 김길성
이 논문을 박사학위 청구논문으로 제출함.
총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조직신학 전공 류재룡
柳在龍의 博士學位(Ph.D) 論文을 認准함
審査委員 김길성 印
審査委員 문석호 印
審査委員 나용화 印
審査委員 이승구 印
審査委員 장성민 印
2005년 12월 일
總神大學校 大學院
감사의 글
이 논문이 나오기까지 은혜 베풀어주신 성 삼위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공부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역사로 이 학위과정을 무사히 마치게 된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교회가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상실하고 개혁주의의 정통 진리의 노선을 이탈한 시대에 천국을 소망하는 본고를 쓰게 되어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질된 기독교인 기복주의와 자유주의, 종교주의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는 상급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신 김길성 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총신대학에서 칼빈주의,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강의하시며 총신대학의 개혁주의 정통성을 이어나가려고 힘쓰시는 김박사님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또한 논문의 심사위원으로 수고해주신 총신대학의 문석호 박사님, 장성민 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심사위원이신 개혁신학 대학원대학교의 나용화 박사님, 국제신학대학의 이승구 박사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분들의 수고로 본 논문이 많이 정리되고 다듬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나용화 박사님은 논문의 많은 내용을 보충하는데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박사과정 공부를 지도해주신 서철원 박사님, 김광열 박사님, 문희석 박사님, 박용규 박사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또 그동안 본인의 공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시고 기도해주신 부모님이신 류차연목사님, 김석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본인은 목회자의 가정에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목회자가 되었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 형제들이 목회자가 되어 서로 도와주며 특히 본인이 개척교회를 하고 힘든 과정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부천에서 목회하는 김경수 전도사님, 유애경 사모님, 제주도에서 목회하는 이강목 목사, 유혜경 사모, 부산에서 목회하는 류재덕 목사, 미국에서 교수사역을 하는 박경신박사, 유미경 집사, 부산 만덕에서 신앙생활 잘하는 김진집사, 유은경 집사와 기도와 후원해주신 숙부 류정수 집사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또한 장인되신 정병학 집사님 장모님이신 권정숙 권사님의 배후의 기도와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또 기도와 후원을 해준 처가 형제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또한 늘 옆에서 함께 있으면서 위로해주고 힘을 북돋아주며 기도해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기도와 협조로 늘 힘을 얻고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자녀들인 선호, 선도, 선영, 선민이 건강하게 자라주어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한 늘 배후에서 기도해주신 청주소망교회 성도님들과 청주신학교 신학생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본인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후원해 주신 난곡동 교회 김영웅 목사님과 교단의 여러 목사님들과 교회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본 논문을 더욱 발전시켜 책으로 발간하여 이 시대에 상급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많은 사역들을 할 수 있는 자료로 사용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목 차
서 론 제 1 절 문제의 제기와 연구의 목적. 8 제 2 절 논문의 구성 및 연구의 방법. 14
제 1 장 상급에 관한 성경적 고찰 제 1 절 구약에 나타난 상급. 19 제 2 절 신약에 나타난 상급. 29
제 2 장 종교개혁 시대까지의 상급 사상 제 1 절 유대교의 공로사상. 46 제 2 절 헬라 로마 세계에 있어서의 상급개념. 49 제 3 절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 52 제 4 절 종교개혁자들의 상급관. 58
제 3 장 최근 개혁주의자들의 상급관 제 1 절 상급무시 견해. 72 제 2 절 상급중시 견해. 94
제 4 장 천국상급에 대한 신앙고백서의 견해 제 1 절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 129 제 2 절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구조. 130 제 3 절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상급사상. 131
제 5 장 천국상급에 대한 신학적 고찰(1) 제 1 절 천국상급에 대한 기독론적 고찰. 143 제 2 절 천국상급에 대한 구원론적 고찰. 154
제 6 장 천국상급에 대한 신학적 고찰(2) 제 1 절 천국상급에 대한 교회론적 고찰. 191 제 2 절 천국상급에 대한 종말론적 고찰. 199
제 7 장 천국상급에 대한 윤리적 고찰 제 1 절 기독교 윤리의 기초. 220 제 2 절 기독교 윤리의 목적. 226 제 3 절 기독교 윤리와 선행. 227 제 4 절 기독교 윤리의 내용과 상급. 228
제 8 장 천국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 제 1 절 상급의 수여자와 수혜자. 266 제 2 절 상급의 원리. 271 제 3 절 상급의 동기와 목적. 284
제 9 장 천국상급의 등급과 그 내용 제 1 절 천국상급의 등급. 296 제 2 절 천국상급의 내용. 300
결 론 제 1 절 상급을 바라보는 신앙. 344 제 2 절 상급을 위한 준비. 346 제 3 절 논문의 의의와 과제. 354
Bibliography. 358 Abstract. 366
서 론
제 1 절 문제의 제기와 연구의 목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 및 그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탄생되었다. 이 교회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고 하신(행 1:8)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전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져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독교의 근본진리에 도전하는 반기독교 세력들이 교회 안 밖에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인본주의와 유물주의, 세속화의 세력들이며 포스터모드니즘(post- modernism) 시대의 상대주의, 종교다원주의 세력들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절대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거부하는 자들이다. 종교 개혁에서 부르짖은 성경의 절대 권위는 과학과 이성의 심판 아래 빛을 잃게 되고 고등 비평가들은 성경을 갈래갈래 해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비교 종교학의 연구가 성경 연구에 도입되고 역사 비판학이 성경의 진위성을 가리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합리주의의 여과를 거쳐 하나의 문화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1880년대에서 1900년 초엽에까지 미국 강단에서 묘사된 그리스도는 하나의 훌륭한 문화적 이상에 불과했다. 남북전쟁 이후에 일어난 미국 경제의 부흥과 과학문명의 발달, 생활수준의 향상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며 구원과 내세를 외치는 정통주의 신학을 외면하고 점차 낙관주의적인 현대주의 신학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미 유럽 교회를 좌경화시킨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교회를 강타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의 진리를 그대로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고 교수하는 학자들이 기독교의 본 고장이라 할 수 있는 서구를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세속화는 최근에 이방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적 다원주의로 흘러가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라는 기독교 단체는 타종교들과의 대화를 강조하며,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포용주의는 성경의 진리를 저버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결과인 것이다.
오늘날 배도의 물결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대로(눅 18:8)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믿는 참 기독교가 드문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온 세계에 전파되어가고 있지만 진실한 기독교가 많지 못하는 서글픈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의 절대성을 포기한 현대 기독교는 내세의 천국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에만 관심을 가진다. 현세의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인본주의 도덕주의 기독교와 이 땅의 축복만 강조하는 기복주의 등과 같은 거짓 기독교가 기독교를 표방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므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골 3:1-3). 만약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이미 기독교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세의 천국을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세에서 믿음생활에 더욱 힘을 쓰게 되는 것이다. 내세에 대한 소망은 천국에 대한 소망 뿐 아니라 천국의 상급도 소망하게 된다. 성경은 신자가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가며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산상수훈에서 8복을 말씀하시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 5:12)고 말씀하시며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게 하셨다.
그런데 자유주의가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인한 것과 달리 개혁주의 안에도 내세의 천국을 믿지만 천국의 상급을 부인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구원에 있어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유대교와 로마 카톨릭과 달리 개신교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구원 얻음에 인간의 행위가 전혀 개입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신자가 천국에서 받을 차등 상급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시하고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은 어떤 것인가 잠깐 살펴보자. 로마 카톨릭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께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인간의 행위가 개입된다.”는 소위 공로사상을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나타내고 싶은 본능 곧 원죄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쉽게 공로사상에 물들기 쉬운 것이다. 이러한 공로사상은 예수님의 완전 대속을 거부하는 비 성경적 이단 사상이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와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이 종교(異 宗敎)의 행위 종교(行爲 宗敎)를 결합한 혼합종교인 것이다.
이러한 카톨릭의 공로 사상에 반대하여 일어난 종교 개혁자들은 상급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함으로서 공로주의를 배격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난 ‘다른 복음’ 또는 ‘거짓 복음’임을 밝힌 대로(갈 1장)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이 거짓 복음임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이 카톨릭의 공로사상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선행과 그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상 주심에 대하여 소홀히 다루는 우를 범하였다. 특히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을 비판하면서 행위가 강조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까지 하였다. 그는 나중에 이를 수정하였지만 은혜를 강조하다보니 선행에 대해 소홀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에 비해 칼빈은 이신칭의 외에도 성화와 선행 및 상급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칼빈도 상급에 대해서 하나님의 상주심 자체는 강조하였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소홀히 다루었다. 이는 그가 상급을 너무 강조하면 공로 사상에 빠질까봐 이를 경계하다보니 상급이 공로가 아니라는데 대한 변호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종교개혁자들이 카톨릭의 잘못된 공로 사상에 대한 반발로 상급을 위한 신자의 선행을 공로 사상에 치우칠까봐 너무 경계하다보니 상급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고 말았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상급관에 편승하여 최근의 개혁자 가운데에 상급을 경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이들이 상급경시 경향의 배경에는 상급에 대한 공로사상에 대한 우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급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부족한데 기인한 것도 크다고 생각된다. 즉 이는 상급을 구원과 혼동하는데서 오는 무지의 결과인 것이다.
만약 성경에 나타난 명백한 상급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의 작은 하나를 부인하다 보면 성경 자체를 부인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천국의 상급을 부인하면 천국 자체까지 부인하는 자유주의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만 되지만 상급은 믿음의 행위가 수반되는 것이다. 즉 구원받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그 성화의 열매로서 선행이 나타나며 이 선행에 대해서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상급에 인간의 행위가 수반된다고 해서 인간은 자기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선행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상급에 있어서 중요한 초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와의 문제이다. 지나치게 은혜만 강조해도 반 율법주의의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행위만 강조하면 율법주의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급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 및 인간의 책임 문제는 성경과 신학 전반을 바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양자의 관계는 신약 시대 이래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논쟁 되어 온 해묵은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것을 획일적인 신학 원리로 일방적으로 내세워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본문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인간의 책임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고자 하는 본문을 곡해하며 공로주의로 흘러가는 잘못을 범하기 쉬운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책임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선택권을 부여하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매우 제한적이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역할 분담하여 50:50 또는 90:10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주권이 일부분만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다 주권하시며 주재하시며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셨다고 하였다(마 10:29-30).
인간의 책임 부분에 대해서도 인간이 부분적으로만 책임진다고 하면 이는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고 하셨던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 행동에 대해 100% 다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이나 상대방에게 전가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동시에 인간도 전적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결코 역할 분담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이러한 이율 배반성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특히 하나님의 예정,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관계,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행위와의 관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도 일하시며 인간도 일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즉 100% 하나님의 주권이요, 100% 인간의 책임이라고 해야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는 상급 문제(賞給問題)에 있어서도 분명한 입장 차이를 보여 준다. 인간이 수고한 것 같지만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다 주권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를 분명히 신앙고백 하였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 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하셨지만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우리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 42).
성경은 일관되게 신자의 상급문제를 강조하며 신자의 선행을 장려하고 있다(마 16: 27; 고전 3:8; 고후 5:10 등).
이렇게 상급의 은혜성과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의 상호 모순되는 듯한 성경의 상급 교리를 바로 이해하는데 본 논문의 목적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 상급교리에 대한 양 극단의 사상인 공로 사상과 상급 무시 사상을 배격하고 상급 교리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영위해 갈 수 있다.
나아가 본고는 천국상급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신학적 고찰을 통하여 천국상급에 대한 실체를 규명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이후에 추구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시해보고자 한다.
제 2 절 논문의 구성 및 연구의 방법
천국 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본고는 성경적 역사적 신학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먼저 서론에서는 문제의 제기와 연구의 목적 및 논문의 구성 및 방법을 다루고자 한다.
제 1 장에서 상급에 대해서 성경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성경에 나오는 상급에 대한 정확한 용어를 구약과 신약에서 살펴보고 상급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강조점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상급 교훈은 유대주의나 로마 카톨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을 제시할 것이다.
제 2 장에서는 천국 상급에 관한 역사적 고찰로 먼저 종교개혁주의자들까지를 다룬다.
1절에서는 성경의 상급 교훈을 유대주의자들은 어떻게 변질시켰는지 그들의 공로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절에서는 상급을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헬라의 윤리적 철학적 상급개념을 살펴본다.
3절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들의 공로사상으로 인해 성경의 상급개념을 어떻게 왜곡시켰는지 살펴본다.
4절에서는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에 반발하여 일어난 종교 개혁자들의 상급관을 살펴본다. 특히 칼빈의 상급관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제 3 장에서는 상급에 대한 최근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살펴볼 것이다. 1절에서는 상급을 무시하는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고 저들의 견해를 비판한다.
2절에서는 상급을 중시하는 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한다.
제 4 장에서는 상급에 대한 신앙고백서의 내용들을 살펴볼 것이다. 1절에서는 장로교 신앙고백서인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를 살펴본다.
2절에서는 이 신앙고백서의 구조를 분석한다.
3절에서는 상급과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봄으로 천국상급 사상이 개혁주의의 전통임을 강조할 것이다.
제 5장과 6장에서는 천국상급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즉 상급과 관련된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을 살펴봄으로 상급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될 것이다.
5장의 1절에서는 천국 상급에 대한 기독론적 고찰을 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천국상급의 관련성을 다룬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상급을 다룬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할 직분이며 이 직분을 잘 감당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영원한 상급으로 그 직분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
2절에서는 천국상급에 대한 구원론적 고찰을 한다. 먼저 구원과 상급의 차이를 분명히 할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수반되지 않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역사이지만 상급은 구원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행위에 대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다음에 믿음과 상급을 다룬다.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처럼 상급도 오직 믿음으로 되어진다. 그런데 상급에서 ‘오직 믿음’은 믿음의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칭의와 상급을 다룬다. 천국상급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주신 것인데 그의 의를 힘입은 결과에 대한 차등 상급이 주어짐을 다룬다. 다음으로 성화와 상급을 다룬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중생되고 믿음으로 칭의받은 신자를 거룩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성화의 열매로 선행이 이루어지며 여기에 상급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화와 상급도 필수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선행과 상급을 다룬다. 인간의 선행은 도덕적 선행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화시켜주시는 결과에 대한 열매인 것이다. 이 선행에 대해 하나님이 상급을 주신다.
6장의 1절에서는 천국상급에 대한 교회론적 고찰을 한다. 상급은 그의 신부된 교회에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교회의 지체들에게도 각자의 은사에 따라 상급을 나누어 주시지만 천국에 가서는 영원히 충성의 결과에 따라 상급을 나누어주실 것이다.
2절에서는 천국 상급에 대한 종말론적 고찰을 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을 다룬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역사의 종말에 최후의 심판을 하실 것이다. 그 때 불신자들은 형벌심판을 받지만 신자들은 상급심판을 받게 된다.
제 7 장에서는 천국상급에 대한 윤리적 고찰을 다룬다. 천국상급은 신자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인데 이 신자의 선행의 기준이 기독교 윤리인 것이다. 1절에서는 기독교 윤리의 기초를 다룬다.
2절에서는 기독교 윤리의 목적을 다룬다.
3절에서는 기독교 윤리와 선행을 다룬다.
4절에서는 기독교 윤리의 내용과 상급을 다룬다.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부모공경, 부부윤리, 사회윤리, 생명윤리 등을 다루게 될 것이다.
제 8 장에서는 천국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를 다룬다.
1절에서는 상급의 수여자와 수혜자를 분명히 함으로 상급의 이해를 바로 할 수 있게 한다.
2절에서는 상급의 원리를 다룬다. 상급은 충성한 결과에 따라 주신다는 면에서 대응성의 원리가 있고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다는 은혜성 원리가 있음을 밝힌다. 상급이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해서 인간이 이를 주장할만한 공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이요 하나님이 은혜로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 또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으로 선행을 하는 것은 결코 상급을 받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경건의 행위만이 상급을 받는다는 면에서 경건의 원리를 다룬다.
3절에서는 상급의 동기와 목적을 다룬다. 상급을 바라보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마치 이기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사상을 비판하고 상급을 바라는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신본주의 신앙임을 분명히 할 것이다. 또 상급의 목적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제 9 장에서는 상급의 등급과 그 내용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1절에서는 상급의 구체적 차등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2절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차등 상급의 내용을 다룰 것이다.
결론에 가서 천국 상급에 대한 신자의 바른 태도를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 본 논문은 무엇보다도 신, 구약 성경을 최고의 참고서로 채택하여 개혁 주의적 성경 해석의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할 것이다. 나아가 성경 계시의 전체적인 조망을 하고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것이다. 계시 이해에 있어서 종합적 구성주의 방식에 의해 성경계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것이다. 개혁신학은 성경계시에 바탕을 두고 믿음으로 신학하는 것이지 그 시대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자연 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상급에 대한 다양한 신학자들의 입장들을 문헌적 고찰을 통하여 밝히게 될 것이다.
제 1 장 상급에 대한 성경적 고찰
이 장에서는 상급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상급에 대한 성경적 용어를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성경의 상급 사상을 고찰하도록 하겠다. 성경은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주신 책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구원에 대한 말씀보다 상급에 대한 말씀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 맥을 이루고 있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 것을 요구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성화에 힘쓰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선행에 힘쓸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성화와 선행에 대해 하나님은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성화와 선행에 힘써야 한다.
제 1 절 구약에 나타난 상급
구약에 나타난 상급을 살피기 위해 먼저 구약의 상급용어를 살펴보자. 구약에 상급을 나타내는 용어는 '사칼'과 '게물' 등이 있다.
1. 구약의 상급용어
1) 사칼(rk'c)
사칼은 (rk'c;, 고용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며(28회) 주로 삯(hire), 임금(wages), 보상(rewards)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그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삯, 임금'
‘사칼’은 먼저 일꾼이 일한 품삯을 의미한다.
창 30:28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창 30:32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창 30:33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출 2: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신 15:18 그가 육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24: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슥 8:10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말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사칼’은 또한 군병들의 급료를 말하기도 한다.
겔 29:18 인자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군대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크게 수고하여 각 머리털이 무지러졌고 각 어깨가 벗어졌으나 그와 군대가 그 수고한 보수를 두로에서 얻지 못하였느니라.
겔 29:19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애굽 땅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붙이리니 그가 그 무리를 옮겨가며 물건을 노략하며 빼앗아 갈 것이라 이것이 그 군대의 보수가되리라.
(2) '보수‘, ’보상‘, ’상급'
사칼은 또한 '보수‘, ’보상‘, ’상급'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큰 '상급'이며(창 15:1), 레아는 잇사갈을 생산 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에게 상급으로 주었다고 했다(창 30:18). 또 회막에서 일하는 자는 '보수'를 받았다(민 18:31; 렘 31:16; 대하 15:7; 사 40:10; 사 62:11; 시 127:3; 전 4:9; 전 9:5).
(3) '통행료'
사칼은 ‘통행료’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2)사칼의 파생어
‘사칼’의 파생어로 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1) 세켈 (rk,c) ‘사칼’ 대신에 그 파생어인 ‘세켈’을 사용한 성경구절들도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삯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사 19:10) 이란 문구를 사용하였고 잠언 기자는 악인의 보상은 불확실한 것인데 반하여 의를 뿌리는 자들의 삯은 확실하다고 말하였다(잠 11:18).
(2) 마스코렛(tr,Kic]m)
마스코렛을 사용한 성경구절은 보수(창 29:15), 품삯(창 31:7, 14), 상(룻 2:12)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3) 게물(lWmG)
구약에서 상급을 나타내는 명사로 사칼 다음에 많이 상요되는 명사는 ‘게물’이다. 게물은 가말(lm'G:)에서 유래했으며, ‘보상’(응), ‘보수’, ‘보답’ (recompense, reward), ‘이익’, ‘은혜’ (benefit), ‘조치’(dealing)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9회 나온다. 그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주시는 보응
사 3:11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라.
사 35: 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사 59: 18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사 66: 6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 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애 3:64 여호와여 주께서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2) 인간이 갚는 복수
욜 3:4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의 보복하는 것을 내가 속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시 137:8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시 103: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말찌어다.
대하 32: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4) 사람이 행한 행위
삿 9: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을 삼았으니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 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잠 12:14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사 3:11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시편 기자는 악인에게 마땅히 받을 것을 보응하시라고(시 28:4; 94:2) 보복의 하나님을 부른다(렘 51:56; 비교 신 28장).
'게물'의 파생어로 '타그물' (lWmg]T)이 있다. 이는 은혜로 번역된다. 시편 기자는 병에서 회복되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복되고 “그 은혜에 무엇을 보답할꼬.” 물은 후 “자기를 바치고 제물로 드리며 서원을 갚겠다”고 대답하였다( 시 116:12). 여기서 ‘타그물’은 ‘은혜’를 의미한다.
2. 구약의 상급 사상
지금까지 살펴본 구약의 상급을 나타내는 명사들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 보면 다 '미스도스'(μισθ??)로 번역되었다. 위의 구약 명사들은 K.J.V.에서는 주로 'reward'로 번역되었으나 R.S.V. 나 N.I.V. 에서는 'reward' 외에 문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이상의 구약 명사들을 통해서 구약의 상급 개념을 살펴볼 때 주로 일한 것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보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 보상은 인간 대 인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물질적인 보수를 뜻한다.
하나님께서 수고한 자에게 그 결과에 따라서 상급을 주신다. 모든 사물은 그 원인에 대해 결과가 따르는 것이고 씨를 뿌린 대로 그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선행을 한 자에게 상급을 주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형벌을 주신다(갈 6: 7-8). 이것은 하나님이 내신 자연법칙에 부합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급과 형벌을 주시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공의에 해당되는 것이다.
라반은 야곱에게(창 30:23,32), 바로의 딸은 유모에게 (출 2:9), 보수를 주어야 했고 6년을 일한 종에게 7년째는 놓아주되 공수로 하지 말 것을 신명기에 말씀하고 있다(신 25:12). 신명기 기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가 복을 밭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는다.”고 말하였다(신 28:1-6).
2)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구약 성경의 일관된 흐름이다.
인류 조상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아담과 함께 온 인류가 멸망을 받게 되었다(롬 5:12). 아담의 계보에 다 죄로 얼룩지어졌지만 아담의 칠 세손 에녹(유 14)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산채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었다(창 5장). 또 노아시대에는 죄악이 온 땅에 관영하며 하나님의 자녀들까지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온 인류를 멸망시키셨다. 그러나 노아는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서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게 하심으로 홍수 심판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후손을 주셨던 것이다.
또 인류가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지면에 흩으시고(창 11장)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하셨다(창 12장).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 과정에서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는데 그들이 불순종함으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고 불순종한 자들은 결국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다. 그러나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하셨던 것이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순종에 대해서는 축복으로 불순종에 대해서는 저주의 형식으로 상급 개념이 나타나 있다(신 28장).
여호수아에서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면 평탄하게 되며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수 1:7-8)
이러한 상벌 사상은 사사기에서 역대기까지의 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사사기 기자는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한 것은 여룹바알의 아들들에게 행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하였다(삿 9:23-24). 또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 아멜렉에 대한 형벌을 내리기 위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다(삼상 15: 2-3).
시가서에서도 축복과 저주가 순종 또는 불순종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시편에서는 “복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이지만 악인은 그와 반대이며 의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지만 악인은 망한다.”고 하였다(시편 1편).
잠언에서는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다”고 하였다(잠 3:33). 선행에 대해 갚아주신다는 말씀이다. 잠언에는 보상사상이 풍부하게 나와 있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잠 11:31)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전도서에서 궁극적으로 선인은 잘되고 장수하지만 악인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였다(전 3:11-13).
하나님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 14).
선지서에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든 죄를 거부하시고 죄에 대해 진멸하신다고 하였다(암 1:3-2:16).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주권통치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 악행에 대해 형벌하시고 선행에 대해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 순종에 대해 상급을 주셨고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할 때는 대적을 보내셔서 벌을 내리셨던 것이다.
이 축복과 저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집단적으로 내려졌다. 우상숭배를 극심하게 행한 아합 왕 때에 3년 반 동안이나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듭되는 범죄와 반역으로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남쪽 유다도 회개하지 않으므로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집단적인 보응과 구별하여 개별적인 상급 개념을 강조하기도 하셨다(겔 18:2,20,21). 자신의 운명에 대해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행위에 대해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지만 회개하는 자에게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또한 그 심판을 돌이키실 것을 말씀하셨다(렘 18:1). 므낫세가 비록 악한 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회개를 보시고 그에게 장수를 허락하셨던 것이다(대하 33장).
이렇게 볼 때 구약 전체에 상급 신앙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구약에 나타난 언약이나 심판, 율법, 약속들(이 약속들은 '만일 하면' 과 같은 조건절로서 동기를 유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은 상급 구조를 떠나서 논의 할 수 없다.
3) 구약에서 상급 개념은 또한 단순히 인과응보의 법칙을 초월한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상급에는 인간이 수고한 가치에 대한 인간의 보상 개념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언약을 세우시고 이 언약을 근거로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의 ‘상급’(賞給)(rk;c)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셨다(창 15:1). 이것은 아브라함의 행위로 상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씀이다. 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행위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인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급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셔서 불순종하였으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다.
이러한 사상은 선지서에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범죄한 백성들에게 심판의 경고를 하셨으나 회개하는 남은 백성들에게는 축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욥기에도 상급이 단순히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갚으심이 아니라는 것이 나타난다. 욥의 세 친구들은 의인은 복지와 장수를 상급으로 받으며 죄에 대한 징벌로 질병과 가난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하고 욥을 회개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과 순결을 주장하였고 자기에게 닥친 고난은 인과응보를 벗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엘리후는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욥 35:7)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로움에 대해 상주시는 것은 순전히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여기에 인간의 공로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해 준다. 하나님께서 상을 보류하신다 하더라도 그 분을 불의 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다고 상급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은 온 세계가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욥 4:11).
시편에서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다고 하였다(시 4:3). 인간이 스스로 경건하며 의로워지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의 주권으로 경건한 자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들의 목자가 되시며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입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였다(시 23).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신다고 하였다(시 103: 10). 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단순히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이며 여호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다(시 73).
솔로몬의 시편에서도 상급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것이지 봉사의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시 127:3).
잠언에서도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으로 되어진다고 하였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1).
구약의 상급 개념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상을 잃지 아니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단순히 행위에 대한 대가의 개념을 넘어 하나님의 은혜로 상급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공로를 추호도 내세울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상급에 대한 자기 공로사상이나 상급 경시 사상이 분명히 배격되어짐을 알 수 있다.
제 2 절 신약에 나타난 상급
1. 신약의 상급용어
신약에서는 상급과 관련하여 대체로 ‘미스도스’와 ‘아포디도미’가 사용된다.
1)미스도스(misqov")
(1)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미스도스(Homer 이래)는 '일에 대한 보수', '사례금'이나 '요금'(예술가, 과학자, 신학자, 시인, 연극자, 의사에게 지불하는 것), '봉급'(군인들), '임대료'(토지나 집세), '사례금'(사제들), '비용‘, ’경비', '신랑의 지불금', 하나님이나 사람이 주는 '상', '형벌'을 의미한다.
(2) 70인 역본의 용법
미스도스는 70인 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사칼의 어군을 번역했고, '급료, 임금, 보수, 보상, 선물'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70인 역에서 군인의 임금(급료; 겔 29:18)에 상응하는 용어에 사용되고 레위인의 차지할 부분(민 18:31), 그리고 제사장의 차지할 부분(미 3:11), 노동자의 임금(출 2:9; 신 15:18)에 상응하여 사용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미스도스는 신약성경에서 2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70인 역에서 군인의 임금(급료; 겔 29:18)에 상응하는 용어에 사용되고 레위인의 차지할 부분(민 18:31), 그리고 제사장의 차지할 부분(미 3:11), 노동자의 임금(출 2:9; 신 15:18)에 상응하여 사용된다.
① 미스도스는 '일의 보수'라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눅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마 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약 5:4에서 인격화 된 품삯을 언급한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행 1: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벧후 2: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벧후 2: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유 1:11 화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미스도스와 관련하여 노동자가 받을 그의 임금(눅 10:7, 딤전 5:18) 가치를 나타내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막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미스도토스, misqwtov")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
눅 15: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mivsqio")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mivsqio")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② 미스도스는 '보답, 보상, 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보상에 대해 사용되었다.
ⓐ 계 22:12에서 보상과 형벌, 양자 모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 선한 행위와 노력에 대해 하나님이 수여하시거나 하실 보상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막 9: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눅 6: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고전 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9: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요이 1: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계 11: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 수고와 노력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열매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③ 미스도스는 '형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벧후 2: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4) 미스도스의 신학적 의미
미스도스는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예수님의 설교에서 자주 등장한다(마 6:1; 19:21; 막 10:21; 눅 18:22). 예수님은 이러한 설교들과 천국 비유에서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까지도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강조하셨다(마 10:42; 막 9:41).
선교사역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반드시 상급을 주신다고 하셨다(요 4:36; 고전 9:18-27).
그러나 아무도 자기의 수고한 상급을 요구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는 상급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마 20:1-16; 25:24; 눅 17:10; 19:17,19).
바울서신에서도 상급에 대한 극단적인 생각을 배격하고 올바른 상급관을 제시하고 있다.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고(롬 2:6; 고후 5:10),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이 받는 상(고전 9:24; 빌 3:14)을 말씀하시고 공력이 있으면 상을 받는다(고전 3:14)고 말씀하셨으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상줄 의무가 없고 단지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4:4; 6:23; 고전 9:16,17). 히브리서에서는 상급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상급을 향한 소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있다(히 10:2,35; 11:6).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인내함으로 영원한 나라를 바라볼 때 약속된 상급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잠시 후에 주님이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말고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하였다(히 10:35-39).
2) 아포디도미(αποδιδ?μι)
이 말은 주로 원인에 대한 결과를 설명해주는 단어로서 구약에서는 씨 뿌린 이후 추수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행함에 따라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슈브 동사).
(1) 아포디도미의 용법
구약 슈브에 해당하는 동사로 신약에서는 아포디도미가 43회 사용되었다. 그 중 마태복음에서 18회, 누가복음에서 12회, 바울서신에서 8회가 사용되고 있다. 그 용법으로 넘겨주다(give away; 마 27:58), 돌려주다(give back; 눅 4:20), 팔다(행 5:8), 삯을 주다(마 20:8), 빚을 갚다(마 1823), 맹세한 것을 지키다(마 5:33), 용서하다의 뜻이 있다.
(2) 최종심판과 관련됨.
신약에서 신학적으로 아포디도미는 최종 심판에서 갚아주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모든 사람은 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는 마 25: 31-46 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최종 심판 때에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마 25:40).
신학적으로 아포디도미는 신약에서 장차 다가올 심판 및 징벌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눅 14:12; 롬 11:9; 골 3:24).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포했으며,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설교하셨다. 갚음에 관한 신약성경의 개념은 막 8:38과 같은 구절에서 가장 잘 예증될 수 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 9:26).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주님(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각 사람의 태도, 그를 향한 우리의 충실함이다. 이것이 마 25:31-46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궁극적인 기준은 그리스도를 향한 인간들의 행위이다. 이 태도는 또한 그들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표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동일하게 요한은 심판 때에 인정을 받게 될 일을 믿음과 동일시하고 있다(요 6:29). 반대로 단지 믿지 않는 것 자체를 죄라고 묘사한다(요 16:9 참조: 요 12:48). 그러므로 갚음이란 개개인들의 업적을 타인과 비교하여 낱낱이 세어보거나 무게를 달아보는 것과 같은 문제가 아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우리가 예수님과 그의 말에 대하여 진실한가 아닌가, 우리가 그를 고백하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이다. 이는 히 10:30에서 확증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시 32:35).
이것은 아포디도미의 용례에 대한 배경을 알려준다. 인간은 그가 기독교인이든지 혹은 믿지 않는 자이든 간에 하늘의 심판주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롬 2:6 참조: 고전 3:13이하; 고후 5:10). 아포디도미는(마 16:27; 롬 2:6; 딤후 4:14; 계 22:12) 인간의 업적 그 자체에 있는 어떤 본래의 도덕적인 가치를 근거로 인간의 행한 일들을 평가한다는 뜻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아포디도미가 행한 일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언급된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행한 일이란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반대의 표현, 아니면 동의와 믿음의 표현이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에서 드러난다. 계 20:11-15에 보면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이 행위들은 펼쳐져 있는 책 속에 기록이 되어 있다(계 20:12). 믿는 자들은 형벌 심판은 면제받는다. 그들에게 보상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업"이다(참조: 골 3:24). 보상은 마지막 심판과 함께 오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세대 안에서 그들 자신이 지닌 원한을 풀려 해서는 안 된다(롬 12:17; 살전 5:15; 벧전 3:9).
인간은 자기 행위에 대한 최종적 책임을 져야한다(롬 2:6; 고전 3:13; 고후 5:10). 각 사람은 최종심판에서 자기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다(마 16:27; 롬 2:6; 딤후 4:14; 계 20:11-15; 22:12). 대부분 이 말은 미래형으로 사용되어 미래에 있을 일의 가능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 상은 자기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마20:1-12; 골 3:24).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롬12:17; 살전 5:15; 벧전 3:9).
(3) 아포디도미의 파생어
아포디도미의 파생어 안타포디도미( ανταποδιδ?μι )는 성경에서 7번 사용되고 있는데(바울서신에서 4번, 누가복음에서 2번 사용되었음) 주로 주어진 것을 되돌려 주는 행위를 강조하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안타포디도미(ανταποδιδ?μι)의 명사형은 안타포도시스(ajntapovdosi")로서 이는 되갚음 (repaying), 보수(reward), 보상(recompense)을 의미한다. 접두사 안티는 보상의 개념을 강화한다. 이 단어는 70인 역본에서 16여회 나오며, 보답하는 것, 삿 9:16 복수나 원수를 갚는 것(삿 16:28 사 34:8)에 대해 사용되었다.
안타포도시스는 신약성경에서 골 3:24에 한번 하나님의 최종적인 보상을 의미한다.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3) 브라베이온(brabei'on, 상 priz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브라베이온’(Homer 이래)은 운동 경기에서 유래한 전문술어로 브라뷰스(brabeuv": 심판자)에서 유래했으며, '경쟁에서의 상'을 의미한다. 후에 이 말은 생의 투쟁으로 인한 혼란의 사상과 관계되었으며, 생의 사역의 완성과 절정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70인 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브라베이온’은 신약성경에서 2회, 곧 바울서신에만 나온다. 델리취의 히브리어 신약성경은 이 두 구절에 나오는 ‘브라베이온’을 모두 보상(recompence), 승리의 보상(reward of victory)으로 번역한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2. 신약의 상급사상
신약에서 상급을 나타내는 단어에도 구약에서와 같이 일한 자에 대한 품삯의 의미가 들어있다. 여기서 일한 자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사회질서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1) 복음서에 나타난 상급사상
복음서에서는 선을 행한 자에게 상을 주시겠다는 상급사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마 10:41; 막 9:41; 눅 6:35). 이 보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물질적, 비물질적인 것을 초월하여 의인에게 심판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람이 행한 것과 그가 언젠가는 받을 것 사이에 파기 할 수 없는 상호상관이 있음을 보게 된다(마 12: 36-37; 24:45; 25:14-46).
예수님께서 친히 의인에게 그 대가를 지불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복이 있으니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 5:12).
예수님께서는 의(구제, 기도, 금식 등)를 행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을 하지 않고 진실된 믿음으로 하는 자에게도 천부께서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마6: 4, 6, 15).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것을 비판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5:44).
또한 선지자를 영접한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영접한 자는 의인의 상을 받고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들도 역시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10: 41-42).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수고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상급은 또한 사람의 기준에 따라 주어지지 않는다. 바리새인의 경건과 열심은 사람을 기준하여 사람에 보이려고 한 것이고 자기를 위하여 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미 자기상을 받았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마 6:2,5,16).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에게 한 것으로 알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상급으로 갚아주신다(마 25:40,45; 10:42). 이 상급은 종말에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을 기준으로 하며(마 10:32), 온전한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다(막 8:36; 10:30).
마 16:27에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금세에 있어 백배를 주시고 내세에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막10:30; 마 19:29; 눅 18:30).
복음서에서 상급개념은 죄 사함과 구원받은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고 죄 사함 받았다고 해서 상급의 차등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인 마태복음의 열 처녀 비유(마 25:1-13)와 달란트 비유(마 25: 14-30)와 양과 염소비유(마 25:31-46)는 다 천국의 차등 상급을 계시하기 위한 말씀이다.
또 누가복음의 청지기 비유(눅 16:1-13), 므나 비유(눅 19:11-27)도 차등 상급을 계시해준다.
그러나 이 상급개념도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인의 주권과 은혜에 의한 것임을 볼 수 있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는 한 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동일한 품삯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은 품꾼의 일한 결과와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따라 품삯을 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충성한 일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라고 대답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상급은 하나님의 나라에 부차적인 것으로 말씀하심으로 유대인의 상급개념을 깨뜨리셨던 것이다.
복음서에는 상급에 대한 종말론적 성격도 나타내주고 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도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심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 4:36-38).(비교 레 26:5; 신 28:33; 삿 6:3; 시 126:5; 암 9:13; 미 6:15; 마 9:37; 눅 10:1).
여기서 품삯을 받는 시기는 종말론적 시간을 의미한다.
2) 바울서신에서의 상급사상
사도바울은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신자가 받는 칭의를 강조하였지만 동시에 행위에 대한 상급도 강조하였다(롬 2:6; 고전 5:10). 그는 유대주의의 공로사상을 칭의의 교리로 대체하였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칭찬과(롬 2:29) 영광(롬 2:7)을 받고 부름의 상을 받는다는 것을 또한 강조한 것이다(빌 314).
예수님이나 바울에게 있어서 상은 로마인들이 부르는 '프레미엄'(상이나 선물)을 말하는 것이지 '프레티엄'(물건의 가격이나 가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의 삯으로 사망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다(롬 6:23). 하나님은 이 상급을 우리에게 빚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이다(롬 4:4). 따라서 칭의의 교리는 상급을 이해하는데 뒷받침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이 공로가 되지 않음은 바울이 말한 대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그렇다고 상급이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지는 않다. 바울은 상급을 경기장에서 승리하는 것과(고전 9:24; 빌 3:14) 지혜로운 건축자에게 돌아가는 상(고전 3:14)으로 묘사하였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상급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바울은 고전 9: 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하였다(27절). 여기서 형용사 아도키모스(ajdovkimo")는 부정 접두사 a 와 도키모스(dovkimo")에서 유래했으며, 도키모스의 반대어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공인되지 않은’ 뜻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거절되는 것이다. 형용사 아도키모스는 신약성경에서 처음부터 부당하게 보이는 것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것, 즉 가짜라고 판명되어 거부된 것이란 의미에서 '가치 없는, 거절된, 거부된'이란 의미를 지닌다(롬 1:28; 고전 9:27; 고후 13:5; 딤후 3:8; 딛 1:16; 히 6:8).
따라서 바울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할까 두려워함이 아니라 상받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구원의 전도자가 면류관을 놓칠 수 있는 것이다.
상급은 또한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구원은 받았어도 믿음의 행위가 없을 때에 아무런 상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비유하여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라고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 말씀하고 있다.
3) 공동서신에 나타난 상급사상
히브리서는 상급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 10장 35절은 하나님의 상급을 가져다주는 약속의 축복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5).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 행위가 상급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상급인 것이다. 또 11장 6절에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자’로 소개하였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할지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상 주심을 바라보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히 11:26). 야고보서는 상급을 특히 강조한 책이다.
올바른 기도는 응답의 상급을 받고(약 1:5-8), 시험을 참는 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며(1:1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다(2:26). 겸손한 자는 높아지는 상급을 받는다(4:10). 야고보는 행함의 믿음이 있어야 칭의의 믿음에 보완이 되어 진다고 강조하고 상급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일서에서도 상급교훈이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 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2:28).
하나님의 자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 느니라(요일 3:3).
4) 계시록에 나타난 상급사상
계시록은 전체가 심판을 주제로 하는데 심판 자체가 상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행함에 대한 상벌을 강조하고 있다.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죄와 사탄, 세상과 그리고 육에 대한 싸움이다. 싸워서 승리한 자에게 영광스러운 상급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게 주님이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10)고 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하게 보상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직접 내리시는 보상을 받을 것이며 그들의 원수는 아무도 그것을 주님의 손에서부터 빼앗을 수 없으며 그들의 머리로부터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시련과 싸움에서 이기는 자들은 이 지상 낙원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완전하고 확실한 거룩함과 행복된 생명나무와 같이 길이 보호함을 받을 것이다(계 22:1,2).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그의 충성에 대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생명의 면류관은 내세의 생명 뿐 아니라 영광까지 가리킨다. 순교한 자는 영화로운 생명에 이를 것이다.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는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흰 돌을 주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2:17).
두아디라 교회에게는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계 2: 26, 28). 예수님은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다(계2:23).
사데 교회에 대해서는 이기는 자에게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약속하셨다(계 3:5).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는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 11 - 12)하고 약속하셨다. 참고 이기는 자는 상급을 받을 것이며 불순종하는 자는 상급을 놓치게 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는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셨다(3: 21).
그리스도와 함께 시험과 승리에 동참한 사람은 그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에 함께 앉을 것이다. 그 보좌는 세상 끝 날에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의 보좌이며 영광의 보좌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머리되신 그 분의 신비한 몸으로 빛날 보좌이다.
계시록 14장 13절에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시며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셨다.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죽은 자에게는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의 봉사와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된 상급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계시록 20장 12절에는 최후의 심판에서 생명책과 함께 책들에 의해서 심판을 하신다고 하였다. 또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므로 불 못에 던지우지 않고 천국의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어도 책들에 자기의 행위가 기록된 대로 상급심판은 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약속하시고 주님이 주실 상급을 가지시고 각 사람이 그 일한대로 갚으실 것을 강조함으로(22:12), 상급 교훈으로 성경을 마감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상급에 대한 용어들을 정리해 보면
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과 ②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은 결코 자기 공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③ 상급은 최종적으로 최후의 심판에 관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2 장 종교개혁 시대까지의 상급관
본 장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상급 교훈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하여 왔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유대주의자들의 공로사상, 헬라의 윤리적 철학적 상급개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로사상, 종교 개혁자들의 상급관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 1 절 유대교의 공로사상
유대교는 그 교리의 근거를 대부분 구약성경에서 찾았다. 특히 유대교는 모세 오경을 가장 자기들의 경전으로 따르는데 모세오경의 십계명에 계명을 순종한 행위에 대한 보상의 약속이 있고 신명기에는 율법의 실천 여하에 따라 상벌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유대교의 최대 교파인 바리새인들의 신학에서 제일 중추되는 개념은 “하나님은 공의롭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여 응분의 처분을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옳은 행위와 그른 행위의 구별이었다. 행위에는 그 행한 사람의 운명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그들의 상급사상이 되었다.
바리새인에게 특이한 것은 ‘공로(功勞) 사상’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쿠트(zakuth)는 구약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메리트(merit)가 된다. 즉 사람이 전력을 다하여 의로운 행위를 힘써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 행하는 자에게 공로가 덧붙여져 생겨지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행위로써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이 된다.
이러한 사상은 유대 랍비들의 계명관 속에서도 발견된다. 유대 랍비들은 계명들을 문자적으로 또는 외부적으로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얻고 반면에 계명을 어기면 하나님 앞에서 빚을 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공로가 빚보다 많으면 의롭다고 간주된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이 자력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수 있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주장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상업적 거래관계가 있고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유대교에서 공로사상이 생기게 되는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계명을 수행하는 데는 큰 희생을 치루든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든지 한다. 그래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한다. 이 계명 실행의 행위는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합침으로 성립한다. 공로라는 것은 사람의 의지에 속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나는 계명을 실천하므로 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선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리새인들의 보상 개념은 더 나은 상태를 바라보는 것인데 그들이 말하는 더 나은 상태는 현세의 평화로운 상태를 말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보상 개념은 현세적인 것 보다는 미래적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신약에서 말하는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나 성령강림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보상 개념과 종말론적 기대를 결부시켰다. 이 종말론적인 기대는 심판과 부활이다.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미래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다. 비록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역할은 단지 인간의 수고에 대해 보상하는 정도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의인에게 상급을 수여하며 죄인에게 형벌을 주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토라와 많은 계명들을 주셔서 그 계명을 순종한 수고에 대해 보상한다는 것이다. 토라에서는 금생에서 계명을 지키면 미래에 좋은 보상을 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의인에게는 의에 대한 보상으로 영생을 약속하셨다는 것이다(단 12:1). 그러나 금생에서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에 따라 이미 보응 받았다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창조하신 하나님과 애굽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그의 뜻을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가서 소위 ‘은혜의 보상의 관점’은 사라지고 계명을 순종한 자의 결과에 따른 공로로 평가하게 되었다. 이 공로사상은 마치 상업거래에서 원금에 대한 이자를 쌓아두는 것처럼 공로를 쌓아두고 미래에 충분히 보상받는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전적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에 상당히 의존하는 것이다. 물론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주를 섬기라”는 말도 있지만 이 말은 유대인들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따라 상급과 형벌이라는 심판을 받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은 재판관으로서 선행과 악행에 따라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최후의 심판과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고 이런 것이 의로운 행위에 대한 마지막 보상이라고 보았다.
이 행함의 원리에 따라 유대인들은 믿음의 확신이나 구원의 확신을 누리지 못한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 앞에서 자신의 행함이 통과될 것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공로사상은 사람에게 자기의 의를 내세울 위험 속에 있다. 사람의 눈은 행위에 대한 관심으로 어둡게 하여 자비로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율법의 표준은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 스스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하고(눅 18:13) 자신의 무가치성을 깨달아야 하며(눅 17:7-10), 율법의 완성 자이신 메시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표준을 하나님의 수준에서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사람들이 지킬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제 2 절 헬라와 로마세계에 있어서 상급개념
헬라와 로마의 세계에 있어서 윤리와 철학적 세계에서의 상급개념은 성경적인 상급 개념과 거리가 먼 단순히 선을 추구하는 그 자체를 상급으로 보았다. 그러나 종교적 세계에서는 내세의 상급을 추구하고 있다.
1. 헬라의 윤리적 철학적 세계
헬라 로마의 윤리적 철학적 세계에서는 상급을 위해 선을 행한다는 사상을 거부한다. 헬라 윤리에서는 행복이 최고의 선이며 그들의 상급이란 단지 도덕성이며 이 도덕성이 이 땅에서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행복은 영혼과 육체의 조화이고, 자기 자신이 이 사실을 아는데 있다. 이 조화는 행복의 핵심에 속하며 이 세상에서 성취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선에 대한 지식이 도덕을 행하게 하는 참된 동기가 된다고 한다. 선에 대한 생각이 변화되는 것은 신의 강제와 명령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여겼다.
플라톤도 상급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나 이는 다만 헬라 철학의 내재적 존재 법칙의 노선에서 언급하는 것이지 동기적 맥락에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급의 개념으로부터 도덕적 행위의 가치와 본성적으로 행하는 것을 구분하여 도덕적 행위는 상급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면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은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의 상급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의 선행 자체가 최고의 선이 되는 것이며, 인간이 선행을 통하여 도덕적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선행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하는 데 이 지식에 의하여 선행이 나타나게 될 때 이것이 상급이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한 내재적인 욕구로 인해 이성이 자극받아 영혼을 덕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호머와 같은 작가들도 이를 지지하였다. 올바른 왕은 땅의 풍요로움과 백성의 번영과 함께 이러한 행복을 누리며 신실한 사람들은 훌륭한 자손을 낳는다(호머 오딧세이., 19, 109-114).
신들은 이를 촉진시키고 지식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악한 행위는 징벌을 받고 선행은 땅에서 정직과 의로움의 상급을 받는다. 행복한 사람은 선한 생각(정직과 의로움)을 가짐으로써 높은 수준의 진리와 지혜를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 시간에서 받는 상급의 개념은 미래의 상급이나 형벌에 대한 신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진정한 선은 그 자체만 위해 추구된다. 행복은 도덕의 실천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오직 선행은 그 자체로써 상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스토아주의에서는 도덕성은 우주법칙으로서 신에 대한 순종이다. 편재하시는 신은 모든 것을 보시지만 행복은 덕 안에 존재하며 덕과 악덕 이외의 상급이나 징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이 도덕에 의해 존재하기에 도덕적으로 향상된 생활이 행복으로 이끈다고 한다. 죄에 대한 징벌과 선에 대한 상급은 도덕과 죄밖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도덕과 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유일한 상급이 이 세상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며 그 외의 상급은 없다고 본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의 본성에 존재하는 도덕성을 개발해야 되는데 이 도덕성이 최고의 목표가 되는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헬레니즘과 로마의 종교에서의 상급개념
헬레니즘의 종교들에서는 미래에 대한 상급개념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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