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친의 학문을 이은 신독재 선생
아버지이자 스승을 잃은 이후 김집의 일상 생활과 태도를 문인(門人)이던 동춘당 송준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계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일체 그의 규범을 준수하여 날마다 관대(冠帶)를 정제하고 새벽에 가묘(家廟)를 뵈온 다음에 서실로 나가 책상을 대하여 글을 보며 온종일 꿇어앉아도 어깨와 등이 높고 곧았다. 사람을 접대하는 데는 넘쳐흐르는 춘풍화기가 사람을 흐뭇하게 했으며, 상스런 말은 입에 내지를 않았고 태만한 기색은 몸에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횡포하고 희롱하여 호오(好惡)가 서로 달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상대하면 모두가 자연히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나타났다. 파리함은 몸으로 옷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고 겸손함은 말을 겨우 이겨내는 것 같지만 사변(事變)을 처리할 때에는 의리로써 정밀하게 판단하고 굳세고 용감하게 꿇어 범하지 못했다.(신독재전서 부록 시장)
김집의 파리함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고, 겸손함은 말을 겨우 이겨내는 듯하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의리로써 판단하고 과감하게 처리하는 추진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외유내강한 성품과 활동을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집의 문하에서 공부한 문인들은 선생에게 높은 관직에 나가 국정을 맡아 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김집은 서울에 오래 머물지 않고 연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학문에 더욱 침잠했다.
선생은 일찍이 도성에 오래 머무르지 아니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원근의 학자들과 강독하고 토론했다. 선생은 일찍이 말하길, “학문을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말과 행실을 돌아보며, 숨고 나타난 것을 일치시키는데 있다.” 하고, “서산에 홀로 갈 때는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홀로 잠잘 때는 이불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매우 사랑하여 선생 스스로의 호를 신독(愼獨)이라 했으니 선생이 애쓰신 그대로 실제인 것이다.(신독재전서 부록 연보)
이로써 김집의 호가 신독재(愼獨齋)인 이유를 알 수 있거니와, 명리를 쫓지 않은 학자의 면모도 함께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집은 아버지가 그랬듯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관직으로 부를 때와는 달리 기민하게 행동을 취했다. 즉 63세 되던 해인 1636년(인조14)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김집은 왕의 수레가 남한 산성으로 쫓겨 들어갔음을 듣고 그 날로 행장을 준비하여 산성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포위되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보고, 김집은 연산으로 돌아와 동지 10여명과 함께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군량을 모으고 의병을 일으키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김집은 북쪽 오랑캐로부터 받은 수모와 고통을 민족의 자존의식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인조 때의 정묘 · 병자호란이 조선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엄청난 것이었다. 종래에 한낱 북방의 오랑캐 정도로 여기던 청에게 당한 치욕적인 패배와 이에 따른 수모는 조선의 지배층과 민중에게 커다란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므로 17세기 내내 ‘북벌(北伐)’ 논의는 주창자에 따라 그 내용과 의미가 다를지언정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국의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북벌 자체의 실현여부와는 별도로 ‘북벌’이란 담론은 17세기 당대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던 사회적 관념의 하나로서 이 시기 조선사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비롯한 관원 180여 명이 인질로 심양으로 잡혀갔다. 그 후 1645(인조 23) 2월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이 귀국했다. 그러나 대청 현실론자였던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도 채 되기 전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같은 해 5월 청에서 봉림대군(鳳林大君)이 귀국했다.
인조는 ‘국유장군론(國有長君論)’을 내세워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에 대하여 대다수의 중신들은 ‘세적승통론(世嫡承統論)’을 들어 소현세자의 장자를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고 봉림대군도 세자 자리를 사양했으나 결국 인조의 의지대로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지 4년 후,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즉위 후 세자 시절부터 가슴에 품고 있었던 북벌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김자점(金自點) 세력에 의하여 밀려난 산림세력을 대거 등용했다. 이는 친청세력(親淸勢力) 견제와 반청정책(反淸政策) 추진을 위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집권층인 서인세력은 낙당(洛黨)․원당(原黨)․한당(漢黨)․산당(山黨)으로 나뉘어져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효종은 병자호란에서 척화(斥和)의 상징이었던 김상헌(金尙憲)을 비롯하여 그간에 낙향해 있던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당시 산림세력(山林勢力)으로 불리던 서인계의 명망가들을 불러 들였으며 이를 통하여 김자점을 중심으로 한 친청세력을 제거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결국 산림세력의 맹렬한 공격으로 김자점과 그 일파는 제거되었다.
그런데 김자점이 산림들의 공격으로 유배를 가자 그의 아들 김익(金釴)이 이를 만회할 의도로 기진흥(奇震興), 변사기(邊士紀)와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元斗杓),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김자점 부자는 주살 당하고 그 추종세력은 조정에서 제거되었다.(연려실기술 32, 효종조 「고사본말」 김자점옥)
그러나 김집은 당시 김육(金堉), 신면(申冕) 등 일부 조신과 대동법시행을 둘러싼 마찰이 있었고, 김자점 일파가 반청성향의 산림인사들이 중앙정부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청에 밀고함으로써 더 이상 조정에 머물지 않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김집이 연산으로 돌아가는 것에 반대하는 각종 기록을 보면, 김집이 산림의 종장으로서 차지하는 위치와 정치적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김상헌은
김집은 유문(儒門)의 숙망(宿望)으로 노성(老成)하고 단량(端亮)하여 사림이 모두 향하여 앙모하며, 다투어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효종실록 권2 효종 즉위년 11월 2일) 라는 인물평과 함께 신독재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감을 막고 서울에 남아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승지 윤항(尹降), 심지원(沈之源), 김경여(金慶餘)를 비롯한 관리들도 모두 머물게 하기를 왕에게 요청했다. 이에 효종도
나를 위해 잠시 머물러 준다면 국가에는 도움이 되고, 사림들에게는 얼마나 모범이 되겠는가.(효종실록 권2 효종 즉위년 11월 정사)
했다. 효종의 말에서 당시 김집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송시열도 신독재에 대한 지지와 더불어 관직에서 물러날 뜻을 보였고, 이조 정랑 홍명하(洪命夏)도
현인(賢人)과 간인(奸人)을 분명히 구분하여 의심 없이 현인을 등용하고, 단호히 간인을 제거하는 것은 사람을 쓰는 요령입니다.(효종실록 권3 효종 원년 2월 무자)
라는 상소를 하여 신독재를 지지했다. 신독재에 대한 지지는 조정에서 뿐 아니라 재야의 유림들에게 보다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1652(효종 3) 교리 이태연(李泰淵)이
김집은 이 시대의 유종(儒宗)으로서 나이가 팔십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어 사림들로 하여금 의지하여 존중할 바를 알게 하소서(효종실록 권8 효종 3년 4월 계해)
라고 했으니, 김집이 재야와 조정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79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