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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없는 젊은이 -4
선출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서울에 집을 마련했다.
학교 앞에 제법 규모가 크고 마당이 넓은 한옥에 길가 담을 헐고 지은 가게가 따린 집이다.
친정 식구들을 데려오면서도 연락조차 하지 않고 고향에 남겨두어 아직 작인노릇을 하는 갓난이 여동생 네를 불러 올려 문방구와 잡화 장사를 하면서 공부하는 아이들도 돌보게 하였다.
가게도 목이 좋아 수입이 좋았다.
동생이 늘 마음에 끼였는데 불러올려놓고 보니 일가친척 없는 타향에서 더 없이 든든하였다.
개성에서 지은 농사로 갓난이가 식량을 대주어 가게 수입으로 동생네 사는 것이 날로 좋아지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게 되어 갓난이와 도시오 내외는 보기도 좋아 보람이 있었다.
도시오는 아이들 이름을 모두 개명했다.
선출이는 진하(晋河)로 후출이는 진구(晋求)로 고쳤다.
선출(先出=먼저 나왔다)이 후출(後出=나중 나왔다) 이름에는 어딘지 상전(上典) 성 참봉이 상것들의 이름을 비하하여 지어주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시오는 이제 아이들의 이름 하나에도 인격과 주체성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시오에게 큰 후원자였던 후지끼를 1930년 9월 조선공산당들이 많이 활동하는 중국 상하이에 소련에 있던 김단야가 나타난 정보를 입수한 경시청에서 특수 임무를 맡겨 전보하였다.
중국말을 못하는 도시오는 10년을 같이 지냈던 형님 같고 스승 같았던 후지끼와 헤어져야 했다.
후지끼가 중국으로 떠나자 도시오는 살벌한 경찰서 일을 그만 두고 가족들이 있는 농장으로 돌아와 전원생활을 즐기며 서울 집에서 처제가 문방구를 하는 가게 옆으로 크게 넓혀 과일 도매상을 열어 동서에게 맡겼다.
40 중반이 된 도시오는 처남이 관리하는 과수원과 논밭을 둘러보며 관배수가 좋은 논을 채소밭을 만들어 서울로 내면서 서서히 장사꾼이 되어갔다.
시간을 많이 내어 한문으로 된 경서(經書)와 육도삼략, 손자, 오자, 한비자 같은 병서(兵書)들을 즐겨 독서했다.
전에 읽고 외울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 동안의 삶의 경륜 탓인지 이런 고전(古典)들에서 새로운 철리(哲理)를 깨달아갔다.
도시오는 조선인이면서 조선을 버리고 일본인으로 살아왔으나 여전히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인인 자신을 돌아보니 조선인도 일본인도 못되는 자신이 부초(浮草)처럼 여겨졌다.
만약에 조선이 독립한다면 일본 순사 앞잡이 노릇을 한 자신은 조선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일본 사람들을 배신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도시오는 그 동안 앞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자신의 무모함을 깨달았다.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며 자신의 과거처럼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어주기로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진하는 법관이 되려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도시오가 만약에 앞으로 조선이 일본에게서 독립을 한다면 일본에 충성하는 법관이 되는 것도 그렇게 좋을 것 같지 않으니 공부를 마치고 나서는 전원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자고 하였다.
청년 진하는 젊은 혈기와 남의 집 하인으로 살아온 집안 내력에 대한 심중에 아픔이 있어 아버지의 충고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닫지는 않았다.
아버지께 대답은 그렇게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으나 조선 제일의 지성을 자랑하는 젊음은 양반들에게 한번 호령하고 싶은 야심으로 불탔다.
1931년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서울에 사는 조선인 친구 네 명이 진하네. 농장에서 며칠 놀다가 함께 서울로 가는 열차 안에서였다.
진동호가 화장실에 갔다가 오는 길에 통로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잡답을 하는 일본 청년들 옆을 지나다가 손에 쥔 담배를 부딪쳐 떨어뜨리고 말았다.
동호가 미안하다고 말 사이도 없이 담배를 피우던 일본 청년이「이 조선 놈의 새끼가」하며 진동호의 어깨를 잡아챘다.
진동호는 어릴 때부터 공수도를 배워 웬만한 장정 서너 명은 상대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깨를 잡아채던 일본 청년이 순간 객차 바닥에 넘어졌다.
다혈질에 공격적인 성격의 진동호가 어께를 잡아채며 주먹을 날리는 일본 청년에게 순간적으로 다리를 걷어 넘겨버린 것이다.
동료 친구가 넘어지자 일본 청년 둘이 합세하여 달려들어 진동호에게 주먹을 날렸고 이를 본 진하 친구들도 일어나 합세함으로 삽시간에 패싸움이 되고 말았다.
일본 청년들도 상당한 주먹 실력을 가지고 있어 4대 3으로 싸워도 팽팽했다.
안쪽에 앉았던 진하가 나중에 일어나 나오면서 잠간 사이에 일본인 청년 세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어 쓸어졌다.
진하는 고등학교 다니면서 한반이던 진동호를 따라 공수도를 배웠다.
천부적으로 운동 소질이 있고 고등학교에서 축구 선수까지 해서 싸움에도 누구에게 지지 않는다.
승무원이 달려오고 열차 안에 있던 일본 헌병들까지 알고 달려와서야 싸움은 끝났다.
헌병들이 젊은이들 싸움이라 적당히 훈방하고 끝내려 하는데 공교롭게도 얻어맞은 일본청년 가운데 정무총감 「아마이다 기요노리」의 조카 오야마 마스다가 끼어있었다.
일본 헌병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진하 일행을 헌병대로 연행하여 가죽채찍으로 살이 찢어지도록 때리며 반일감정이 있어 무고한 일본인 청년들에게 고이로 집단 폭행한 폭행 범으로 몰아갔다.
헌병들은 정무총감 「아마이다 기요노리」조카가 다친 사건이 되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정무총감의 조카인줄 미리알고 고의적으로 폭행 한 것으로 꾸미고 사회질서를 교란한 불량학생으로 몰아 학교 당국에 퇴학을 시키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럴 때는 후지끼가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도시오 혼자서 개성 경찰서를 찾아가 부탁을 해보았으나 정무총감 조카를 폭행한 사건이라 학교 퇴학문제는 경찰서의 힘으로는 어렵다면서 그래도 진정서를 올려주어 벌금으로 모두 풀려나왔으나 학교에서는 모두 퇴학을 당했다.
개성 집으로 내려온 진하는 자기 정체성을 돌아보는 개기가 되었다.
상놈으로 태어나 조선의 양반님들에게는 인간 대접을 받아보지 못하고 상전에게 능욕을 당한 복수심에 철저한 일본 경찰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려고 했는데 친구들의 패싸움에 말려 일본 헌병들에게 조선인이란 이유로 살이 찢어지게 얻어맞고 학교까지 퇴학을 당했다.
비로소 자신은 결코 일본인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이겨보려고 과수원에 들어가 농장 일꾼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해보았다.
참봉 어른에게 능욕을 당하는 엄마를 본 그날부터 선출이는 아홉 살 난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엄마를 따라 동생과 같이 생전 처음 타보는 기차에 오를 때 벌써 엄마가 참봉 댁에서 도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영악하게 철이 들어버렸다.
아버지를 따라 개성에 와서 보통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더 없이 행복했고 상전의 집 행랑이 아닌 경찰서 관사에 살면서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옷을 입고 신을 신었고, 사천강변에 불하받은 땅에서 만들어진 사과 농장에 새 집을 짓고 광활한 농토를 가진 부농의 아들로 변신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선출이의 어린 가슴에 일찍부터 남들보다 더 배워야 한다는 자의식이 생겨나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서울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자신도 출세할 수 있다는 야망이 있어 운동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에 좋은 성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필자 주 : 경성 제국대학은 일본이 세운 관립학교로 1920년 재단법인 조선교육회가 발기 되어 종합대학인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인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봉쇄할 목적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 사람들에게 독립정신을 일으킬 수 있는 정치, 경제, 이공계 학부는 설치하지 않고 식민지 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설치하였다가 1941년에 이공학부가 설치되었다. 1926년 개교 당시 조선인 교수는 전체 57명 중 5명에 불과하고 학생은 150명 중 47명이었다.)
그러나 하찮은 싸움에서 조선인이란 이유로 헌병대에서 억울하게 얻어맞고 대학에서 퇴학까지 당하면서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싸우느라 농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해 보았지만 마음의 공허함은 메워지지 않았다.
(계속)
- 갈등하는 지성 -
진하는 다시 공부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 법률과에 들어갔다.
보성전문학교는 학교 당국이나 학생들에게 경성제국 대학에서 보지 못한 민족의식이 있었다.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범벅이 되어 일본의 눈을 피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민족이니 애국이니 하는 것에는 본래 관심이 없는 진하지만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서클에 호기심을 느끼자 공산주의 조직에 가담한 친구가 공상주의 학습을 하는 곳에 같이 가자고 하였다.
친구를 따라 도심의 큰 길을 벗어나 한적하고 평범한 기와집에서 전문학교 학생 10여명과 고등학생이 7-8명을 미모가 뛰어나고 세련된 여자가 지도하고 있었다.
진하를 친구가 사람들 앞에 소개하자 그 여자가 "나는 손명화요"하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진하에게 손명화 선생이 모두들 앞에 자기를 소개하라고 하였다.
진하는 모인 분위기를 보아 자기를 좀 과장 할 필요를 느꼈다.
저는 경성제국대학을 다니다가, 열차에서 정무총감 「아마이다 기요노리」의 조카를 만나 폭행한 죄로 퇴학을 당해 잠시 쉬다가 보성전문 법률과에 들어왔다고 하였더니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손명화선생은 등사판으로 프린트한 팸플릿으로 마르크스 자본론과 러시아말까지 가르치고 있었다.
유창한 손명화선생의 강의에 진하는 흥미를 느껴 열심히 참석했다.
손명화선생은 감옥에 있는 박헌영 동지,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김단야, 주세죽동지등 조선공산당 선배들의 공적과 혁명투쟁을 알려주며 때로는 혁명의 전사가 되자고 열변을 토했다.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못되는 자기 정체성에 고민하던 진하는 이 모임을 통해 민족이나 국가보다 온 인류가 공동의 하나가 되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 세계관은 바로 자기를 위한 철학만 같았다.
학교를 졸업할 때쯤 이 모임을 통해 진하는 해박한 공산주의 이론가로 손명화선생의 신뢰를 받았다.
졸업을 앞두고 진하는 여러 번 손명화 선생에게 초대를 받았으나 그 때마다 사정이 생겨 손 선생의 집으로 가보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졸업을 앞둔 진하에게 일본 관료가 되지 말고 과수원이나 관리하며 평화롭게 살자고 하였지만 진하의 마음속에는 공산주의 혁명가의 꿈이 익어가고 있었다.
1935년 연말 진하는 진동호를 비롯한 친구들과 관수동에 모녀가 장사하고 있는 선술집에서 망년회를 가졌다.
주모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색시가 술상을 들고 들어오는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아주 예쁘고 상양하며 영리하게 생긴 계집은 아무래도 어디서 본 듯하다.
그렇다고 술집 출입이 처음인 진하가 색시를 술집에서 보았을 이는 없다.
이상하게 망년회 내내 색시에 대한 궁금증이 머릿속에 가득하였다.
스무 두서너 살 정도의 요염하게 생긴 계집은 사내들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진하는 지금껏 선술집 작부들과 놀아본 적이 없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서 친구들의 요청을 받은 작부가 일어나 붉은 갑사(甲紗)치맛자락을 살짝살짝 들어 허벅지를 보일 듯 보일 듯 내보이며 한창 유행하고 있는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황성 옛터에)을 흐드러지게 불렀다.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끌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묻어놓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구슬프고 애잔하게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계집을 따라 모두 함께 합창을 하는데 어떤 친구들은 눈물까지 흘렸다.
어쩐지 여인의 노랫가락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진하도 눈물을 흘리며 자기에게 이런 여동생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으나 선술집 작부의 애잔한 노래 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가슴을 찢어놓을 것만 같아 잠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황성의 적은 그 계집을 위하여 만든 노래만 같았다.
도시오는 개성으로 온 후부터 조선 사람들은 쇠지도 않는 양력설을 쇤다.
진하는 본정통에 있는 미스코시 백화점에 들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일본 술과 엄마가 좋아하는 과자를 설 선물로 사서 개성 집으로 내려왔다.
양력 1월 1일 동생 진구와 같이 부모님께 세배를 올리고 아침상을 받아 엄마가 끓인 만두 국을 먹다말고 진하는 깜짝 놀랐다.
아주 어릴 때 참봉 댁 부엌방에서 설날 순달이와 선출이 형제는 엄마가 퍼주는 만두를 넣어 끓인 떡국을 먹는데 다섯 살 순달 이가 자기 그릇에서 굵은 만두를 하나 건져 선출이 그릇에 넣어주면서 이거 오빠 먹어 하였다.
진하는 어릴 때 보았던 순달이의 모습은 기억나지는 않지만 선술집 그 작부가 순달이란 생각이 들어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서울로 올라갔다.
약력 설을 쇠는 사람은 일본 사람들 뿐이어서 개성은 물론이고 서울의 거리도 그저 평일과 같았다.
관수동 선술집은 한 낮이라 그런지 한가로웠다.
선술집으로 들어서니 색시가 방에서 나왔다.
진하가 앞으로 다가가 "안녕하십니까?" 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색시는 진하의 이런 행동이 장난스러워 보였는지 빙그레 웃으며 "서방님 어서 오셔요." 하며 자리에 앉으라고 하였다.
진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색시가 시키는 대로 가게 나무 의자에 앉았다.
주모가 아직 숫되어 보이는 진하를 아래위로 흩어 보다가 술집 출입이 처음인 것 같으나 차림새로 보아 제법 돈푼이나 있어 보이는 지라 공손한 태도로 "아이고 서방님 안방에 술상 차릴게 들어가셔요." 하며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를 했다.
방은 작아도 깔끔하고 깨끗했다.
주모가 "조금만 기다리셔요. 술상차려 색시를 보내드리겠습니다요." 하고 나갔다.
철부지 봉이다 싶은지 주모가 앞에서 슬데 없는 너스레를 떨며 진하가 보아도 술상을 제법 걸게 차려 들고 들어오고 뒤 따라 색시가 "서방님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애요," 하며 들어왔다.
그저께 보았을 때보다 어려보이고 더 요염하고 예쁘다.
기억은 되지 않지만 색시에게서 순달이 모습이 느껴지는 듯 했다.
주모가 "서방님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셔요." 하며 나갔다.
색시가 진하 술잔에 술을 따르며 한 잔 하셔요. 하며 귀여운 미소를 흘렸다. 진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얼떨결에 색시 자고 가도 됩니까? 했더니 "아이고 한 낮부터 웬 주무시기는요? 그러다가 댁에서 아씨마님에게 쫓겨나시려고요" 하며 안주를 집어 입에 넣어주었다.
진하는 지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연하다.
만약 순달이가 아니면 어떻게 하나?
비록 술집 여자지만 이렇게 혼자서 여자와 같이 해보기는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리며 불안했다.
색시가 말이 없는 진하를 보며 속으로 아직 경험이 없는 총각이라 그러려니 여기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채웠다.
정종을 서너 잔 정도 마셔갈 무렵 진하는 생뚱맞게 색시를 보고 황성의 적을 불러 달라고 하였더니 색시가 저 노래를 잘 못해요. 하고 뺐다.
그저께 여기서 우리 망년회를 할 때 색시가 황성에 적을 어떻게나 잘 부르는지 그 노래가 듣고 싶어서 왔소.
망년회에 왔다는 말에 색시는 그 망년회가 기억이 났는지 어머! 그날 그 망년회 왔던 서방이셨구나? 그래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했다. 하면서 넘어 가려하자 진하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색시도 진하를 따라 같이 불렀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진하가 노래를 멈추고 여자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는 가리로다 끌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묻어놓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여자는 혼자서 간드러지게 불렀으나 지난번처럼 애잔하거나 구슬프지는 않았다.
진하가 눈물을 흘리자 여자가 서방님 왜 눈물을 흘리시나요. 하더니 옆으로 와서 명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며 제가 노래를 잘 못 불렀나요. 했다.
진하가 계집의 손을 잡자, 손을 빼려하자 여자의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주며 「순달아!」 하고 불러보았다.
참봉 댁에서 손 집사네가 없어지자 큰 난리가 났다.
검찰에 넘어간 참봉 어른을 구명한다며 토지를 팔던 손 집사가 가족을 데리고 살아지자 마님은 어찌할 바를 몰라 소란을 떨다가 몸 저 누웠고, 참봉어른은 상당한 벌금을 내고야 6개월 만에 나와서는 손 집사 일로 집에 있던 하인들을 모두 내 보내버렸다.
아무런 대책 없이 쫓겨난 순달 이네는 엄동설한에 거지 생활을 해야 했다.
김해 등지로 유랑하며 구걸하던 모녀는 모진 겨울을 견디며 입춘을 맞을 무렵 진주 어느 선술집에서 밥을 한술 얻어먹다가 주모가 어린 순달이가 불쌍하다며 수양딸로 달라고 하였다.
배고픔과 얼어 죽을 고비를 넘겨온 순달이 엄마는 주모가 말아준 국밥을 배가 부르게 먹고는 단잠을 자는 것을 보고는 주모에게 수양딸로 주고 떠났다.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 8살의 순달이는 엄마를 잊지 못했지만 엄마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수양엄마는 순달이 이름을 혜숙이로 고쳐 부르며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혜숙이는 머리가 좋은 것인지 공부를 열심히 한 탓인지 6년 동안 줄곧 일등을 했다.
수양엄마는 그것을 자랑하며 여자고등보통학교에도 보내주었다.
여고보 3학년이던 가을날 수양엄마가 음식을 잘못 먹고 설사병을 얻어 보름이 넘게 고생을 하다가 순달이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았다.
55살의 수양엄마가 혜숙이에게 남겨준 것은 선술집과 집에 따른 밭 여섯 마지기뿐이었다.
수양엄마가 남에게 받을 돈들이 제법 있었지만 혜숙이를 찾아와 돈을 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술집에서 17살 혜숙이가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막연했다.
낮에는 술을 팔고 밤이면 늙은 영감님들의 잠 시중까지 드는 수양엄마 밑에서 오직 듣고 보고 배운 것은 술장사뿐이다.
수양엄마는 혜숙이에게 "야 이년아 너는 이 담에 어떤 일이 있어도 술장사를 하면 못쓴다. 어미가 몸뚱이를 이놈 저놈에게 굴린다고 따라 배우지 말고 이다음에 못나도 한 사내만 만나 평생을 살아야 한다." 며 가계에 들어와 술상을 만지는 것도 못하게 하였다.
수양엄마가 죽고 없어도 술손님은 찾아들고 살길이 막연한 혜숙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술을 팔아야만 했다.
해가 일찍 저문 겨울저녁 혼자서 술을 마시던 마을 사내가 혼자서 계속 술을 마시더니 손님이 뜸해지자 어린 혜숙이를 덮쳤다.
소리를 질렀지만 술집에서 여자 비명소리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여덟 어린 소녀의 순정을 밟아 뭉개놓은 사내 연석은 염치도 좋게 드나들며 제마누라처럼 괴롭혔지만 주변에서는 다 큰 계집애가 술장사 하면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보고 보호해 주는 이 하나 없어 어린 혜숙이로는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사내놈의 마누라가 알고는 찾아와서 순달이를 때리고 분탕을 쳤지만 사내는 계속 찾아와 싫다고 하는 혜숙이에게 주먹질까지 하며 자고 다니고, 그 마누라는 그럴 때마다 찾아와서 때리고 분탕을 쳤다.
견디다 못한 순달이는 집과 밭은 이웃집 아저시께 팔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주모가 남겨놓은 패물들을 챙겨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이 관수동 선술집에 몸을 맡겼다.
처음에는 소 집사가 아니었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원망을 하며 가까이 있으면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상것들의 한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면서 손 집사도 얼마나 서러웠으면 그렇게 했을까 생각하니 오히려 그리워지고, 어릴 때 오빠라고 부르던 선출이가 무슨 큰 혈육이나 되는 것처럼 그리워졌다.
하룻밤 오입이나 하려고 나온 부잣집 도련님으로 알고 한잔 술이라도 더 팔려고 요염을 떠는데 「순달아!」하고 부르는 소리에 혜숙이는 얼마나 놀랐지 모른다.
진주 수양엄마가 순달 이란 이름을 버리고 혜숙이라고 불러준 후 십 수 년을 스스로도 잊어버린 순달 이를 이 하늘 아래 누구 하나 알 리 없는데 어떻게 이 사내가 불렀단 말인가?
엄마도 잃어버리고 혈혈단신 외로운 몸 선술집에 앉아 웃음을 파는 혜숙이의 본명을 불러주는 이 사내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혜숙이는 깜짝 놀라 "당신 누구세요?" 하며 사내를 밀어내고 얼떨결에 일어서는데 사내는 순달이 손목을 잡아 앉히며 "네가 순달이가 맞았구나?"
"그렇지 순달이 맞지?"
혜숙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순달이란 이름을 불러주는 이 사내를 상상할 수가 없다.
천리타향 서울 바닥에서 혜숙이로 살아가는 순달이의 본명을 불러주는 이 사내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놀라는 순달이 손을 꽉 잡고 "순달아 선출이 오빠를 기억하겠느냐?" 하는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사내가 선출이 오빠라는 말에 순달이는 눈을 크게 뜨고 파르르 떨며 말문이 막혔다.
사내들에게 능숙하고 농익었던 작부의 모습은 사라지고 죄를 짓다 들켜 오라비 앞에 앉은 순박한 시골 처녀처럼 측은한 모습의 순달이를 진하는 꼭 껴안으며 "너였구나? 순달아 오빠다!" 하는데 달구 똥 같은 눈물이 흐르며 목이 메었다.
겨우 말문을 연 순달이가 "정말 선출이 오라버니가 맞나요?" 하며 처다 보았다.
진하는 순달이를 꼭 껴안으며 "그래 오빠다."
"내가 선출이 오빠다." 하고 오빠란 말에 힘을 주었다.
"순달아!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하는 진하의 품에서 순달이는 "오빠!!" 하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모든 설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오빠!" 하고 외치며 통곡하는 순달이 소리가 온 집안에 들렸다.
혜숙이가 선술집에 와서 딸 노릇을 하며 비싼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면서 많은 손님을 들게 하고 있다.
진주에서 사내에게 비록 몸을 더럽혔으면서도 밤손님을 받지 않았다.
주모 욕심에는 혜숙이가 젊을 때 밤손님을 받아 재물을 모으면 좋겠는데 어리석은 년이 누가 저를 요조숙녀로 알아나 주는 듯이 사내를 받지 않는다고 한 번씩 욕설을 하면서도 딸처럼 사랑하고 있다.
두 남녀가 술상을 마주한 것을 보고 나온 주모는 혼자 어차피 웃음을 파는 주제에 그만 젊은 놈하고 연애를 하면 재미도 보고 돈도 벌고 좀 좋으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때 아닌 순달이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주모가 놀라 달려오니 혜숙 년이 낮선 사내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주모는 선술집 문을 닫아걸고 혜숙이가 오빠를 만난 경사를 위해 일찍부터 저녁상을 준비했다.
순달이가 눈물을 닦고 오빠를 위해 시장을 보아오겠다고 나섰다.
진하가 말렸으나 순달이는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진하가 주모에게 순달이를 데려가겠다고 하였더니 주모가 "도련님! 혜숙이 저애가 팔자가 더러워서 그렇지 참 아까운 아이요 제발 데려가서 잘 거두어주시오" 하고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그간에 있었던 순달이에 대한 주모 이야기에 진하는 가슴이 아팠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순달이는 자꾸 눈물을 흘렸다.
진하가 "왜 우느냐, 우리가 만났으니 이제부터 울지 말고 웃자구나?"
"앞으로 오빠가 너를 지켜주마!" 하고 개성에 있는 집으로 같이 가자고 하자 내가 어떻게 어른들을 가서 볼 수 있겠느냐며 주모인 엄마와 같이 살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주모가 "혜숙아! 도련님을 따라 가거라. 친정오빠나 진배없는데 따라가서 어른들에게 인사도 드려야지, 그리고 너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라. 내가 우리 혜숙이 잘 되라고 부처님께 빌어주마." 했다.
진하도 "순달아 우리는 가족이야, 아버지와 엄마도 너를 반가워하실 꺼다." 하며 순달이 손을 잡았다.
순달이가 큰 과수원 안에 궁궐 같은 집을 보더니 놀라며, "이 집이 오빠네 집이예요" 하고 물었다.
진하는 눈빛으로 대답을 하며 큰 소리를 엄마를 불렀다.
진하가 마당에서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자 갓난이는 "어제 서울에 간애가 웬일로 벌써 와서 애들처럼 마당에서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고 야단이야?" 하고는 방문을 열다가 낮선 색시와 같이 선 진하를 보고는 놀랐다.
갓난이가 "그 처자는 누구냐?" 며 물었다.
"엄마 순달이야!" 하는 진하의 말에 갓난이가 놀라며 "뭐라고 순달이라, 버머리 순달이란 말인가?" 하며 맨발로 뛰어내려와 순달이 손을 잡으며 "순달아!" 하자 순달이도 "아주머니!" 하고 안기며 울었다.
"이개 어찌 된 일이고? 순달아! 네가 여기를 어떻게, 찾아 왔노?" 하면서 잃었던 딸을 만난 듯이 갓난이도 순달이를 끌어안으며 큰 소리로 울었다.
과수원에 있던 도시오와 진구가 집에서 들리는 통곡 소리에 놀라 "이거 네 엄마 소리 아니냐?" 하자 진구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는 집으로 달려왔다.
진구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 도시오는 갓난이가 난선 색시를 끌어안고 우는 것을 보고 어찌 된 일이냐고 진하에게 물었다.
진하가 "아버지 순달이가 왔습니다." 하였다.
도시오는 빨리 생각이 나지 않아 "순달이라니?" 하다가는 생각이 나서, "뭐라고? 이 처녀가 순달이란 말인가?" 하고 놀랐다.
대청마루로 올라와 순달이에게 절을 받은 용바우와 갓난이는 눈물을 흘리며 딸이 돌아 온 것처럼 기뻐했다.
용바우는 "달아! 어디 네 손을 한번 만져보자." 하고 다가앉으며 손을 꼭 잡더니 "달아 반갑구나 그동안 어떻게 살았노?"
"내가 살아서 너를 다 만나다니 꿈만 같구나?" 하는 용바우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용바우에게 "아제요!" 하며 순달이가 혈육처럼 안기며 울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진구는 순달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손을 잡고 "누나 이렇게 와주어서 고마워!" 하며 반가워했다.
용바우가 자전거를 타고 나가더니 쇠고기와 일본에서 들어온 비싼 과자들을 사가지고 왔다.
진하네. 외삼촌 식구들까지 와서 온통 집안에 큰 잔치가 벌어졌다.
저녁을 먹고 사과와 배를 가져다가 깎던 갓난이는 순달이 엄마 생각이 나자, 갑자기 깎던 과일과 칼을 내려놓으며 "형님(순달이 모)을 우짜머(어떻게 하면) 좋으노(좋으냐)?" 하고 방바닥을 치고 통곡을 하는 바람에 순달이도 통곡하고 다른 가족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진하 졸업식을 마친 다음날 도시오는 식구들은 모두 개성으로 보내고 진하만 좀 남으라고 하였다.
도시오, 용바우는 어릴 때부터 사대부 양반들처럼 여자 정조를 순결로 여기지 않았다.
천출로 태어난 용바우네 선조들 모두는 몰라도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아내까지 양반 놈들에게 정조를 짓밟혔다.
특히 할머니는 양반집 하녀가 주인의 씨를 받아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하고 종년이 되어 오라비인 주인의 아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나서 종놈인 용바우 조부와 결혼을 했다.
조선에서 천출로 태어난 여자가 조금만 예쁘면 어디 순결을 지킬 수 있었던가?
순달이네 부모와 용바우네는 한집에서 누대로 하인노릇을 하며 서로의 부끄럽고 욕된 사정들을 다 알고 서로 덮어주며 가족처럼 살아왔다.
용바우는 두 달간 순달이와 같이 지내는 동안 아이가 예쁘고 지혜로우며 사랑스러웠다.
만일 옛날처럼 양반집 하녀였다면 주인이 그냥 둘 아이가 아니게 예쁘고 사랑스럽다.
양반들에게 동문학습의 벗이 있다면 용바우에게도 한집에서 하인으로 태어나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순달이 에비 봉술이 형님과의 우정이 있다.
어릴 적에 아이들과 싸울라치면 세 살 위인 봉술이 형님이 용바우 편이 되어주었다.
들에서 살모사에 물려 뱀독으로 죽으면서 용바우야! 순달이 부탁하제. 하고 눈을 감았다.
양반들에게 가문의 뼈대가 있다면 천출들에게는 인간의 정이 있다.
옛날처럼 참봉 댁의 하인으로 살았다면 진하와 순달이를 맺어 주었을 것이다.
순달이의 아픈 지난날들을 진하가 보듬어주며 평생 보살펴 주었으면 싶다.
용바우는 진하와 같이 청요리 집으로 나와 저녁을 먹으며 진하가 부어주는 고량주를 두어 잔 마시자 술기운이 약간 돌았다.
"진하야!" 아버지 용바우가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할 듯이 무겁게 불렀다.
술을 따르던 진하가 "아버지 말씀 하시지요." 했으나 용바우는 술을 마시고 안주 먹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용바우가 "순달이가 와서 내가 너무 기쁘다." 하고 운을 떼더니, "아이가 참 사랑스럽게 컸구나. 진하야! 순달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나?" 하고 물었다.
진하는 양력 설날 집에서 순달이를 찾아 선술집으로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작부가 순달 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천하고 천한 천출로 한 집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귀여워했던 순달이다.
오빠라 부르며 따르는 순달이를 아이들이 때리기라도 할라치면 대신 싸워주기도 했다.
어쩌다가 순달이가 선술집 웃음을 파는 계집이 되었을까?
우리 가족들 탓일까?
성 참봉 집이 망해서 하녀를 팔아먹은 것인가?
내가 순달이와 결혼한다면 아버지와 엄마가 용납해 주실까?
그냥 동생으로 보살펴주어야 하나? 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순달이와 한집에서 지낸 두 달간의 생활에서 보아온 순달이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느 여학생들보다 오히려 더 영리하고 아름답고 교양이 있다.
진하는 순달이를 아내로 품어주어야 하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하고 있다.
"아버지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는 말이다, 하늘이 순달이를 우리 식구로 보내주었다고 생각 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진하는 벌써 아버지의 생각을 알았다.
"아버지 좋으신 대로 하시지요."
"아니다. 네 생각을 묻는다."
"아버지!"
"오냐!"
"어머니가 참봉나리 방에서 능욕을 당하던 그 날 제가 그 창가에 있었습니다."
진하의 입에서 피눈물이 묻은 말이 나오자 용바우는 속으로 놀랐다.
진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아버지와 엄마가 옛날 할머니에 대하여 나누시는 말씀도 다 들었습니다."
용바우는 더욱 놀랬으나 침착하게 "그랬구나!" 하고 대답하면서 진하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자 내심 기뻤다.
"저는 지난 설날 아침에 만두 국을 먹다가 옛날 어린 순달이가 설날 제 만두를 내 그릇에 넣어주던 기억이 나면서 선술집에서 보았던 여자가 순달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잃어버린 누이 같기도 하고, 꼭 제 아내를 남에게 빼앗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가서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날 순달이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순달이를 품어 주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합니다."
"순달이가 살아 온 세월이 순달이 탓이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가족들 때문에 당한 고생을 생각 한다면 제가 당연히 순달이를 지켜주어야지요."
용바우는 진하의 말이 고마웠다.
"네가 그렇게 까지 생각하고 있으니 이 에비는 참 고맙구나?" 하고 용바우는 밝은 미소로 진하를 보았다.
"아버지! 이 조선에 상것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무슨 욕이 있습니까?"
"있다면 양반들의 것이고, 모두가 다 천출들의 한 많은 애환이지요."
"보통학교를 한 여자도 몇이 안 되는 이 조선에서 순달이는 여고보까지 다닌 신여성으로서 누구 못지않게 아름답고 교양이 있습니다."
"순달이를 품어 주지 못한다면 제가 어찌 배운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의 양반들에게 사악한 품격이 있다면 우리 천출들에게는 순박하고 착한 품격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순달이를 가족으로 받아주시는 선하고 순박한 이런 품격 말입니다."
용바우는 아들 진하가 순달이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니 죽은 순달이 에비 봉술이 형님에게 우정을 다할 수 있어 마음이 가볍고 기뻤다.
개성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용바우는 아내 갓난이와 안방에서 오랫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늦게야 애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방으로 나왔다.
갓난이가 "오늘 아버지가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모두 들어봐라" 하였다.
도시오가 순달이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손을 잡더니 "순달아 아제는 네가 우리 식구가 되어 주어 참 고맙구나."
"아지매하고 진하도 너하고 평생을 같이 살자고 한다."
순달이가 놀라자, 갓난이가 옆에서 어깨를 안으며 "달아 아무 말도 하지마라. 아버지도 오빠도 모두 그렇게 하기로 했단다." 하였다.
순달이는 아직 무슨 뜻인지 모르고 용바우의 딸로 같이 살자고 하는 줄로 알아듣고 갓난이 품에 안기며 "아지매!" 하고 흐느꼈다.
진하가 엄마 갓난이를 밀어내고 순달이를 안아주며 "순달아 하늘이 너를 내게 보내주셨구나!" 하자 가족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진하가 "순달아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이렇게 가만히 그리고 평생 내 아내로 나와 같이 해다오." 하자, 깜짝 놀라는 순달이를 진하는 팔에 힘을 주어 안았다.
순달이가 진하 방으로 따라 들어와 감히 오빠와 그럴 수 없는 몸이라고 울먹이자, 진하가 "너와 내가 결혼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순달이를 감싸 안으며 "지난날은 우리가 종으로 태어났기에 내 몸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자유 하는 사람으로 내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알기에 우리는 서로 보듬어 줄 수 있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좋아하는데 못할 것이 무어냐?"
"어릴 때 나는 신랑하고 너는 각시하며 소꿉놀이를 할 때부터 우리는 부부였잖아?"
"만약 우리가 양반들과 결혼을 해서 살다가 우리의 천출이 알려지면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느냐?"
"순달이 자네가 생각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양반네들이나 하는 짓이다."
"신지식을 공부한 새 시대 문명인인 우리는 서로의 아픈 상처를 사매주고 또 우리처럼 천출로 태어나 아직도 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울이 되어 주어야할 책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순달아! 우리는 이제 미개한 조선의 양반들 보다 새로운 문명과 지식으로 계명한 문화인이야."
진하의 따뜻하고 새로운 가치관에 순달이는 큰 위로와 새로운 용기를 얻어 진하를 처다 보며 "오빠 고마워요," 하며 진하 품에 안겼다.
순달이는 오늘이야 진정한 지성과 문화인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았다.
진하는 품에 안겨 울먹이는 순달이의 입술을 훔쳤다.
가족들이 모두 빨리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좋겠다며 준비에 들어갔다.
진하는 우수(雨水)에 이른 봄비가 오는 날 신흥청년동맹 학습에 참석하려고 서울에 올라갔다.
양반도 상놈도 없고, 부자도 가난한 이도 없는 공산주의 혁명가가 될 것을 다짐하며 손명화 선생님과 몇몇 동지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고 헤어지는데 손명화 선생이 둘이서 한잔 더 하자고 하였으나 집에 손님이 있다는 핑계를 되고 들어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전화 벨 소리에 선 잠이 깨어 누가 이 밤중에 전화를 했을까? 하고 억지로 일어나 전화를 받으며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교환 아가씨가 개성에서 온 시외 전화라며 받을 거냐고 물었다.
깜짝 놀라 "여보세요!" 하는데, 수화기에서 급한 목소리로 "오라버니 - 큰일 났어요. 아버지가 다쳤어요." 순달이의 다급한 목소리다.
놀라 "무슨 일이냐?" 고 물었더니, 집에 비적이 들어와 아버지가 다쳤다고 한다.
진하가 급하게 택시회사에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한 시간여 만에야 전화를 받은 기사가 퉁명스럽게 밤에는 대절 비를 갑절은 받아야 한다며 사설을 늘어놓으려 했다.
차비는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빨리 오라고 불렀다.
대문 밖에서 샛바람이 불어 추운 날씨에 한참을 기다려서야 차가 왔다.
개성광제병원으로 가니 순사들이 와 있고 외삼촌이 순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가니 가족들이 울고 있고, 침대 위에는 하얀 보자기가 덮여있었다.
아버지는 벌써 숨을 거둔 뒤였다.
진하네 집에서 외삼촌댁이 거처하는 집은 같은 과수원 안이라도 30미터나 떨어져 있다.
순달이에게 방을 내어준 진구는 외삼촌댁이 거처하는 집에서 잠을 잔다.
도시오와 갓난이 순달이 세 사람만 집에서 잠이 든 밤중에 건장한 사내 5명이 도시오 방으로 들어왔다.
도시오가 놀라며 누구냐고 하자. 긴 일본 칼 내밀며 반항을 하면 가족을 모두 죽인다며 불을 켜라고 하였다.
갓난이가 불을 켜자 도시오에게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이다.
칼로 위협을 하며 국가를 위해 독립자금으로 2천원을 협조해 달라고 하는 자가 도시오 눈에 익은 연석이었다.
침착한 도시오는 당장 돈이 없으니 1주일 여유를 달라고 하자 놈은 네 아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돈이 없다고 하면 되느냐? 평소에도 돈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빨리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사실 도시오는 집에 돈을 두지 않는다.
은행에 가야 있다고 하자 칼로 위협을 하던 놈이, 칵 하고 위협을 하다가 그만 도시오의 앞가슴을 찔러버렸다.
도시오가 비명을 지르며 쓸어졌다.
갓난이가 놀라 비명을 지르자 놈들이 당황하여 도망을 쳤다.
갓난이가 도시오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여보! 진하 아버지! 진하 아버지!!"
한쪽으로 외진 방을 사용하는 순달가 잠결에 희미한 비명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어머니 방에서 나는 소리다.
놀라서 옷을 대충 걸치고 안방으로 달려가니 아버지는 쓸어져 피를 흘리며 숨을 가쁘게 쉬고 갓난이가 솜을 꺼내 지혈을 시키고 있었다.
도시오가 힘겹게 말문을 열어 "그놈이 허평이다. 허평이" 하였다.
순달이가 "아버지 허평이라니요."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야 부하라고 하였다.
순달이는 도시오가 김단야 부하 허평이라고 한 말을 입으로 외우며 외삼촌과 진구를 부르러갔다.
달려온 외삼촌과 진구가 아버지 도시오를 과수원에 사용하는 손수레에 싣고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까지는 20리가 넘는다.
농막에 자던 머슴들까지 연락을 받고 달려와 수레를 차례로 끌며 달렸다.
순달이는 우선 연필을 찾아 허평과 김단야의 이름을 적어놓고 진하에게 전화를 했다.
병원에 도착한 도시오는 가슴이 찔렸는데 손수레에 싣고 달려오느라 흔들려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병원에 도착할 때는 숨을 몰아쉬더니 운명하고 말았다.
순달이가 아버지에게 들은 대로 김단야의 부하 허평이라 적은 쪽지를 순사들에게 넘겨주자, 경찰은 러시아로 도망간 공산주의자 김단야(김태연)가 왔을 리는 없고 아마 그이 부하 허평을 중심으로 수사에 들어갔다.
우수에 내린 봄비 탓인지 샛바람이 쌀쌀한 날 작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손용바우(도시오) 장례식을 치렀다.
진하는 장례식에 아버지 이름을 고쳤다.
도시오란 이름을 쓰지 않고 용바우를 한문으로 용암(龍岩)이라고 고쳐서 명정과 곽에 自由人 孫龍岩之柩(자유인 손용암지구) 라고 섰다.
진하가 아버지의 혼백이라도 천출이 아닌 자유인이기를 비는 마음에서다.
아버지 장례식을 마친 진하는 너무나 허전했다.
천하고 천한 상놈의 굴레를 씌워 멸시와 천대를 한 조국에 대하여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공산당과 독립 운동가를 잡아들이는데 조금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던 아버지가 진하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진하도 민족이나 조국에 대하여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인간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조국이기에 진하는 오직 현실에 적응해서 인간다운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상놈의 굴레와 가난을 벗고 살 수 있게 해 준 일본이 차라리 좋았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일어난 일본 청년들과 패싸움에서 조선인이라 이유 때문에 헌병대에 끌려가 무지막지하게 얻어맞고 퇴학까지 당하하면서 자신은 조선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라는 사실에 갈등하다가 만난 것이 공산주의였다.
세상 경륜이 없는 진하의 짧은 식견으로 국제 공산주의야말로 사해동포(四海同胞)를 위해 일 할 수 있는 위대한 의념으로 믿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레닌의 프롤레타리아를 금과옥조처럼 배우며 공산주의 혁명가의 꿈을 꾸어왔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는 아버지를 죽였다.
진하에게 이념이 부족했는가 아니면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애착이 의념보다 컸던 것일까?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다고 외친 옛 사람들의 말을 상기하면서 진하는 아버지를 죽인 공산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도시오를 죽인 허평이란 자는 골수 공산주의자 김단야의 부하다.
손명화 선생님이 그렇게도 위대한 혁명가로 칭송하던 김단야의 부하가 혁명을 위해 남의 재산을 탈취하며 살인까지도 사주했단 말인가?
어떻게 내 아버지를 죽인 공산주의와 함께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수 있단 말인가?
진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혁명가의 열정은 적개심으로 변했다.
김단야가 1929년 12월 국내로 잠입하였을 때다.
이 정보를 입수한 후지끼가 김단야 일당인 허평을 잡아다가 김단야가 있는 곳을 추궁하다가 증거 부족으로 풀어주었다.
김단야에게 관심이 많았던 도시오는 후지끼가 허평을 취조할 때 취조실을 지나면서 허평을 몇 번 보았다.
후지끼의 취조 서류를 관리하던 도시오는 허평의 사진과 김단야 사진을 자세히 보아두었기에 허평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허평은 도시오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용바우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쯤 되었을 때 허평이가 풍덕에 있는 자기 집에 들어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허평이 지난겨울 웅기에서 결빙한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가서 김단야를 만났을 때 도시오의 과수원과 집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도시오가 재산이 많고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하든지 그에게서 2000원 정도의 돈을 받아 내라고 지시하였다.
허평은 의협심은 많으나 지식이 없고 생각이 단순해서 쉽게 김단야가 시켰다고 불었다.
경찰서에서 진하는 아버지를 죽인 것이 김단야가 허평에께 시킨 짓이었다는 말을 듣고는 젊은 혈기에 복수심이 불탔다.
고등학교만 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장 일을 하던 진구는 허평이를 죽이겠다고 경찰서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하였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공산주의로는 인류평화 공영에 기여할 수 없다.
평등분배와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외치며 자본주의 모순만 내세워 유토피아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혁명을 하자던 공산주의는 인간의 본질을 외면한 망상의 철학이다.
아버지를 죽인 그들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가 되는 것은 인륜을 저버리고 더 나가서 인류 사회에 무서운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공산주의 혁명가의 몽상에서 깨어난 진하는 공산주의를 복수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계속)
-아들의 분노- 6
한참 동안 진하가 보이지 않자 진동호는 개성에 있는 진하네 집으로 찾아 왔다가 결혼식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진하는 친구들에게 결혼식을 알리지 않았다.
진동호가 친구로는 진하 결혼식에 참석하는 유일한 한 사람이 되었다.
함경도 변방인 경원에서 소를 잡던 진동호 할아버지가 같이 동업하다가 연해주로 다니며 쇠가죽 장사를 하는 친구와 사돈을 맺은 후 사돈의 권유를 받아 서울로 올라와 식육점으로 성공한 편이다.
함경도 변방인 경원과는 달리 신분의 차별이 심한 서울에서 식육점은 내가 백정이요 하는 일이지만 진동호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갑오경정 이후 신분의 차별이 없어졌다며 남들의 멸시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돈만 벌 수 있다면 그까짓 백정이면 어떻고 비웃거나 멸시하면 어떠랴 식이라 남들의 의식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동호는 사람들의 멸시가 싫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경도의 콩과 쇠가죽을 가져가고, 그 곳 석유를 함경도에 가져다 파는 작은 무역을 하는 외삼촌댁에서 3년간 학교를 다녔으나 고등학교는 다시 서울에서 입학하였다.
조선말은 서툴면서도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진동호는 친구들에게 웃음거리만 되어 잘 어울리지 못하는데 진하가 먼저 가까이 하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 너 우리 집에 같이 갈래? 하고 초대를 했더니 싫어하고 화를 냈다.
조선말이 서툰데 하필이면 함경도 사투리라 친구들이 킥킥거리며 무시하는 것이 싫어 다시 외삼촌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갈까 하는 중이었다.
진하가 야! 우리 집에 놀러가자 하는데 왜 화를 내느냐며 어께를 잡는데 동호가 시비를 거는 줄 알고 확 뿌리치는 바람에 넘어졌다.
황당한 진동호의 행동에 화가 난 진하가 일어나면서 주먹을 날렸다.
둘은 한바탕 붙었으나 싸움에는 항상 자신이 있는 진하가 오히려 보기 좋게 얻어터졌다.
입술이 터지고 피를 흘리면서 "야! 진동호 내가졌다. 그렇지만 인마, 친구가 집으로 초청하는데 이러는 놈이 어디 있어?" 하고 따지자, 알아듣기 어려운 함경도 사투리와 억양으로 "내가 싫다는 왜 지랄이야 인마! 그러지 말고 네가 먼저 우리 집에 가자" 하였다.
동호가 무심코 우리 집에 가자고 했는데 진하가 "좋다 그럼 너 네 집으로 가자" 하고는 가방을 들고 따라 나셨다.
진하가 따라나서자 동호는 순간 낭패감을 느꼈다.
진동호네 집은 식육점을 하고 있어 친구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내가 백정이요 하는 꼴이 되므로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다.
어릴 때 친구들이 집에 왔다가 백정의 아들이라고 놀리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외삼촌 집에 가서 지금까지 자랐다.
동호는 지금 삼촌이 관장으로 있는 공수도 도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진하에게 도장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하였다.
속으로는 도장에서 운동을 하고 나면 시간이 늦어져 제 집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장으로 따라 가면서 동호가 운동하는 것을 알게 된 진하는 이자식이 이런 격투기를 하고 있어서 내가졌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운동을 하고 싶어졌다.
진하는 모든 운동을 잘 하는 편이다.
평소에 아버지가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려면 남자는 힘으로 장정 몇 명 정도는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 적이 있다.
이참에 격투기를 좀 배워두자 하고 진동호 삼촌에게 "저도 동호와 같이 운동을 하고 싶어 왔습니다." 했더니 동호 삼촌이 반가워하며 운동복까지 내 주었다.
도장을 나오면서 동호가 "인마! 무슨 마음으로 운동을 한다고 지랄이야?" 했다.
진하도 지지 않고 "인마 나도 네놈하고 싸워서 이겨 보려고 그런다, 왜" 하고 응수하자, "인마! 그러면 우리 친해보자" 하고 동호가 진하에게 손을 내 밀었다.
동호를 따라 식육점 옆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서 진하는 동호네 집이 백정인 것을 눈치 챘다.
진하는 진동호 방에서 자기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는 집안 내력을 동호에게 먼저 토해냈다.
"동호야! 내 아버지는 조선에서 천대받는 남의 집 하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조선은 없어지고 대일본제국이야?"
"양반들의 나라 조선은 없어지고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의 나라가 되었다."
" 너 내 친구가 되어 줄 수 있겠지?" 하자, 동호가 진하를 처다 보다가 와락 껴안으며 "야- 인마! 우리는 벌써 친구잖아?" 했다.
비천한 신분에 뿌리를 둔 동질감으로 둘은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말까지 나누는 사이로 친해졌다.
용바우의 죽음으로 늦어져진 진하 결혼식을 상복을 입었지만 한 집에 같이 있는 처지에 남들이 보드라도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옳다며 엄마 갓난이가 서둘러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만 불러 3월 13일 간소하게 치렀다.
간소하다 해도 부잣집 잔치라 음식은 마을 사람들이 삼일은 먹을 수 있을 만큼 풍성하였다.
양력 3월 13일 아침부터 내리던 이슬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라도 하듯이 오후 들면서 멈추고 햇빛이 났다.
천막을 치고 예식을 하려고 준비하다가 햇빛이 나서 모두 치우고 습기가 있는 마당에 사람들의 신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멍석을 깔고, 식장을 꾸며 먼저 결혼 한 진동호가 홀기(笏記:전통혼례의 사회)를 맡아서 예식을 올렸다.
진하는 순달이와 같이 중국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결혼식 전에 출국 허가를 받으려 경찰서에 들은 길에 후지끼 안부를 물었더니 상하이에서 봉천(심양)으로 옮겼다고 알려주었다.
가족들에게는 순달이와 신혼여행이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를 도와주었던 후지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후지끼는 봉천(심양)에서 동북지역에 활동하는 조선인 독립군과 공산당을 좇는 보안책임을 맡은 경찰고위 간부였다.
후지끼는 도시오의 죽음에 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하며, 진하 결혼을 축하하여 봉천에 머물 동안 일본 사람들이 지은 고급호텔인 동북반점에서 묵도록 주선해 주는 등 진하의 방문을 무척 반가워 해주었다.
진하는 순달이와 같이 인력거를 타고 심양에 있는 고궁과 북릉공원, 중산공원 등을 돌아보며 평생 이렇게 행복하기를 마음으로 빌었다.
흐트러짐이 없이 영리하고 교양이 있게 처세하는 순달이를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결혼한 것이 자랑스러웠다.
심양에서 사흘 째 되는 날 저녁에 후지끼가 그동안 바빠서 대접이 소홀했다며 진하 내외를 초대 하였다.
꽤나 잘 지은 러시아풍의 집 대문 안 쪽에 지은 별관에 거처하는 젊은 사람들은 집안일을 돕는 사람이라고 하나 직감으로 후지끼의 비서 겸 경호를 맡은 사람들 같았다.
집에서 일을 돕는 여자들이 서너 명이 있는데 음식은 요리 집에서 시켜와 평생 구경도 못해 본 진수성찬에 진하 내외는 감동했다.
저녁을 먹은 후 후지끼 부인이 순달이를 데리고 활동사진을 구경하러 나가고 진하와 후지끼는 2층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지끼에게 진하는 국제공산당과 싸우는 경찰이 되어 아버지를 죽인 김단야를 잡고 싶다며 자기 심경을 이야기 하였다.
진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지끼는, 일본 정보 경찰이란 사람 죽이기를 파리 잡듯이 해야 하며, 가족을 두고 온 세상을 돌아다녀야 하는 만큼 가정을 가진 진하가 경찰이 되는 것은 말리고 싶다고 하였다.
진하는 후지끼의 그런 마음이 고마웠다.
그러나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스코바로 가서 김단야를 잡아야겠다며 도와 달라고 하였다.
후지끼는 여러 말로 진하를 말리며 자네가 하지 않아도 일본경찰이 반듯이 복수를 해 줄 것이니 집에 가 있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지끼의 말 속에는 어느 선에서 진하로 하여금 경찰이 되도록 충동질을 하고 있었다.
눈치를 체지 못한 진하는 경찰이 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후지끼는 말을 돌려 김단야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김단야의 본명은 김태연으로 경상도 김천 출생이다.
배제고보에 다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 내려가서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검거 되었다가 출감한 후에 상하이로 가서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로 활동했다.
김단야는 박헌영(부인 : 주세죽), 임원근(부인 : 허정숙)과 함께 화요파의 삼총사로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고향에 본처가 있으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여자들과 무절제한 관계를 하다가 고명자에게 걸려 결혼식을 올렸다.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은 여성해방운동을 주도하며 시대적 격변기에 공산주의 유물사관으로 성까지 개방적이었다.
김단야는 상하이에서 혁명동지이자 친구인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과 밀애를 하다가 1933년 박헌영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것을 보고 고명자 몰래 주세죽을 데리고 러시아로 가서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비록 비열하지만 조직력과 리더십에는 탁월한 인물이다.
좀더 앞으로 가서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에서 유력한 청년 단체인「신만청년회」 회원들이 회식을 하다가 우연히 일본경찰을 폭행하였다.
화가 난 일본 경찰은 고의적으로 「신만청년회」 회관과 회원들의 집을 수색하다가 뜻밖에도 김경서의 집에서 박헌영이 상하이로 보내는 비밀문서인 「고려공산당 청년회 중앙집행위원」명의의 통신문을 나왔다.
단순한 폭행사건이 이 문서로 말미암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변하면서 상하이로 망명한 김단야가 고려공산당청년회 상하이 임시 특별 연락부 책임자가 되어 서울에 있는 「공청 후계 중앙간부」와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공산청년회」, 만주에 있는 「공청 만부 비서부」세 곳을 진두지휘를 하게 되었다.
1926년에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단야는 고려공산청년회를 동원해서 조직적으로 지원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된 인물이다.(필자주: 6.10 만세 사건은 연희전문 이병립 박하균 YMCA 박종두가 일으켰으나 좌파 사람들은 김단야가 일으켰다고 선전하고 있다.)
6.10 만세 사건 후 김단야는 모스크바로 가서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과 상하이에서 활동을 하다가 1934년부터 러시아에서 동방노력자 공산대학 조선인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소련에서 그의 활동은 처음에는 괄목 할만 했으나 계속 되는 문란한 사생활로 비판을 받는데다 서울과 상하이에 있는 그의 조직들이 해체되면서 코민테른(저자 주 : 코민테른은, 제3 국제당 혹은 제3인터내셔널로 블라디미르 레닌이 발기하여 1919년 3월에 창설되어 1943년 5월 15일 해체된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의 국제적 조직체이다.)의 신뢰도가 흔들리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심양에 있는 후지끼에게 일본 내 공산당 활동과 만주에 있는 중국 공산당 정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중국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오청을 하였다.
후지끼는 긴 이야기를 마치며 이 김단야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조선에서 활동하는 잔당들을 상당히 쓸어낼 수 있고 상하이에 있는 조직들의 정보도 알아낼 수 있으니 진하가 모스크바로 가서 김단야를 데리고 나오는 일을 한번 해 보라고 제안하였다.
정보세계에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진하는 후지끼의 제안이 반가웠다.
데리고 나오거나 죽이는 것은 차후 문제다.
일단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부터 하였다.
"서울 경시청에 이야기해서 자네를 경찰로 채용하도록 해겠으니 내가 주는 소개장을 가지고 서울 경시청으로 가라"고 말하는 후지끼의 입가로 지나가는 묘한 미소를 진하가 보고 말았다.
진하는 순간 전신에 아찔한 전율이 흘렀다.
진하는 순진하기만 한 젊은이가 아니다.
아홉 살에 성 참봉에게 능욕을 당하는 엄마를 보았고, 아버지가 참봉 뒤통수를 친 통쾌한 복수를 보았다.
그러므로 진하는 본능적으로 의심이 가면 경계를 한다.
후지끼를 아버지의 은인으로 믿고 찾아왔으나 진하를 도시오의 아들이 아니라 정보활동에 희생 시키는 부속물로 삼으려 한다는 의심이 생기자 본능적으로 경계를 시작했다.
진하는 그의 입가로 지나간 미묘한 미소에서 역시 후지끼는 일본인이고 좋으나 싫으나 저들에게 이용물에 불과한 조선인이란 사실을 인식하였다.
아버지를 잃으면서 내 가족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이든 공산주의든 모두 적으로 간주하기로 한 진하다.
참봉 댁에서 같이 종으로 살았던 순달이에게 남다른 동질성을 느꼈기에 사랑하는 누이처럼 지난날의 연민을 느끼며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도시오 아니 용바우도 순달이가 불행해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진하를 불러 결혼을 종용해 올 만큼 자기와 동질성을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후지끼를 아버지의 옛 은인으로 믿고 찾아왔는데 진하를 생각해 주는척하면서 첩보의 희생물로 조직에 끌어넣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후지끼를 이용하자.
병법서를 읽으시던 아버지가 대학을 다니는 진하에게 일본인도 아니고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도 실용가치가 없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모두를 주의해야 한다고 일러주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호텔로 오면서 아내 순달이를 쳐다보니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 순달이가 아팠던 모든 세월을 내가 갚아주어야 하며 순달이를 위해서라도 쉽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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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갈수록 재미있어집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비참했던 이 땅의 역사를 읽는 듯합니다. 진하의 갈등, 특히 후지끼의 미묘한 미소를 읽은 진하의 다음 행동이 기대됩니다.
긴 글에 머물러 주신 흔적 감사합니다. 주인장 수고가 많습니다. 성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