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면이 바다에 닿아 있고,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으며, 호수들이 바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 해남 땅. 그야말로 물 천지다. 그래서 海南이라고 했던가. 조선시대 유배자의 35%가 전라도로 왔고, 이 중 50%가 해남군에 유배되었던 곳, 이 먼 곳에 우리들은 남해고속도로→순천→벌교→강진을 거쳐 5시간만에 왔다. 박정택 님의 그랜저 승용차에 이재근, 이인식, 방재곤 님이 타고, 윤재희 님의 산타모 차에는 박홍권, 주영민, 허금화, 김정숙 님이 타고. 여름 해는 길어 7시가 지났는데도 아직 날은 밝다. 불경기라서 그런지,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많은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 때문인지 시설지구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적막감마저 감돈다. 예약한 영빈장에 배낭을 내려놓고, 숙소 주인이 소개해 준 식당으로 갔으나 구미 당기게 하는 먹거리가 없다. 주 대장이 삼겹살 하는 식당을 찾아내는데 성공. 큰 식당 틈 사이에 있는 조그만 곳 할매식당. 우리들 9명은 시장기가 강하고 할매는 혼자서 어쩔 줄 모르고. 윤재희, 주영민 님이 주방일을 거들어 빠른 시간에 삼겹살을 구워 소주 마시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내일은 8시간 산행이니 5시반에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동양화 공부도 12시에 끝내야만 했다.
7월 12일 일요일 새벽 6시, 다시 할매식당으로 가서 아침밥을 먹고, 빈 도시락에 밥을 채우고, 영양식 계란 후라이도 한 개씩 밥 위에 얹었다. 할머니의 따뜻한 배려로 반찬도 먹을 만큼 담았다. 케이블카 공사장 인부들의 밥을 해준다고 하더니 손맛도 있고, 인심도 후하다.
두륜산(頭崙山)은 한반도의 남쪽 끄트머리인 해남 땅에 솟아오른 명산이다. 옛 사람들은 머나먼 중국 곤륜산(崑崙山)에서 동북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백두산에 이르고, 다시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와 해남 땅에서 긴 여정을 마쳤다고 하여 백두산의 '두(頭)'와 곤륜산의 '륜(崙)을 합쳐 '두륜(頭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륜(崙)자가 '바퀴 륜(輪)'자로 바뀐 것은 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두륜산 연봉들이 바퀴처럼 둥글게 휘돌아 있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3년부터 옛 이름을 되찾아 頭輪山은 頭崙山으로, 大興寺는 大芚寺로 고쳤다. --*崑:산이름 곤, 崙:산이름 륜, 芚:둥구미 둔, 둥구미:짚으로 둥글고 울이 깊게 결어서 곡식 따위를 담는 그릇-- 두륜산은 높이가 703m에 불과하나 바다 가까이 자리잡아 그 기세는 아주 웅장하고, 산봉우리의 생김새 또한 중후하며, 봄의 춘백,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동백으로 사계절의 변화가 절승을 이루는 산이다. 두륜산의 깊고 깊은 골짜기엔 천혜의 복지가 있으니 대둔사 터가 바로 그곳이다. 서산대사는 묘향산에서 열반에 들기 전에 당신의 유품을 대둔사로 보내며 이런 말을 남겼다. "두륜산은 기이한 꽃들이 철따라 아름답게 피어나며 먹을 것이 풍족하다. 내가 보기에 두륜산은 오래오래 좋은 일이 많을 것이다. 북쪽에는 월출산이 있어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되었고, 남쪽의 달마산은 튼튼한 지축이다. 동쪽의 천관산과 서쪽의 선은산이 또 우뚝 마주 솟았다. 바다와 산들이 호위하고, 골짜기가 그윽하니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을 땅이다.종통(宗統)이 거기로 돌아가리라." 서산대사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두륜산은 전쟁의 참화도 겪지 않았다. 임진란도, 6·25도 이곳을 비켜갔다. 또, 서산대사의 유품을 모신 뒤, 대둔사는 조선조 후기 쇠잔해진 불교를 중흥시킨 명찰이 되었다. 13대 종사(宗師), 13대 강사(講師)로 불리는 고승대덕들이 여기 머물며 많은 제자를 길렀다.
7시 출발. 실비가 내린다. 대둔사를 살펴보고 일지암(一枝庵)으로 올라갔다. 한 젊은이가 방문을 열고 나와 우리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 없이 도로 들어간다. 일지암은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草衣禪師) 장의순(張意恂)이 40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다는 곳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인《東茶頌》을 짓고, 이곳에서 차모임을 가졌다해서 우리나라 차의 성지가 되어 다인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초의선사는 이웃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다산 정약용과 또,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추사 김정희와 이곳 일지암을 중심으로 차를 함께 마시며 학문과 사상에 관한 폭넓은 대화를 나눔으로써 이 나라 불교와 유학과 실학의 교류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 대둔사에 드나들며 초의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소치 허련(허유)은 일지암에 있을 때 초의선사의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다. 소나무 숲이 깊고 대나무 무성한 곳에 몇 칸의 초실을 얽었다. 늘어진 버들이 처마에 닿아 있고 풀꽃이 섬돌에 가득 차서 그늘이 뒤엉켜 있었다. 뜨락 가운데는 아래위로 못을 파고 처마 아래에는 크고 작은 물통을 놓아두었는데 대쪽을 연결해서 멀리서 구름 비친 샘물을 끌어온다. '눈에 걸리는 꽃가지를 잘라 내니 멋있는 산봉우리가 석양 하늘에 더 잘 보이네' 이런 시구가 매우 많은데 시가 맑고 고상하며 담박하고 우아하니 속된 기운이 없다. 눈 내리는 새벽이나 달이 뜬 밤마다 시를 읊으며 흥을 견디곤 했다. 향기가 일어나고 차가 한창 끓으면 흥이 내키는 대로 거닌다."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며 우리들은 계속 오른다. 윤재희 부부는 등산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두륜봉을 거쳐 바로 내려간다고 한다. 9시 5분에 정상 가련봉(703m)에 도착. 일기가 불순하니 시계도 좋지 않다.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는데. 잠시 머무른 뒤 만일재로 되돌아 와서 두륜봉(630m)으로 간다.
남도에 가면 '자랑하지 말라'는 것 다섯 가지가 있다. 여수에 가면 돈자랑 하지말고, 순천에 가면 인물자랑 하지말고, 벌교에서는 주먹자랑 하지말고, 목포에서는 노래자랑 하지말고, 강진에 가면 양반자랑 하지말라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추가하면 안될까? 두륜산에 가서 옷자랑 하지말라고. 허금화 님이 이번 산행을 위해 며칠 전 새로 구입한 고어텍스를 입고 뽑냈으니(?). 미끄러지거나 나뭇가지에 걸려 몸에 상처 나는 것은 괜찮은데 옷이 찢어질까봐 무척 염려했다.(이날 기록자도 새 옷 고어텍스를 입었으나 허 선생님 때문에 빛을 내지 못해 섭섭)
구름다리가 있는 곳 근처의 두륜봉에 다녀온 일행은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서 있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했다. 이제는 마지막 봉우리인 위봉을 거쳐 쇠노재로 하산한다. 오랫동안 비가 온 탓에 잔뜩 물먹은 바위가 상당히 미끄럽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하고. 우리들은 협의한 끝에 안전을 생각하여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잠시 보고 가라는 뜻인지 운무에 잠겨 있던 위봉이 거대한 모습으로 위용을 드러내고 이내 구름 속에 사라져 버렸다. 되돌아 와서 내려오는데 비는 멎고 날씨도 좋아진다. 위봉으로 가지 못했음이 못내 아쉬웠다. 다시 할매식당에 와서 매운탕을 시켜 도시락을 까먹고, 해남 읍내로 가서 한일탕에서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 심신이 깨끗하다. 시장통에서 세발 낙지를 찾았으나 허탕. 주 대장이 전날 밤 장원한 기념으로 팥빙수를 사주시고. 부산으로 오는 길, 순천만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별량면에 있는 '해돋이 가든'에서 대하를 먹으려고 했으나 또 허탕. 추석이 지나야 나온단다. 대신 '서대회무침'을 먹고 저녁식사를 했다.
순천은 박정택 님의 고향, 순천만 자랑이 대단하다. 왼쪽으로는 여수반도, 오른쪽으로는 고흥반도에 둘러싸인 호수와 같은 만으로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고, 그림쟁이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주변의 낮은 구릉지와 갈대 숲, 조용한 농촌 마을과 농경지, 바깥 바다 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섬 섬 섬. 명산 산행도 하고 이렇게 좋은 곳을 드라이버까지 하니 나는 너무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상터미널에 도착하니 밤 9시 40분. 이인식 님이 기사 두 분의 수고가 너무 많아 위로하고 싶다고 하여 국밥집에 들려 수육을 먹으면서 이번 산행을 끝맺음했다. 다녀온 거리 왕복 450㎞. '박정택, 윤재희 두 분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