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연구논문
한국 장로교의 초기 선교정책(1884∼1903)
-19세기 "토착교회론"의 한국 수용 배경과 발전에 대한 재검토-
옥성득(보스톤대 교회사 박사과정)
I. 머리말
19세기 말에는 앵글로 색슨계를 중심으로 두 가지 새로운 근대 선교 이론이 제국주의와 함께 전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다. 피어슨(A. T. Pierson)과 학생자원운동(SVM)으로 대변되는 신속한 "세계복음화론"과 데니스(James S. Dennis)로 대변되는 점진적 사회 개혁과 복음화를 동시에 추구한 "기독교 문명론"이 그것들이다.
1880년대에 시작된 한국 장로교 선교는 이 두 이론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19세기 중반을 지배했던 벤-앤더슨(Venn-Anderson) 노선의 "토착교회론"을 공식적인 선교정책으로 채택했다. 곧 한국 장로교회는 중국 산동의 네비어스(John L. Nevius)와 만주의 로스(John Ross)가 선교 현장에서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토착교회론"을 수용하여 한국 상황에 맞게 변용시켜 나감으로써, 타선교지와는 다른 선교 역사가 전개되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위의 세 이론 가운데 "토착교회론"의 역사적 배경과 한국 선교 초기 20년간의 토착화 양상을 검토하는 것이다. 벤-앤더슨의 "삼자원리"에 입각한 "토착교회 설립론"과, 한국 개신교 선교를 처음 시도한 귀츨라프와 토마스 만주 선교의 선구자 번즈의 토착선교론을 먼저 살펴본 뒤, 19세기 후반 중국에서 이들을 구체적인 선교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산동의 네비어스와 만주의 로스의 선교정책을 비교하고, 이들을 수용하여 변형시킨 초기 장로교 선교정책의 특징들을 분석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이 분야에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지만, 네비어스와 로스의 선교방법론의 형성과 발전 과정, 그 구체적 내용,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한국에서 변형, 토착화된 네비어스 방법의 내용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정리되지 않았거나 잘못 이해되는 점들이 있으므로, 이 글을 통해 기존 연구를 보완하려고 한다.
II. 19세기 토착교회 설립론
1. 19세기 중반의 토착교회 설립론
중국 선교가 본격화된 19세기 중반의 해외 선교는 영국 교회선교회의 총무 벤(Henry Venn)과 미국공리회 해외선교부 총무 앤더슨(Rufus Anderson)의 이른바 "삼자이론"(three-self theory)이 지배하고 있었다. 곧 선교지의 신생 교회들이 해외 선교부로부터 독립하여 자립·자치·자전하는(self-supporting, self-governing, self-propagating) 토착교회로 성장하는 것을 선교의 최종 단계로 설정하고, 토착인 목회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친 네비어스나 로스는 새로운 선교방법을 창안한 이론가라기보다는, 벤-앤더슨 노선의 원리를 중국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만든 실천 이론가들이었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의 대표적 선교정책으로 지목되어 온 "네비어스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벤과 앤더슨의 토착교회 설립론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벤(Henry Venn, 1796∼1873)
헨리 벤은 이른바 "삼자이론"으로 불리는 19세기 "토착교회론"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는 30여 년간(1841∼1872) 교회선교회(大英敎會 Church Missionary Society) 총무로 봉직하면서, 선교이론과 선교정책을 정립하고 세계 선교계를 이끌었던 선교 행정가요 지도자였다.
그의 가계는 영국 성공회 안에서 복음적인 그룹에 속해 있었는데, 부친은 1799년 교회선교회와 종교서회(Religious Tract Society), 1804년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등을 조직한 클래팜 파(Clapham Sect)의 일원이었다. 클래팜 전통은 개인적 경건과 사회 참여를 결합하여, 정치와 식민정책에까지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아프리카 사회의 재건과 종합적인 복지를 위해서 노력했다. 농업과 상업, 교육제도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노예 무역을 근절시키는 데 헌신하였다. 한편 그는 인도에서 선교사 더프(Alexander Duff, 1806∼1878)와 더불어 교육제도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더프와 달리 그는 소수 엘리트 대상의 영어 교육에 반대하고 토착어를 수단으로 한 보통 교육을 주장했다.
복음주의 3세대인 그는 18세기 조지 휘필드와 웨슬리 형제의 대각성 운동에서 비롯된 복음주의와 영국 국교회의 성직제도적인 고교회(high church)론을 조화시키려고 한 온건론자였다. 그는 선교지에서 개인의 회심과 함께 교회의 조직을 함께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단계는, 개종자-회중(토착인 교사)-교구(토착인 사제)-관구를 거쳐 토착인 주교를 정점으로 하는 감독제도의 완성에 있었다.
그는 선교사가 세우고 선교사가 인도하는 교회의 약점을 발견하고, 토착교회를 위한 삼자원리를 이론화했다. 삼자 가운데 최종 단계로서의 자전을 중시하고, 토착인 목회자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 번역도 중시했다. 그러나 선교지의 토착교회는 세계 교회와 연결되는 개방성과 보편성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영국교회가 임시로 존재해야 한다고 보고, 제국주의와 비교적 무관한 토착교회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을 선두로 서구 열강은 식민지 경쟁에 들어갔고, 아프리카에서 영국은 영구적인 존재인 식민정부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1850, 60년대에 통하던 삼자이론은 1880, 90년대의 선교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2) 앤더슨(Rufus Anderson, 1796∼1880)
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삼자이론을 만든 미국측 선교 행정가는 앤더슨이다. 그는 44년간(1824∼1866) 미국공리회 해외선교부(美國公理會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총무로 미국의 해외선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54∼1855년의 인도·시리아 시찰 후 그의 권고로 여러 선교회들이 대규모 선교기지를 해체하는 대신 토착인 목회자가 담당하는 농촌 마을 교회를 설립하고, 고등교육을 위한 영어 학교를 폐쇄하는 대신 토착어를 쓰는 초등학교 교육에 주력하게 된 사건은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앤더슨은 선교의 동기를 "그리스도에의 순종", 곧 "선교 지상 명령"에 두었으며, 선교의 최종 단계는 독립하여 자전하는 토착교회의 설립에 두었다. 그러나 벤과 달리 교회의 제도적 구조보다는 독립적인 "지역 교회"를 강조하고, 서구의 교회 제도를 선교지에 이식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가 "선교 지상 명령"이 교회 탄생 이전에 주어졌으므로 교회가 아닌 개별 신자에게 주어진 것으로 본 것이나, 성령의 인도에 따른 개별 신자의 결정과 토착교회의 자유를 강조한 것도 그의 회중교회론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앤더슨은 반서구문명화론자였다. 그는 19세기 초의 인디언 선교와 하와이 선교의 실패로부터 배운 교훈, 즉 먼저 토착인을 서구 문명으로 동화시킨 뒤 복음화하려고 했던 잘못을 반성하고, "문화 대신 그리스도"만을 전해야 한다는 새 이론을 주장했다. "사회 발전은 선교의 불가피한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지론을 고수한 그는, 비록 미국의 "뉴잉글랜드 문명이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상 최상 최고이지만" 선교지에서는 "가공할 만한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곧 더 효과적인 문명화의 수단은 오직 복음뿐이라는 역설을 주장했다.
따라서 선교사는 토착교회가 설립되는 대로 빨리 그 지역을 떠나 "끊임없는 정복"을 위해 다른 선교지로 가야만 하는 복음의 대사다. 선교사는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자로 만족하고 떠나야만 한다. 물을 주고 가꾸는 자는 토착인이요, 궁극적으로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앤더슨은 선교사의 임무 가운데 설교를 가장 중시하였고, 선교의 대상도 중하층에 초점을 두었으며, 많은 시간이 필요한 성경번역보다는 토착어로 된 소책자 문서 출판을 강조하였다.
앤더슨의 선교 프로그램은 두 가지 확신 위에 서 있었다. 첫째는 기독교와 기독교 문명의 승리에 대한 종말론적 확신이었다. 그는 후천년설적 소망에 입각하여 선교를 통해 사탄이 지배하는 이방 민족을 복음으로 정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고 했다. 두번째 좀더 확고한 신념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신뢰였다. 서구 문명과 종교 양식의 이식에 반대하고 토착교회를 지지한 밑바탕에는, 일단 복음이 전파되고 나면 토착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경적인 교회로 성장하고 그 결과 기독교 문화가 열매 맺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앤더슨은 "기독교 문명화론"이 야기할 선교 "온정주의"(pateralism)와 "문화 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의 해독을 내다보고 순수한 복음 선교를 위한 토착교회 설립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점증해 가는 제국주의 상황에서 토착교회와 토착문화를 강조한 것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앤더슨의 약점은 문명화와 복음화를 이원화하고 선교 개념을 너무 단순화한 교회 모델에 있었다. 벤과 달리 앤더슨에게는 복음이 가지는 사회 봉사나 사회경제적 정의의 차원이 약했다. 또한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믿었기 때문에 토착교회의 철저한 현지화의 필요성을 보지 못했다. 앤더슨 선교신학의 약점은 후술할 네비어스의 약점이기도 하다.
앤더슨의 선교신학의 영향은 비버가 지적하듯이 다음 세대에 계속되었다. 한국 선교에도 큰 영향을 미친, 그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스피어를 비롯해, 학생자원운동과 네비어스 등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3) 귀츨라프와 번즈의 토착화 선교론
19세기 중반 중국에서 활약한 귀츨라프와 번즈는 한국 선교와 연관을 갖는 인물이다. 이들의 토착선교론은 한국에 직접 영향을 준 네비어스와 로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귀츨라프(Karl F. A. G tzlaff ; 郭實獵, 1803∼1851)
귀츨라프는 중국 기독교 토착화론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는 유태계 폴란드인으로 독일 경건주의와 선교운동의 본산인 할레 대학을 졸업한 뒤 1826년 화란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동남아시아에 파송되었다. 성공적인 사이암 선교 후, 모리슨의 영향으로 선교가 법적으로 금지된 중국 선교에 뜻을 품고 1828년 화란선교회와 손을 끊고 독립 선교사로서 중국 선교 여행에 나섰다. 1834년부터 마카오에 거주하면서 "내 평생에 중국을 복음화하자"라는 야심찬 목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구와 중국의 문화 차이가 너무 크므로 외국인의 전도는 효과가 없다고 보고, 약간의 신학 지식으로 훈련된 중국인 신자에 의한 대중 전도를 추진했다. 선교사의 역할은 중국인 전도자들을 지도 감독하는 자여야 하며, 중국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중국 문화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좁은 지역에 대한 집중 선교보다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다수 개인을 회심시키는 방법을 옹호했다. 서구식 교파 교회의 설립이나 학교 교육은 그의 관심이 아니었다. 성령이 회심의 궁극적 원천임을 신뢰하면서 성경 말씀의 능력을 믿고 나아갔다.
이 방법론이 구체화된 것이 1844년 조직된 복한회(福漢會, The Chinese Union)이다. 신속한 내륙 전도를 위해서 18개 지방에 중국인 전도인과 권서를 파송하고, 귀츨라프 본인이 번역한 성경과 여러 소책자를 반포하도록 했다. 1846년부터 매년 약 600여 명이 세례를 받는 등 폭발적인 성과를 보이자, 1849년 9월 귀츨라프는 복한회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유럽 여행을 나섰다. 그는 영국과 독일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바젤선교회와 레니쉬선교회는 지원 선교사 4명을 중국으로 보냈다. 한편 영국에서는 중국복음화협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가 조직되고, 1853년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1832∼1905)를 첫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했다.
그러나 런던선교회의 레그(James Legge ; 理雅各, 1815∼1897)는 귀츨라프의 토착인에 의한 열광적인 선교방법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중국인 전도자들을 조사한 뒤, 그들의 신앙 지식과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귀츨라프의 수세 조건이 너무 허술하며, 많은 중국인 전도자들은 교리 지식이 엉성하고, 아편을 피우며, 홍콩을 떠나지도 않고 내륙 여행을 한 것처럼 거짓 보고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유럽에 도착한 이 보고서는 귀츨라프의 변호와 항변에도 불구하고 모금 여행에 치명상을 입혔다. 1850년 11월 유럽을 떠나서 홍콩에 온 그는 조사에 착수하면서 적극적인 전도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복한회는 다른 선교사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병 중에서 이루어진 유럽 여행과 과로, 복한회로 인한 갈등이 겹쳐 귀츨라프는 1851년 8월 9일에 사망했다. 아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없는 복한회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중국 복음화 열망은 헛되지 않아 뒷날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를 통해 열매 맺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한국교회사에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한 개신교 선교사로 등장한다. 그는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요청으로 무역 탐사 여행에 참가하여 서해안 일대와 백령도를 거쳐, 충청도의 고대도와 홍주 일대에 약 한 달간 머물면서 성경과 전도문서를 반포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 사건은 "바닷가를 스쳐 지나갔을 뿐"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귀츨라프가 일기에 썼듯이 소멸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한반도 땅에 뿌려졌으며, "주님께서 작정해서 짚어 주신 날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힐 것"으로 보는 관점이 그의 선교방법론과 연관하여 더 바람직할 것이다. 비록 서구 식민 자본주의를 위한 탐사 여행에 동행했지만,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그의 선교신학이 한국 방문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사에서는 귀츨라프가 전하려고 했던 교회 유형을 미국 개신교의 교파형 교회와는 다른 "서구형 프로테스탄트 교회," 곧 정치와 교회의 유기적 연결, 공동체 신학, 강한 교회론 등을 특징으로 하는 서구적 교회라고 서술해 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귀츨라프는 이른바 서구식 국가교회나 교파형 교회를 이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교단 소속 선교사인 레그 등과 달리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계열의 독립 선교사(independent missionary)로서 수세 조건이나 전도인의 요구 조건이 까다롭지 않았다.
근대 개신교 선교의 세 가지 유형은 ① 교단의 지원을 받아 교단 교회를 설립하는 교회 선교(church mission), ② 중국내지회처럼 초교파적이며 선교자금 모금을 특징으로 한 선교회 선교(society mission), ③ 귀츨라프가 그 첫 모델이며 슈바이처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개인이 자신의 선교방법과 선교지를 선택하는 자유 선교(free mission) 등이다. 귀츨라프는 18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마카오와 홍콩에서 영국 대사관의 중국어 통역 겸 서기(영국 무역 상무관)로 일하면서 주말과 여가 시간을 이용해 선교한 자비량 선교의 선구자였다.
이 유형은 한국을 방문, 선교하고 '순교'한 토마스(Robert G. Thomas, 1840∼1866)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토마스 연구의 권위자인 민경배 교수는 그의 역작 논문 "로버트 토마스 : 한국 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교섭의 문제"에서, "토마스는 한국에 소개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간주되는 소위 서구적 교회형의 신학을 전래시킬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서론에서 밝히고 그의 교회론이 귀츨라프와 동일한 "서구형 교회론"으로 미국적인 "교파교회론"과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의 결론에서 밝히는 토마스 목사의 선교신학은 앞에서 살펴본 귀츨라프의 "자유 선교" 유형과 흡사하다. 곧 "토착인과의 계속적 접촉, 고정(固定)교회 밖으로의 외연(外延), 그리고 세속직에서도 선교사로 형태를 지속한다는 생각"이 그의 선교신학이었다.
여기 L. M. S.와 토마스와의 선교 이론의 차이가 있었다. 조직과 기구의 범위 안에서의 선교, 그것 이상 L. M. S.는 할 수 없다고 보았고, 그 의무가 지상의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토마스는 사람 있는 곳에 곧 선교 있다는 광활한 생활선교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런던칼리지 재학 때부터 정규 학업보다는"설교의 능력"에 더 관심했다는 사실, 중국 선교사로 지원한 동기 유발이 대학 도서관에서 읽은 귀츨라프의 중국 선교 이야기였을 것이라는 추측, 1863년 런던선교회의 선교사 지원 면접에서 그가 밝힌 바대로 "소박한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선교론이었다는 사실, 상해에 도착한 후 선배 선교사 뮈어헤드(W. Muirhead)와의 갈등에서 드러난 그의 선교론이 도시보다는 농촌, 외국인보다는 토착인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우선하는 것(이는 앞에서 언급한 귀츨라프와 레그의 갈등을 다시 보는 듯하다), 그가 런던선교회를 떠나 산동의 지부 소재 영국세관의 통역 연수관으로 취직하여 자비량으로 하는 "자유 선교"로 방향을 돌린 것, 그리고 다음 항에서 살펴볼 윌리암슨과 번즈의 관계처럼,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과 손을 잡고 한국 선교 여행에 나선 점 등은 모두 그의 "기동 선교론"적인 "자유 선교" 유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귀츨라프와 토마스는 다음 항에서 살펴볼 잉글랜드장로교선교회의 번즈와 더블어 교회 기구나 조직보다는 개인 영혼 구원에 초점을 둔 선교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 번즈(William Chalmers Burns, 1815∼1868)
만주 선교의 개척자 번즈는 로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지만, 그동안 알려진 바가 적으므로 생애와 더불어 그의 선교관에 대한 소개가 필요할 줄 안다. 그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인 킬사이드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전통적인 경건의 훈련을 받으며 자랐다. 글래스고우대학교에서 학생선교회(Student Missionary Society)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영웅적인 선교사들의 글을 읽으며 선교 정신을 길렀다. 1839년 대학을 졸업할 때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저명한 선교사 더프가 일하던 인도에 가기로 지원하였다.
그의 신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학으로, 공포에 찬 시내산의 천둥소리와 복음의 세미한 목소리가 동등하게 공존했다. 천국과 지옥, 율법과 복음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 있었다. 영원은 실제였다." 선교사로 준비하면서 인도한 킬사이드 교회의 집회는 부흥의 불길에 휩싸였다. 웨슬리나 휘필드에 못지 않는 강력한 그의 대중 설교는 수많은 영혼들을 죄로부터 돌이켜서 그리스도에게 굴복시키고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힘을 체험케 했다. 스코틀랜드교회사에서 기억되는 "1839년 대부흥"을 일으킨 번즈는 이어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아일랜드 각지를 돌면서 7년간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가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수없이 많은 설교를 인도할 수 있었던 체력과 자기 희생과 인내는 대단했다. 그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전도한 "거리 전도에 능한 첫 사람"이었다. 캐나다의 2년 사역도 부흥이 뒤따랐다.
1843년 스코틀랜드장로교회는 대분열을 겪었다. 번즈는 국가교회로부터 분리해 나온 자유교회에 속했다. 캐나다에서 돌아온 번즈는 신자들의 마음이 회심이 아니라 교회 문제에 몰두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도 선교사로 다시 지원했다. 스코틀랜드자유교회가 번즈의 인도행을 고려하고 있을 때, 자매교회인 잉글랜드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가 첫 중국 선교사로 보낼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번즈가 적임자로 추천되었고, 1847년 4월 22일 중국선교사로 안수받았다.
1847년 12월 31세의 번즈는 홍콩에 도착했다. 1년간 중국어 공부에 매진한 결과 어느 정도 설교가 가능해지자 감옥 전도부터 나섰다. "손으로 할 수 있는 무슨 일을 보거든 힘써서 그 일을 하라"는 자신의 모토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는 곧 선교사 구역을 떠나 중국인 구역으로 옮겨갔다. "자신을 중국인의 형제요 친구로 동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본국에서처럼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거리에 나서서 설교하였다. 번즈는 영국장로교선교회의 첫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선교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허락받았다. 그래서 동료 의료선교사 영을 따라 1851년 외국인의 발길이 적게 미친 하문(Amoy)에 첫 선교지부를 정하고 주변 내륙 지방 선교에 나섰다.
1854년 안식년 휴가로 스코틀랜드에 갔을 때 부흥회를 인도하여 수백 명을 회심시켰다. 그러나 7년 동안의 중국 선교 동안 단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동료 의사 영이 4명에게 세례를 주고 첫 중국인 교회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중국행을 앞당겼다.
1855년 8월 상해에 도착한 번즈는 그곳에서 순회 전도에 나섰다. 1855년 12월부터 6개월간은 젊은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선교 여행에 나서 내륙을 전도하고 스와토우(Swatow) 항을 개척했다. 이때 번즈는 테일러에게서 중국식 옷입기를 배웠고, 테일러는 번즈와의 행복한 교제를 통해 영적 감화와 폭넓은 정신을 배웠다. 번즈는 복주(Foochow)에서도 1년간 선교한 후, 박해가 일어난 하문으로 돌아가 동료들을 도왔다. 이 때 번즈는 선교사들의 설교가 너무 기독론 중심의 "복음적"인 것을 지적하고, 중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신론에서 출발할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중국 북쪽 내륙지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번즈는 마침내 1863년 10월, 천진조약(1858)으로 거주가 허용된 북경에 가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약 4년간 전도하면서 번역에도 힘을 기울여 찬송가와《천로역정》(天路歷程)을 완성하고, 시편과 소책자〈정도계몽〉(正道啓蒙)을 번역·출판하였다. 번역 원칙은 실제 전도를 위한 자유 의역이었다. 그러나 번즈는 북경과 같이 선교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곳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늘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그는 하문에서처럼 씨만 뿌리고 세례와 교회 조직의 열매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사람이었다.
11866년부터 스코틀랜드 후배 선교사인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1829∼1890)과 함께 북부 지역 순회 전도에 나선 그는, 1867년 10월 천진을 거쳐 만주의 개항장 영구(營口, 牛莊)로 들어갔다. 이 첫 만주 선교는 그러나 6개월만에 마감되었다. 겨울 추위 속에 중국식으로 지내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868년 4월 4일 만주 선교의 미래를 확신하면서 53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계속하실 것이니, 아, 아무 걱정없도다." 그의 유언이었다. 그가 중국에 남긴 것은 거대한 기관이 아니라 거룩한 삶이었다. 봉황성(鳳凰城, Corean Gate)까지 가서 한국인을 만나고 영구로 돌아온 윌리암슨은 번즈가 씨뿌려 놓은 결실인 4명의 중국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처럼 번즈는 귀츨라프와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복음 전파를 선호한 복음주의 계열의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성경만 거의 읽고 전하는 사람이었으며, 가슴엔 불신자를 "회심"시키기 위한 자유로운 전도 여행으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그는 학교나 병원과 같은 선교 사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수세자를 돌보는 목회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비록 장로교인이었지만 한 교파에 매이지 않는 초교파적 정신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우리는, 번즈의 만주선교론과 토착교회론이 로스에게 영향을 준 것을 기억할 때, 추후 연구가 더 필요한 주제이지만, 귀츨라프-(토마스)-번즈-로스로 이어지는 토착교회 선교 방법론의 계열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귀츨라프와 번즈의 내륙 전도론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영감을 주어 1866년 중국내지회(China Inland Mission)를 창설하도록 만들었다. 내지회는 개항장을 떠나 내륙 전도를 실시하면서, 중국 최대 선교회로 성장하였다.
2. 19세기 말 중국에서 발전된 토착교회 설립론
한국 선교와 한국 교회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19세기 말 중국에서 발전된 토착교회론인 네비어스와 로스의 선교방법론을 살펴보자.
(1) 네비어스(John Livingston Nevius ; 倪維思, 1829∼1893)
그는 미북장로교 중국 선교사로서 영파와 산동을 중심으로 40년간 봉사했다. 1850년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하여, 1853년 졸업할 때는 중국 선교사로 헌신해 있었다. 이 때 프린스턴은 구학파가 지배했다. 그의 엄격한 주일성수론과 권징, 성경의 강조는 이 교육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구학파에 "결코 극단적인 헌신은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용어논쟁에서, "신"(神) 지지자인 맥카티(McCartee) 등이 유교 고전의 "상제"(上帝)를 만물의 창조주로 가르치는 것은 제1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마틴(W. A. P. Martin)을 비판할 때, 네비어스는 "상제"에 우상숭배적 요소가 없다는 레그와 마틴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의 중국 문화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토착교회론의 바탕이 되었다.
1) 초기의 선교정책(1860∼1879)
초기 네비어스의 선교방법과 신학을 보여주는 주요 자료는 초신자를 위한 신앙 안내서인《천로지남》(天路指南, 1857), 조상제사의 오류를 비판한《사선변류》(祀先辨謬, 1859·1864), 토착인 전도인들의 지침서인《선도지귀》(宣道指歸, 1862), 조직신학서인《신도총론》(神道總論, 1864), 그리고 초기 산동 선교 경험을 정리한 China and the Chinese(1869) 등이다.
가.《宣道指歸》
《선도지귀》는 중국 선교 8년만에 나온 네비어스의 초기 토착선교론의 결정판으로, "본토인 목사와 전도사가 따라야 할 원리와 실천에 관한 그의 가장 중요한 책"이다. 전체 7장 가운데 제5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도 바울의 선교 원리인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고전 9 : 19∼22) 성육신적 방법이 모범이다. 선교는 "의사소통의 법칙"이나 "약의 법칙"처럼, 듣는 자의 필요와 처지에 맞게, 실제적인 내용을, 듣는 자의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 일반 대중에게는 화려한 미사여구보다는 단순한 말로 전해야 한다. 따라서 대중 이해가 없는 전도는 암중모색에 그친다. 성육신적 설교와 가르침은 청중과 동고동락할 수 있는 마음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들에게 속해서 그들과 동화되어서는 안 되며, 분명한 진리와 도덕적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선도지귀》는 초기 한국교회 선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893년 9월 감리교 선교회 9차 연회는 "본처 전도사"를 위한 4년간의 신학 교육과정을 마련했는데, 2학년의 한 과목이 이《선도지귀》였고, 그 필독서의 한 권이 네비어스의《사선변류》(Errors of Ancestral Worship) 이었다. 네비어스의 이 두책은 당연히 1890년대 장로교회에서도 널리 읽힌 것으로 짐작된다.
나. China and the Chinese
비록 1880년대의 새로운 선교방법을 적용하기 이전이지만, 기본적인 그의 선교관을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의 사명은 구원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하는 것이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이나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방인을 문명화함으로써 기독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문명을 발전시키도록 하면서 기독교화하는 것이다." 앤더슨의 반문명화론이 재현되고 있다.
둘째, 교육 선교는 복음 전파를 위한 기관이어야 한다. 네비어스는 중국은 인도와 달리 선교학교가 "효과적이고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었으나, 벤과 앤더슨처럼 영어 기숙사 학교에는 반대했다. 영어를 배운 자들이 높은 봉급을 받고 통역관으로 취직되자, 취업을 위해 학교에 오는 자가 대부분이었고, 비록 소수가 교회 계통에 남아도 중국어가 서툴러 토착인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교인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어와 과학이 인간을 중생·성화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주입시켜 반기독교적인 정신을 배양시킨다고 보고, 고등교육에 의한 간접 선교에 반대했다.
셋째, 전도는 상류층보다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 민중층에 기독교가 침투하면, 그 결과 전통 종교와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넷째, 문서 전도는 중요하다. 입으로 직접 전도하는 것 못지 않게 소책자 전도가 중요하다. 특히 소책자는, 미국 저서를 그대로 번역하기보다는, 중국인의 사고와 종교 체계에 연결되도록 저술해야 한다. 한문 성경 반포만으로는 효과가 없으며 직접적인 전도와 병행해야 한다.
다섯째, 의료 선교는 궁극적인 선교사업인 복음 전파를 위한 예비와 보조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백성들의 편견을 제거하고 신뢰를 얻는 데 치료 사역만큼 더 나은 수단은 없다.
여섯째, 선교의 단계는 선교사에 의한 전도에 이어, 토착인 신자들을 "외국 선교사보다는 저들 자신과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제2단계가 있다. 이때 토착인 조사를 선발하여 교육하되, 그 자격 요건은 "선교 초기 단계에서는, 높은 문학적 신학적 자질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자질은 신실한 경건이다." 선교의 최종 단계는 "진정한 이교주의의 개종과 토착 기독교회의 설립"이다.
이상의 정책들은 고유한 네비어스 방법이라기보다는 당시 중국에 통용되던 정책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1893년 장로교공의회가 조직되면서 채택한 선교정책 10개 항에 반영되었다.
2) 1880년대의 "네비어스 방법"
그러나 네비어스의 20년(1860∼1879) 산동 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 "오랜 동안의 고통스런 경험"을 거친 후, 네비어스는 1880년 지부에서 300마일 떨어진 새 지방을 개척하면서 전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뉴욕 본부에 보낸 5월 4일자 편지에서 "나는 전도사업을 처음부터 독립적이고 자립적이 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시골 교인들은 대부분 예배 처소-보통 크고 좋은 방 한 개-를 스스로 마련합니다. 모든 곳에서 완전한 자립의 원칙에 따라 주변 지역으로 공격적인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1881년 1월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 전에 쓴 글에서는 새 방법의 특징을 ① 고용 체계(employment system)와 대비되는 자발 체계(voluntary system) ② 소수의 유급 조사 ③ 대중 설교가 아닌 개인 전도의 방법 ④ 토착인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 ⑤ 지방 교회 지도자가 인도하는 주일 예배 등 열 가지를 들고 있다.
1882년 9월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새 방법을 실험해 나갔다. 1884년 4월 28일자 편지에서는 "지난 순회 여행에서 90명에게 세례를 주고 4개의 새 전도처를 개척하여 모두 60개가 되었습니다. 채택한 방법에 대해서 나는 이것이 성경적인 방법, 실제적인 방법,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이른바 옛 방법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확신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옛 방법(old method)은 새 지역을 개척할 때, 선교회 자금으로 예배당을 세우고, 유급 토착인 조사를 파견하여, 선교사의 감독 하에 그 지방 교회를 목회하게 하여, 교회가 자립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외국 자금에 의지하는 교회는 결코 자립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네비어스는 1885년 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에 두 편의 글을 발표하고 자신의 "새 방법"을 소개했는데, 이듬해 The Methods of Mission Work로 증보 출판하였다.
새 방법(new method)은 "중국인에 의한 중국의 복음화"라는 목표에서는 "옛 방법"과 동일했으나, 처음부터 예배 처소를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고, 예배도 그 지역 교회 교인 가운데 오래 믿은 사람 가운데 지도자를 뽑아서 인도하도록 했다. 이들은(보통 30∼50명) 여름이나 겨울에 네비어스의 집에서 선교회 자금으로 사경회에 참석하여 성경 중심의 신학 교육을 받았다. 네비어스는 일년에 각 교회를 두 차례 방문하였고(매년 4∼6개월 동안 수천 마일이 걸리는 60여 개의 전도처와 지방 교회 순회 여행), 선교 자금으로 고용된 몇 명의 순회 조사들이 일정 지역을 맡아 각 교회를 두 달에 한번씩 심방했다. 그리고 새 신자들은 믿기 전의 직업을 그대로 유지했다(고전 7 : 20). 기독교는 신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흔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교회의 성격은 나무와 같다. 교회는 중국 토양에 토착하여 성장해야지 연약한 외래종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신자의 훈련도 지적 훈련과 더불어 고난과 핍박을 견딜 수 있는 영적 훈련에 치중해야 한다. 교회 교육에서 성경 본문이 중심을 차지해야 하며, 성령의 인도에 의존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전도처에서 선교 자금의 유입과 유급 토착 사역자를 최소화하고 대신 무보수의 자원주의를 강조하면서, 토착 목회자의 교육에서 세속적인 고등 교육보다는 영적 훈련을 강조하는 체제, 곧 선교회의 봉급을 받는 파송 목사 대신 지역 교회 출신의 영수가 목회하는 체제였다.
곧 1877년에 있었던 황하강 범람 사태 때 선교사들이 구제사업으로 $20,000 이상을 70,000명 이상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때 산동인들은 선교사에게 돈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네비어스는 선교사들이 정치가들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매복민심"(買服民心)하는 자들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돈을 목적으로 개종하거나 취직을 위해 전도인이 되는 이른바 "모식 신자"(rice Christians)를 막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순회 조사 제도에서 보듯이 유급 사역자를 전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다. 네비어스는 새 전도처를 개척하는 세 가지 방법 가운데, 산동에서 실패한 상주 유급 전도인(resident paid agents)이나 장단점이 공존하는 순회 유급 전도인(itinerant paid preachers)보다는, 무급 토착 신자(unpaid native Christians)에 의한 전도를 주장했다.
그의 "preaching"의 개념은 포괄적이었다. 설교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문서 선교도 복음 전파라고 보았다. 그 가운데 강연식 설교보다는 대화에 의한 가르침을 우위에 두었다. 이는 중국인의 사고가 "사교적, 응답적, 교리문답적, 대화적"이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 정신 발달 단계가 어린이와 같은 수준에 있으므로 그렇게 취급해야 한다"는 기본적 인식때문이었다. 따라서 6개월에서 2년간의 학습 기간이 설정되었다. 전 교인에게 엄격한 주일 성수를 요구했고, 7년간 1,000명의 수세자 가운데 10%를 넘게 출교할 정도로 엄격한 치리를 시행했다.
교회 조직은 초기 단계에서 융통성을 부여했다. 도시에서는 전통적인 장로교 조직을, 시골에서는 영수가 담당하고 순회 조사가 감독하는 "초보적이고 임시적인" 선교단체 조직 형태를 선호하였다. 이는 선교 초기에 장로를 안수하여 조직 교회를 추진하였으나 장로들이 교회에 걸림돌이 되었으므로, 장로직에 합당한 자가 나타날 때까지 신중하게 기다리기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886년 당시 산동 중부 지방에는 아직 장로로 조직된 교회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끝으로 네비어스는 타교단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서구 교회들의 교단주의가 중국에 그대로 도입되어 악영향을 미칠 것을 경계하면서, 교단간의 정책 조정을 위한 선교대회와, 교단간의 영토분할(교계 예양) 협정을 추진했다. 그는 교단은 역사적 산물로 선한 것이지만 교단주의로 가서는 안 되며,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비어스는 "삼자원리"(three-self principle)라는 신학적 공식을 적용 가능한 방법론으로 변형시킨 선교 현장의 실천가였다. 비록 "삼자원리"라는 용어는 사용한 적이 없지만 그 원리를 고수하고 이를 실험하여 "아시아에서 삼자 원리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네비어스 방법"은 중국에서 초기에는 지지자가 적었다. 동료 선교사들은 기존의 "옛 방법"에 익숙해서, 네비어스 혼자 새 방향으로 물줄기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공정한 시도"는 불가능하였다. 동료인 교육 선교사 마티어(Calvin Mateer, 1836∼1908)가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올 정도였다. 1900년 뉴욕선교대회에서는 그의 동생 로버트 마티어가 네비어스 방법을 신랄히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비어스 방법은 한국에서 채택되어 성공을 거두어 나갔고, 1896년 서인도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하는 등 세계 각지에서 호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산동 북장로교 선교회도 1898년 제2차 선교대회에서 그의 방법을 주요 의제로 집중 토론하고 이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2) 로스(John Ross ; 羅約翰, 1842∼1915)
1871년 중국에 파송되어 1910년 사임할 때까지 40년간 만주 선교사로 봉사한 로스의 생애와 선교 사역은 잘 알려져 있으므로, 그의 선교관과 선교방법론을 앞에서 서술한 네비어스와 비교하면서 서술하려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로스 자신의 말을 인용해 보자.
나는 만주 이남에서 어느 선교사보다도 그와 더 친밀한 접촉을 했다. 많은 선교 주제에 대해서 다양하고 자세한 긴 토론을 통해서, 나는 그를 중국에서 가장 폭넓고 정당하며 예리한 정신의 소유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오랫동안 나는 그를 대단히 존경하고 흠모했다. 나는 많은 관심과 공감을 가지고〈교무잡지〉에 실린 그의 토착인 전도자에 관한 논문들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불완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 논문들에서 내린 부정적인 결론과 달리 내가 보기에 중요한 한 주제를 보완할 뜻으로 글을 써서〈교무잡지〉에 실었다. 그뒤 [1887년 9월] 한국 서울을 방문하고 오는 길에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의 순회전도에 관한 진실, 특히 그 때 세례받은 많은 자들이 어떻게 기독교와 접촉하게 되었는지를 알려고 했다. 그 역시 우리의 만주 사역의 원리와 행동의 모든 세부사항을 알려고 아주 열심이었다. 특히 우리의 토착 교인 사용 방안에 대해서 모두 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혹자는 내가 본토인 사역자에게 봉급을 주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고 생각하는데, 잘못입니다. 만일 내가 당신 설명과 같은 사람을 안수할 수 있다면 교회 사역을 위해 그를 따로 세워서 지원하겠습니다."
로스는 네비어스와 친밀했으며 그의 방법을 배우고 보완하려고 했다. 따라서 로스는 네비어스와 함께 "새 방법"을 발전시킨 사람이었다. 로스는 일차적인 "복음화"는 다양한 외국 기관이 맡고, "교회" 일은 토착인들이 맡는 것을 자신의 방법의 요체라고 했고, 네비어스도 이에 동의하면서, 믿을 만한 토착인 조사를 구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사실 네비어스에게는 로스의 "왕 목사"(old Wang) 같은 사람이 없었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로스의 선교방법을 살펴보자. 첫째, 로스는 "기독교 문명론"에 반대하고 "토착교회론"을 옹호한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중국의 관습을 서구화하거나 없애는 것을 마치 기독교화하는 증거로 보는 견해에 반대하면서, 이러한 사회 관습 개혁은 선교에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단정하고, "선교사는 타문화 관습의 판단자가 아니다." "관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선교사의 유일한 의무이며, 최상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교사의 임무가 "개종"과 "중생"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선교에 정부 차원의 무력 사용도 당연히 거부했다. 앤더슨 노선의 네비어스와 같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토착교회론이 로스의 기본 선교관이었다.
둘째, 선교사는 교구 목사와 달리 광범위한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순회전도와 내륙전도를 실천했다. 그가 만주를 개척할 당시 "중국내지회"가 창설되어 내륙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그 역시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에 머무르지 않고 중심도시인 심양으로 "불법적으로" 진출하였으며, 광범위한 순회 전도여행을 실시하여, "고려문"을 통한 한국인 전도까지 추진하였다. 이것은 귀츨라프-번즈 노선이다.
로스는 순회전도를 두 형태로 나누었다. 선교 초기에는 현장 답사를 위한 광범위한 지방 여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기독교의 용어조차 모르기 때문에 단순한 순회전도는 노력의 낭비이다." 두번째 형태는 선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가능한데, 선교사가 대도시에 거주하면서 수십 개 지방 거점을 감독·순회하며 목회하는 것이다. 선교사 밑에는 각 거점마다 유급조사가 있어서, 개교회를 맡은 "학생 전도자"들을 돌본다. 이 형태는 "네비어스 방법"과 흡사하다. 다만 네비어스는 재정적 "자립"에 중점을 두고 유급조사를 제한적으로 사용하였지만, 로스는 "자전"에 더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에 선교회 자금으로 좀더 많은 수의 유급조사를 고용하였다.
셋째, 선교의 목표는 19세기 토착교회론의 목표인 토착인에 의한 "자립·자치·자전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 두었다. 그의 이 선교방법에 따라 한국인 권서와 전도인들이 한국에 파송되었고, 그 결과 의주와 소래 등에 자립·자전하는 최초의 한국 개신교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넷째, 신생 중국교회는 "십자가의 도"인 복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단계이지, 서구 교회에서나 가능한 "성서 비평"과 같은 신학적 주제를 소개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죄를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성화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네비어스처럼, 입교인은 초보적인 요리문답 중심의 학습자반을 9개월간 거친 뒤에 세례를 받게 했다.
다섯째, 초기 전도인과 조사의 선발 기준은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보다는 열정적인 마음과 영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로스는 네비어스처럼 더프의 영어에 의한 고등교육론에 반대했다.
여섯째, 전도 대상에서 일반 대중을 우선시했으나, 교육받은 중상류층도 중시했다. 선교 초기부터 그는 유교 고전을 공부하여, 전도나 설교에 이를 적절히 예화로 인용하였다. 그는 "중국 고전의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는 네비어스의 일반 대중 대상 전도론과 비교되는 점이다.
일곱째, 선교 초기에는 교육보다는 전도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학교가 "다른 곳에서 복음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나, 만주에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우리의 시간과 자금이 매일 전도하는 데 골몰해서 할 뜻이 있었더라도 학교사업에는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여덟째, 대중 설교를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다양한 형태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발전된 철학 토론 방법인 청담(淸談)식 전도방법을 이용했다. 이는 예배당에서 사전에 광고한 주제로 간단히 강연한 뒤 질의 응답을 통해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로스는, 중국인들은 토론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을 선호하고 열린 마음으로 듣기 때문에, "흥미있게 잘 설교하면 어디서나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역시 네비어스가 대중 설교보다는 경서 강독식의 개인적인 가르침을 중시한 것과 비교된다.
아홉째, 성경 번역을 중시했다. 귀츨라프나 번즈처럼 그는 성경 번역에 상당한 정열을 쏟았다. 이는 토착인에 의한 선교방법과 더불어, 성경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작업이었다. 실제로 그의 순한글 복음서들과《예수셩교젼셔》는 한국 땅에 뿌려져 많은 개종자의 열매를 맺었다. 네비어스도 문서 전도를 중시하였지만 대부분 소책자 저술에 그쳤다.
열째, 타종교에 대한 우호적 태도이다. 그는 타종교에도 계시의 흔적과 진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전도할 때, 타종교를 공격해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기독교와의 공통 분모를 찾아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을 취했다. 네비어스도 제사 문제로 고민하는 중국 교인들을 향해 동정적인 자세로 상담하였지만, 제사를 금지하는 분명한 태도를 취한 데 반해, 로스는 전족(纏足)이나 일부다처제와 같은 관습은 물론, 제사와 같은 신학적으로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그 긍정성을 옹호하는 열린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예컨대 1890년 상해선교대회에서 마틴(W. A. P. Martin)이 제사를 선별적으로 허용하자는 논문을 발표하자, 허드슨 테일러 등 대다수가 강력히 반대하고 나왔을 때, 로스는 리처드(Timothy Richard), 리드(Gilbert Reid)와 함께 마틴의 온건론을 지지하는 소수 입장을 개진했다. 로스는 제사에 기도의 요소가 없으므로 조상 숭배(ancestor "worship")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효도 정신의 표현인 추모 의식(ancestor ritual)으로 보았다. 또한 로스는 도교(道敎)의 상제관이 기독교와 비슷한 점을 들어 "상제" 사용을 옹호했으며, 한글 성경에서도 고유 신명인 "하나님"을 사용하는 데 주저치 않았다.
끝으로, 타 교회와의 협력 선교 및 교회 일치에 대한 관심이다. 로스는 아일랜드장로교회와 만주 선교지를 분할하는 협정을 추진하면서 두 선교회의 연합도 제안했다. 이 비전대로 두 선교회는 1891년 한 노회로 통합했다. 만주 장로교회가 급성장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교회연합 정신이었다. 네비어스도 교회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동료들로부터도 반대를 받았다면, 로스는 선교사들이나 중국인들과 동역자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가 한만 국경과 한국에 있는 자신의 개종자들을 1892년 미북장로교로 넘겨준 것도 이러한 협력 정신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인접한 두 지방 사이의 많은 교류를 고려할 때, 한국 서북지방에서 일찍부터 자립·자전하는 교회가 세워진 데에는 로스와 만주 장로교회의 통일된 자립·자전 정책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III. 한국에서 토착화된 "네비어스 방법"과 로스의 토착교회론
한국에서 수용·발전된 네비어스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으므로, 그 수용 배경과 한국에서 토착화된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수용 배경
네비어스는 1890년 5월 상해선교대회를 공동의장으로 주재하고 "선교방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자신의 방법을 재옹호했다. 이어서 6월에 안식년 휴가로 미국에 가는 길에,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계속된 서면 요청으로 서울에 와서 2주일간 머물면서 자신의 경험과 선교 방법론을 강의했다. 언더우드 등은 이미 네비어스의 책을 읽고 "사업을 어떻게 시작할지 많은 도움과 암시를 받은 터였으나," 그의 방문을 통해 "그의 체계에 대한 완전한 의미를 충분히 설명들었다." 그 결과 장로교 선교회는 1891년, 타 선교지의 선교 방법과 그 결과들을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조사한 후에, "비록 우리 사업이 좀더 느리게 시작되고, 여러 해 동안 눈에 보이는 열매를 크게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결국에는 다른 방법보다 이 계획을 조심스럽게 따르면 더 확실하게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남감리교도 네비어스 방법을 채택했다.
(1) 선교회 내부 사정
네비어스 방법을 수용하게 된 첫번째 선교회 내부 요인은, 새 선교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해외선교에 거의 경험이 없는 20대 청년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역 현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조언해 줄 선배 선교사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예를 들면, 1886년부터 표출된 알렌과 언더우드, 헤론간의 갈등은 조정자가 없었기 때문에 뉴욕 본부에 서로 사직서를 보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결국 알렌의 선교사직 사임으로 일단락되었다.
두번째 요인은, 본국의 잠정적인 지원 동결이었다. 선교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개되고 있던 한국 선교에 대해 뉴욕 본부는 "대규모의 선교사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1890년까지는 인원과 사업비를 증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 전파에 대한 강한 열정을 지니고 있던 언더우드와 같은 젊은 선교사들이 한성에 가만히 앉아서 지내기란 어려웠다.
1887년 1월 소래에서 올라온 3명의 한국인에게 언더우드가 세례를 주자, 알렌은 정부를 자극하여 선교사업이 위험에 빠질 수 있으므로 "적절한 선교사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언더우드는 알렌에게 보낸 반박 편지에서 ① 수세는 선교사업이며, ② 근대 선교 역사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조약상 선교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두 선교를 감행했으며, ③ 박해와 순교를 각오하는 자들의 세례를 거절할 수 없으며, ④ 병원과 학교와 같은 현재의 선교 사업은 정부 감독하에 진행되고 있으므로 위험하지 않으며, ⑤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자원하여 수세를 요청하는 자에게 목사요 선교사로서 세례를 거절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선교의 적극적인 추진을 주장했다.
그러나 계속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교 본부는 추가 지원을 관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교 본부로부터 재정과 인원을 확보하는 길은 눈에 보이는 결과였고, 선교 자금을 최소화하면서 최대한의 열매를 약속하는 네비어스의 방법은 이 상황에서 매력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 외부 상황
네비어스 방법을 수용하게 만든 외적 요인들은 다음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약상 선교의 자유가 아직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1889년 내륙 여행에서 "정부 관리들로부터 복음 전도를 허용치 않겠다는 입장을 수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직접적이고 개방적인 선교" 곧 선교사의 공개적인 노방 전도나 서울과 개항장을 벗어난 내륙 전도와 부동산 구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토착인에 의한 전도가 대안이 될 수 있었다.
둘째, 한국에서 로스의 토착인 선교방법이 성공하고 있었다. 내한할 때부터 로스의 한글 성경 번역과 반포 활동을 알고 있던 언더우드는, 1887년에 들어와서 서북 지방에 로스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큰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87년 1월 소래 신자 3명이 세례를 받았다. 신약을 완간한 로스가 참석한 가운데 1887년 9월에 조직된 정동 장로교회는 14명의 수세자 가운데 13명이 로스의 권서와 연관된 사람이었다. 만주 한인촌과 서북지방은 로스의 영향 아래 있었다. 젊은 선교사들은 완전한 성자는 아니었다. 언더우드는 내한 첫 선교사로서 한글 성경 번역의 명예를 차지하려는 선한 "야망"을 가지고 로스본의 무용성을 주장하면서 새 번역을 추진했다. 동시에 1887년 3월에 벌써 선교본부에 평양의 중요성을 거론하면서 선교기지를 개설할 것을 건의했고, 가을에 소래를 거쳐 의주까지 불법적인 내륙 선교 여행을 감행했다. 1888년 2차 북부지방 여행에서 언더우드는 소래에서 7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반기독교 칙령으로 소환되었다. 1889년에는 신혼여행차 의주까지 여행하여 33명의 로스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의 급성장을 보고 받은 선교부에서는 1889년에 벌써 이를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언더우드의 공격적인 행동은 한국 북부를 선점한 로스에 대한 일종의 경쟁 의식의 발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로스 방법이 한국 상황에 맞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로스의 정책을 배우려 하지 않고, 그들의 교파 선배 선교사요 그 방법의 선구자인 네비어스에게서 직접 전수받고자 했을 것이다.
셋째, 로스의 개종자들이 보여준 선교사 의존 의식, 곧 모식 신자 경향에 대한 서울 선교사들의 비판이다. 언더우드는 처음부터 "한국인들에게 선교사들은 본국의 부유한 선교부로부터 지원받고 있다는 인상을 줄 위험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언더우드 부인은 "[의주의 신실하지 못한 신자들로 인한 쓰라리고 실망스런 경험들]이 이미 네비어스의 책을 공부한 후 심각하게 고려하고 어느 정도 따르기 시작했던 엄격한 자립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도록 도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펫은 1890년 서울에 도착했을 때, 정동교회의 두 장로가 치리를 받아 한 명은 출교되었으며, 많은 수세자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이듬해 만주 한인촌 여행에서는 로스가 주장하는 '수천 명'의 신자들을 만나 보았으나, 그들이 "신자가 되면 선교사들이 먹여 주고 입혀 주므로 앉아서 성경공부만 하고 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고, 로스의 외형 위주의 선교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서울 선교사들이 로스의 사역자들을 불신하고 비판한 것은, 그들이 로스 밑에서 제대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넷째, 서북 지방에는 상인으로 대변되는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중산층이 성장해 있었는데, 이들이 네비어스 정책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이들은 경제적 부에 어울리는 신분 상승의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 클라크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사경회에 참석한 가장 큰 동기는 자신의 사회 집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이었다. 사경회 참석자들은 영수와 집사, 혹은 여성 지도자로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경회와 성경공부에 참석하기를 게을리한다면, 당사자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그 지도자의 자리에서 곧 탈락되기 쉬웠다. 그 직분에 대한 사례는 없었으나 자신의 집단으로부터 존경이 있었다.
그러나 탐관오리와 청일전쟁 이후 본격화된 일본 자본주의 침략은 이들의 재산을 위협했다.
한국의 신발쟁이·상인·갓쟁이, 여러 수공업자들의 직업은 사라지거나 개혁될 것이다. 수천 명의 침모들은 일거리를 잃고 아사 지경에 이를 것이다. 반면 벌써 한밑천 잡을 기회를 노리고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일본인 상인, 양복쟁이, 수공업자들은 돈을 쓸어갈 것이다. 이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산업을 독점하면 한국인들은 거래를 할 수 없어서 살기 위해 새로운 친구요 보호자인 일본인들을 위해 "나무를 베고 물을 긷는 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신분 상승과 재산 보호를 목적으로 교회에 들어온 이들이 '선망의 대상'인 교회 지도자가 되어 그런 세속적인 욕구를 영적으로 승화시켜 나갔고, 예배당 건축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다섯째, 한국의 가족제도와 씨족 공동체로 구성된 마을제도가 네비어스 방법을 가능케 한 사회적 요인의 하나라고 보여진다. 비록 이 사회적 구조를 벗어나 처음으로 개종하는 자들은 체제의 질서를 깨는 이단자로 몰려 핍박을 받았으나, 가장이나 가문의 어른이 개종할 경우 한 가족이나 집안·친척이 개종함으로써, 지방 개교회가 자립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한 예로 1892년 올린저(F. Ohlinger)는 장로교가 감리교보다 가족 개종에 더 성공해 왔다고 밝히고, 그 원인의 하나가 남녀가 같이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예배처소를 마련한 것이라고 보았다.
여섯째, 한국인 신자들의 주체적인 자립 정신이다. 즉 네비어스 방법에 의해 한국인의 자급 정신이 길러진 점이 없지 않지만, 네비어스 방법이 채택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근본적 바탕은 한국인의 자립적인 자아(self) 의식이다. 전통의 농경 마을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상부상조하던 두레 정신, 품앗이 정신도 이와 연결된다고 하겠다. 1888년에 벌써 소래교회가 예배당 건축을 위해 $120을 헌금한 것과, 캐나다의 매켄지가 소래의 서경조 집에서 지내면서 한국말을 배울 때 봉급을 주려고 했더니, 서경조가 돈을 받고 전도하거나 교회 일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거절한 경우, 그리고 1894년 정동교회를 건축할 때 집사 이춘호가 "외국인의 도움 없이 본토인들의 손으로 새 교회당을 지어야 한다고 제안"한 사실은 초기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던 자립정신의 좋은 예이다.
2. 네비어스 방법과 로스 방법의 한국 토착화
네비어스 방법은 한국 실정에 맞도록 상당히 수정되었다. 언더우드는 네비어스 정책을 수용한 지 10년이 된 1900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선교회가 따르고 있는 체계는 정확히 원래의 네비어스 체계는 아니다. 사업의 필요에 따라 만든 것으로, 네비어스 방법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네비어스의《선교사업의 두 방법》과 비교해 보면 그 책이 제시하는 계획들보다 훨씬 더 철저히 자급적이다.
마펫은 1909년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초기 선교정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1890년 네비어스에게서 받은 "큰 원리가 된 두 가지 씨앗 사상"은 "사경회 제도와 자급"이었으며, 한국 상황에 맞도록 "상당한 수정을 가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1934년 선교 희년 기념대회에서도 이를 반복하면서 "우리 선교회는 이 노선에서 네비어스 박사의 제안을 상당히 넘어섰다"고 밝혔다. 덧붙여서 그는 로스로부터 한글 성경뿐만 아니라 선교 방법도 전수받았다고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밝히고, 1891년 로스를 방문했을 때 "교회 건물이 중국식으로 지어져 있고, 중국인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며, 모든 것이 중국 생활과 관습에 맞게 이루어지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게서 "토착교회를 발전시키는 사상"을 배웠다고 했다.
따라서 1891년부터 공식적 문서로 나타나는 초기 한국 장로교의 선교정책들을 검토할 때, ① 철저한 자급, ② 한국적 사경회 제도, ③ 교회의 토착화라는 세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철저한 자급과 자전
무엇보다 네비어스 정책은 한국에서 철저히 자급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로스가 자급보다는 자전을 중시하고 유급조사를 많이 고용하면서 선교 자금 사용에 관용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다양한 방향에서 철저한 재정적 자립과 자전이 추진되었다.
1) 일반 신자의 자원 전도와 조사의 지원
전 교인에 대한 전도 의무가 강조되었다. 네비어스의 산동이나 로스의 만주 전도는 주로 유급 순회조사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한국 서북 지방은 교인들의 자발적인 전도에 의해 진행되었다. 세례문답에서 가장 중요한 심사 기준의 하나는 전도한 사람이 있는가의 여부였다.
한국인들은 모두 전도인들이다.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은 모든 세례 신청자가 생명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의 명단을 말하기를 기대한다. 각 지역교회는 안정기에 접어들면 최선의 사람을 한두 서너 명 선택해서 순회 전도인 사역에 전임하도록 하고 가족의 생계를 지원한다. 이것이 바로 해마다 교회가 배가하고 구도자가 셀 수 없이 늘어나는 이유이다.
1899년 평양 선교사 리(Graham Lee)는 중국교회와 비교했을 때 한국에서는 "누구든지 교인이 되는 대로 즉시 전도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순회조사도 점차 한국교회가 월급을 지불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도시의 교회는 남녀선교회를 조직하여 교회가 없는 지역에 전도인을 파송하였다. 따라서 선교회 규칙에서 유급전도인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 추가로 강화되어 나간 것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자립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문서·의료·교육 사업의 자급
선교사들은 성경을 비롯한 각종 서적도 1891년 규칙에서 무료 배부는 금지하고 최소한 생산비 ⅓ 이상에서 판매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엄격한 자립정책에 대해 성서공회의 켄뮤어 총무는 "불신자에 대한 전도사업으로서의 권서사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대할 정도였다. 의료사업에서도 극빈자를 제외하고는 약값과 치료비를 받아 병원 경비의 ⅓에서 ⅔ 정도는 충당하였다. 1890년 서울의 소년학교는 마펫의 지도하에 학생 자비 부담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1896년 부가된 선교회 세칙에 의하면 학교 교육에서 개인 학생에 대한 지원은 일체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선교비 보조가 학교 운영비의 절반 이상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실 전도의 문을 여는 수단으로서의 학교사업은 별로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학교 없이도 전도가 너무나 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문제는 자치와 연관시켜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다.
3) 예배당 건축의 자급
예배당은 한옥으로 하고, 지역 교인들이 지을 수 있는 수준에서 자급하도록 했다. 언더우드에 의하면 1892년 선교회는, 교인들이 먼저 인건비를 포함하여 건축비용의 ⅓을 모으면, ⅓은 선교자금에서 3년간 빌려주고, 나머지 ⅓은 선교본부에서 허락하면 지원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선교사들의 원칙은 곧 필요없게 되었다.
1890년대 말 서북지역은 "사랑방" 시대를 지나 예배당을 건축하던 시기로 접어들었는데, 1898년의 경우 평양 지부에서는 126개 예배 집단에 수세인 1,050명(신규 697)과 학습교인 3,440명(신규 2,319)이 있었는데, 1년간 44개 예배당을 자급으로 건축하여 "자기 자신들의 예배당"을 가진 집단은 69개로 늘어났고, 황해도에서는 35개 예배당 가운데 24개를 신축했다.
이 가운데는 개인이 집이나 땅을 헌납하는 경우도 있었고, 소수 유력 신자들이 상당액을 부담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 자금은 사경회 등을 통해 일정 기간 모은 "건축 기금"(Church Fund)으로, 건축일은 교인들의 자원 노동으로 예배당을 신축하거나 증축해 나갔다. 1894년 서울의 정동교회 건축처럼 여신도들이 "성미"(誠米)를 모은 경우도 있다.
이같은 자급은 당시 교인들의 경제 상황에 비추어 이해하면 더욱 빛나는 헌신이 될 것이다. 평양의 경우 1895년부터 20명의 신자가 주일마다 1∼10센트를 헌금하기 시작했는데, 마펫 목사가 "헌금 봉투 제도"(envelope system)를 도입하자 80명이 매주일 1∼15센트를 내게 되었다. 당시 하루 품삯은 보통 10센트였고, 일가족 월 생계비는 2달러였다. 따라서 1896년 평양의 첫 교인들은 평균적으로 수입의 1/20을 헌금했다고 볼 수 있다. 가난한 과부의 두 동전과 같은 헌금이 모여 초기 한국교회가 운영되고 예배당이 건축되었던 것이다.
(2) 한국적 사경회 제도
두 번째 한국적 네비어스 정책의 특징은 사경회 제도에 있었다. 사경회는 완전한 자급이 이루어지고, 전 교인이 배우며, 함께 참여하고 교제하는 공간이었고, "새벽기도"와 "날 연보"가 시작된 공간이었다.
1) 완전한 자급의 공간
사경회 경비는 1891년 규칙에서는 네비어스 방법대로 선교회 부담으로 한다고 하였지만, 1901년에는 이를 넘어서서 자비 부담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는 이미 시행되고 있던 내용을 명문화한 것에 불과했다. 다음은 1899년 사경회에 대한 보도이다.
사업의 한 특징은 옛 감리교 구역회 양식을 본뜬 훈련반으로 여기서는 감리교는 물론 장로교에서도 성행한다. 장로교는 작년[1899]에 17개의 사경회가 열렸는데, 5개는 선교사가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 사경회는 두 개 외에 모두 완전히 자립했다. 한 가지 즐겁고 특이한 일은 실제적이고 신학적인 목적으로 열리는 여자사경회가 완전히 자립한다는 사실이다. 여자사경회 참석은 남자사경회보다 훨씬 자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런 사경회 자비 참석은 평양에서 1895년부터 벌써 시작된 것으로, "오직 성경과 복음을 더 배우기 위해서" 먹을 쌀을 메고 수백 리 길을 걸어와서 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을 참 종류의 "쌀 신자"였던 것이다. 지방 여자들을 위한 평양 부인사경회는 1898년 5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그 조건은 "비용을 한국교회가 전적으로 부담할 경우"였다.
2) 전교인 배움의 시간
산동이나 만주에서는 조사 중심의 사경회도 선교회 부담으로 참석하게 했는데, 한국에서는 일반 평신도도 참석하였다. 자비 부담의 일반 부녀자 사경회도 열렸다. 이는 자전정책과 연관된 것으로, 전도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과 교리를 배우고 훈련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조사들을 위한 신학자반에도 초청받지 아니한 평신도들도 자비로 참석하였다.
부인사경회는 "감리교 구역 모임방법과 가장 가까운" 형태로 초신자들의 양육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00년에는 5년제로 발전되어, 1904년 12월 평양 사경회에서 16명이 처음으로 수료하였으며, 1901년 1월에 열린 20일간의 첫 지방 지도자반 평양 부인사경회처럼 수세자로 글을 읽을 수 있는 자 8명만 참가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부인사경회들은 1908년 "평양여자성경학교"로 발전했다. 초기 사경회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성경공부와 한글 읽기, 찬양이 주 수업 내용이었다. 전주에서 열린 1902년 1월의 10일간의 첫 부인사경회의 시간표를 보면 성경읽기(8:30∼9:00), 예수의 기적(9:00∼1:00), 학습인 교육과 교회 규칙(1:00∼2:00), 누가복음(2:00∼3:00) 등이었다.
사경회는 또한 가르치는 공간이었다. 사경회가 소도시로 확산되고 회수가 늘어나면서 한국인 조사와 여성 지도자가 교사로 나섰고, 여러 사경회는 한국인 강사만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도시의 사경회에 참석한 자들은 자신이 사는 시골로 돌아와 배운 것을 매일 저녁 가르쳤다. 이때는 남녀가 같은 장소에서 배우기도 했다.
3) 새벽기도의 시작
1898년도 사경회 보고에 의하면 "아침 햇살이 비추기 훨씬 전부터 옆방에서 찬송·기도·성경공부하는 소리가 들린다. 같은 찬송 소리가 밤늦게까지 들린다"라고 했다. 황해도의 1901년 1월과 2월의 사경회에서도 선교사들은 "거의 매일 아침 4시 성경공부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고 한다. 이러한 1890년대 말, 1900년대 초 사경회에서 시작된 초보적인 형태의 새벽기도회가 1907년 대부흥을 거치면서 좀더 형식을 갖춘 정규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었다고 보여진다.
4) 교제와 참여의 공간
대도시 사경회에는 각 지방 교인들이 함께 모였다. 이전에는 전혀 모르던 자들이 일주일에서 열흘 간 숙식을 함께 하며 사귐으로써 지방간의 벽이 무너져갔다. 말씀 안에서 영적인 교제를 통해 이들은 공동체 의식과 지체 의식을 키워갔다.
사경회는 또한 한국 교인과 선교사간의 관계도 친밀하게 만들었다. 평소 지방 순회 전도여행를 하던 선교사들과 조사들은 각 지방 교인들의 집에 묵거나 신세를 졌는데, 이들이 도시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참석할 때면 역으로 선교사들과 도시 교회가 대접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사경회 기간 중에 교회 직원들을 위한 토론회가 열려 교리와 교회 정치 문제에 대한 합의점을 찾고, 교회 일치를 이루어 나갔다. 이 문제는 자치 항에서 후술하겠다.
사경회는 전도 훈련의 장이었다. 1899년 선천 사경회 때 저녁예배 후에 참석자 186명이 모두 전도하러 나갔다. 선교사의 지시없이 이루어진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이후 사경회는 오전에 성경공부를 한 뒤에 오후에 전도하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배우고 가르치고 전하는 세 가지 참여가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5) 날 연보하는 열심
자발적 전도와 관련된 "날 연보"가 사경회 기간 중에 드려졌다. 선천에서는 1902년 11월 사경회에서 처음으로 날연보 350일이 바쳐졌다. 6개월 이내에 교인이 없는 마을에 자비로 가서 5일 내지 10일간 전도하겠다는 서약이었다. "여기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참여했다. 그 결과 3개월간 이 도의 전역에서 약 3,000일의 자원 전도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헤아릴 수 없다."
6) 축제의 공간
한국의 사경회는 옛날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절기 축제와 비슷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이나 장막절과 같은 절기에 며칠씩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축제를 즐겼듯이, 한국 초기 장로교인들은 겨울 농한기에 1주일에서 2주일간 계속된 도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쌀 짐과 이부자리를 이거나 메고 수백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 등지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휴가 이상의 것이었다. 말씀의 잔치, 배움의 잔치, 기도와 찬양의 잔치, 일치감을 맛보는 교제와 전도의 잔치에 한바탕 어울려 신령한 축제 분위기 속에 흠뻑 젖어 들었던 "거룩한 경험"의 축제였다. 특히 오락이나 휴가가 적었던 여성들에게 그들만의 사경회가 열렸을 때, 사경회는 집안 일과 유교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의 공간이었고, 한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찾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환희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경회는 당시 한말 사회에서 박해받고 소수인(minority)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던 남녀노소 교인들에게 한 마당 축제로 역할하여 일상생활로 돌아갔을 때 신앙인으로 넉넉히 생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해 주었다고 하겠다.
(3) 교회의 토착화
먼저 네비어스와 로스의 토착화 방법에 인상을 받고 이를 평양에서 실천한 마펫의 토착화 신학을 살펴보고, 이어서 구체적인 한국교회의 토착화 양상을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한다.
마펫은 1904년 9월 22일, 첫 선교사 알렌 내한 20주년 때 열린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에서 "한국 복음화 정책과 방법"이라는 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정책과 방법의 근본 원칙이 존슨(Herrick Johnson)의 문구인 "하나님의 실재인 복음에 대한 생생하고 변함없는 확신"(a vivid and abiding sense of the Divine reality of the Gospel message)이라고 밝히면서, 다섯 가지 정책과 여섯 가지 방법을 정리하고 있다. 그의 복음주의 신학을 잘 보여주는 이 정책들 가운데, 세번째 원칙인 "기독교의 영적 혜택"에 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혁은 구속이 아니다. 단순한 도덕 개혁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 복음 메시지의 핵심이다. 문명은 기독교가 아니다. 서구의 사상·관습·발명품은 기독교의 본질적 부분이 아니다. 사실 많은 동양 사상과 관습이 서구 세계의 이상한 개념이나 관습보다 훨씬 더 영적인 사상에 가까우며, 서구 문명의 일부로 간주되는 많은 것들의 도입은 영적 생활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 우리의 사명은 영적 기독교의 소개이지, 서구 문명의 소개는 아니다. 교육은 중생이 아니다. (스피어의 말대로) 우리는 이방인에게 세속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파송된 것이다. (중략) 선교는 사회의 표면을 무시하고 내면을 다루기 때문에 사회의 표면을 강력하게 개혁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마펫의 반문명-영적 복음화 이론은 앤더슨-엘린우드-스피어(Robert E. Speer)로 연결되는 미북장로교의 주류 선교 노선인 복음주의와 일치하면서, 네비어스와 로스의 노선과도 일치하는 토착교회론이다. 따라서 마펫처럼 선교사들이 서구화가 아니라 복음화를 추진하고, "미국 장로교회가 아닌 한국 장로교회 수립"을 목표로 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런 결과는 토착화였다.
1) 열린 공간, 사랑방과 안방
교인들에게 배움과 참여의 공간으로 사경회가 있었다면, 일반인에게는 열린 공간인 사랑방이 있었다. 곧 한국 전도사업의 독특한 특징은 네비어스 방법의 친밀한 개인 전도 형태를 발전시킨 사랑방 전도이다. 불신자나 구도자가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기독교에 대해서 배우고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사랑방을 통해 주어졌다. 선교사나 조사·전도인들은 사랑방에서 한 마을의 구도자들을 만나 종교적인 대화와 토론, 성경공부와 기도를 나누었다. 사랑방은 "교회와 민중을 잇는 자유롭고 격의없는 대화 통로"였다. 따라서 부산의 베어드(W. M. Baird)는 전도 초기인 1893년 교회 옆에 사랑방을 지어 정해진 시간에 한국인 방문자들을 만났고, 1893년 평양의 마펫도 자신의 첫 집에서 사랑방을 "누구에게나 주야로" 개방했고, 여기서 1894년 1월 7일 8명이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고 평양에서 첫 한국인 성찬식이 이루어졌다. 서울에서도 1894년 예배당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선교사들의 사랑에서 전도와 예배가 이루어졌다. 여자들의 경우는 안방 전도가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2) 한국식 예배당과 건물
다른 선교회와 달리 장로교회는 모두 한국식으로 예배당을 지었다. 이는 언더우드가 표현한 대로 "본토인들 스스로 예배당을 마련하게 하되, 토착적이고, 지역 교회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는 정책에 따른 것이다.
이는 단순히 건물 양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정책 전반과 연관되는 문제였다. 즉 서울이나 대도시에 주변의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외국 양식의 큰 교회(예컨대 천주교의 고딕식 명동성당)나 학교·병원 등을 세워서 선교지부를 구축하고 기관 위주의 사업을 전개할 것인가, 아니면 선교사들과 본토인들의 직접적인 복음 전도를 위주로 하는 선교를 전개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언더우드는 1893년 제1회 북미선교대회에 참석하여 교육·의료 선교보다는 "무릎으로 하는" 선교, 곧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다가가는 선교, 지식인 계층보다는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의 하나가 한옥 예배당 건립 정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1896∼1897년 14개월간 한국을 비롯 여러 선교지를 둘러본 스피어 총무는 1898년 제6회 북미선교대회에서 보고하면서, 점증하는 선교의 제도화에 대해 경고하고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제도주의나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많은 생명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급을 강조하면서 너무 많은 선교기구들이 몸집만 불리고 생명력은 미약하다고 지적하고, 미국의 돈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피어의 이 보고에는 자급을 강력하게 실천하던 한국 선교 현장에서 받은 강한 인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한 마을에 신자들이 생기면 먼저 어떤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수가 늘어나면 별도의 작은 집을 사거나 짓고, 마침내 큰 기와 지붕의 예배당을 지어 나간 것이 초기 교회 건축의 일반적 발전 형태였다. 이는 자급의 원리에 충실하면서, 마을마다 그들 자신의 예배 처소를 갖게 함으로써, 예배하기를 즐긴 한국인들의 영성에 어울리는 조치였다.
한국 양식으로 교회 건물은 지은 것은 네비어스와 로스 방법에서 온 것이지만, 한국 특히 평양에서는 병원과 학교를 비롯해 선교사 주택까지도 한옥(기와집) 양식으로 한 것은 이를 한 단계 진전시킨 것이다. 다음은 평양의 폴웰 의사가 1902년에 쓴 글이다.
이곳의 큰 교회당은(한국식으로 매주일 1,500명 이상이 앉는다) 한국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우리의 거주지도 동일한 양식인데, 브라운(A. J. Brown) 총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양 선교 거점은 내가 이때까지 본 가장 지혜로운 선교 건축물의 훌륭한 실례이다. 이것은 내가 미국과 영국의 여러 선교회의 많은 선교 거점들과 우리의 9개 선교회를 방문한 뒤에 쓰는 것이다.……건물의 외부선이 토착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¼마일쯤 떨어진 언덕에서 보면 전혀 차이를 식별할 수 없다.
교회당 양식 가운데 특이한 것은 남녀 구별을 위해 'ㄱ'자 모양으로 남녀석을 따로 지은 것이다. 참고로 1898년 평양에는 장로교 예배당 2개와 감리교 예배당 1개가 있었는데, "세 회당을 다 � 모양으로 뎡 치 지엇고," 선천에서는 남회당과 여회당을 따로 지었다. 이렇게 예배당이 한국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브라운의 평가처럼, 기독교가 "한국에서 집처럼 아주 편안하게 되었으며, 본토 토양에 뿌리를 내려 그 나라의 일부분이 된" 증거였다.
3) 한국적 예배 의식
예배와 절기의 현지 동화 현상은 선교지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토착화 양상이다. 한국교회는 1890년대 후반에 와서 주일 오전 성경공부와 주일 오후 예배와 전도가 정착되면서 자연스럽게 주일성수가 시행되었다. 토요일 날 물을 길어서 쌀을 씻어 놓는 집도 생겼다. 또 수요일 기도회가 정착되었는데, 기도와 간증이 주 내용이었다.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짧은 기도를 이어가는 돌림기도와 한 목소리로 다같이 기도하는 통성기도가 수요 기도회 때 드려지기 시작했다.
예배당 내부에는 의자가 없었고, 모두 한국식으로 마루에 앉았다. 기도를 드릴 때는 모두 꿇어 앉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형식을 취했다. 가장 뚜렷한 특징은 당시 풍속대로 남녀의 좌석을 분리한 것이다. 커튼으로 양쪽을 분리하거나, 따로 예배 시간을 정해서 모였다. 평양 장대현교회처럼 예배당을 증축할 때, 'ㄱ'자 모양으로 하여 격리하였다.
학습식·세례식과 성찬식 역시 단순하면서도 감격 속에서 이루어졌다. 성찬식은 장로교 전통에 따라 절기에 한번, 곧 일년에 네 차례씩 가졌는데, 대부분 세례식 직후에 시행했다. 다음은 1897년 여름 평양을 방문한 스피어 총무가 목격한 학습식·세례식·성찬식 광경이다. 초기 예배 자료가 적으므로 길게 인용하고자 한다.
교인들이 찬송가「할렐루야 되네」에 이어「예수의 피밖에 없네」를 우렁차고 격정적으로 불렀다. 내 등에 있는 모든 신경까지 울렁거렸다. 17명의 학습자가 일어섰다. 무급조사가 학습 서약서를 읽었다. 죄 회개, 제사 포기, 주일 성수, 효도, 가족과 이웃 전도, 그리고 나태, 축첩, 술취함, 노름과 모든 죄를 버리겠다는 엄격한 내용이었다. 이어서 기도를 드릴 때, 많은 자가 울었다. 헌금은 모든 자들이 진심으로 바치기에 열심하는 듯했다. 세례 청원자 29명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침묵과 기도와 큰 경외 속에 리(Lee) 목사가 마루에 꿇어앉은 그들 가운데로 걸어가서 세례를 주고 위대한 교제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한 남자가 감격하여 크게 울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되고, 상투나 변발과 같은 분리와 의심의 상징을 없애는, 그 연합의 광경에 기뻤다.
세례식 후에 한국인 직원이 성찬식 성경구절을 읽는 동안, 서로 미워하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함께 머리를 숙여 한 성경을 읽어 가고, 아직 극히 일부의 한글성경이 출간되었기에 한문을 아는 자들은 모두 한문성경을 보았다. 이어 쌀로 만든 떡이 분배되고 두 개의 단순한 瓷器 잔에 포도즙이 분배되었다. 모든 것이 단순했다. 헌금은 오래 된 서류함의 서랍 세 개로 거두었다. 세례식 물은 값싼 사발에 담았다. 부나 어떠한 과시도 없었다. 그러나 술꾼·노름쟁이·간음꾼·점쟁이·불교 중·난봉꾼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사람들 속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분명한 증거들이 풍성하게 있었다.
이 글에서 보듯이 한국교회는 학습 제도를 발전시키면서, 특이하게 세례식처럼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서약하는 학습식을 가졌다. 6개월에서 1년간 교리 교육을 받은 신자들에게 합당한 의식이었다고 보여진다. 외국처럼 유아세례 교인이 적은 환경에서 학습은 일종의 세례와 같았고, 정식 세례는 견진이나 입교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하겠다.
세례식에 사용한 물은 흰 사발에 담긴 정화수였다. 새벽마다 여인들이 떠놓고 기도하던 그 물과 사발이 이제는 주님과 한 몸이 되고 교회의 지체가 되는 세례의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성찬식에서는 쌀로 만든 떡과 포도즙을 사용했다.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떡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해방 이후 시골 교회에서도 사용한 시루떡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붉은 빛 시루떡은 전통적으로 예배(제사)용 떡으로, 조금씩 떼어 주기에도 편리했을 것이다. 동제(洞祭)나 가정제사 때 함께 떡을 나누던 풍속이 변하여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기념하고 재림을 소망하는 의식이 된 것이다. 한국의 시루떡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살과 평범한 자기 잔에 담긴 주님의 보혈은 기독교 토착화의 한 상징이라고 하겠다.
가정 제단도 초기부터 강조되면서 집집마다 가정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는데, 1900년대 후반에는 가정 새벽 기도회도 지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 세 번 식탁에서의 축사 기도도 드리게 되었다. 이는 유교 전통의 가족 중심적인 예배가 기독교의 가족 예배로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외에도 신년 연합 기도회, 수난절과 부활절, 황제탄신 축하예배,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과 같은 다양한 절기를 통해서도 한국적인 예배와 행사들이 이루어졌지만 후속 연구 과제로 남겨 둔다. 또한 혼인식, 장례식, 추도예배 등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도 중요한 추후 연구 주제이다.
IV. 맺는 말
이 글은 1900년까지 한국 장로교 선교정책의 하나였던 "토착교회론"의 배경과 발전 과정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앤더슨-네비어스-언더우드로 이어지는 노선과, 귀츨라프-번즈-로스·네비어스-마펫으로 연결되는 노선 모두 개인 영혼 구원 중심의 복음적인 "토착교회론"이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철저한 "자립"과 고유한 "사경회" 제도, "토착화" 등이 한국적 특징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의 논의를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재정리함으로써 결론으로 삼으려고 한다. 이 글에서 정리하지 못한 한국 정치와 종교·문화에 대한 태도나 정책, 그리고 머리글에서 밝힌 전파론과 문명화론이 한국 현장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추후 연구 과제로 남겨 둔다.
1. 거품인가 사실인가?
폭발적인 한국교회의 성장에 대해 1900년 초에 일부 중국 선교사들은 "그것은 거품이다"(It's a bubble)라고 일축했다. 선천교회를 예로 들면, 1901년에 75명이던 교인이 5년만에 1,435명으로 늘어나 해마다 배가(倍加)했으니, "거품"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의사 샤록스(A. M. Sharrocks)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작년에 선천 선교 거점의 교인은 6,507명이었다. 올해는 11,943명이다. 매달 453명씩 12개월 동안 어디서 5,436명이 왔는가? 이것이 우리 소수 선교사의 결과일 수 있겠는가? 혹은 지역 전도인들에게 지출된 $72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가 자급하고 있는 15명의 전임 전도인들이 있다. 일반 신자들은 자원 전도나 특별 전도 활동을 위한 총 8,000일을 서원했다. 지난 일년간 1,164명이 세례를 받아 매주일 평균 22명, 매달 100명의 수세자가 생겼다. (중략) 따라서 한국교회는 자전한다고 볼 수 있다. (중략) 그 비밀은 무엇인가? 이 결과를 산출한 중요한 한 요인이 있다. 처음부터 한국인들은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이 우리 선교사의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이라고 믿도록 배웠다. (중략) 어느 누구도 돈을 동기로 교회에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200석의 새 교회당도 이런 노선에서 지어지고 있다. (중략) 한국 "양반"이 옛 의복을 벗고 일하는 것은 새 시대의 분명한 상징이다. 위엄있는 교회 직원에서부터 아래로 초신자까지, 빈부상하를 막론하고 함께 먼지와 열기 속에서 웃으면서 이 힘든 일을 가볍게 해나가고 있다. (중략) 이런 정신이 배후에 있는데 어찌 성장하지 않겠는가?
선교사나 조사가 아니라, 일반 교인들이 성장의 핵심이었다는 말이다. 신자가 되고 전도하고 교회를 짓고 다스리는 모든 일이 한국인 스스로 자립·자원하여 이루어냈으므로 '거품'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에도 한국교회 성장이 폭발적으로 가속되자, 외국에서는 '거품'이다, '버섯'이다, 무식하고 감정적인 농민들의 '대중 개종' (mass conversion)이라고 비판을 계속했다. 1901년과 1909년 한국을 방문한 브라운(A. J. Brown) 총무는 1909년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고 있다.
나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대량으로 교회에 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 단위로 입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선교사들은 각자 개인으로 구별해서 조심스럽게 심사하고 학습인으로 평균 1년간 시험한다. 성경을 충분히 알고 가정 기도회를 드리고, 형편에 맞게 헌금을 드리고 변함없이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 전까지는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다. 미국교회 입교인을 이런 유형의 신자에게 한정한다면 그 수는 상당히 줄지 않겠는가?
또한 한국 기독교에 감정적 요소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불신할 수 있겠는가? 가슴은 머리 못지 않게 옳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동반되는 회개와 신앙과 헌신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인간 감정 가운데 가장 강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그것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할 경우, 기독교인 생활의 확고한 기초가 된다. 일본인이 전쟁(war)할 수 있고, 중국인이 사업(work)할 수 있다면 한국인은 사랑(love)할 수 있다.
학습 교육과 엄격한 학습 문답, 1년여의 세례 교육과 신자의 삶 시험 등을 거쳐야만 교인으로 등록했고, 이후에도 엄격한 권징(치리)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회는 급성장했던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와 신앙과 헌신"이었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넘치는 자들이었다.
2. 자치없는 자립인가?
한국 장로교회의 네비어스 정책을 언급할 때 등장하는 비판이 자치(self-governing)와 이를 위한 목회자의 수준 높은 교육문제이다. 사실 앤더슨-네비어스 노선이 이를 강조하였으나, 실제 선교 현장에서는 토착인 목회자의 안수가 연기되었고 선교사는 한 지역에서 장기 체류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자치없는 자립이란 선무당에 불과하므로 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1) 서리제도에 의한 자치
1906년에 쓴 샤록스(A. M. Sharrocks)의 말을 계속 살펴보자,
앞에서 말한 대로 선천 지부에는 78교회에 11,943명의 교인이 있다. 이 교회들은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고, 무급 영수들이 담당한다. 이 교회들은 13개 시찰로 조직되어 13명의 조사가 돌본다. 그들은 4명의 목회 선교사가 감독하는데, 두 명은 올해 안식년 휴가로 없고 다른 한 명은 현재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다. 이들이 78교회의 약 12,000명을 적절히 돌볼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는 실제로 거의 자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교인들의 자치와 자전으로 인한 급성장이 '실제적인 자치'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즉 수적 증가가 자치를 위한 기초를 형성했다고 하겠다. 느리게 성장하는 선교지에서는 소수의 교인으로도 장로와 목사를 세우고 노회를 조직하는 것이 장로교 선교의 일반 관행이었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 노회가 조직되고 7명의 목사가 안수받기 전까지 선교사만 목사였고, 선교사들만 치리를 담당했다. 이를 전통적인 장로교 정치 조직에서 보면, 브라운(A. J. Brown) 총무의 말대로, "비정상적"이고 "교회 조직은 최하위 순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외형적인 조직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이었고, 기구보다는 실제적인 운영의 문제였다.
초기 한국 현장의 교회론은 회중교회론과 자발적인 선교단체 조직에 장로교 교회론이 혼합된 형태였다. 그 결과 장로가 있는 조직 교회(church), 영수와 집사만 있는 반조직 교회(chapel), 그리고 일반 교인들만 있는 미조직 교회(group) 등과 같이 세 가지 교회형태가 존재하였다. 언더우드는 1900년 288개의 한국교회에 완전히 조직된 교회가 없는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유아기의 본토인 교회에서 본국에서와 같은 완전히 조직된 교회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조직은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하는 것이 정책"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런 미조직 교회는 한국인 영수(leader)가 설교와 목회를 책임졌다. 영수가 학습자와 수세자를 일차로 심사하였고, 선교사는 일년에 한두 차례 방문하여 한나절 동안 수십 명을 간단히 문답한 후 의식을 베풀었을 뿐이다. 치리 역시 교회 사정을 잘 아는 영수나 조사의 의견에 따라 선교사가 결정하여 처리하였다.
이처럼 초기 교회 조직의 특징은 서리제도에 있었다. 성례를 제외한 목사직을 담당한 서리 남자 목사인 조사(助事, helper)와 서리 여자 목사인 전도부인, 서리 남자 장로인 영수(領袖) (뒷날 추가된 서리 여자 장로인 勸師), 그리고 서리 남녀 집사(steward)가 있어서, 장로교 3대 교직 모두 안수받지 아니한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2) 사경회를 통한 자치 훈련
수백 년간 유교 정부의 통치를 받아오면서 개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적었던 한국인들이 교회를 조직하고 자치하게 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었었다. 민주주의 훈련이 안된 상태에서의 자치란 혼란과 개인주의를 야기할 수 있었다. 영수를 중심으로 한 서리제도의 미조직 교회를 위한 자치 훈련과 교회 권위에 대한 순종은 시급한 문제였는데, 사경회 기간의 토론회가 이를 해결해 주었다.
사경회는 우리 사업을 통일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정치와 자립, 세속 정치와의 관계 등과 같은 많은 곤란한 문제들의 정리, 공동체 정신의 발전, 확신의 심화, 지도자들의 책임감 훈련, 그리고 이 모두가 연합하여 튼튼한 기초 위에 교회를 견고히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사경회 기간 중에 직원 토론회가 따로 열렸다. 그 주제들은 대부분 교회 정치 문제였다. 1901년초 평양 사경회의 주제는 교회 정치와 조직, 교회 부동산 관리, 교회 재정 모금, 교육, 결혼, 영수의 의무 등이었다. 1902년 1월 황해도 사경회에서 영수들의 토론 주제들은 남녀 학교, 가정 경제, 조혼 금지, 묘자리 등이었다. 이러한 초기 토론회가 발전되면서 직원 사경회가 분리되었고, 직원 사경회에서는 좀더 다양한 교회 현안들이 다루어졌다.
(3) 자치를 위한 한국인 목회자 교육
토착교회의 자치는 토착인 목회자 양성과 교회 조직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네비어스 방법과 신학교육의 문제는 한국에서 늘 논쟁의 대상 내지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네비어스 방법때문에 한국인 목사들의 신학 교육 수준이 너무 낮아졌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먼저 간단히 중국의 신학 교육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에서 토착인 목회자 문제가 본격적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1877년 제1회 상해 선교대회에서부터였다. 이 때 용어 문제가 심도있게 토론되었는데, 비록 일치된 신용어에 합의하지는 못했지만, 신학교육에 중국 문화와 사상을 고려해야 된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선교 자금으로 본토인 전도자를 고용하는 문제도 찬반이 엇갈려 의견의 일치는 보지 못했는데, 이 토론으로 교육받은 본토인 목회자의 필요성이 제고되었다. 또한 신학교육 문제가 세 번쨰 주요 의제였는데, 학문적 교육과 실천적 교육의 두 입장이 대립되었으나, 여전히 후자를 지지하는 선교사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소년 기숙사 학교에서 교육받은 자나 대학에서 교육받은 자들보다는, 교회에서 신앙과 인격에 인정을 받은 자로 세상 경험도 많은 성인 가운데 목회 후보자를 뽑아서 목회 현장에 필요한 실제적 훈련을 받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네비어스는 이 세 가지 논쟁점 가운데, '상제' 찬성, 선교자금으로 본토 전도인 고용 반대, 성인 대상 실천 목회 교육 지지 노선에 서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와 중국 각지에 영어를 수단으로 가르치는 대학들이 들어서고, 고등교육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신학 교육은 학문적 노선과 실천적 노선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지역에 비해 산동 지방 대학들은 영어로 수업하는 데 반대하고 1920년대까지도 중국어 수업을 고집했다. 영어 교육과 중국어 교육 사이에서 타협적인 세 번쨰 입장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만, 성경학교와 사범학교는 중국어로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영어 교육을 받은 자들은 월급이 많은 무역 회사 등에 취직하고 일부만이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또 이들도 일반 대중의 필요와 거리가 먼 학문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이라 목회 현장에서 문제가 생겼으므로, 목회자 수급을 위해서 일반 대학보다 수준이 낮게 중국어로만 가르치고 실천적인 훈련에 중점을 두는 신학 교육을 하는 방안이었다. 이 세 번쨰 노선은 1907년 중국선교 100주년 선교대회에서와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지지를 받았다.
한국 초기 선교에서는 일반 학교의 경우 북감리교는 배재학당에서 보듯이 영어-고등교육 노선을, 장로교 학교들은 토착어-초등교육 노선을 따랐으며, 신학 교육은 위에서 말한 세 번쨰 노선인 토착어-실천적 교육을 진행했다고 하겠다.
네비어스가 산동에서 실시한 신학 교육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890년 네비어스로부터 이 경험을 전해 들었을 한국 선교사들이 목회자 교육을 서두르지 않고, 1896년 레놀즈(W. D. Reynolds)가 제안한 대로 그 수준도 일반 교인보다 너무 높지 않게 하향 조정하고 미국 유학도 잠정적으로 유예시켰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1888년 12월 언더우드의 사택에서 시작된 "신학반"은 1900년까지 농한기를 이용한 사경회 형태의 단기과정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급성장으로 선교사들은 목회자 양성 문제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고, 한국인 조사나 장로들을 대상으로 한 정규 신학교를 1901년에 설립하게 되었다. 이는 1900년 평양공의회 위원들의 헌의도 있었지만, 1901년 방한한 브라운이 급성장하는 한국교회가 장기적으로 건전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도"도 중요하지만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토착인 목회자 교육이 급선무라고 제안한 결과였다. 브라운은 네비어스 방법의 지혜를 인정하고 너무 많이 교육받은 목회자는 반대하였지만, 선교사 수를 늘리기보다는 토착인 목회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데니스(James S. Dennis)의 노선과, 선교사는 목사가 아니라 일종의 감독과 같다는 로스(John Ross) 노선을 따라, 목회자 교육을 강조했던 것이다. 곧 평양의 숭실학교 설립과 더불어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조기 설립은 네비어스 방법을 수정한 결과였다.
다음은 평양 선교 10년째인 1903년 8월에 쓴 마펫의 글이다.
우리가 교육을 무시했다고는 믿지 않으며, 상황에 맞게 적용시켰다. 10년만에 교인이 100명에서 20,000명으로, 수세자도 수십 명에서 5,000명으로 지속 성장한 것을 고려할 때, 그 10년 동안 산동이나 다른 지역에서 40년 동안 이와 비슷한 수적 성장을 하면서 교육한 자들과 같은 노선으로 이 많은 교인들을 목회할 자를 교육시킬 수는 없었다. 우리는 비록 제도적 교육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교육의 기초를 놓기 전에 많은 교구민(constituency)을 복음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을 기독교인 교구민을 가지고 있고, 1,000명에 가까운 학생이 다니는 초등학교들과 내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 고등학교가 있다. 이것은 많은 자들을 모아 들인 전도사업에서 성장해 나왔다.
"전도" 우선의 급성장이 10년만에 "교육"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상황을 만들었고, 이 새 상황에 네비어스 방법은 적응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1902년 9월 선교사공의회는 1년에 3개월씩 5년 과정의 신학 교과과정을 마련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교육하여 목사 안수를 앞당겼다. 1907년에 배출된 최초의 장로교 7인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받은 교육을 보여주는 이 교과과정은 첫 해는 수정 없이 그대로 따랐고 1904∼1907년에는 일부 수정하였다. 첫 두 해 동안 수업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 해
성경 구약: 개요- 5경; 책- 창세기
신약: 개요- 복음서, 책- 마태복음(Happer 주석)
교회사 구약 유대사, 현대 만국사
신학 신론, 성경, 영감, 삼위일체
설교학 공중 연설, 본문 분석, 낭독
교회 표준 〈耶蘇敎要理問答〉(소요리문답)
일반 역사 Sheffield 《萬國通鑑》1, 2권
일반 독서 Williamson《基督實錄》
지리 그리스도 당시 팔레스틴
교양 산수 : 가감승제
둘째 해
성경 구약: 개요- 여호수아, 사사기, 역사서; 책- 출애굽기 신약: 개요-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서; 책- 마가복음 (Faber 주석과 Swallen 개요), 고린도서(Nevius, Dodd, Miller 주석들)
교회사 Corbett 《聖會史記》의 사도시대사
신학 창조, 인간, 죄, 사탄
설교학 설교 개요
교회 표준〈信道揭要〉(신앙고백)
일반 역사《萬國通鑑》3, 4권
일반 독서 Martin《天道溯源》
지리 족장 시대의 팔레스틴, 바울의 여행
교양 산수 : 분수와 소수
1907년 공의회 회의록에 의하면 그 해 안수 받은 목사 7인은 5학년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교과를 수업했다.
목회신학 Hunt, 교회사(종교개혁 이후) Sharp
지리 Grierson 욥기 Grierson
미국사 Blair 天道溯源 Sidebotham
로마서 Junkin 말세학 Swallen
다윗과 시편 Ross
이상 5년간 수업 내용을 요약하면, (1) 성경 과목에서 신구약 개론과 5경과 이사야·다니엘, 시편과 욥기, 복음서와 사도행전, 로마서·고린도서·계시록 등의 중요한 책들 ; (2) 교회사는 코베트(Corbett)의 《성회사기》(聖會史記)1·2 권 전체 ; (3) 조직신학 전반(특히 말세학) ; (4) 설교학(Du Bose의《福音講臺》와 무디의 설교 등) ; (5) 교회 표준으로 소요리문답, 신앙고백, 교회치리, 예배모범, 성례 ; (6) 신앙서로는 A. Williamson의《기독실록》(基督實錄), W. A. P. Martin의《천도소원》(天道溯源), W. Muirhead의《천도실의》(天道實義), Hayes의《구세략설》(救世 設), James의 천주교 비판서인《양교변정》(兩敎辨正)등 ; (7) 일반역사는 쉐필드(Sheffield)의《만국통감》(萬國通鑑) 5권과 매켄지(Mackenzie)의 19세기 역사인《태서신사》(泰西新史), 페이버(Faber)의 문명사인《자서조동》(自西 東), 미국사 ; (8) 지리는 팔레스틴 지리 외에 고대 국가, 유럽, 헐버트의《 민필지》등이다. 이는 당시의 중국·일본·한국에서 지식인들을 위해 저술·번역된 최고 수준의 한문 신학서를 교재로 한 상당한 수준의 신학 교육 내용이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제도적 근대 교육을 받지 않은 자들을 선발하여 조사로서 실천 목회를 하면서 5년간 일반 교양과 상당한 수준의 신학 교육을 받게 해서, 수세 후 약 10년 여만에 목사로 세운 선교사들의 행동은 자치를 연기시킨 것으로 보기 힘들다. 1907년 안수받은 7명의 목사 가운데 양전백(36세로 최연소)은 1893년에, 김종섭·방기창(55세로 최연장자)·송인서는 1895년에, 이기풍은 1896년에, 길선주는 1897년에 각각 세례를 받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들은 모두 기혼자로서 가족을 책임지면서 "전도자요 설교자요 영수로" 신학을 했다. 그것은 네비어스 방법에서 교회 지도자는 본래 직업을 떠나지 않고 부름받은 현장에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토착 교회 성장에 더 적합하다는 이론을 따른 것이다. 그가 속한 삶의 현장을 떠나 나머지 교인과 이질적인 근대 교육을 받으면 본래 환경과 유리되어 버린다는 중국 선교 경험을 따른 조치였다. 그리고 신학 교육은 과중한 육체적·정신적·영적 부담을 고려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마펫의 말처럼 선교사들은 "뒷날 목회 지원자의 대부분이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마친 후에 입학하면 교과과정을 조정해야 할 것이고, 수업 학기와 학년도 바꾸어야 할 것"으로 계획하였다.
그러므로 백낙준과 같은 이세대 지도자가 비판하는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한 구세대"의 문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실 고등 교육기관인 평양의 숭실학교(1905년 장감 연합으로 한국의 첫 대학부 설립)와 서울의 연희전문학교(1915년 설립)는 네비어스 방법을 수정해서 세워졌고, 이는 전도사업의 결과 교회가 성장한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따라서 일세대 목회자에게 근대 교육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었다. 물론 장로교가 감리교의 배재학당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을 일찍부터 운영하지 않은 정책은 비판받을 수 있겠지만, 소수의 선교사로 급성장하는 교회들을 돌보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만주의 장로교회처럼, 고등교육은 우선 순위가 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었다. 1917년 이광수가 지적했듯이, 1세대 목회자들은 "세상 지식"(世上知識)과 "하나님 지식"을 대칭적으로 보는 태도로 나갔고, 고등교육기관을 졸업한 2세대들은 신학교로 들어와 목회자로 헌신하기보다는 중국·일본 등지에서처럼 높은 급여를 주는 세속 직업으로 나갔다. 결국 세속 교육보다 한 단계 낮은 신학 교육이 중국에서처럼 한국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를 네비어스 정책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일 것이다. 네비어스 정책이 고등 신학 교육 노선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나, 그 정책을 택하지 않은 다른 선교지에서도 본토인 목회자의 낮은 교육 수준 문제는 초기 선교의 일반적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2년부터 신학 교육에서 네비어스 방법을 수정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에서 신학교육이 이루어졌음도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결론적으로 선교 20주년이 되기 전인 20세기로 접어들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신학 교육과 목회자 양성에서도 자치를 향해 새롭게 나아가고 있었다고 하겠다.
(4) 자치를 위한 의학 교육
1900년 경부터 한국에서 장감 선교회는 서로 합의하여 감리교는 출판사업을, 장로교는 의료사업을 전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감리교는 이 때 선교의 문을 여는 수단으로서의 의료선교는 한국에서 더 이상 필요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와 에비슨(O. R. Avison) 등 장로교 선교사는 의료사업의 일차 목적이 치유 자체에 있다는 선교관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당시로서는 거대한 기관인 세브란스 병원을 건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역시 네비어스 방법 이 1901년을 지나면서 수정된 한 예이다.
1900년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에서 에비슨(O. R. Avison)은 "선교지마다 토착인 의사와 간호원 양성을 위한 좋은 학교"를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선교사는 임시적 존재"로서 궁극적으로는 토착인이 모든 분야를 책임져야 한다고 보고 이를 제안했다. 곧 정부에서 의학교를 운영할 때가 오므로 그때 교수가 될 "기독교인 의사"를 미리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비슨은 이 대회에서 시설이 좋은 연합 병원(union hospital)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선교회들간에 예양(comity)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에비슨의 "예양과 일치"를 주제로 한 연설에 감동된 세브란스(L. H. Severance)가 $15,000의 거금을 기부하여 1902년 추수감사절에 서울에서 세브란스 병원과 의학교의 기공식이 열리고, 1904년에 완공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의학과 병원 분야에서의 자치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본 논문의 한계를 넘는 것이므로 생략한다. 다만 1907년 7명의 한국인 목사 안수와 더불어 1908년 6월 3일 7명의 한국인 의사가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것은 한국 기독교의 자치를 위한 힘찬 새 출발이었다.
3. 방법인가 정신인가?
1902년 평양의 의사 웰즈(J. H. Wells)는 평안도에서 1895년 100명의 신자에서 8년만에 15,000명(수세자 3,728명)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룬 결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대성공을 말이나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법'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천주교도 전혀 다른 방법으로 비슷한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유일한 다른 개신교 선교회인 감리교는 우리와 동일한 결과를 얻었는데, 그들의 '방법'은 우리와 다르지만 (비록 대체로 한국인은 그 차이를 분명히 모르지만), 실제 진행에서는 많이 다르지 않다. (중략) 그러나 비록 사업상 특별한 방법은 없지만 실제 이루어진 일들은 '특별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예를 들면 자립이 고통스러울 정도까지 추진되었다.
방법이 아니라 실제 이루어진 자립이 특별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한국교회 급성장 원인에 대한 두 가지 대표적인 해석과 이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줄 안다. 첫째는 한국교회 성장의 주원인을 네비어스 방법으로 보는 입장이다. 클라크(C. A. Clark)는 그 가운데서 "성경공부의 강조"를 핵심 요소로 꼽았다. 그러나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가 지적한 대로 여러 선교지에서 성경공부를 강조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도 많았으므로 성경공부의 강조가 성장의 핵심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두 번째 입장은 1901년 한국을 방문한 브라운 총무의 분석이다. 그는 급성장 원인을 네비어스 정책보다는 한국의 정치·사회·문화·종교 등 상황적 요인에서 찾았다. 그러나 베어드는 브라운이 제기하는 외부상황적 요인이 핵심 성장 요인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좀더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역 공동체의 "예배 주도권"(Worship Initiative)에 관심을 두었다. 즉 선교사나 파송되어 온 전도사 등 외부인이 아닌 교인들 스스로가 예배 인도와 설교와 가르침을 책임지고 처리해 나가는 체계는, 한국을 비롯 수천 년간 예배 공동체를 형성해 왔던 여러 지역 공동체에서 마을 사람들의 영성을 만족시켜 주고, 예배 인도자와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교회에서 지도력을 확립하고 제자도를 훈련받을 수 있게 해 주므로, 자체 내부 발전이 가능하여 자급·자전·자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베어드의 제3의 해석도 역시 한국인의 영성과 정신을 강조하였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철저한 자립은 선교사들이 주도한 것인가 아니면 한국 교인들의 자기 희생적이고 자립적인 태도가 이런 발전을 이끌어 나갔던가? 두 요소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었다고 보지만 후자의 요소가 강했다고 본다. 선교사들은 네비어스 정책에 대한 자신들의 확고한 신념과 일관된 정책 추진을 강조했다. 마펫은 7년간의 한국 선교후
토착교회의 자급정책은 전적으로 개인 선교사에 의존한다. 만일 한 개인 선교사가 그 방법이 최선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으면 토착교회로 하여금 추진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확신이 없으면 본부에서 토착교회 자금 지원을 철회해도 토착교회에 돈을 주지 못하게 막을 수 없다. 선교사는 본부 외에 다른 곳에서도 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1934년 희년선교대회에서 스왈른은
나는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신념을 가졌다. 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그들 스스로 교회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나는 그들이 어떻게 해 나갈지 몰랐지만, 내 마음에 그러한 확신이 왔다. 이제 40년이 지난 지금 이 문제에 대해 내 생각을 바꿀 이유가 없다.
라고 회상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확고한 신념과, 후속 선교사들이 이에 동의하고 초지일관 추진해 나간 정책이 한국교회 자립을 성공시킨 이유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둘째, 그러나 한국 교인들의 강력한 자립정신이 선교사들의 정책 추진을 가능케 했고 오히려 점점 이를 주도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한 예가 1897년 소래교회가 자발적으로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인" "자신들이 지원하는 외국 선교사를 요청"한 것이다.
지낸달 이십오일브터 쟝로회에셔 회의 제즁원 의 어비슨씨 집에셔 셜시�엿난 (중략) 그즁 데일 됴흔 곳은 장연 숑쳔교회에셔 말하기를 외국 목 즁에 누구던지 나려와셔 우리를 치면 무리들이 그 목사를 위�야 가 를 사셔 줄 거시오 그 목 의 일용 것과 부리 하인의 의식을 다 당�겟다고 �다더라.
이는 그 해 있었던 인도 기근을 위한 연보와 더불어 자원주의가 얼마나 한국교회에 충만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1900년 빈튼은 한국교회는 "거의 자발적이고, 비조직적으로, 목사없이 성장했으나, 세계 역사상 가장 사도시대의 모델에 가깝고 활기차게 자립하며 자전한다"고 지적하면서, 문제는 넘치는 교인들을 어떻게 지도·훈련할 것인가라고 했다.
따라서 초기 한국교회의 급성장의 비밀은 '방법'이 아니라 한국 교인들의 탁월한 자립·자전·자치적 정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의 정책이 아니라 한국 교인들의 태도가 중요했다. 선교사들이 네비어스나 로스의 방법을 시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폭발적인 한국 교인들의 전도열과 성장력 앞에서 선교정책과 규칙들을 계속해서 수정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준비된 마음이 선교사에게 박차를 가하게 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 초기 한국 장로교회는 네비어스-로스 노선을 따라 자립과 자치, 토착화, 교회 일치, 충만한 생명력을 이룩하면서 급성장했다. 이는 거품성, 서구형, 교파 분열성, 제도성 성장의 문제를 안고 있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새롭게 들여다보고 배워야 할 귀중한 유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