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함덕 초등학교 선흘 분교장
함덕에서 한라산쪽으로 6~7km 가량 올라가야 되는 중산간 마을인 선흘리는 원래 알선흘(낙선동)과 선흘 본동, 백해동, 그리고 선인동(선흘 2구) 등으로 이루어진 가호 수 400~500호에 인구 2,000명이었던 큰 마을로, 지금도 선흘곶(동백숲)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그런데 해방 직후 공교롭게도 이 마을의 불화는 이 숲에서 비롯되었다. 일제 때 구장을 지낸 부 아무개는 일제 말기에 30여 만평의 선흘곶을 불하받았는데, 해방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도로 찾을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에는 남로당 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제주에 서청이 들어와 있었다. 권력의 위세를 알고 있던 부씨는 곧 서청을 불러들였다. 서청과 연결된 부씨와 마을청년과의 대립은 확대되어 관이 싸움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 되었다. 부씨는 상대를 경찰에 고소하고, 경찰이 출동하자 마을 청년들 쪽에서는 경찰을 피하는 방법으로 입산하기 시작했다.72)
이 선흘리는 변변한 사상가나 토벌대의 주목을 받는 무장대의 주모자급 인물이 한 명도 없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선흘곶 벌채와 관련한 마을의 알력은 많은 젊은 청년들을 마을에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73)
그러나 당시 조천면 전체가 활동이 강했던 지역이므로 선흘리에도 그 여파가 미쳐 허씨 5형제(허남익, 허남섭, 허남홍, 허남식)가 주동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 결과 인민위원회(위원장 허남섭)가 조직되었고, 여성동맹 활동도 허씨 형제의 부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4․3 와중에 한때 선흘리에 남도당 제주도당이 이동해 와 있었다는 증언도 있었다.74) 1948년 5․10선거 때 선흘리에는 선거를 거부하기 위해서 북촌리를 중심으로 한 해변 마을 사람들이 올라왔고, 조천면 전체 대부분 지역에서처럼 선거가 이루어 질 수 없었다.75)
이 선흘리에 소개령이 내려진 것은 1948년 11월 21일 경이었다. 선흘리에서도 북촌, 함덕으로 소개되어 내려가기도 했지만, 많은 주민들이 선흘곶의 목시물굴, 대섭이굴, 도틀굴(일명 반못굴) 등으로 숨어 들었다.76) 선흘리는 4․3을 거치면서 근 300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1948년 11월 25일 도틀굴을 시작으로 한 학살이 다음날 목시물굴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고, 27일과 28일 엉물학살에 이르기까지 4일 동안에 1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희생되는 등, 동백나무 군락이 무성한 선흘곶은 피냄새가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77)
함덕초등학교 선흘분교장(1995년 3월 1일 부)은 1936년 4월 5일 선흘 간이학교로 시작되어, 1944년 5월 15일 선흘공립국민학교로 승격 개교한 학교였다. 이 선흘교의 4․3에서의 피해 상황을, 선흘교에서 펴낸 자료와 「제주교육사」(1999)는 방화의 주체를 밝히지 않은 채, “1949년 10월 18일 4․3으로 교사가 전소되어 한 때 폐교되었다.”78) 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선흘리 주민 김형조79)․박기행80)․부보배81) 등은 선흘리 주민들이 소개된 것은 1948년 11월 21일이었고, 이날 토벌대에 의해 텅빈 선흘리 마을이 방화되면서 선흘교도 이날 함께 전소되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따라서 1949년 10월 18일에 선흘교가 전소되었다는 기록들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고, 학교 방화도 토벌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더불어 기록해야 할 것 같다.
선흘리 주민 오태권82)․고두희83)․고태식84)․김형조․오태엽85)․박기행․부보배 등은 4․3 당시에도 선흘교는 현재 위치인 조천읍 선흘1리 1018번지에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당시 학교 규모는 <그림 14>의 평면도처럼 <그림 15>의 자리에 2개 교실과 소규모 교무실이 있는 60평 정도의 석조 기와의 본관, 그 뒤쪽(북)으로 목조 기와의 변소 1동, 본관 남서쪽으로 목조 도당(함석)의 관사(방, 마루, 방, 부엌)에, 교실은 25평 정도 크기였고, 학교 부지는 지금은 약 3,500평 정도지만, 4․3 당시에는 1,000평 정도로, 교문은 남쪽 울타리 중앙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증언을 종합하면 4․3으로 인한 선흘교의 피해는 소규모 교무실을 포함한 3개 교실과 관사 등이 전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부보배는 간이학교 5회 졸업생들이 마련한 풍금이 소개되면서 함덕교로 넘어갔다고 증언하였는데, 이 증언을 통해 학교 비품의 일부가 소개 학교인 함덕교로 옮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선흘교 4학년이었던 오태엽은 학생은 4학년까지에 60명이 조금 넘었다고 하였다. 오태권과 고태식86)은 1948년 11월 25일에 도툴굴이 발각되면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한 고태식이 당시 선흘교 학생이라고 증언해 주었다. 이 고태식(高泰植)을 「제주도4․3피해조사보고서-수정․보완판」(1997)에서 확인한 결과 당시 17세였으며, 피해일자는 1948년 10월 25일로 신고되어 있었다.87)
4․3 때 빨치산 소년 대원으로 활약했다는 안중택(작고, 당시 13세)은 원래 선흘리 출신으로, 산에 올라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 앞에서 선서까지 하였다고 하며, 선서에 앞서 왜진돌이(술래살리기) 등 방법으로 선흘교를 휴교 조치하는데 주모자 역할을 하였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아이들과 모의하고 술래를 따라가는 척하고 교문 밖으로 달아나서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을 사람 300여 명과 함께 산에 올랐다가, 후에 잡힌 후 석방되어 함덕교 4학년에 편입되었다 한다.88) 안중택의 증언에 따른다면 선흘교 학생들의 일부가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으나, 오태엽은 이런 사실이 있었는지 잘 모르는 일이라고 증언하였다.
오태엽․박기행․부보배 등은 4․3 당시 선흘교에는 교장 양명만(명월리), 교사 이창진․조홍배(선흘) 등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교사들간에 사상적 대립도 없었고, 4․3에서 교사들의 피해는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기 전 선흘교에는 1948년 10월 중순경부터 경비대가 주둔89)하고 있었고, 주변 주민들을 잡아 감금했다가 알선흘(낙선동)의 고병방통 등으로 끌고 가 학살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특히 1948년 10월 31일에는 선흘리 주민 등 8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들은 선흘교에 감금되었다가 학살된 사람들이었다.90)
선흘교는 4․3으로 전소된 후 폐교91) 되었다가, 1950년 8월 13일에 함덕교 선흘분교장으로 개교하게되고, 마침내 1953년 4월 1일에 선흘교로 승격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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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 : 선흘 1리 1018 번지
∙ 대지 : 약 1,000여 평
∙ 건축재료 : 석조 기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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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소실 전 학교 터
72) 안중택(작고, 성산읍 고성리)의 증언 : 오성찬, 「한라의 통곡소리」, 소나무, 1988, p.39에서 인용.
73) 제주4․3연구소, 「4․3과 역사」30호, 제주:온누리 인쇄문화사, 1998, p.8.
74) 제주4․3연구소(1989), 앞의 책(Ⅰ), pp.130~131.
75) 제주4․3연구소(1989), 앞의 책(Ⅰ), p.107.
76) 제주4․3연구소(1998), 앞의 책(Ⅰ), p.8.
77) 제주4․3연구소(1989), 앞의 책(Ⅰ), p.15.
78) 제주도교육청(1999), 앞의 책, p.279 ; 선흘국민학교, 「선흘학구향토지」, 제주:삼원인쇄사, 1987, p.57.
79) 1922년생, 선흘리.
80) 1926년생, 선흘리, 선흘리 노인회장.
81) 여, 1925년생, 선흘리.
82) 1916년생, 선흘리.
83) 1936년생, 선흘리.
84) 1942년생, 선흘리.
85) 1935년생, 선흘리, 당시 선흘교 4학년.
86) 1942년생, 선흘리.
87)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89.
88) 오성찬(1988), 앞의 책, pp.39~41.
89) 김상효(봉개동)의 증언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720에서 인용 ; 제민일보 4․ 3취재반(1997), 앞의 책(④), p.320.
90) 차경구(여, 증언 당시 78세, 선흘리)의 증언 : 제민일보 4․3취재반(1997), 앞의 책(④), p.321에 서 인용.
91) 그 폐교 일자를 제주교육연혁지(1987)에는 49년 10월 18일로, 김민규의 「조천읍지」(1991)에는 1949년 4월 3일로 되어 있다.
글과 사진 : 함덕 초등학교 선흘 분교장, 제주큰동산, 2013.02.08, 제주 서귀포시 보목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