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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잘못된 인터넷 자료 모음(수정요청 자료)-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7차--안항식(安恒植) 안병찬(安炳瓚) 안창식(安昌植) 안병림(安炳琳)
순흥안씨 잘못된 인터넷 자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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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항식(安恒植) 에 대하여 1860년(철종 11) ∼ 1922년 . 한말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
본관 미상(未詳)ㅡㅡㅡ>순흥(順興) <수정요망>
상세내용
........중략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ㅡㅡㅡ>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추가등재요망>
<2>
상세내용
........중략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ㅡㅡㅡ>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추가등재요망>
<3>
<인물등재요청>
안창식(安昌植)
1838-1895 (1838. 3. 20~1899. 10. 30)
순흥인 안창식은 고려조 좌찬성 문성공(左贊成 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예(後裔)로
효행(孝行)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증직(贈職)을 받은 경량(璟良)의 손자(孫子)이다.
그는 헌종(憲宗) 4년 무술(戊戌 1838) 2월에 출생(出生)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고 네 살 때에 할아버지가 그의 재주를 시험(試驗)하기 위하여 글을 지으라 하니
곧 「사람의 소리에 산이 운다」하고 말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였다.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그때 판서(判書)였던 이건필이
그 의 재주와 효성이 아까워 벼슬 자리를 천거(薦擧)하였으나 늙은 부모(父母)를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이를 사양(辭讓)하였다.
갑오(甲午 1894) 동학운동 때 홍주성이 동학군(東學軍)에게 포위(包圍)되어 위급(危急)하게 되자
군사를 모집하여 초토사(招討使)였던 이승우를 도와 평정하였다.
이에 이승우가 조정(朝廷)에 보고하여 벼슬을 내리도록 하였으나 끝내 사양(辭讓)하였다.
을미(乙未)년 8월 국모(國母)의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창식은 그의 아들 병찬에게
"나는 늙어 힘이 없으나 뒤에서라도 도울 터이니 나라를 위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라"고 하였다.
이에 병찬은 채광묵 과 같이 수백명의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홍주성에 들어갔다가
당시 이승우의 배신으로 실패(失敗)하여 이승우에게 김복한 등과 같이 체포(逮捕)되었다.
창식도 아들과 같이 체포(逮捕)되어 홍주옥에서 서울로 이수되어 형을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特使)로 다음해 병신(丙申)년 봄에 석방(釋放)되었다.
그 후 날로 기울 어지는 국사(國史)를 걱정하다가 을미(乙亥 1899)년10월30일 홍주 다동에서 세상(世上)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안창식의 본은 순흥(順興)이니 문성공 안향(文成公 安珦)의 후예로서 대대로 홍주의 남쪽에 위치한 청양 화성(靑陽化城)에서 살면서 문학을 전업으로 삼았다.
그는 형체가 장대하고 기개가 고상하며 침착하고 강개하여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나라 일을 걱정해 왔다.
그의 이러한 성품이 병찬(炳燦)・병림(炳琳) 두 아들을 의병운동에 투신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특히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운동의 반민족적 측면을 우려하여서
1895년 여름부터 비밀히 거의(擧義)할 뜻을 두고서 한두 사람의 동지와 함께 광호(廣湖)등지로 가서 저자 사람을 앞세워 먼저 일어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른바 홍주의진의 선구자들인 박창로(朴昌魯)・이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정제기(鄭濟驥)・
송병직(宋秉稷)・조병고(趙秉皐)・김정하(金正河)등과 더불어 가만히 서로 왕래하면서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 아들 안병찬(安炳燦)이 전 승지(承旨) 김복한(金福漢)・전 승지(承旨) 이설과 함께 구체적으로 거사 계획을 세우고
1895년 12월 1일 홍주성으로 입성할 계획을 세우고 찾아왔다.
마침 안창식은 그 고을 사람인 채광묵(蔡光默)과 더불어 180명의 민병을 모집해 놓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그 군사를 내놓아 채광묵과 함께 원통한 사정을 하소연한다고 핑계하고 관문(官門)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날이 11월 29일 홍주의진의 첫 입성이었다.
화성(化城) 의병의 입성을 계기로 여러 의병장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속속 홍주로 들어왔다.
이러한 의병의 기세에 눌려 관찰사(觀察使) 이승우(李勝宇)가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 되어 각지로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끝내 이승우의 배반으로 12월 4일 성안에 있던 의진의 수뇌부가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아들 안병찬도 체포되었다.
집에 있다가 이 소식을 접한 안창식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홍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중도에서 돌아왔다.
다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승우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월 20일 안창식은 을사 홍주의거와 관련되어서 체포되었다. 심문받을 때 창식은
"30년 동안 군림하신 국모(國母)가 적당에게 시해를 당하셨는데 도리어 원수를 갚으려는 자를 역적이라고 한다면 국모를 시해한 자는 마침내 충신이란 말이냐.
시골의 미천한 자가 혹시 높고 귀한 이의 상투나 수염을 움켜잡아도 오히려 패악무도한 자라 이르는데,
하물며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는 자이랴.
도리어 역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역적으로 만든다면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는 자가 마침내 충신이란 말이냐." 라고
항의하였으며, 한사코 뜻을 번복하지 않았다.
1896년 정초에 두 부자와 의진 관련자들 23명이 모두 서울 법부로 압송되었으나 도중에 안창식은 연로하여 일찍이 고향으로 돌려보내어졌으며,
아들 병찬은 재판에 회부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지(特旨)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714~715.
註・騎驢隨筆 50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170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2卷 259~266・272・273・275・280面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인물 > 독립운동가자료 > 독립운동자공적자료
근거자료ㅡㅡㅡ>
안항식(安恒植)
순흥안씨1派26世-참판공파-의병 독립운동가
홍성군(인물) 구국(救國) 충의(忠義)
안항식(安恒植)
순흥인(順興人) 안항식은 병오년에 민종식이 영도한 의병(義兵)에 가담(加擔)하였다.
홍주성에서 싸우다가 적(適)에게 사로잡혀 대마도(對馬島)로 유배(流配)되었는데 옥리가 주는 왜식(倭食)을 거절(拒絶)하고
마침내는 한식(韓食)으로 옥중(獄中)생활(生活)을 하다가 석방(釋放)되 었다.
-홍성군(인물)-
안항식(安恒植)
1860(철종 11)∼1922.
조선 말기의 의병.
충청남도 청양 출신.
향리에서 도학을 강구하고 후진교육에 전념하던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 음력 4월 중순 정산(定山 : 지금의 청양)에서 은거하던 전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산(鴻山)의 지치(芝峙)에서 의거하였다.
그 뒤 홍주성으로부터 패주한 관군과 일본군이 홍주성을 재탈환하고자 대공세를 감행하자 수일간의 공방전을 전개하며 성을 사수하였으나,
윤4월 9일 새벽전투에서 패전하여 동지 80여 명과 함께 적의 포로가 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던 중 적이 제공하는 식사를 거절하는 등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
해 7월 윤석봉(尹錫鳳) 등 70여 명이 석방되고, 남규진(南奎振)·유준근(柳濬根)·이식·신현두·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
신보균·최상집(崔相集)과 함께 유죄선고를 받고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얼마 뒤 태인에서 의거한 최익현(崔益鉉)이 이 곳으로 유배되어 오자 시와 학문을 논하였으며,
동지와 함께 최익현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국권상실 후 풀려나 향리에서 주경야독하며 지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2·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1997)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인물 > 독립운동가자료 > 독립운동자공적자료
청 대 사 (靑垈祠)
순흥안씨 충의효행 기적비 "비문 중에서"
-전략- 안창식(安昌植)께서는 종제인 화농 안항식(安恒植)과 그 아들이자 증조이신 규당 안병찬(安炳瓚)
그리고 증증조 안병림(安炳淋)과 함께 홍주의병운동에 참가하셨다.
그 우국충정 누라서 따르겠는가 한 가족이 다함께 생명을 초개같이 아끼지 아니하시고 항일 전선에 뛰어드심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길이 빛나는 나라사랑 충절의 표상으로 이는 조상대대로 이어지는 충효에 바탕한 문중의 기상이자 자랑으로서 우리 모두가 몸둘바를 모르게하는 바이다.
의병운동이 세불리하여 왜적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고 옥살이를 당하셨는가 하면 증고조 항식어른께서는 대마도에 유배되시는 욕을 당하셨다.
지역특산품 : 구기자, 청양고추 (우편주문, 현지구입)
청대사(靑垈祠)
충남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청대골에 위치한 청대사는 1994년 9월에 건립된 사당으로
순흥안씨 문중 출신 애국지사 4명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홍주의병 안창식(安昌植)선생과 안병찬(安炳瓚).안병림(安炳淋)부자, 안항식(安恒植)선생의 곧은 뜻을 기리는 청대사(靑垈祠)는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일어난 홍주의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네 분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해마다 청양군수, 홍성보훈지청장, 청양문화원장 등이 봉행에 참석하며
순흥안씨 유족대표와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다.
홍주의병 활동으로 안창식 선생 3부자는 옥고를 치렀으며 3·1운동 당시 유림들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파리장서 사건까지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홍주의병은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홍성군을 비롯한 충남 서부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으로
1906년 5월에는 단일 전투로는 최대 희생자를 낸 홍주성 전투를 치르다 일본군에게 300여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순흥안씨 충의효행 기적비 "비문 중에서" 보면
-전략- ....창식께서는 종제인 화농 항식과 그 아들이자 증조이신 규당. 병찬 그리고 증증조 병림과 함께 홍주의병 운동에 참가하셨다.
그 우국충정 누라서 따르겠는가 한 가족이 다함께 생명을 초개같이 아끼지 아니하시고 항일 전선에 뛰어드심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길이 빛나는 나라사랑 충절의 표상으로 이는 조상대대로 이어지는 충효에 바탕한 문중의 기상이자 자랑으로서 우리 모두가 몸둘바를 모르게 하는 바이다.
의병운동이 세 불리하여 왜적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고 옥살이를 당하셨는가 하면 증고조 항식어른께서는 대마도에 유배되시는 욕을 당하셨다.
충효절의와 애국정신에 투철한 가문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숭조목족(崇祖睦族)하는 모범된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子
안병찬(安炳瓚)
安炳瓚
1854(철종 5) 충남 청양~1929.
한말의 의병장·독립운동가.
기타 인명 안병찬(安炳燦)/한일선(韓一善)
연령 76
항일/국방 / 의병
1854(철종 5)∼1929. 한말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치규(穉圭), 호는 규당(規堂). 충청남도 청양 출신. 창식(昌植)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홍주의 교임(校任)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당시 초토사(招討使) 이승우(李勝宇)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 데 일익을 맡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金福漢)·이설(李설)·임한주(林翰周)·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그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처음에 동학농민운동 평정의 공으로 관찰사로 승진하여 와있던 이승우를 의병장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실패,
뒤에 오히려 배신당하여 그를 비롯한 홍주칠의사(洪州七義士)가 모두 잡혔을 때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 후 홍릉주사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
그해 2월 23일 박창로(朴昌魯) 등 40여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閔宗植)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1만여명으로 구성된 홍주의진은 그해 윤4월 9일 적의 포위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82명 사망,
145명이 잡히고 그 중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간신히 피신하였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병림(炳琳)·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하였으며 삼부자가 모두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추서되었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703~704.
註・騎驢隨筆 50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2卷 304・317・331・332・333・334面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인물 > 독립운동가자료 > 독립운동자공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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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등재요청>
안병림(安炳琳)
의병장(義兵將)
1860. 11. 18~1929. 12. 2
안병림은 홍주(洪州)의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안창식(安昌植)의 아들이며, 병찬(炳瓚)의 아우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문성공 안향(文成公 安珦)의 후예로서 전통적인 유가(儒家)에서 성장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의병운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의 부친과 형은 일찌기 을미 홍주의진의 중추적 인물이 되어 활약하고 옥고를 치른 바 있었다.
이어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미 부친은 사망한 뒤여서, 형 병찬이 홀로 의거를 일으켰으나,
1906년 2월 23일 패전하여 체포되었다가 4월 12일에야 석방되었다.
석방을 전후하여 홍주를 중심으로 다시 대규모의 의진이 형성되었다. 민종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형 병찬은 참모(參謀), 병림은 참모사(參謀士)가 되어 형을 보좌하였다.
홍산(鴻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천(舒川)을 향해가서 양총(洋銃) 20자루를 빼앗아 가지고
남포(藍浦)를 지나 3일을 유진(留陣)하면서 적군과 한차례 교전을 하였다.
이어서 보령(保寧)을 지나 홍주(洪州)로 달려 갔으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다시 근처 삼신당리(三神堂里)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한 차례 격전을 벌여 왜병을 쫓고 4월 26일 입성하였다.
이 전투에서 안병림은 돌격장(突擊將)이 되어 남계원(南啓元)・곽한일(郭漢一)등과 함께 공을 세웠다.
의진이 홍주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성내의 일진회원의 음모로 동문(東門)이 무너지고 피아간의 접전 끝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었지만,
의진의 탄환이 다 떨어져 결국 성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백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병림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적군은 의병장 민종식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수색하는데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종식과 이남규(李南珪)・이용규(李容珪) 등은 청양(淸陽)・예산(禮山) 일대에서 끊임없이 활약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의 활약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적군은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민종식을 위시하여 곽한일(郭漢一)・김덕진(金德鎭)・박윤식(朴潤植)・이세영(李世永) 등과 같이 안병림(安秉琳)도 체포되었다.
의병장 민종식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민문(閔門)의 일원으로 고종의 특지에 따라 석방되었다.
그러나 병림은 9개월 만에야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그동안 한성에 구금되었었는데, 찬 방에서 거처하다가 병을 얻어 거의 폐인이 될 뻔하였다.
1907년 10월 1일에 다시 형 안병찬 외 3인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부(公州府)로 압송 심문 받았다.
일인 순사 공팔(公八)의 모략때문이었다.
출옥후에도 형 안병찬을 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하였으며
삼부자가 모두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703~704.
註・騎驢隨筆 50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2卷 304・317・331・332・333・334面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인물 > 독립운동가자료 > 독립운동자공적자료
유공자명(한글)
안병림
유공자명(한자)
安炳琳
호적명
이명
생존여부
사망
성별
남
생년월일
(양)1860년 11월 18일
사망년월일
(양)1935년 10월 15일
본적
1. 충청남도 청양 化城 梅山
독립운동당시 주소
忠南 靑陽 化城 梅山
관리번호
4147
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운동계열
의병
소속 및 지위
閔宗植義兵陣 突擊將
독립운동기간
2년
활동지역
洪州
수형년수
복역년수
공적개요
1906年 乙巳條約 勒結에 抗拒하는 洪州義兵將 閔宗植 麾下 突擊將으로 任命되어 洪州城 攻略에 參戰한 후 마침내 倭軍의 攻擊으로 洪州城이 陷落됨에 日憲에게 逮捕되어 9個月間 被囚되어 釋放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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