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짙은 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그늘이 정말 고맙게 느껴지는 6월 하순. 주5일제 수업에 따른 토요일 휴교에 맞춰 부산진구 관내 역사체험과 병형한 학생들의 봉사활동이 매주 토요일마다 실시되는데, 오늘은 황령산 봉수대를 찾아가야 할 차례. 전포동 황령산 체육공원 입구에서 학생들을 인솔해 봉수대까지 오르는 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오늘 탐방은 힘들어 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하루가 되고 말았다.

▲ 황령산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부산시내 전경(부산진구 서면 방향)

▲ 황령산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부산시내 전경(중앙동과 부두 방향)

▲ 황령산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부산시내 전경(부산항과 태종대, 영도 방향)

▲ 황령산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부산시내 전경(광안리 광안대교 방향)

▲ 금련산 정상 KT 기지국

▲ 봉수대 바로 옆에 있는 방송국 송신탑

▲ 남천동과 용호동 방향 전경

봉화를 올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을 봉수대, 봉대, 봉화대, 연대라고 부른다. 봉수대는 높은 산마루에 설치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산이 많아서 옛날의 봉수는 가장 효율적인 통신방법이였으며, 봉수대는 멀리 바라보기 좋은 산봉우리에 돌로 쌓아서 만들었다. 봉수(烽燧)는 불과 연기를 올려서 지방에서 발생한 병란이나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서로 연락하고 중앙(한양)에 전하는 옛날의 통신수단이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인 집결지는 한양의 목멱산 경(京)봉수대(지금의 남산)이다.
봉화(烽火)는 가야 수로왕과 백제의 온조왕 때에 처음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장 확실한 기록은 고려 의종 3년(1149년)에 처음으로 봉수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흑산도에 도착한 것을 자국에 알리기 위하여 봉화(烽火)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어 꼭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봉화(烽火)를 올린 것은 아니다.
봉수는 필요에 따라 신호를 할 때에는 밤에는 불빛으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하였는데, 밤에 피워 올리는 것을 봉(烽, 횃불)이라 하고, 낮에 피워 올리는 것을 수(燧, 연기煙)라고 한다. 그래서 봉수(烽燧)는 주야간의 연락 수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1485년 간행된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기에는 전국에 650여개의 봉수대가 있었고, 신호 방법은 횃불의 수로 달리하였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 출현시에는 횃불 2개, 국경 접근(근접)시에는 횃불 3개, 국경 돌파(침범)시에는 4개, 적과 접전시에는 횃불 5개로 봉화를 올렸다. 그리고 봉화가 한양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2시간 미만이고, 시간당 100키로미터 이상의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밤에는 대개 싸리나무 속에 관솔을 넣어서 불을 올리고, 낮에는 소나무, 잦나무 등의 나뭇가지에 가축의 똥이나 산짐승들의 똥을 넣어 태웠다. 나무에 똥을 넣어 태우면 연기가 심해서 낮에는 잘 보이게 된다. 봉화를 우리말로 ‘홰’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봉화는 ‘횃불’하고는 다른 말이다. 횃불은 밤길을 밝히거나 또는 제사 때 화톳불을 놓기 위해 싸리나 갈대 또는 노간주나무로 만들어서 손에 들고 다니는 불이다.
불교 경전인 “법화경”에서는 횃불을 ‘거화(炬火)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희승 선생의 국어사전에는 ‘거화(擧火)’라 소개하고 “조선시대에 임금에게 직소(直訴)하고자 백성들이 남산에 횃불을 켜서 그 뜻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풀이 하고 있다. 그리고 봉수대에 전용 아궁이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라고 한다.

황령산(荒嶺山)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와 연제구, 남구 및 수영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누를 황(黃)을 쓴 황령산(黃嶺山)으로 기록하여 '현의 남쪽 5리에 있다.'고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년)》에는 거칠황(荒)을 쓴 황령산(荒嶺山)으로 기록하여 '화지산으로 뻗어나 있으며 마하사가 있다.'고 하였다. 황령산은 동래가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동래지방에 있었던 거칠산국(居漆山國)에서 온 산 이름으로 보고 있다. 거칠산국에 있는 산이어서 '거츨뫼'라 했던 것이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거칠'황(荒)', 고개'령(嶺)'의 황령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봉수대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계기로 1898년(고종 35년) 그 기능을 상실할 때까지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어온 군사적 목적의 중요한 통신시설이였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의하면 황령산 봉수대는 1425년경(세종 7년)에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포를 지키는 해안초소 역할을 했던 황령산 봉수대는 간비오산 봉수대와 함께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봉수대이다. 대략 30리의 거리마다 산꼭대기에 봉화대를 두고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불을 올렸다.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동 산50-1에 위치한 황령산 봉수대(비지정 국방문화유적)는 동으로는 해운대의 간비오산 봉수대와 연락했고, 서는 엄광산의 구봉 봉수대 북으로는 범어사 계명 봉수대와 연락하는 등 동서남북 봉수대와 연결하도록 되어 있다. 봉수대에는 도별장 1명, 그 밑에 별장(別將) 10명, 감고(監考) 1명, 봉군(烽軍) 100명씩 배치하고, 이들에게는 가까운 곳에 있는 평지인 평전(平田)을 주어 생활대책을 마련해 주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게 하였다. 부산에 있는 여러 봉수대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입시에 그 기능을 발휘한 바 있어 조상들의 향토 사랑과 국토수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우리 고장의 중요한 사적지이다.
첫댓글 와
구슬땀 흘리지 않고 앉아서 구경하네요^^



회장님 덕분에 봉화대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 합니다.
고맙습니다.
서백 회장님~
잘 보았습니다~
늘 다니던 곳인데도..공부 잘 하였습니다^^
어제의 연장이네요
미소원은 공부하는곳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