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31년 6개월의 재위기간동안 부인 6명 자녀는 18남 4녀를 두었습니다.
그의 자녀로는 문종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
화의군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정안옹주 정현옹주가 있죠
정실 소생 기준으로
맏아들 문종 (5대)
둘째아들 수양대군 (후에 7대 임금인 '세조')
셋째아들 안평대군(명필)
넷째아들 임영대군
다섯째아들 광평대군
여섯번째 아들 금성대군 (* 후에, 문종의 아들인 단종(6대 임금) 을 복위시키는 운동을 하려다 발각되 처형됨)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
여덟번째 아들 영응대군
(1418~1450) 31년 6개월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1450년 음력 4월 8일(양력 5월 26일),
재위 1418년~1450년)
세종은 조선의 제 4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도(裪), 자는 원정(元正)d이다.
묘호는 세종,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흔히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부른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과학 및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오늘날 10월 9일은 한글날로 정해졌다.
현재 대한민국의 10,000원권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유교정치의 기틀마련
황희, 맹사성 등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정치를 맡겨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적으로 거행하였으며,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국방의 정비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평화적 해결을 묘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 들지 않았다.
1419년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일본의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켰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한 것이다.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었다.
1434녕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사군(四郡)과
함경도의 육진(六鎭)을 개척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 되었던 영토가 두만강 및 암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훈민정음의 창제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흠은 이후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그의 업적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과학의 발전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관측 기구인 간의,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등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예술의 발전
세종은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을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 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케 하였다.
법전의 정비
세종은 즉위 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볍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정책(欽恤政策)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
(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말년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 세종은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병석에 누워 각종 질병(중풍, 임질, 노안)에 시달려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1450년 음력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능은 영릉 (英陵)이다. 세종이 죽은 후 조선의 정치 상황은 한층 나빠지는데,
장남 문종은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장손 단종은 숙부이자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였다.
조선 제 4대 세종대왕과 소현왕후 심씨의 합장 릉 - 영릉(英陵)
사적 19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
영릉(英陵)은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합장한 능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제 4대 왕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한글(훈민정음: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록)을 창제하고 측우기(測雨器),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아악(雅樂)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野人)을 정벌하고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活字)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조선의 창업을 찬양한 노래), 농사직설(農事直說:농업기술을 모은 책),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윤리 덕행을 찬양한 책),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석보상절(釋譜詳節:석가의 일대기), 의방유취(醫方類聚:의학 백과사전)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聖德)이 하늘같이 높았다.
영릉은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죽자 광주(廣州)에 쌍실능을 만든 뒤, 예종(睿宗) 원년(1469)에 여주로 옮겨왔다.
이 능제는 조선 전기 묘제의 기본이 되었다. 영릉(寧陵)과 함께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모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세종전을 새로 짓고 경역(境域)을 정비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측우기(測雨器)는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세종 23년(1441)에 장영실 등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우량계(雨量計)이다.
세종대왕은 땅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자로 제어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안전한 방법을 철(鐵)로 주조한 원통형 우량계를 발명, 강우량을 과학적 방법으로 정확히 측정하게 하였다.
지방에서는 서울의 철제 측우기의 모형으로 자기(磁器)나 와기(瓦器)로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이때 작품들은 남아있지 않다.
이 측우기는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 된 1837년 공주에 있었던 청동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보물 제561, 기상청 소장)를 본뜨고, 대석(臺石)은 기상청에 보관중인 관상감을 본 뜬 것이다.
제4대 세종 (1418~1450)
태종의 3남, 이도 / 소헌왕후심씨 외 부인5,
18남 4녀 / 31년 6개월
훈민정음 창제(1443), 과학기술의 발달, 4군6진 개척,
우리나라 역사상 위대한 성군
자료제공: 권태겸의 기념사진
양효안공(良孝安公) 신도비부묘소(神道碑附墓所)
서울 유형문화재 제50호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63-1번지
이 비는 세종의 부마인 양효(良孝) 안맹담(安孟聃)의 신도비로서 세조 11년(1466)에 건립되었으며, 묘소는 그와 그의 부인인 정의공주(貞懿公主)의 묘소이다.
양효공은 본관이 죽산으로 함길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세종 10년(1428) 14세에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금실이 매우 좋았다.
이에 세종은 그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한강 가운데 있는 두뭇개(옥수동)의 저자도(楮子島)와 낙천정(樂天亭)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활도 잘 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비의 형태는 거대한 화강석 거북받침대 위에 대리석으로 된 용머리장식을 갖춘 통비(通碑)이다.
특히 여의주 구슬을 놓고 두 마리의 용이 몸을 틀고 있는 용머리 장식 부분의 조각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신도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 받침대는 목둘레 주름이 사실적이고 콧구멍이 뚜렷하게 조각되었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鄭麟趾)가 지었고, 글씨는 안맹담의 4남 안빈세(安貧世)가 썼다.
정의공주는 안맹담이 죽은지 15년이 지난 성종 8년(1477)에 세상을 떠나 안맹담 옆에 묻혔다.
|
이 질문에 답변하시면 지식머니 5, 채택시엔 70 을 더 드립니다.
// 엑스퍼트 채택 textarea 값 체크
function formSubmitValidCheck(formId,textareaId)
{
if($(textareaId).value.trim() == "") {
alert("채택 이유를 남겨 주세요.");
} else {
$(formId).submit();
}
}
// 네임카드
function toggleTab(idx, aid, userid, allTab, type) {
if (1 <= idx && idx <= 3) {
for (var i = 1; i <= 3; i++) {
if (allTab == true || (allTab == false && i != 2)) {
$('namecardTopTab_'+aid+'_'+ i).style.display = (i == idx) ? 'block' : 'none';
$('namecardTab_'+aid+'_'+ i).className = (i == idx) ? 'on' : '';
}
}
if (idx == 3) {
var url = "";
if (type == "E") {
url = "/qna/my/expert_namecard/recentAnswers.html?userid="+userid;
} else if (type == "C") {
url = "/qna/counsel/recentCounselAnswerList.html?userid="+userid;
} else {
return ;
}
new Ajax.Updater("namecardTopTab_"+aid+"_"+idx, url);
}
}
}
// Daum View 추천 연동
function daumView(url, channel){
daumQna.load("http://api.v.daum.net/internal/news_info_with_publish.js?function=recommendCallback&nurl=" + encodeURIComponent(url) + "&channel=" + channel);
}
function recommendCallback(obj){
var data = obj[0];
daumQna.load("http://api.v.daum.net/open/recommend?nid=" + data.id + "&key=" + data.recommendKey);
}
-
DaumFlash("http://i2.daumcdn.net/imgsrc.search/knowledge4/2010/flash/AnswerRecommend_daumView.swf","click=addRecommendCount&id=recommend_A_51061390_5DZMp&count=14&aid=5DZMp",83,77,"recommend_A_51061390_5DZMp");
-
세종대왕1397~1450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휘, 도, 자 원정, 시호, 장헌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 민씨 소생.비 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1408년(태종 8)충녕군에 봉군, 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1.세종대왕의 업적
-훈민정음창제-
우선 정음청이라는 것을 설치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한글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훈민정음이 이곳에서 간행되니깐요. 물론 이 한글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훈민정음을 반포합니다. 이로서 세계가 인정하는 한글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천문학의 발전- 천문학을 주과하던 곳은 서운관이었다. 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할 수 있었다.
석축간의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관측대 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그리고 규표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 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혼천의: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 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정초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시계의 발명- 해시계: 해시계를 일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 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릉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 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 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 이 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 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 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 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 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 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음악- 모든 음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율관(음관)을 제정하고, 앙상블에 필요한 미비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처음으로 창안해낸 사실들이 곧 그의 중요한 업적의 내용들이다.
-김종서의 6진개척과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
김종서의 6진개척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들을 쫒아냄으로서 오늘날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영토를 확보해놓습니다. 그리고 최윤덕, 이천에게 시켜 압록강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을 설치합니다.(이천은 자세히 보면 안빠지는 곳이 없습니다. 금속활자자를 간행한것도, 측우기를 만든 것도, 압록강을 개척한 것도 모두 이천이 들어가있지요.)
사실 이 북방개척에서는 세종대왕의 가장 악독한 업적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바로 사민정책입니다. 남방에 사는 주민들에게 강제로 북쪽으로 이주시킨 것이지요. 물론 세금혜택이나 정부지원 등 상당한 대가가 있었지만, 실제로 이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에 다른 임금들이 이러한 업적을 행했다면 두고두고 이걸로 씹어댔을 것이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정책을 펼쳤기에 그 확보해놓은 북쪽땅이 완전히 우리땅으로 편입되게 된 것이죠. 현재는 욕을 먹더라도 미래를 건너다본 세종대왕다운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세종대왕의 생애]
세종대왕은 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경복궁 서쪽 인왕산 기슭 준수방에서 태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 8월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왕조 제 4대 임금이 되셨다.
고려사를 개수시키다.
1420년 3월에는 집현전(지혜의 집)을 설치하고,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1423년에는 조선 통보를 주조하게 하였으며, 1429년 정초로 하여금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업에 관한책 <농사직설>를 편찬하게 하였다.
1432년 왕명으로 윤희, 신색, 맹사성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지리>를 편찬
1433년 '혼천의'를 만들었으며, '향약집성방'을 펴냈다.
1434년에는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악기를 개조하였고, 이천, 김돈, 장영실로 하여금 구리로 된 '『갑인자』란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
최초의 공중 해시계 앙부일구(보물 제 845호)를 만들도록 하였으며, 물시계(자격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자격루는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가 되어있는 물시계 이며, 장영실, 김조, 이천 등이 제작하였다.
1435년 경복궁 안에 주자소를 옮겼다.
1437년 김종서에 명하여 두만강 방면에 있던 여진족을 토벌하여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1441년 '치평요람'을 편찬하게 하였다.
1442년, 이천과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하였다. 비의 양을 재는 기구이며, 세계 최초의 우량계 였다.
1443년 훈민정음(28자)를 창제하였으며, 전제상정소를 두었다.
1445년 <치평요람>완성하였으며, 권제, 안지, 정인지 등이 훈민정음으로 된<용비어천가>를 지었다.
1446년 9월 3일(양력 10월 9일)훈민정음(한글)을 반포하였다.
공문서에 한글을 쓰게 하였다.
1447년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하였으며,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다.
1449년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였다.
1450년 2월 17일 영응대군(세종의 여덟째 아들)의 집 별채에서 승하하셨다.
[세종대왕의 업적]
한글, 훌륭한 책의 편찬, 과학기가의 연구, 음악의 진흥, 육진개척, 일본과의 외교, 불교의 진흥 등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리글을 갖게 해준 것은 우리에게 주체 의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는 데서 큰 가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은 있되 우리 글이 없어 청음청을 두어 한글을 만들게 한 업적과,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등 훌륭한 과학기기를 만들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으며, 김종서 장군에게 명하여 육진을 개척케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 함경도는 오랑캐의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갑인자 라는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훌륭한 책을 많이 만들어 역사와 학문 연구에 이바지 하였으며, 용비어천가, 고려사,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치평요람, 석보상절, 의방유희 등입니다.
이러한 업적 외에도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 정신의 유산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종대왕 업적]
1. 훈민정음(한글) 1446년 9월 3일(양력 10월 9일)반포되었음
2. 최초의 공중 해시계 앙부일구(보물 845호)
3. 측우기 (세계 최초의 우량계)
4. 물시계 (자격루, 옥루 등)
5. 일성정시의(별이 자리를 옮기는데 따라서 밤 시각도 알게 만든 시계)
6. 4군6진 개척,
7. 군사제도 개편,
8. 조선통보 주조
9.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악기를 개조하였고, 음악을 발달시켰음
10. 구리로 된 『 갑인자 』라는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많은 책을 남겼음
11.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업에 관한책 '농사직설' 편찬
12. 우리 나라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리지' 편찬
13. 1445년 '치평요람'완성
14.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지었음
15.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이 밖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