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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장소 |
내용 |
비고 |
08:00 |
잠실역 주변 |
서울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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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
견훤왕릉과 금곡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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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0 |
관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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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 |
쌍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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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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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 |
계백장군 유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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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충곡서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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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돈암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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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
개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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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
명재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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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
노성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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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논산 출발 |
논산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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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
잠실역 주변 |
서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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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강사(오덕만 선생 011-417-7481)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旅路에서 즐기는 詩 感想 ]
<수선화에게>
-- 정 호 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11월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인 달이라서 그런지 만나는 지인들마다
넘 우울하고 외롭다고들 아우성이네요^^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시 구절에 위안을 삼길 바라며~~
유서 깊은 예향(禮鄕) 논산
그러나 논산은 충청지역 가운데에서도 공주 부여와는 또 다른 물질적 . 정신적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 유교 및 예학문화의 유서가 깊은 곳이다.
충남은 기호학파의 중심지이며, 논산은 그 가운데에서도 유교문화를 집약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논산은 정신문화 전통과 선비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많은 유교문화자원이 남은 곳으로 충청도 유교문화권의 중심이 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유교문화의 본고장이라 자부할 수 있다. 영남유학의 본산이 도산서원과 안동일대 라면 기호유학은 논산의 연산과 노성을 그 중심지로 한다.
논산시는 명실상부한 조선의 기호예학의 1번지이며 유교의 정신적 뿌리를 낳은 고향이다. 연산의 돈암서원과 노성의 노강서원은 그 중심이며, 사계 김장생 . 신독재 김집 . 우암 송시열 . 동춘당 송준길 . 명재 윤증 등 조선후기 한국의 학문계와 정치계를 대표하는 걸출한 인물을 낳은 본고장이다.
이와 같이 논산은 조선시대 예론(禮論)과 사림 인사들의 거점이었다. 논산은 조선 중.후기의 한국 예학을 주도했던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연산 지역, 명재 윤증의 노성 지역은 유서와 전통이 살아있는 지역이고, 그의 후학들이 정신문화와 유교적 사회이념을 실천했던 곳이다.
논산의 이러한 정신사적 유적들은 흔히 다른 지역의 유형적 문화자원보다도 훨씬 내면적 특징과 지성적 품위를 지니고 있다.
후백제의 성립과 견훤
통일신라가 쇠망해갈 무렵 전국은 소위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기존의 신라와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가 그것이다. 이때 전북 지역은 후삼국 중의 하나인 후백제 역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후백제를 건국한 인물은 견훤이란 자였다.
견훤이 어디에서 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경상도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신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를 보면 그가 전라도 광주(光州) 북쪽 마을에 사는 부잣집 여자와 지렁이가 교합하여 낳은 사람으로 나와 있다. 학자들도 일부는 광주 내지 승주(昇州) 출신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상주 출신설이 맞다는 견해도 있다.
광주 내지 승주 출신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첫째 견훤이 제일 먼저 무진주(광주)를 공격하여 근거지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래부터 견훤이 광주와 연고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후백제에서 활약한 인물들 중에 광주 인근 출신이 많다는 것이다.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나 후백제의 인가별감(引駕別監)이었던 김총(金摠)이 승주 출신이었던 것이다. 셋째 승주는 백제시대에 삽평(揷平)이라 불리웠는데 삽(揷)은 상주의 옛 이름인 사벌주(沙伐州)의 사(沙)와 음이 비슷하고 평(平)의 뜻이 벌(伐) 또는 부리(夫里)와 같으므로 승주를 상주로 혼동하여 기재했다는 것이다. 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와 918년 왕건에게 귀순해온 상주의 적수(賊帥) 아자개(阿慈盖)는 한자가 다르므로 별개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918년 당시 견훤은 이미 전주에 도읍하여 후백제왕이 된지 18년이나 지난 뒤인데 이때 견훤의 아버지가 왕건에게 귀순했다는 것은 논리상 모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사료적 근거가 희박한 것이고 추론에 불과할 뿐이다.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서남 해안에 가 광주를 공격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휘하에 광주 인근 출신이 많다는 것도 그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승주를 상주로 혼동하였다는 것도 추측일에 불과하다. 또 견훤의 아버지가 고려에 귀부했다는 것도 부자간의 현실 인식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합리적인 사관에 입각하여 쓴 <<삼국사기>>에는 그가 상주 출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주 가은읍 일대에는 견훤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예컨대 견훤성(甄萱城)이라 불리우고 있는 성재산(城在山)이 있고 견훤이 태어나 자랐다는 마을이 가은읍 아개리(阿介里)에 있다. 또 상주쪽에서 속리산 문장대를 오르는 길목에 견훤이 쌓았다고 하는 산성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근거로 볼 때 견훤은 상주 출신임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광주 북촌 탄생설은 견훤이 광주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그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에서 유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상주에서 태어난 견훤은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면이 있어 호랑이도 그를 해치지 않았다. 즉 그의 어머니가 견훤을 나무숲 속에 두고 갔는데 돌아와 보니 호랑이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면은 있었지 않나 한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웅대하고 뜻과 기운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 해준다.
이렇게 성장한 견훤은 신라의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진출한 그는 서남해 방면의 방수군(防守軍)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전투가 있을 때마다 선봉에 서서 싸우는 등 용기가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뛰어났다. 그 공으로 비장(裨將)이라는 지휘관이 되어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항상 인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고 휘하 장병들에게 용기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진성여왕대부터 시작된 농민봉기로 전국이 혼란에 빠지고 국가의 통치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큰 야망을 품고 신라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이제 부패와 권력 쟁탈로 얼룩진 신라 조정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는 인근의 고을을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한 달여 만에 5천의 무리를 모을 수 있었다. 당시 백성들은 신라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이 군사력을 가지고 그는 892년 드디어 신라의 9주(州) 중 하나였던 무진주(武珍州:현재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여 왕을 칭하게 되었다. 5천의 무리라 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궁예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북원(北原:강원도 원주)의 양길(良吉)에 의탁하였던 궁예는 군사를 나누어 받고 동쪽으로 정벌하여 강릉에 이르렀을 때 무리가 3천 5백여 인이었다. 이 군사력을 가지고 궁예는 관부를 설치하고 철원에 이르러 왕을 칭하였던 것이다.
견훤의 휘하병력 5천에는 견훤과 함께 경주에서 파견되어온 신라의 공식적인 군대가 핵심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 인근에서 모집했거나 모여든 병력들과 서남해 일대에서 해상활동을 하던 섬 출신의 병력도 다수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것은 승주(순천)의 김총(金摠)이나 박영규(朴英規), 전남 신안군 압해도 출신 능창(能昌)의 예에서 알 수 있다.
김총은 견훤 휘하에서 인가별감(引駕別監)이라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 직책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말뜻으로 보건대 호위부대의 장이었지 않나 한다. 그러한 공로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죽은 후에도 순천의 성황신으로 추봉되었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로 승주를 지키고 있다가 견훤이 고려에 귀부하자 그 역시 고려에 귀순한 인물이다. 그도 순천의 산신으로 추앙된 것을 보면 그 위치가 자못 컸다 할 수 있다. 능창은 섬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로 909년 궁예 휘하에 있었던 왕건이 나주를 공략하려 하자 왕건을 죽이려다 오히려 사로잡힌 자이다.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909년이면 압해도 일대가 견훤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그도 견훤과 연결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렇듯 견훤의 병력 속에는 전라도 출신의 인물들이 다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무진주 일대를 장악한 그는 스스로는 왕을 칭했지만 자신이 신라의 군인이었기 때문에 공공연히 말하지는 않았고 스스로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軍開國公食邑二千戶)라 했다고 한다. 이 관직이 뜻하는 것은 신라의 서방인 공주․전주․무주를 총지휘, 통제하는 도독과 같은 위치에 있는데 본인은 전주의 자사와 어사 중승이란 직을 갖고 식읍 2천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사실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지위는 상당하였다. 그것은 북원의 양길에게 궁예가 의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양길에게 비장(裨將)직을 제수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또 군사력 또한 강성하여 양길이나 궁예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러한 지위를 바탕으로 그는 전주에까지 진출하였다. 이곳에서 주민들의 환영을 받은 그는 내가 삼국의 기원을 상고해 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박혁거세가 발흥하였으므로 진한, 변한이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익산의 미륵산)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지났는데 당(唐) 고종(高宗)이 신라의 청원을 받아들여 장군 소정방을 보내 병력 13만으로 바다를 건너게 하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黃山)을 거쳐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군과 합세, 백제를 멸하였다. 지금 내가 완산에 도읍을 정하고 어찌 의자왕의 원한을 씻지 아니하랴 하면서 후백제를 칭하고 관부와 관직을 설치하였다(900년). 물론 견훤의 말은 역사적으로 틀린 점도 있다. 예컨대 백제가 금마산에서 개국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익산 주변의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견훤이 이를 몰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말은 백제를 부흥시켜 주민들의 원한을 풀어주겠다는 의미에서 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후백제를 건국하여 신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견훤은 901년 신라의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금성(錦城:나주)의 남쪽으로 군대를 돌려 인근부락을 점령하고 돌아갔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2년 뒤인 903년에는 금성군의 협조를 얻은 왕건이 쳐들어와 인근 10여 주현을 빼앗겼다.
그런 한편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중국의 오월(吳越) 및 후당(後唐), 거란, 일본 등지에 외교사절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는 자신의 정권에 대한 정당성과 독립성을 외국으로부터 공인받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견훤은 경상도 상주 출신이었으나 신라의 군대에 들어가 서남해의 방수군(防戍軍)이 되었다. 이후 여기에서 세력을 키운 그는 무진주를 점령하여 지배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다가 점차 북방으로 진출하여 마침내 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 왕을 칭함으로서 신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활발한 정복활동과 외교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였다.
견훤은 누구인가?
견훤(甄萱 ;867˜935) 후백제의 시조. 재위 892˜935. 본래 성은 이(李)씨이었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의 농민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 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 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 용개(龍蓋). 보개(寶蓋). 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 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견훤을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견훤은 자랄수록 체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 이때는 신라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하여 점거 당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은 몇몇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문란하여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유망과 초적(草賊)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때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지금의 光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라고 자칭하고, 북원(北原:지금의 原州)의 적수(賊首)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지금의 全州)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였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주요전투연표
901년(효공왕 5년) 대야성 (大耶城, 지금의 합천)을 치려다가 실패하고, 군사를 금성(지금의 나주) 남쪽으로 옮겨 공격했다. 910년(효공왕 14년) 3,000명의 병력으로 10여 일간 나주성(羅州城)을 포위하고 싸웠으나, 궁예가 수군으로 급습해 와 물러났다.
916년(신덕왕 5년)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918년(경명왕 2년) 6월에 태봉국 궁예 휘하의 병사들이 왕건(고려 태조) 을 추대하니, 궁예는 도망하다가 부하들에게 피살되고 왕건이 즉위하였다. 상주 아자개 고려에 투항하였다.
920년(경명왕 4년) 10월에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하고, 진례성(進禮城)으로 진격하였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자 퇴각하였다.
922년(경명왕 6년) 6월 휘암을 사신으로 삼아 쓰시마에 파견하였다.
925년(경애왕 2년) 11월 조카 진호(眞虎)를 볼모로 보냈다.
927년(경애왕 4년) 9월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경주)을 함락하여 친려(親麗) 정책을 쓰던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한 후, 김부(金傅)를 왕(경순왕,敬順王)으로 세워놓고 철수하여 신라인의 원한을 샀다.
929년(경순왕 3년) 고창(古昌,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투항하고, 934년(경순왕 8년) 웅진(熊津,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속했다.
935년(경순왕 9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 되었으나 3개월 후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했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10만 대군으로 후백제를 멸망시킨다.
이로써 후백제는 건국한 지 4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견훤의 출생설화
<참고>
견훤과 일본 숭신천황의 탄생설화
고려말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후백제 견훤. 대목을 보면 드라마 .태조 왕건.으로 부쩍 유명해진 후백제 시조 견훤이 어떻게 해서 태어나게 되었는지가 흥미롭게 나온다.
이에 따르면 견훤은 광주(光州) 북촌(北村)이란 곳에 살던 어떤 부자의 딸이 지렁이와 관계해 낳은 아들로 기록돼 있다.
이 딸의 아버지는 매일 밤 보랏빛 옷차림을 한 사나이가 밤마다 찾아와 자기 딸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는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딸을 시켜 어느 날 밤 미스터리의 이 남자가 걸친 옷에다가 실을 꿴 바늘을 꽂아두게 했다. 날이 밝아 실을 따라 가보니 바늘은 북쪽 담장 밑 지렁이 허리에 찔려 있었다. 이 설화에 따르면 견훤은 아버지가 지렁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영적인 존재가 주로 밤에 여인을 찾아온다는 이런 설화를 고 장덕순 서울대 교수는 .야래자(夜來者) 설화.라 명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견훤 설화를 빼다박은 듯한 이야기가 현존 일본 최고(最古) 문헌인 「고사기」(古事記.712년쯤 편찬)에도 있어 주목을 끈다. 이른바 천황으로서는 최초의 실존인물로 일본 학계가 추정하고 있는 이가 숭신(崇神.스진)이다.
「고사기」는 숭신이 뱀의 아들이라 하고 있다. 자세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천하절색인 옥의비매(玉依毘賣)라는 여인은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임신했다. 부모가 그 까닭을 따지니 딸은 .수려하게 생긴 사내가 저녁마다 찾아와 같이 지내다가 어느덧 잉태하게 되었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부모는 어느 날 밤 딸을 시켜 실타래의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내 옷자락에 찔러 두게 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 살펴보니 실은 자물쇠 구멍으로 빠져나가 미와산(美和山)이란 곳의 신사(神社)에 이르고 있었다.
이 신사는 뱀을 모셨다. 이런 전통 때문인 듯 지금도 미와산에서는 사람들이 뱀을 잡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견훤 탄생 설화나 「고사기」에 나오는 숭신천황의 그것이 지렁이와 뱀이라는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모티브가 아주 똑같다.
황패강 단국대 명예교수는 이 두 .야래자 설화.가 첫째, 밤에 처녀에게 정체불명의 사내가 찾아와 동침하고, 둘째, 사나이는 인간이 아닌 영적인 존재이며, 셋째, 그 결과로 여인이 잉태해 영웅이 출생한다는 점에서 일치함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두 고대신화 사이의 이런 놀라운 일치점은 사실 두 나라 학계, 특히 신화학 전공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속시원한 대답은 없는 듯하다.
서울대 서대석 교수는 이런 .야래자. 설화가 한반도의 마한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고 숭신천황의 탄생설화 또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또한 썩 명쾌한 답은 아닌 듯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향후 연구과제임이 분명하다.
닭 다리벌과 견훤
후백제의 견훤은 고려 태조 왕건과 황산벌에서 싸우기 위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견훤은 큰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당하게 되었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도망쳐 나와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왕건은 견훤과 같이 연무읍 부근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사와 일전에 벌였다. 이때 견훤은 개울가 나무다리 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다가 불현듯 「여기가 어디더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부하는 「여기는 닭다리벌이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견훤은 갑자기 얼굴색이 변하면서 당황하여 앉아있던 다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견훤의 아버지는 큰 지네였다고 한다. 원래 지네와 닭은 상극이라 자기가 닭다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 이미 자기의 운명이 끝난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견훤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견훤왕릉
신라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몇몇 신하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봉기가 심해졌다. 이때 견훤이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워 40여 년간 다스렸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황산불사(黃酸佛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을 때 전주 완산이 그립다고 유언을 하였으므로 완산을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해 등창이 나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커다란 봉분 앞에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남쪽으로 전주 뒷산이 70리 떨어져 잘 보이고 있다.
이 무덤은 후백제(後百濟) 시조(始祖) 견훤(?∼936)의 묘라고 전해온다. 견훤의 본성(本姓)은 이(李)인데, 상주(尙州) 사람으로 신라장군(新羅將軍)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라 하며,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40여년간 다스릴 때 후삼국(後三國)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졌었다.
견훤왕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19년(936) 황산불사(黃酸佛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을 때는 완산(完山)이 그립다고 하였으므로 완산을 향하여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현재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견훤의 무덤은 사실인가?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문헌상으로만 본다면 실제 견훤의 무덤으로 보아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후백제왕 견훤왕릉이라 해도 괜찮으리라..
다음은 견훤왕릉을 전하는 문헌상 기록이다.
고려사』 지리지 덕은군 조
견훤의 묘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은진현조
백제왕 견훤의 묘가 현의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다.
『동국여지승람』 은진현 총묘조
견훤묘가 현의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는데 세속에서 왕묘라고 한다.
『동국지지』 은진현 능묘조
견훤묘가 현의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는데 세속에서 왕묘라고 한다.
『여지도서』 은진현 총묘조 : 견훤총이 현의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다. 견훤이 까치고개(鵲峙峴)에 진을 쳤는데 까치가 큰 깃발 위에 앉자 깃발이 갑자기 부러져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견훤이 필시 패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주변에 말하길 ?내가 죽거든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장사지라라? 했다. 지금 전하는 무덤에서 모악산이 보인다고들 한다. 작치라는 이름 역시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세속에서 왕의 무덤이라고들 한다.
『대동지지』 은진현 산수조
풍계촌 남쪽 12리에 후백제왕 견훤의 묘가 있다.
『방여총지』 후백제조
고려 태조가 몸소 신검을 항복시켰다. 이해 견훤이 죽었는데 묘가 은진현 봉계촌에 있다.
왕건과 신검의 전투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넷째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내다가, 견훤이 양검을 강주(康州,지금의 晉州)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지금의 光州)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신검은 이찬(伊飡) 능환(能奐)으로 하여금 사람을 강주 . 무주 등으로 보내어 음모를 꾸몄다. 이에 견훤은 935년 3월에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 당하고 금강은 죽었다.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있다가 그 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부(尙父)의 지위와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 후 견훤의 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은 일대 접전을 벌렸다. 고려 태조 왕권은 신검이 있는 중군을 향하여 총공격을 가하여 3,200명을 사로잡았고 5,700여명을 죽였다. 고려군은 무너져 달아나는 후백제군을 맹진격하여 황산(지금의 연산)에 이르러 양검, 용검을 항복시켰다.(『고려사절요』 권135 37)
왕건은 포로가 된 후백제 군사 3,200명을 본토에 돌려보내고 흔강과 부달(富達) 등 40명과 그 처자를 개경에 호송하였으며, 능환을 문책하여 군부를 배신한 죄로 목을 베었다. 신검은 왕위를 찬탈한 것이 본심이 아니고 협박에 의해서였다고 하며 목숨을 애걸하여 살려 주었다. 이 말을 들은 견훤은 분함을 참지 못해 등창이 터져서 황산불사(黃山佛舍)에서 죽고 말았다.
견훤은 죽을 때 ‘내가 도읍한 완산과 익산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 고 유언하여 현 연무읍 금곡리에 묻힌 것이라 전하고 있다.
금곡서원 문화재자료 제78호(1984.5.17 지정)
이 서원은 만치당 김수남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송시열, 송준길에 의해 1687년 가야곡면 조정리에 금곡사를 신축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가 숙종 16년(1690)에 김수남의 유풍지인 연무읍 금곡리로 이축하였다. 정조 5년(1781) 매죽헌 성삼문, 송재 조계명 양위를 추배하였다. 1868년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었고, 그 해에 단소를 설치 운영되어 오다가 1977년 사우를 건립 복원하였다.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유림들이 모여 춘추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 김수남 1576년 ~ 1636년(인조14년)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여일 오는 만치당 본관은 광산으로 김장생의 문인. 광해군2년(1610) 전사시에 합격한 후 은둔하다가 인조 2년(1624)문과 급제,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적군이 침입하자 분사했다. 승지에 추증되고 강화의 충열사와 금곡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봉곡서원 향토유적 제15호(1992.10.28 지정)
봉곡서원이 처음 건립된 곳은 논산이 아니라 전북 여산이었으며 창건 당시는 서원이 아닌 향사우였다. 숙종 37년(1711) 우암 송시열과 오봉 이호민의 발의로 1712년 여산 공촌면 장항리에 서원을 창건하였다.
제향 인물은 이계맹, 이순인, 남명한, 진효극, 남두건 등 5인이다.
고종 8년 전국적인 서원 훼철령으로 봉곡서원도 훼철되었다가 1899년에 이르러 복설 허가를 받아 단소를 설치하고 봉곡단소(鳳谷壇所)라 칭하였다. 이때 복건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기호사림의 리더격인 돈암서원에 통문을 발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복건 추진세력은 단순히 문중이나 향촌이 아닌 지방관까지 동원된 강력한 그룹이었다.
여산 유림의 주도하에 여산군수 윤기진, 정읍군수 윤익병 등이 주무가 되었으며 유사는 서병희가 맡았으나 복건은 실패했다.
복건 시도가 무산된 후 원내에 이계맹 등 5인의 비를 세우고 옛터에 봉곡단을 설립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1965년 연무유림은 정부의 지원을 얻어 고내리 효죽동에 새 원우를 건립하고 이전하였으며 1969년 내삼문, 1973년 숭모재와 외삼문을 세웠다.
관촉사(灌燭寺)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이 바위로 불상을 조성하게 했다.
이 불상이 흔히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관촉사 앞에 넓게 펼쳐져 있는 들이 바로 황산벌이다.
백제의 계백장군과 신라의 화랑 관창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바로 그곳.
미륵보살(彌勒菩薩) 대석불(大石佛) 앞에 놓여 있는 이 대석등(大石燈)은 불상(佛像)과 같은 시대(時代)에 제작(製作)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전형적(典型的)인 사각석등(四角石燈)으로 하대석(下臺石)의 복련(覆蓮)과 상대석(上臺石)의 앙련(仰蓮)은 둔후(鈍厚)한 조각수법(彫刻手法)을 드러내고 있다.
굵직한 원주형(圓柱形)의 간주석(竿柱石)에는 상단(上端), 중간(中間), 하단(下端) 3곳에 각각 세 줄기의 띠를 두르고 있다. 특히 중간대(中間帶)에는 8곳에 자방(字房)을 갖춘 4엽(四葉)의 복련판(覆蓮瓣)을 간단하게 장식(裝飾)하였다. 상대석 위에는 4각형의 화사대(火舍臺)를 마련하고 그 위에 2층의 누각형(樓閣形)의 화사(火舍)를 설치하였다. 화사부(火舍部)는 4우(隅)에 4각형 기둥을 세웠으며 화사내 중앙(中央)에는 화대(火臺)가 놓여 있다. 둔후(鈍厚)한 4각형의 옥개석(屋蓋石) 네 귀에는 큼직한 귀꽃을 갖추고 있다. 2층 옥개석 정상(頂上)에는 큼직한 수연형(水煙形)의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제작연대(製作年代)는 고려(高麗) 광종(光宗) 18년(967)경(頃)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촉사 은진미륵
한편 이 지역은 백제 미륵 신앙의 도량인 익산 미륵사터와 멀지 않은 위치에 있어서 옛 백제의 미륵 신앙의 전통이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얼굴은 네모난 데 이마는 좁고 볼은 넓다.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크고 선명하며, 눈은 거의 귓가까지 찢어졌다. 귀는 2미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꽉 다문 입은 얼굴을 전체적으로 굳게 만든다. 전체 18미터의 거대한 키에, 몸뚱아리는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슬쩍 깍아 만든 괴석이라서 사람의 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머리에는 관을 썼고, 손에는 연꽃 가지를 쥐고 있다. 비사실적이고, 도식화된, 토속화한, 괴체한 고려 불상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호국의 은진미륵 전설
고려 때 북쪽 오랑캐들이 우리나라를 자주 침략을 했다. 어느 날 오랑캐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압록강가에 집결해 있었다. 오랑캐들은 배가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스님 한사람이 삿갓을 쓴 채 마치 얕은 냇물을 건너듯이 다리만 걷어올리고 건너오고 있었다. 이때 오랑캐 두목은 「보아라, 저기 중이 건너오는 곳을 얕은 모양이니 그곳으로 강을 건너자.」
하고는 진군 명령을 내렸다.
멋모르고 강을 뛰어 들어간 오랑캐들은 수심이 깊어 모두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화가 난 적장은 그 스님을 찾도록 명령을 내렸다. 중을 찾아낸 적장은 칼을 빼어 내리쳤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중은 간 곳이 없고 그 중이 쓰고 있던 삿갓 한쪽만 떨어져 있었다.
그때 은진미륵은 온몸에 땀이 흘러 내렸고 미륵이 쓰고 있던 갓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이는 은진미륵이 중으로 화신하여 압록강에 나타나 국난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은진미륵은 호국불로서도 유명하다.
해탈문
문은 네모난 돌기둥을 양쪽에 세운 후, 양 기둥 뒤쪽으로 길쭉한 돌을 5개씩 쌓아 옆면을 이루게 하였다. 기둥 위로는 네모지고 넓적한 돌을 얹어 놓아 전체적으로 4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관촉사가 건립된 후 참배객이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동·서·남·북 4곳에 이러한 문을 두었는데, 그중 동쪽에 세운 이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석문을 세운 시기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관촉사가 건립되었던 고려시대로 짐작된다.
관촉사 경내(境內)에 들어가려면 이 석문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이다.
관촉사배례석(灌燭寺拜禮石)
관촉사 배례석은 석등에서 약 10m 동쪽으로 떨어진 화단 안에 있는 것을 탑에 옮긴 것으로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된다.
직사각형의 받침돌 형태로,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옅게 새긴 후 그 안에 고사리무늬 같은 버섯구름 모양을 새겨 넣었다. 윗면에는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와 2개의 연줄기를 조각하였다.
조각이 정교하고 장중한 맛이 풍기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관촉동 비로자나 석불입상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 입구의 대정운사라는 고려시대 절터에 있던 불상이다.
네모난 얼굴은 비대한 느낌도 들지만 선명한 눈썹, 작은 코, 입과 턱에 있는 U자형의 선이 특이한 인상을 준다. 사각형 신체의 작고 비만한 모습은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평행 옷주름과 다리에 U자형 무늬의 구불구불한 선이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오른손 검지를 왼손이 말아 쥔 모습이다.
쌍계사
쌍계사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초기 사찰로 추측되고 있다. 처음에는 500~600칸의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집으로 여러 차례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그 뒤 고려 말의 대문장가 행촌 이암이 중건을 발원하였고, 목은 이색이 사적비를 지었다고 한다.
다시 전쟁으로 불탄 후 대웅전을 숙종 42년(1716) 승려 자영이 2층으로 중창했다. 영조 12년(1736) 11월 화재로 대웅전이 전소되자, 2년 뒤인 영조 14년(1738) 6월에 대들보를 올리고, 이듬해 다시 중건하였다.
쌍계사 대웅전의 기둥과 대들보들은 굵은 재목을 사용했고, 규모도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정면 5칸은 6개의 기둥을 같은 간격으로 세우고, 각 칸마다 두 짝씩 문을 달았다. 이들 문살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꽃새김을 한 꽃살문이다.
배흘림 있는 기둥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짜 돌리고 그 위에 외사출목(外四出目), 내오출목(內五出目)의 다포식 공포를 배열하였는데 우리나라 불전 건물로서는 가장 출목수가 많은 공포의 사례이다.
이 건물의 넓은 실내에 들어서면, 누구라도 기둥 상부나 천정의 현란한 조각 장식에 압도된다. 3개의 불상 위에는 갖가지 형상의 용들이 꿈틀거리고 그 사이사이로 봉황이 구름 사이를 날고 있다. 대들보 사이에도 봉황이 여기저기 날고 있고 대들보에 얹혀진 충량 머리에는 두 눈을 부릅뜬 긴 코를 가진 용이 내려다보고 있다.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촘촘히 늘어선 공포의 살미 끝은 저마다 막 터지려는 듯한 연꽃 봉우리로 빈틈이 없다.
정면 5칸 마다 설치된 문짝에 조각된 꽃무늬는 국화, 작약, 목단, 무궁화 등을 화려하게 조각했고, 꽃과 문살에도 채색하여 아름답게 꾸몄다.
부안 내소사의 꽃살 무늬와 함께 18세기 불교건축의 대표적인 미의식 세계를 보여준다.
쌍계사 대웅전에서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은 네모서리 기둥이다. 나무 본래의 형상 그대로 비스듬하게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나 줄기 자체의 움푹 패인 홈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유난히 굵은 기둥이 네 귀퉁이에 버티고 서 있다.
반면에 나머지 기둥들은 비교적 가지런한 굵기에 반듯하게 잘 다듬어져 있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모서리에 자연 그대로의 기둥을 세운 것이리라. 이에 약하고, 못나고, 모자란 이들까지 포용하려는 불심의 표현으로 해석하려는 이도 있다.
쌍계사 부도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쌍계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련된 이 부도밭에는 모두 9기의 부도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절에서 돌아가신 아홉 승려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는데, 6기는 종모양을 하고 있고, 나머지 3기는 지붕돌을 갖춘 4각 부도이다.
종모양의 탑몸돌을 하고 있는 부도들은 4각 또는 6각의 바닥돌 위에 놓여 있다. 바닥돌은 연꽃무늬를 둘렀으며, 탑몸돌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을 얹어 머리장식을 하였다. 지붕돌을 올린 부도들은 기단(基壇) 위로 동그란 탑몸돌을 얹고 지붕돌을 덮은 모습이다. 기단에는 연꽃무늬나 구슬을 이어놓은 듯한 무늬들을 조각하여 장식해 두었다. 탑몸돌에는 읽기 힘든 상태의 글씨가 보이는데, 그 중에는 ‘혜찬대사’의 이름을 새긴 것도 있다.
모두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어 당시의 부도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쌍계사에 입적(入寂)한 고승들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것으로 9기가 현존하고 있다. 6기는 종(鍾)형이고 3기는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방(方)형이다. 종형부도의 높이는 150㎝내외이고 4각 또는 6각의 지대석을 사용하였고 지대석에는 연꽃무늬의 장식이 있다. 옥개석이 있는 방형의 부도들은 130㎝내외이고 원형의 탑신에는 아무 장식도 없고, 기단부에는 연꽃무늬 연주화문 등이 장식되어 있다.
전략적 요충지 득안성
논산지역은 백제 사비시대 동방 득안성 지역으로 천혜의 요충지이자 천년을 이어 온 군사상 중요 거점지역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한강 하류에서 건국하여, 3세기 고이왕(235-285)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관등제도를 마련하면서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추었다. 이후 근초고왕(346-374) 재위 시기에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활발한 정복사업에 나서 한반도내 경기.충청.전라 3도 전부와 낙동강 중류의 일부지역, 강원.황해 양도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논산지역도 이때 백제에 통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침류왕 이후 백제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지배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쇠약해 졌다. 이틈을 이용하여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455-474)을 죽이고 왕도를 함락시키자, 문주왕(475-476)은 웅진(현 公州)으로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웅진 천도 후 즉위한 동성왕과 무령왕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 지방에 22담로를 설치하면서 국가의 통일을 강화해 나갔다. 또한 성왕(523-554)은 538년 백제의 중흥과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사비(현-부여)로 천도하였다. 이때 성왕은 22부의 중앙 관서제를 확대 정비하고 수도에 5부 지방에 5방을 두었다.
5방은 전국을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눈 구역명칭이며 그 구역의 중심지가 방성(方城)이었다. 5방의 방성을 보면 중방은 고사성(古沙城 ; 고부),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 은진),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대흥), 남방은 구지하성(광주), 북방은 웅진성(공주)으로 되어 있다. 방성에는 최고 책임자로 방령이 있고 이 방령은 대체로 달솔의 위계를 지닌 자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방령하에는 보좌관으로 방좌(方佐)가 있었다. 이 방성들은 대개 산험(山險)에 의지하여 축조되었고, 때로는 석축된 것도 있었다 한다. 또 방성에는 1천명 내지 700명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따라서 방성은 군사적 측면에서도 핵심되는 기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백제맹장 계백과 반굴․관창의 우국충정의 격전, 황산벌 전투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계백 장군은 말을 마치고 마침내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그리고 출병전에 병사들에게 "옛날 월 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결사항전의 자세로 싸울 것을 다시 한 번 당부 한 후, 출병하여 3개의 진을 치고 기다리는 계백장군과 그 의지를 담은 5천 결사대를 향해 김유신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이나 싸웠으나 번번이 후퇴를 일삼았다. 김유신의 병사들은 지치고 사기가 꺽였을 때, 김유신장군 휘하 흠순(欽純)장군이 그의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기를, "신하 노릇을 하자면 충(忠)만함이 없고 자식 노릇을 하려면 효(孝)만한 것이 없다. 위태한 것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효(忠孝)를 둘 다 완전히 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니, 반굴은 "그리하겠습니다" 대답하고 곧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용감히 싸우다가 죽고 말았다.
이를 본 장군 품일(品日)이 그의 아들 관창(官昌)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에게 보이면서 "우리 아이의 나이는 겨우 16세나 뜻과 기개(志氣)는 자못 용맹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겠느냐?"고 하였다. 관창은 "그리하겠습니다" 하고 곧 적진에 달려들어 싸웠으나 적에게 사로잡혀 백제 장군 계백 앞에 끌려 나갔다. 계백은 (사람을 시켜) 관창의 갑옷을 벗긴 뒤 그의 나이가 어리고 또 용맹함을 사랑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도로 살려 보냈으나 관창이 아버지에게 "제가 적진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기(旗)도 뺏어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함이 아니겠습니까?"하며 재차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죽었다. 두 장수 아들의 장렬한 호국충정을 본 병사들은 그 정신을 본받아 다시 계백의 결사대를 향해 돌격, 마침내 계백은 수적 열세에 밀려 장렬히 전사했다.
죽기를 각오한 계백의 황산벌 전투는 백제와 신라의 호국 충정의 격전장이었으며 계백으로서는 1당 100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이나 싸워 이겼으나 5만의 나당연합군의 수적 열세에 밀려 패전한 통한의 전투였다. 백제군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고 좌평(佐平)․충상(忠常)․상영(常永) 등 20여 명이 사로잡혔다. 이 황산벌 전투로 백제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했으나 우리 역사상에는 충과 호국의 표상으로 기리 기억되고 있다.
이 황산벌 싸움에서 김 유신장군의 5만 대병을 맞아 계백장군 휘하의 5천 결사대가 피와 땀을 흘렸던 대결전장의 하나였던 벌곡면 한삼천리 일대에는 당시 한삼천 주변의 세 골짜기에서 백제군과 신라군이 흘렸던 피와 땀이 냇물을 이루었다 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 뒤로 이곳을 한삼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계백과 그 시대
계백(階伯 ; ?-660)은 백제의 장군이다.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641년 의자왕(義慈王)의 즉위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고,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등 국내 문제로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으로 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다. 결국 660년(의자왕 20) 소정방(蘇定方)과
계백과 3영
황산벌과 계백의 3영, 김유신의 3도는 어떻게 추측할 수 있을까?
신라 진격 예상로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황산벌 진격 예상로
1. 지헌영(池憲永): 상주 - 보은 - 옥천 - 환산성 - 탄현(대전 식장산) - 대전 - 진잠 - 두계 - 양정고개 - 개태현 - 황산벌
2. 홍사준,전영대(洪思俊, 全榮來): 상주 - 영동 - 영동군 양산면 - 금산 - 고산 탄치(炭峙)- 황산벌
3. 성주택(成周鐸) : 상주 - 영동 - 양산 - 금산 - 진산 탄현(숫고개) - 벌곡도산 - 덕실 - 웅치 - 황산벌
김유신의 3도
2. 우군 : 한삼천(汗三川)을 지나 ⇔ 황령산성으로 진격했으며
3. 좌군 : 달이산성-양촌-모촌리를 거쳐 ⇔ 모촌리 산성에서 백제군과 대치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사료 상의 탄현은 진산면과 복수면 사이에 있는 .숫고개.라고 주장한다.(모촌리와 신흥리일대라고 추정:[논산군집],1994,논산시)
계백장군 전적지 도지정 기념물 제 74호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침입하였을 때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 신라 김유신의 군사 5만여 명과 대결 4차례에 걸쳐 물리 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자 계백장군의 충절어린 의로운 죽음을 보고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한 것으로 조선 숙종6년(1680)에 충곡서원을 건립하고 계백장군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근래에는 묘소에서 묘제로 지냄.
백제의 부흥운동
백제는 멸망한 직후(660)부터 부흥운동이 각지에서 벌어졌다. 3년 동안에 걸쳐서 벌어진 백제의 부흥운동으로 전국은 부흥운동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신라와 당군이 지배하는 판도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백제 부흥군은 전 국토를 거의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비도성과 이웃해서 있는 논산지방도 백제 부흥군의 지배 하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직접적으로 제시할 만한 관계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군의 유인궤와 신라의 김인문은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사비도성을 지켰고, 웅진도독에는 왕문도가 임명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의 백제 옛 영토에 대한 지배는 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그것은 백제의 많은 성들이 여전히 신라의 군대에 반항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군은 백제의 장정들을 많이 살해하는 등의 만행이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유민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항쟁하였다. 이 결과 200여성이 호응하여 당군에 대항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흑치상지가 웅거하고 있던 임존성(大興)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할 때의 성이 200이라 하고 백제가 부흥운동을 일으켰을 때 호응한 성이 200여 개소나 된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나 . 당 의 연합군은 백제의 옛 도읍인 사비성(부여)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이 백제의 부흥군이 장악했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백제 부흥군이 남령을 점령한 후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나 . 당을 괴롭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남령의 위치가 논산지방과 인접해서 있는 석성면에 있는 석성산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학설을 근거로 해서 생각해 볼 때 그 배후에 있는 논산지방 일대는 백제 부흥군의 지배 하에 부흥운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백제 부흥군을 지휘하던 인물은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이었다. 도침은 승려이면서도 백제 부흥군의 총사에 오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사비도성 내에 있는 사찰에 근거를 두고 당군과 승려사이에는 물론이려니와 신라나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추앙을 받던 인물이 아닌가 한다. 그가 바로 백제 서울인 사비도성을 목하에 두고 있는 남령을 점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신(福信)은 논산지방과 인접해서 있는 (금강입구 부근)에 근거를 두고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을 맞아다가 왕이라 칭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들은 죽은 왕문도 대신에 파견된 유인궤와 신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유인궤가 보낸 사신은 그 관직이 낮다고 하여 답서조차 주지 않는 고자세를 취하기까지 했다. 이때 백제 부흥군은 신라가 운송하는 양도를 차단하기 위해서 웅진성 동쪽에 있고, 대산, 윤산 등을 거점으로 해서 신라군과 그들이 수송하는 양로를 차단했다고 한다. 공산성은 금강하류에 있는 계족산성에 비정되고 있는데 이 산성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지족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서 내려다보면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이 수로는 신라가 군량을 수송하던 수로이다. 그리고 정현성, 대산, 윤산 등은 논산시의 전신인 황등야산군에 영속되어 있던 진잠면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에 비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정황을 감안해 보면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는 바로 논산시의 전신이었던 황등야산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기세를 떨치던 백제의 부흥군은 자체내의 내분으로 인하여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즉, 부흥운동을 주도하여 오던 복신(福信)과 도침 사이에 불화가 생겨, 복신(福信)이 도침을 죽이고 권력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풍왕과도 시기가 생겨 죽이려고 하다가 도리어 살해되고 말았다. 이렇게 내분에 의하여 힘이 약화되자, 풍왕은 고구려와 왜의 원병을 청하여 당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마침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663). 이리하여 3년간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종말을 하고 말았다.
백제용사들의 의지가 담겨진 도적굴(성동면 정지리)
성동면 정지리 구등재에 오르면 도적굴이란 굴이 있다. 굴의 형태는 입구가 그리 크지는 않으나 옛날에는 굴속이 깊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전란을 피해 피난처로 알려져 있었던 굴이었다 한다. 백제 때의 이야기이다. 나당군에게 패한 백제의 군사들은 의자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래도 백제를 부흥시켜야겠다고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인 저항을 하고 있었다. 백제의 계백장군은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최후의 격전을 펼쳤으나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사비성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갈곳을 잃은 한 부대는 처음엔 석성산성으로 피했다가 전열을 가다듬어 나당군을 기습하여 여러 번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수가 많은 나당군을 무찌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백제군에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보급지원이었다. 군량이 떨어져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고 나당군과 여러 차례 싸우다 보니 모든 군사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고 허기에 지쳐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먹을 것을 구해오랴 적을 무찌르랴 군사들은 이젠 기진맥진하였다.
어느 날 이었다. 그 날도 백제군사들은 한편으로는 적과 싸우러 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 며칠 동안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군사들은 사람들의 물건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배가 고픈 나머지 무엇이 보이기만 하면 범처럼 덤벼들어 물건을 닥치는 대로 빼앗기 시작하였다. 먹을 것이 있으면 우선 배를 채우고 곡식들을 모두 그들에 의하여 운반되어 갔다. 그런데 그 날 밤 여기 백제군 장수는 어쩐지 그날따라 잠이 영 오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가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처자식 생각을 했고 망해버린 백제의 옛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자기 눈앞에는 하얀 백발노인이 서 있는 것이었다. 그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쿵 하고 치면서
「네가 장수란 놈이냐? 그래 백제 백성들의 곡식을 강탈해 먹다니, 그래 가지고서도 네놈들이 백제의 군사라고 할 수 있느냐?」
하고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장수는 이 노인이야말로 틀림없이 산신령이 내림이라 생각하고 「노인어른. 잘못하였사옵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라고 빌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으며, 백제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이 온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며 애원을 했다. 그랬더니 그 백발노인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백제란 나라가 다시 부흥하고 말고는 내가 알 바가 아니요. 그러나 집념이 강하면 천하도 통일할 수 있는 일이니 잘 싸워보시오. 단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우리 백성들의 물건은 강탈하지 말고 군사들을 먹이고 싸우게 하려면 나당군의 물건을 빼앗도록 하시오. 이곳은 지리적으로 좋지 않은 곳이니 사비성으로 가는 길 으슥한 곳에 있는 구등재를 찾아가시오. 거기엔 여러 군사를 숨김 수 있는 굴도 있고 먹을 것도 한결 구하기가 쉬울 것이요」 하고는 백발노인은 어디로 인지 사라져 버렸다. 장수는 한참동안 생각을 해 보았다. 백발노인이 가르쳐 준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장수는 그 날 저녁 군사를 이끌고 구등재를 찾아갔다. 그곳에 가보니 그 노인이 예기한대로 바위 아래에 굴이 하나 있었다. 이곳 바위굴에 진을 치고 있는 백제 군사들은 사비성으로 가져가는 신라군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 굴속으로 가지고 갔다.
석성산에 있을 때보다는 적과 싸우기도 좋았고 신라군을 기습하기도 좋아 백제군이 있는 굴속에서 많은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거기다가 굴속에서 연기를 피워도 연기는 높은 곳으로 빠져나가 아무리 훑어보아도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이 쉽게 발견되지 않게 되어 있는 신비한 굴이었다.
어느 날 하루는 신라군과 싸우던 백제 군사들이 몰리게 되어 그들은 이 굴속으로 피하여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 뒤를 따라온 신라 군사들이 며칠을 두고 백제 군사들을 찾았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신라 군사들은 백제 군사들을 따라 이곳까지 뒤쫓아 왔는데 감쪽같이 백제군사들이 사라진 것이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신라군은 물러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백제 군사들은 여기를 본거지로 하여 백제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리며 싸웠으나 백제는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하나 둘 늙어서 죽어갔다.
많은 세월이 지난 뒤 한 농부가 나무하러 이곳까지 갔다가 우연히 굴을 발견하였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보고 도적들이 살지 않았나 하고 마을에 내려와 도적굴이라고 말한 것이 그만 도적굴이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은 숭고한 백제용사들의 의자가 담겨져 있던 굴이었다고 한다.
충곡서원지
충청남도지정 기념물 제12호 (1976. 10. 4 지정)
충곡서원은 계백장군을 주벽으로 하고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사육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부적면 충곡리 수락산 서쪽 산록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6년(1680)에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고종8년(1871)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5년 옛날 위치에 재건되었으나 사우만 남고 멸실되었던 것을 그때의 초석에 따라 1977년 재건,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을 재 건립하였다.
창건당시는 계백장군을 주벽으로 사육신을 배향하였으나, 그 뒤 이현동, 박증, 김정망, 김익겸, 김홍익, 이민진, 김만중, 박종, 조병시, 김자빈, 이학순 등이 점차 추배되어 지금은 18위가 배향되어 있고, 경내에는 성삼문 선생의 유허비가 있다.
돈암서원 사적 제383호.
돈암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서원으로 1634년에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그의 학문을 잇기 위해 원래 연산면 하임리에 창건되었다. 1659년 국가로부터 사액 허락을 받고, 1660년에 돈암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돈암서원은 예학을 대성한 사계 김장생을 모시게 됨으로써 창건과 함께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사원은 동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펼쳐진 일대의 들판을 내다보고 있다. 서원내의 건물로는 유경사, 양성당, 응도당, 장판각, 정회당, 산앙루, 내삼문, 임덕문 등이 있다.
사당인 유경사는 둘레담으로 둘려 있으며 사당내부에는 주벽인 서벽 중앙에 사계, 왼쪽의 북벽에는 안에서 밖으로 신독재, 우암, 오른쪽인 남벽에는 동춘당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 앞편에는 관세대가 있으며, 내삼문 앞에 위치한 양성당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강당 앞 오른쪽인 동남쪽에는 응도당이 자리잡고 있다. 응도당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박공에 풍판을 설치 했고, 그 밑에 보첨(補添)과 같은 구조를 꾸며 처마를 다시 형성했다.
현재의 돈암서원은 평지에 세워지는 서원건축에서 볼 수 있는 건축공간의 미학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돈암서원의 사당도 서원경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외삼문-강당-내삼문-사당은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사당에서 들어 열개문을 열고 앞을 바라보면, 내삼문을 지나 양성당 지붕을 건너 멀리 앞으로 펼쳐지는 산야의 전경이 일품이다. 사당 일곽, 내삼문과 강당 사이의 공간, 강당 앞마당, 그리고 외삼문을 지나 멀리 들판너머 옆으로 길게 펼쳐지는 안산에 이르기까지, 중첩되며 계속 이어지는 외부공간은 우리나라 서원건축이 엮어내는 공간구성 기법의 백미에 속한다.
돈암서원은 본래 현재의 위치에서 서북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아 홍수로 서원에 물이 들어오자 1880년(고종17) 이곳으로 이건했다. 이전하기 전인 창건 당시의 건물 배치는 사우앞에 강당인 응도당을 건립했는데, 이건된 현재의 건물배치는 건립당시와 다르게 사당앞에 강당인 양성당이 있고, 본래 강당이던 응도당은 양정당 앞마당 우측에 있다. 현재 양성당 편액을 달고 있는 강당 건물은 원래 응도당으로서, 이건 이전의 건물배치와 기본적으로 일치하는데, 다만 현재의 강학공간에 동재와 서재인 거경재와 정의재가 생략된 점이 이건 이전과 다르다.
현재의 돈암서원은 서원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당 앞에 마당을 두고 그 동서쪽에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는 전형적인 서원건축의 배치를 하고 있지 않고 누각도 없는데, 돈암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면서 이러한 배치를 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이 시기가 되면 전국적으로 서원의 강학 기능이 약화되고 반면에 유림들 세력의 근거지로서 제향공간이 중요시되는 시대적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고, 또 이건하면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해 격식을 제대로 갖춘 서원건물을 짓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돈암서원원정비
비는 높직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현종 10년(1699)에 세운 것이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몸 앞면에 전서체로 새긴 비의 제목은 김만기의 글씨이다.
응도당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성격 중 강당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옛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 건물로 강당 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돈암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1880년 이건될 당시 응도당(凝道堂)은 구터에 남아 있다가 1971년 이건, 개와중에 “숭정 6년 계유(癸酉) ”명문이 있어 인조 11년(1633)의 초창기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돈암서원의 건물배치와 규모는 여러 기록에서 사계 김장생이 고례(古禮)를 이어받아 생전에 주자대전(朱子大典)을 고증하여 강경에 황산(죽림)서원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은 것이라고 한다(원정비문 참조).
조선후기 서원의 문화사적 성격 중 장수강학(藏修講學)의 강당(講堂)으로 보기 드물게 큰 규모와 옛 규제를 충실히 따른 건물로서 중요하다.
유경사
현종 1년(1660) 임금에게 ‘돈암’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으며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없어지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으로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 인조 12년(1634) 창건,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다.
호서 기호학파의 대표적 서원으로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등 네분의 위폐를 모셔 제향하고 있다.
고종 17년(1880)에 홍수로 서원앞의 사계천이 범람하자 현재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원형대로 이건했다.
조선중기 이후 상신(相臣) 9명, 대제학 5명, 열사 2명 등의 많은 인물을 배출한 기호지장의 대표적 서원으로, 1973년 돈암서원 사우와 함께 도유형문화재로 지정관리되던중 93년 돈암서원지역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서 해제되었다가 재지정되었다.
책판
돈암서원에 보존되어 있는 책판으로 사계, 신독재 양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책자로 보존해 나가고자 만든 것으로 사계전서 1,793판, 황강실기 및 신독재 전서와 유고1,238판, 사계유고 경서변의, 가례집람, 상례비요가 1,137판 등 총 4,16판중 각종
책판은 가로50cm, 세로22cm, 두께2cm 목판으로 서원 내 장판각에 보존되어 관리되고 있다.
장판각은 정면3칸, 측면1칸으로 내부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깔아 판고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정면 3칸에는 쌍여닫이 판문을 각각 달았다.
왕건과 개태사
왕건[太祖 ; 877(헌강왕 3)~943(태조 26)] 고려의 제1대 왕(918~943 재위)이다. 뛰어난 정치력과 덕망으로 고려왕조 창건과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嶽:개성) 출신이다. 아버지는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이고,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왕륭은 송악군 사찬(沙粲)으로서 자신의 군(郡)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歸附)하여 금성태수로 임명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 왕건은 발어참성(勃禦塹城) 성주(城主)가 되었으며, 898년에는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었다.
그 뒤 왕건은 여러 전선에서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하면서 차츰 자신의 세력을 쌓아나갔다. 900년에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靑州: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지금의 화성).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 여러 군현을 경략하여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 수군을 거느리고 전라도지방으로 진출하여 금성(錦城:지금의 나주) 등 10여 군현을 빼앗아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으로 승진했다. 906년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甄萱)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909년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이 되어 나주와 광주(光州) 일대에서 활약했다.
913년 변방에서의 공으로 파진찬(波珍粲)에 오르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궁예가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자 918년 6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태조는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맞섰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열세로 후백제에게 계속 패했으나 930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뒤 935년에 투항해온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했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과 천호산, 그리고 개태사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8만 7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천안부(지금의 천안)에 이르러 진용을 정비하고 다시 경상북도 일선군(지금의 선산)으로 진군하였다. 후백제군과 일선군의 일리천(一利川)에서 격돌하게 된 고려군은 사기가 떨어진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황산군(黃山郡 지금의 연산)에 이르러 서로 진을 쳤다. 이에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안 후백제왕 신검(神劍 견훤의 아들)이 황산에서 태조에게 항복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즉 태조가 936년에 후백제를 정벌하여 대승리를 거두고 이에 대 사찰을 창건하며, 산 이름을 천호산, 절 이름을 개태사라 정하고는 친히 발원문을 지었다. 이 발원문에는 후백제군을 일격에 물리칠 수 가 있었던 것은 산신령과 부처님의 도움 때문이니 앞으로도 불위(佛威,부처님의 가호)로서 옹호하고 천력(天力)으로 부지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 발원문은『고려사 (高麗史)』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與地勝覽)』『여지도서』에 잘 전해지고 있다.
천호산에 있는 개태사에는 고려 태조의 진전이 있다. 고려 태조 19년에 백제를 정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니 하내(河內)의 30 여군과 발해국(渤海國) 사람들이 모두 귀순하였다. 드디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하고 친히 원문(願文을) 지어 손수 이르기를
‘생민(生民)들이 백가지 근심을 만나니 많은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군사는 경내에 얽히어서 재난이 진한(辰韓)을 시끄럽게 하니 사람들은 의탁하여 살 길이 없고 집들은 온전한 담이 없었습니다.. 운운(云云).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큰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하여 생민을 도탄에서 임의로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 하였더니 위로 부처님의 힘에 의탁하고 다음에 하늘과 신령의 위엄에 의지하여 20여 년 간의 수전(水戰)과 화공(火攻)으로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천리 길을 남으로 치고 동으로 쳐서 친히 간과(干戈)를 베개로 삼았더니 병인년 가을 9월에 숭선성(崇善城)에서 백제의 군사와 대진하여 한 번 부르짖으니 흉공(兇狂)의 무리가 와해되었고, 두 번 북을 울리니 역당 (逆黨)이 얼음 녹듯 소명되어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떠 있고 환호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운운(云云)‘
‘풀잎의 도적과 산골의 흉도들이 저희들의 죄과를 뉘우쳐 새 사람되겠다고 곧 귀순해 왔습니다. 某(王建)은 그 뜻이 간사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울어진 것을 붙들어 일으키는데 있으므로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않고 풀잎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운운’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관사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나이다. 운운.’
‘원하옵건데 부처님의 위엄으로 덮어주고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힘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하였다.’
고려말 왜구와 개태사
고려 말 논산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왜구는 13, 14세기 중국 연안에서 해적 행위를 하던 일본인 집단을 가르킨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 전란의 시기로 중앙통치 권력이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자 서부 일본 지방의 연해민들이 집단화하여 해적이 되면서 인근 고려와 중국 연안에서 약탈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왜구의 주 약탈 대상은 부족한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왜구는 수십 척에서 많을 때는 수백 척의 배에 수십 명에서 2천여 명까지 이르렀다. 왜구가 고려에 침입한 회수는 충정왕 이후 공민왕까지 무려 471회나 되며, 경상북도 54회, 경상남도 85회, 전라남도 31회, 전라북도 24회, 경기 56회, 충청남도가 53회에 이른다.
논산에는 주로 우왕대에 집중되고 있다. 이 사실들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 찾아본다.
우왕 2년 3월 왜구가 부여에서 공주에 이르러 마침내 공주를 함몰시키고 적들이 다시 석성을 침략하였다. 그리고 왜구들이 연산현 개태사로 나아가서 노략질을 하였다.
우왕 4년 9월 왜구가 연산.이산.공주에 침입하였다.
우왕 6년 7월 왜구가 서주와 또한 부여 정산 운제 고산 유성현 등을 침입하고 마침내 계룡산에 들어가니 부녀와 영아들이 왜구를 피해 산에 올랐다가 다수가 왜구에게 살해되고 사로잡혔다.
우왕 9년 8월 왜구가 옥천, 보령 등 현을 함락하고 마침내 개태사에 들어가 계룡산에 주둔하였다.
우왕 14년 8월 왜구가 연산 개태사에 침입하고 청주, 유성, 진잠 등 현에서 노략질을 하였다.
현재의 개태사
개태사는 전성기엔 천 여명의 승려가 상주하여 화엄법회를 갖는 등 승려 양성도량 역할을 담당하였고, 한때에는 8만9암자(八萬九庵子)를 소속시켰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장경불사(藏經佛事 :校正)도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한다. 국가의 변고(變故)가 있을 때마다 중신(重臣)들이 호국기도(護國祈禱)를 드리던 고려시대 최대의 호국수호사찰(護國守護寺刹)이다. 그 후 우왕(遇王) 2년부터 14년까지 3차례에 걸친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방화 약탈되고,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이곳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개태사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빛을 잃은 개태사는 이후 5백 여 년 동안 폐사된 채 내려오다가 1934년 김광영 불자(金光榮佛子:大成華菩薩)에 의해 재건되었고 매몰되었던 미륵삼존석불(彌勒三尊佛)과 5층탑을 세우고 일시 개태도광사(開泰道光寺)라 칭하였다.
한때 사찰의 건물이 천호산 기슭에 하나의 촌락을 이루었던 개태사는 옛 모습은 찾을 길 없고, 농경지로 변한 채 대형초석(大形礎石)과 지대석(地台石) 절을 둘러쌓던 성(城)들만이 남아 있어 개태사지(開泰寺址)로서 도지정 문화재 기념물(記念物) 제4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개태사 경내에 있는 미륵삼존불 대법당(大法堂) 복원사업이 전개되어 1989년 4월 12일 기공식을 갖고 총 4억 6천만 원을 들여 복원되었다 한다.
5층 석탑
아담한 5층 석탑으로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것이다. 이 탑은 본래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던 것을 현 개태사 경내로 옮겨온 것이다. 1층 탑신 이하와 5층 옥개석 이상은 유실되었다. 현재 1층 탑신과 기단부, 보주 등은 다시 만들어 복원하였다. 옥개석과 옥신이 각기 별개의 석재로 만들어 졌으며, 옥신의 모서리에 우주가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낙수면이 심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처마끝은 약간 반전되었다. 체감율이 양호하여 전체적으로 조화된 느낌이다.
1층에서 3층까지의 옥개석 받침은 4단이며, 4. 5층의 옥개석 받침은 3단이다.
5층 옥개석 중앙부에서부터 4층 옥신까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찰주가 심어졌을 것을 생각된다. 상륜부에는 보주만이 조각되어 있다.
삼존불상
중앙 본존불의 불상 높이는 451cm, 좌협시보살상의 높이는 384cm, 우협시보살상의 높이는 372cm이다.
철확
높이 97cm, 입 지름 281cm 의 거대한 철제 솥이다. 조선시대 영조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1909년 일본인 학자 관야정(關野貞)이 조사하였을 때는 연산읍 서쪽 냇가에 묻혀 있었다. 그 후 경성박람회(京城博覽會)에 잠시 출품되었고 연산 부근에 있는 현 연산공원에 되돌려져 보관되다가 지금은 개태사 경내로 옮겨놓았다.
청동금고
금고(金鼓)는 다른 말로 금구(金口, 禁口), 반자(盤子, 般子, 飯子, 半子)라고 한다. 법당 내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말로 하지 않고, 대신 두드리는 불교도구입니다. 개태사 경내에서 집을 짓던 중 발견되어 현재는 부여박물관에 전시 되고 있다. 지름이 102cm로 국내 발견 금고 중 규모가 크다. 측면 높이 22cm, 두께는 약 1.5cm ˜2cm 내외이다. 두드리는 부분인 당좌(撞座)는 지름이 54cm이다. 연화문과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으로 장식되었다. 명문은 없다.
석조(石槽)
개태사의 옛 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던 도구이다.
사찰 부엌에서 물탱크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개태사의 옛 터인 마을 안길의 땅속에 매몰된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그 크기가 거대한 것으로 알려져 절에서 쓰던 둘레 9.4m의 개태사 철확(철솥)과 함께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또한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 개태사터의 역사를 살피는 데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풍화작용으로 마모가 있으며 석조가 마을 안길에 있어 더 이상의 마멸을 방지하고자 지금은 지하에 매몰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또한 개태사 철확과 함께 개태사의 규모를 짐작케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2기가 1m의 간격을 두고 위치하고 있는데, 직사각형,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겉 표면은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았다. 직사각형의 석조는 가로 300m, 세로 130cm, 두께 20cm로 큰 편이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석조는 위 면만 드러난 채 땅 속에 묻혀 있는데 가로 150cm, 세로 110cm, 두께 18cm 정도이다.
천호산의 유래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복하려고 황산(연산)에 이르러 후백제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후백제로서는 최후의 결전을 이 싸움에 걸고 전력을 다하였고 고려의 왕건 또한 이 싸움이야말로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 싸움을 승전으로 이끌기 위하여 모든 지략을 다하여 격전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황산벌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은 적진을 살피고 야전 병영에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큰 밥솥을 머리에 이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왕건은 그 꿈이 왠지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왕건은 주위에 있는 스님들을 불러 놓고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꿈 얘기를 들은 스님들은
「불길한 꿈이니 이 곳에서 철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빙 둘러 산이 있으니 이것은 솥 가마요. 우리는 솥 가운데 있으니 불을 피우게 되면 타죽게 되니 불길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왕건도 이 말이 옳을 것 같아 진영을 철수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 때 병사 한 사람이 찾아와서
「철수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꿈 해몽을 잘 하는 부인이 이 근처에 살고 있으니 한 번 해몽을 듣는 것이 어떠할 지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왕건은 손수 말을 타고 진영을 빠져나와 꿈 해몽을 잘 한다는 지금의 부적면 부인리에 살고 있는 부인을 찾아갔다. 왕건의 꿈 얘기를 들은 그 부인은
「사람이 서까래 세 개를 짊어졌으니 임금왕자(王)요, 귀인은 솥을 머리에 썼으니 왕관을 쓴 것이나 다름없고, 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용궁으로 들어간 것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상좌가 된 것이 아니요? 그러니 여기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요.」
라고 해몽을 해주었다. 왕건은 이에 힘을 얻어 도선국사의 진언에 따라 적군을 물리쳐 주기를 하늘에 기도하고 부처님께 빌었다. 그랬더니 뜻밖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병사들이 나타나 함께 싸우니 왕건의 한 마디로 후백제군이 무너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왕건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하늘이 보호하여 병사가 나타나 도왔기 때문이라 하여 병사들이 나타났던 황산을 천호산(天護山)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은 개태사 미륵삼존불
연산면 천호리 산기슭에 자리한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고 창건한 국립 대 사찰이었다. 개태사 경내에 있는 미륵삼존 불상에는 이러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 말기 왜구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다. 물밀 듯이 몰려온 왜적들은 한양을 점령하고 나서 각지방에 내려와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무렵 이 곳 개태사에서는 스님들이 국난을 당하면서부터 호국에 대한 염불을 계속하고 있었다. 개태사에서 스님들이 호국 염불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왜적들은 개태사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왜적들은 절간에 들어와서 주지 스님을 찾았으나 나타나지 안자 절간 문을 부수고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하였다. 왜적들은 대웅전 문 앞에 가서 묵직한 문을 열어 제쳤다. 그 순간
「아니! 이게 무슨 불빛이냐?」
대웅전 안을 바라보는 순간 삼존석불에서 빛이 발했던 것이다. 그 불빛을 바라본 왜적들은 눈을 뜨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어갔다. 그 때 대웅전 안을 들여다보지 않은 왜적들은 잔뜩 겁을 먹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대장에게 사실대로 보고를 했다. 그러나 대장은 부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아니! 그래 사람이 부처님을 쳐다보자 빛이 발해 죽어?」
적장은 믿을 수 없다 하면서 부하를 데리고 개태사에 직접 와서 대웅전 문을 힘껏 열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왠지 겁이 나고 몸이 떨렸다. 그는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들어 우협시불과 중앙불의 목과 허리를 힘껏 내려쳤다. 그 다음 좌협시불을 내려 치려하자 이상한 불빛이 보이는가 하더니 칼이 부러지고 적장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그 이후부터 개태사에는 왜적이 쳐들어오지 못했다 한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절 부근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불이 나서 집과 곡식을 태우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어떤 때는 마을 전체를 불태워 마을이 쑥대밭이 되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이 쌓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개태사의 잡귀가 하는 것 같으니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이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의견을 모으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불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을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부처님을 만났는데
「개태사의 불상을 원상태로 해 놓고 정성껏 불공을 드리면 화를 면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의 꿈에 나타났던 부처를 찾아 복구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불공을 드리니 그 후부터는 불이 나지 않고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호국의 가마솥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 경내에 직경이 3m, 높이 1m인 거대한 철로 만들어진 가마솥이 있다. 개태사가 가장 번창했을 때 스님들이 1천 여 명이나 있었는데 이 솥은 스님들의 공양을 끓이기 위해 만들었다한다. 어느 해의 일이다. 크게 도를 깨우친 스님이 개태사를 찾아와
「얼마 후 대홍수가 나서 본당의 부처님 상이 위험할 것이니 이 가마솥으로 본당에 이르는 물길을 막으면 불상은 안전할 것이다.」
라고 하며 어디론지 떠났다.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은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워낙이 큰스님의 말씀인지라 그 말에 따라 가마솥으로 본당 앞을 막았다. 과연 대홍수가 났는데 불상은 안전하게 되었지만 가마솥은 떠내려가 지금의 연산면 고양리 다리 근처에 묻히게 되었다고 전한다.
가마솥에 대해서는 이러한 얘기도 전해오고 있다. 고려말기 왜적들의 침입으로 개태사는 쇠퇴하여가고 가마솥은 녹슬어 쓸모없게 뒹굴고 있었다. 왜적들의 침입이 있자 우리나라 군사들의 식사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솥을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이상하게도 이 솥에 밥을 지어먹은 군사들이 잘 싸워 그 때부터 왜적들은 물러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 이 솥은 왜적들과는 원한을 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왜적들이 이 솥을 옮겨가려고 할 때면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을 쳐 손을 대지 못했다고 전한다.
한편 이 곳 주민들은 이 쇠솥과 함께 제방을 쌓으면 수해를 막아줄 뿐만 아니라 그들에는 풍년까지 들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가마솥을 보면 두 군데 깨진 데가 있는데 한쪽은 주민들이 스님들과 원성이 있을 때마다 화풀이하여 깨졌다하고, 다른 한 쪽은 도적이 깬 자리라고 한다.
어느 날이었다. 도적이 무쇠덩어리가 욕심이 나서 가마솥을 깨려고 망치로 두들겼으나 좀처럼 깨지지 않아 도적은 화가 나서
「이 천한 밥솥아 너 때문에 마을이 될 것이 안 돼, 네가 마을에 병을 몰고 오고 흉년이 든단 말이야.」
하며 내려치니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천둥 번개가 내려쳐 도적은 도망치다가 벼락을 맞고 죽었다 한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서울 박람회에 가마솥을 가지고 갔는데 그 후부터 계속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각계에 진정을 내어 다시 연산 땅에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 사람들이 죽어서 염라국에 가면 염라대왕이
「네가 연산의 가마솥과 은진미륵과 강경 미내 다리를 보았느냐?」
라고 물어본다고 한다. 이는 염라대왕도 알 정도로 유명하다는 말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선녀와 놀던 옥녀동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 밑에 옥녀동이라 하는 마을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군을 멸망시키고 대망의 후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태조 왕건은 부처님의 가호로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생각하여 도선국사의 도움을 받아 천호산 기슭에 개태사를 창건하여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국립대사찰을 조성하게 하였다.
어느 날이었다. 태조 왕건은 천호산 기슭에서 병사들과 함께 야영을 하게 되었다. 후삼국 통일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기념하기 위하여 군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있던 왕건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천호산 산봉우리에서 선녀가 꽃마차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왕건은 넋을 잃고 꽃마차 위에 타고 있는 선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환한 불빛을 발하며 내려오던 꽃마차는 점점 왕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왕건 옆에 멈추어 서서 선녀는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것을 축하하옵니다. 저희들은 하늘의 선녀로서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축하를 드리려고 내려온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선녀들은 밤이 늦도록 왕건과 함께 즐겁게 놀아 주었다. 자정이 되었을 무렵 선녀들은 왕건에게
「저희들은 이제 시간이 다되어 하늘나라로 올라가야만 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는 손을 흔들며 꽃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 때 왕건은
「선녀! 선녀!」
하며 불러 보았지만 선녀들은 하늘로 올라가 이미 보이질 않았다. 왕건은 깜짝 놀라 선녀를 부르며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왕건은
「어쩌면 이처럼 생시 같을까? 참으로 신기한 꿈이로다.」
생각하고는 대사를 불러들여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대사, 길몽이요? 흉몽이요? 참으로 신기하지 않소?」
하고는 대사가 말해주길 바랬다. 대사는 염주를 만지며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합장하면서
「소승이 생각 할 때에는 길몽인 것 같사옵니다. 하늘이 태조를 돕겠다는 계시라 생각되옵니다.」
라고 하였다. 왕건은 크게 기뻐하면서
「선녀들과 내가 놀던 여기를 「옥녀동」이라 부르도록 하여라.」
라고 했다 하여 이때부터 지금까지 옥녀동이라 부른다고 한다.
명재고택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 하며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 산의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 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뒷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하다.
조선 숙종대에 윤증(尹拯) 선생이 지었다고 전하나 그 세부기법으로 미루어 19세기 중엽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산(尼山)의 산자락에 기대어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하여 놓여 있다. ㄷ자형의 안채가 날개를 펴서 뒤에 배치되었는데 그 앞을 막아 중문간(中門間)의 출입에 방해가 안되도록 비끼면서 동쪽으로 축을 옮겨 가로로 배치되었다. 사랑채 앞은 행랑채 없이 전면이 개방되며 안채 축의 정면에 정갈한 조선식 우물이 축조되었고 그 남서쪽에는 역시 조그만 연못이 조성되었다. 안채 동북쪽 모서리에는 사당채가 있는 데 근래에 다시 복원 한 것이며 사당 주위로 담을 둘러서 공간을 따로 구획하고 있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대체적으로 중부방식을 좇으면서도 남도풍(南道風)이 들어가는 특이한 구성이다. 전체적으로는 좌우대칭으로 가로칸은 겹집인 양통 뼈대로, 세로칸은 서쪽을 전후퇴, 동쪽을 전퇴로 간살이를 하고 복판에 3칸 ×2칸의 넓은 대청(大廳)을 두었다. 서쪽날개는 앞쪽으로 부터 2칸부엌, 2칸안방, 웃방이 차례로 배치되며 꺾어져서 웃방 옆은 찻방, 그 앞은 넓은 대청과 연결되는 대청공간이 있다. 안방과 부엌 웃간까지의 전퇴 및 안방 뒷퇴는 모두 툇마루가 놓였으며 웃방의 뒷퇴에는 골방이 놓였다. 동쪽날개는 앞으로부터 2칸 작은 부엌, 2칸 안사랑, 마루방, 뒤쪽 모에는 가로 2칸을 건넌방으로 꾸몄다. 안사랑 앞퇴는 툇마루이고 건넌방의 앞칸은 역시 대청이 되어 안대청과 연결되었으며 마루방을 따로 구획하여 이용한다.
구조는 양통집과 같이 3평주3량인데 대청중앙만 긴보 5량이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모를 굴렸고 장혀를 받쳤다. 그러나 종도리는 굴도리이며 장혀 받치고 소로를 끼워서 뜬창방을 보냈다. 보의 단면은 굴린 네모꼴이며 대공은 높은 사다리꼴 판대공이다. 기둥은 네모꼴이고 덤벙주초이며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基壇)이다.
사랑채는 높은 2단축대(築臺)위에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간살이이다. 동쪽에 대청을 두고 복판 2칸은 사랑방이며 서쪽간은 앞에 높은 누마루를, 뒤에는 사랑부엌을 배치했다. 사랑 앞퇴에는 툇마루가 놓이는데 사랑대청과 연결되며 대청전면에는 문 시설이 없이 개방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남도풍의 평면구성이다. 사랑채의 서쪽과 안채 작은 부엌 사이에는 2칸 구들을 두어서 조그만 샛마당을 만드는데 이 건물은 아마도 나중에 만들어 넣은 듯 보인다.
구조는 1고주5량으로서 구조기법 등은 모두 안채와 유사하다. 다만 네모뿔대의 높은 주초(柱礎)를 쓰고 화강암 가공석 바른층 쌓기 댓돌과 축대(築臺)를 쓴 점만이 다르다.
대문채는 높은 2단축대 위에 자리했다. 맞걸이 5칸집이며 가운데 2칸에 꺾여 통행되도록 대문간을 만들었다. 지붕은 모임이며 평으로 처리했다. 광채는 안채 서쪽에 세로로 배치되었는데 4칸 ×2칸의 박공지붕집이다. 구조는 안채와 같은 3평주3량집이다.
사랑채 앞의 축대와 우물, 연못 그리고 몇 그루의 나무들은 당시의 조경미를 느끼게 해준다. 또한 뒤안의 축대와 장독대, 대나무 숲의 울창함은 우리나라 살림집 공간구조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휘하고 있다.
윤증가의 유품
▶부속문화재
상투관(중요민속자료 22-1 ) 빗(중요민속자료 22-2 )
빗치개(중요민속자료 22-3 ) 살쩍밀이(중요민속자료 22-4 )
신(기일)(중요민속자료 22-5 ) 신(기이)(중요민속자료 22-6 )
합죽선(중요민속자료 22-7 ) 백목화(중요민속자료 22-8 )
월자(중요민속자료 22-9 ) 첩지(중요민속자료 22-10)
비녀(중요민속자료 22-11)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사용하던 물건들과 그의 문중의 맏며느리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유물들이다.
상투관은 머리 정돈과 장식을 위해 상투 위에 쓰던 관(冠)으로 나무로 만들었다. 높이는 6.6㎝이고 위쪽이 둥글며, 앞뒤로 4줄의 골이 나 있고 양옆으로는 상투비녀를 꽂을 수 있도록 트여 있다.
빗은 길이 16㎝, 높이 6㎝로 향나무로 만들었으며, 모서리 부분이 각이 져 있고 등부분은 약간 휘어져 있다.
빗치개는 빗살 틈의 때를 빼거나 가리마를 타는데 쓰는 도구로, 길이가 9.3㎝인 갈색의 뿔제품이다. 현재는 원형이 많이 파손되어 형태만 남아있다.
살짝밀이는 뿔로 얇게 만든 것인데 망건을 쓸 때에 귀옆머리를 망건 밑으로 밀어넣을 때 사용했던 도구로 현재는 원형이 많이 파손되어 형태만 남아있다.
신발로는 길이 32㎝, 높이 5㎝인 가죽단화 1쌍과 길이 36㎝, 높이 5㎝의 가죽단화 1짝, 그리고 길이 31㎝, 높이 34㎝인 흰 무명천과 가죽으로 만들어 국상(國喪) 중 예복을 입을때 신었던 백목화가 있다.
월자는 가발의 일종으로 대례복을 입을 때 덧드리는 딴머리로 다리라고도 부르며 길이가 105㎝나 되었다. 머리 세 가닥을 땋아서 한 개로 굵게 만들었는데 위쪽에는 약간 둥글게 묶어서 검은 천을 씌운 다음 조그만 천고리를 달았고 끝에는 두 가닥의 붉은 댕기를 드리웠다.
첩지는 여자들이 예복을 입고 머리를 치장하던 용구로 길이는 5.5㎝이다.
누런 색깔의 놋쇠로 만들었으며 몸통이 긴 곤충형인데, 머리에는 4줄의 선을 무늬로 넣었고 끝은 위를 향하고 있다.
비녀는 은으로 만들었으며 몸통 직경이 0.9㎝인 원통형이다. 비녀의 몸통과 머리부분은 따로 만들어 연결시켰다. 그밖에 접는 부채인 합죽선은 문양이 없고 길이는 40㎝이며 대나무와 한지로 만들었다.
경상도 일대에는 이러한 유품이 여러 곳에서 전해오고 있으나 경기와 충청지방에서 이러한 것들이 전해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여성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윤증 초상 일괄(尹拯 肖像 一括)
초상화와 함께 전하는『영당기적』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 卞良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 장경주, 1788년 이명기, 1885년 이한철이 모사할 때까지 4번의 제작사례를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제작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윤증이 차지하는 비중과 함께 현존하는 장경주와 이명기가 그린 <윤증초상>은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회화적 격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성을 지닌다. 아울러 '영당기적'은 초상화 제작과 이모과정 그리고 세초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로 지정 예고된 이들 작품 외에도 종가에는 1919년 및 1935년작 전신좌상 및 소묘초본이 여러 점 전하고 있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744년작(전신) : 111x81cm(화면), 190.1x101.0cm(전체)
- 1788년작 1(전신) : 118.6x83.3cm(화면), 182.2x100.3cm(전체)
- 1788년작 2(전신) : 106.2x82cm(화면)
- 소상(2점) : 59 x 36.2cm(정면), 59 x 36.2cm(측면)
- ꡔ영당기적ꡕ : 36.3 x 26.3cm
후덕한 선비의 집, 윤증 선생 고택
선비의 집이니 조촐할 수밖에 없다. 부자옹(부잣집)이나 벼슬살이한 사람들의 뻑적지근한 저택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예의를 감추고 염치 있게 내외의 살림을 꾸릴 수 있을 정도로만 안채,사랑채,대문간채와 사당을 지었다. 이집의 특성은 매우 안정감이 높다는 데 있다.부근의 넓은 대지를 연상시키는 평탄함과 후덕스러움이 집안에 가득하다. 종손이 지금도 기거하고 있는 사랑채에 올라가 수인사를 나누었다. 사랑방의 넓고 한적한 멋에 압도 당한다.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생각이 솟는다. 전생에 웬만한 적덕을 하지 않고서는 금생에 그런 호강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니 체념은 하지만 마음은 몹시 부럽다.
사랑채에는 눈에 띄는 재미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사랑방 아랫목 북쪽 뒷방으로 들어가는 샛장지이다. 만살창으로 만든 네 짝의 미닫이인데 가운데 두짝을 좌우로 밀어 끝의 짝에 겹치게하고 열면 여닫을 수 있다. 끝의 문짝이 돌쩌귀에 달렸기 때문에 개폐가 가능하다. 이때 문지방의 일부가 문짝과 함께 열린다. 문지방을 잘라 놓은 것이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말라 뒤틀리면 문지방이 이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개폐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도편수가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놀랍다. 이런 문은 지금도 현대 주택에서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 우리의 집 구경은 이런 흥미있는 생동감 넘치는 자료수집으로 신이 난다.
사랑채는 정면4칸, 측면2칸이다. 8칸인데 그중 방은 2칸뿐이고 나머지는 마루깐 구조인데 사랑방 아랫목 편에서 이어져있는 마루깐 한칸은 다락(내루)으로 만들어져 있다. 다락에서 문을 열고 내려서면 작은 사랑방이다. 큰사랑방 미닫이여닫이를 열고 나면 뒷방이 이어져 있다. 작은사랑방의 북쪽 문을 열면 안채의 부엌 옆 골목이 된다. 안채는 대문으로 들어선다. 지금의대문은 꼭 중문같은 맛을 지녔고 그리고 사랑채 보다 깊숙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 옆의 층계로해서 대문으로 접근한다. 문앞에 다시 돌 층계가 있다. 대문간은 한칸통이고 다섯칸이다. 문을 들어서면 바로 벽이다. 가로막는 벽을 피해 한칸 지나야 앞마당으로 들어선다. 내외벽의 시설이다. 예의를 중시하던 학자님댁 답게 내외벽을 들였다. 여름에 여인들이 가벼운 차림으로 있다가 갑자기 손님의 방문을 받으면 준비할 시간이 있어야 단정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내외벽을 만들었다. 내외벽은 면벽,가리개라고 부른다. 문의 안이나 밖에 작은벽을 따로 쌓기도하고 문간의 내벽을 이용하는 구조인데 이댁은 문간 안벽을 활용하였다. 문을 들어서면 방문객이 벽을 향하고 "이리 오너라 부른다" 계집종이 쪼르르 쫓아나와 "누구시냐고 여쭈랍신다" 하며 찾아온 연유와 신분을 묻는다. 벽체를 사이에두고 안팎에서 주고 받는 대화다. 그 사이에 안에서는 손을 맞을 준비가 끝난다. 신분이 확인되고 들어와도 좋다는 통지를 받아야 벽을 지나 안마당에 들어올 수 있다.
안마당은 널찍하고 반듯하며 정갈하다. ㄷ자형의 안채가 정갈하게 자리잡고 있다. 기둥 사이의 간살이가 넓어 보인다. 편안하게 구조된 것이다. 안채에서의 일품구조는 양명한 햇볕이 가득한 넓은 대청이다. 육간대청이라 하면 썩 넓은 대청을 의미한다. 이집 대청은 8칸이다. 육간보다 2칸이 더 많다. 대청에서 안방으로 가는 내고 앞에 1칸과 대청에서 건넌방으로 가는 서고 앞에 2칸의 마루가 더 있다. 여기 2칸 중 1칸은 건넌방 사이의 골방 같은 위치에 있어서 이를 제외 한다면 8칸의 넓이로 대청이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대지와 같은 평활한 넓이다. 담대하다. 안방에서 내다보면 그 넓은 대청이 차분하고 광활하게 바라다 보인다. 기둥 사이의 간살이가 넓은데 비하여 기둥은 낮은 편이다. 그래서 이집은 평활하며 안정적이다. 신곡간의 집들이 간살이보다 기둥이 높아 입체적이며 구축적인 것과 대조되는 구성이다.
간살이가 넓고 기둥이 짧아서 대들보도 낙낙한 높이에서 마루를 건질렀다. 굵고 투실한 목재를 사용 하였는데도 대들보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날렵하고 아담스럽게 바라다 보이도록 꾸미는 일은 대목에겐 큰 고심거리다. 여기에서 연등천장이 고안된다. 오량집에서 짧고 긴 서 까래가 걸린다. 그것을 다 들어내 보이도록 하고 서까래 사이의 벽체를 양토하여 싸발라 말끔하게 정리한다. 이것을 연등천장이라 부르는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대들보에 의지하고 우물반자(천장의 한 가지)나 설치하였다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한 공간이 되어 시원한 맛은 싹 가시고 만다.
대청은 마루를 깔았다는 점이 구조상의 특색이다. 마루는 남쪽 지방에서 발달한 구조이다. 북방에서 발전하여 남쪽으로 전파해 온 구들과 마침내 접합한다. 구들과 마루가 한 지붕 아래 공존하는 것을 한옥의 특색이라 일컫는다. 대청의 마루는 그 점에서 한옥만의 특색을 지닌 것인데 그 마루를 우물로 짜는 법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한옥만이 지닌 돋보적인 구조다. 현대인들에게는 잊혀져 있다. 대청를 올라서 서쪽을 바라다보면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세짝이 보인다. 맹장지 사분합이라 부른다. 맹장지 중앙 부분에 산대가 드러나 있다. 넉살무늬 구조다. 창호지 한 겹만 발라 빛을 받게 마련한 것이다. 맹장지 부분을 안팎으로 싸발라 햇빛을 차단한 것과는 대조되는 구성이다. 이 창을 불발기창이라 부른다. 불발기창은 집에 따라 그 살대의 꾸밈이 다르다.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서서 동쪽을 바라다보면 대청 끝 자리로 띠살무늬에 궁판을 들인 분합문이 보인다. 건넌방의 출입문이다. 띠살무늬는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래위로 긴 살대를 장살이라 하고 가로댄 살대를 동살이라 하는데 동살은 상.중.하의 세 구간으로 구성 되었다. 상구간의 동살대 수는 넷, 중앙의 것은 여섯, 아래쪽 하구간은 다시 넷이다. 또 장살은 여덟이다. 4.6.4와 8의 수인데 4에 2를 더한 6과 6에 2를 더한 8이 채택된 것이다. 8은 4의 곱이고 4는 2의 곱이며 2는 짝수로 1의 홀수를 기다려 3의 기반수(基盤數)를 이룬다. 철학의 수로 표현되는 통례에 따라 이들의 수는 그것의 논리를 표상하고 있다.
대청의 뒤쪽엔 머름대 위에 세운 문얼굴이 있고 바라지창이 달렸다. 이 바라지창을 밀어 좌우로 열어 제치면 바로 뒤뜰, 후원이 바라다 보인다. 대나무숲이 무성한 후원의 시원한 바람이 여름의 더위를 씻어 준다. 트인 앞과 열린 뒷문을 통하여 부는 시원한 바람은 슬슬 부치는 태극선 하나로 시원한 여름을 지낼 수 있다. 대청은 여름에 시원하게 지내는 장소로도 유용하다. 잔치를 하거나, 음식을 장만하거나,여러 사람이 즐기거나,다듬이질하고 다듬질하는 일들이 진행된다. 제사도 여기에서 지내고 방문객과 환담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안방 남쪽의 4칸 넓이가 부엌이다. 이 시기면 반빗간 제도가 가시고 부엌이 본격적으로 경영된다. 대가댁 부엌답게 널찍하게 생겼다. 이 정도 넓이면 현대인들의 생활생활방식에 맞게 꾸밀 수도 있다. 옛집에 오늘을 사는 지혜가 들어서는 일이다. 안채는 어머님의 도량이다. 사랑채가 남자의 기상(氣象)이라고 하면 안채는 우주의 산실(産室)이다. 기(氣)와 정(情)이 어울려 인격을 함양하는 터전이 되면서 집은 이와 같은 형상을 지니게 된다. 안채에서 사랑채로 가려면 낙은 샛담에 설치된 쪽문을 지나야 한다. 사랑채에 손님이 오시면 이 문은 닫힌다. 수발하는 동자나 계집종말고는 출입이 통제 된다. 예의를 지키기 위한 담이고 문이다. 그러면서도 문과 담은 그렇게 딱딱한 구성이 아니다. 오히려 소박하며 느긋한 맛을 풍긴다. 갖추되 지니침이 없다는 옛말을 이런 데서도 맛볼 수 있다. 그런 맛은 대청에서도 즐길 수 있다. 바라지창을 활짝열면 후원이 다가선다. 대숲의 바람소리가 가슴을 스치는 사이에 소담한 장독대가 눈에 들어온다. 정서와 생활이 공존하고 있는 실존의 세계다. 부엌에서 뒷문을 열고 나서면 곳간과 창광이 있고 후원으로 가면 언덕 위에 장독대가 있다. 정결한 장소에 깨끗하게 정돈된 독이 가지런하다.
노성산성 사적 393호
백제 때 산 정상부분을 돌로 둘러쌓아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산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거의 완벽하게 쌓았고 동쪽면, 북쪽면, 서쪽면은 돌을 네모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신증동 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성 둘레는 590m, 높이 2.4m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는 장수의 지휘대로 보이는 터(장대지)가 있으며 동쪽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토기, 기와같은 여러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산에 있는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한 주요 방어지역이었던 곳이다.
황산성
연산평야와 논산평야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264m의 산봉우리를 빙둘러 돌로 쌓은 산성이다. 등고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으며, 깬돌을 이용하여 모가 난 쪽이 겉으로 나오도록 하였고 북쪽은 험준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였다.
성 안에서는 백제의 세발토기를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오랜 시기에 걸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서쪽의 노성산성과 일직선상에 있어서 신라군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산성은 흙과 돌로 자연< 自然 >의 지세< 地勢 >를 이용하여 험준< 險峻 >한 상봉< 上峰 >에 만들었다. 웅진시대< 熊津時代 >로부터 사비시대< 泗 時代 >에 걸쳐 축성된 백제< 百濟 > 때의 것으로 여겨지며 자연석을 이용하여 작은모 쌓기를 한 것이 특징이다.
둘레는 870m이고 성안에서 '황산인방< 黃山寅方 >' '대안< 大安 >'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바 있으며 백제 특유의 삼족토기< 三足土器 >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견된다.
주변의 고분군< 古墳群 >과 함께 백제< 百濟 > 말< 末 >의 황산벌 싸움과도 관계 깊었던 산성< 山城 >으로 보여지고, 조선< 朝鮮 > 초기< 初期 >까지도 군창< 軍倉 >을 두어 유지했던 기록이 있다.
북서쪽의 노성산성< 魯城山城 >과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신라군< 新羅群 >을 방위하던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 推定 >된다.
[공부 합시다]
기호(畿湖)예학의 대가 김장생의 고장 논산
본래 유교는 <예기(禮記)>, <의례(儀禮)>, <주례(周禮)>를 3예(禮)라 하여 유가의 경전으로 중시해 왔을 뿐 아니라,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곧 예라고 할만큼 그 비중이 매우 컸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주자의 <가례(家禮)>가 들어오면서 조선조에 와서는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하나의 지침이 되었으며, 조선조에 와서 17세기 이후 예가 하나의 학문적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소학>을 실천하기에 힘쓴 한훤당 김굉필, 그 제자인 조광조가 도학 . 성리학 . 의리학을 드높였으며, 회재 이언적과 화담 서경덕을 거쳐 퇴계 이황 . 율곡 이이는 조선 이학(理學)의 기반을 세웠다.
예학은 이러한 전통 위에서 그 정신을 이어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의 문인이었던 사계 김장생(1548-1631)과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인이었던 한강 정구(1543-1620)를 필두로 활발하게 전개하여, 정구의 영남(嶺南)예학과 김장생의 기호(畿湖)예학으로 발전하였다.
김장생이 조선예학에 기여한 점은 가례의 학문기반을 수립한 것이다. 김장생은 이학(理學) . 경학(經學) . 고증(考證)을 모두 겸하여 조선 예학의 기초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그 조(祖)로서 추앙 받고 있다. 이학과 경학을 통해 논거를 찾고 고금예서를 연구하여 미비점을 보완하고, 어려운 변례(變禮)문제에 대하여 제자 학우들과 문답하여 예를 실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저서중 대표적인「의례문해」는 관(冠) . 혼(婚) . 상(喪) . 제(祭)의 예(禮)에 관하여 매우 구체적인 문답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이 상례와 제례에 관한 문답 저술인「의례문해속」을 저술하는 기반이 되었다.
사계는 예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였고, 일상적 생활이 예(禮)에 맞도록 실천하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독서의 순서로서 <소학>과 <가례>를 중시하였고, <가례집람>과 <의례문해>의 보완에 정성을 바쳤으며, 특히 변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상례비요>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그의 예학은 아들인 신독재 김집(1574-1656)을 통해 체계화되었고, 문인 우암 송시열(1607-1689),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초려 이유태(1607-1684), 시남 유계(1607-1664) 등을 통해 전승되었으며, 도암 이재(1680-1746)는 <사례편람>을 저술하여 예학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여행프로그램 [別有風景]
한비야 씨는 여행이란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진행되었던 위례역사문화연구회의 정기답사를 2009년 9월, 102차로 끝내고 송파문화원의 '테마가 있는 문화탐방'이라는 강좌로 변경되다보니 우리 회원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4월부터 새롭게 여행 프로그램을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프로그램 이름을 고민하다가 이백의 시 <산중문답>에
問爾何事棲碧山(문이하사서벽산)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불답심자한)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류수묘연거)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이란 詩가 떠올랐습니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을 별유풍경(別有風景)으로 바꿔보니 보통 볼 수 없는 특별히 좋은 풍경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별유풍경(別有風景)을 구경하러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말이죠.
여행일정은 종전과 같이 매월 4째 주 화요일에 진행되며 접수 및 신청은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02-3401-0660)으로 하셔야 합니다. 1회 참가 시에 회비는 4만원이며, 3개원 단위로 신청을 하실 경우에는 10만원입니다. 강사는 오덕만 선생님이 진행하실 계획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회차 |
일자 |
탐방주제 |
탐방지 |
9 |
12월28일(화) |
서해안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당진 |
당진면천읍성 → 면천향교 → 영탑사 → 영랑사 → 안국사지 → 필경사 → 김대건신부생가지 |
10 |
1월25일(화) |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 사람의 정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금산 |
개삼터 → 태고사 → 보석사 → 남이자연휴양림 → 육백고지전승탑 → 백령성지 → 서대산 → 칠백의총 |
11 |
2월22일(화) |
북부에는 궁예, 남부에는 이 성계와 관련된 땅이름이 많은 포천 |
포천향교 → 구읍리석불입상 → 구읍리미륵불상 → 반월산성 → 청성사 → 용연서원 → 채산사 → 인평대군묘 → 성석린 선생 묘 |
회 비 : 3개월(100,000원), 1개월(40,000원)
회비입금: 국민은행 836301-04-002170(예금주: 오덕만)
접수처 :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담당: 오유정 02)3401-0660)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193-17 광진빌딩 2층 ☏ 3401-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