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졌고,
사람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 (찬송 50장, 새 35장)
2017-6-27, 화
맥락과 의미
사도
바울은 1장에 이어서 계속 자신과 예루살렘의 사도들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거짓 선생들을 반박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바울을 깎아내리며 거짓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 맞서서 자신의 권위를 세웁니다. 다른 사도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님께 복음을 받아 전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11절부터는 순수한 복음을 다시 전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됩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의 행위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율법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 직분은 사람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 (1-10절)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바울의 사도적 권위는 사람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한 지 14년 후, 혹은 1장에서
예루살렘에 간 지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예루살렘의 ‘유명한 자들’(사도들)에게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말했습니다. 거기에 올라간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따라서 한 것입니다. 또 개인적 차원에서 방문한 것입니다. 공적으로 그의 복음을 검증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의
권위를 사람에게 종속시켜서 약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둘째, 그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한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도록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방인도 할례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할례를 받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게
하지 않았습니다(3절).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이
아닌 것을 성도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가진 자유를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강요하는 자들은 ‘거짓
형제’입니다. 사람의 권위에 일시적으로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오직 십자가의 복음 진리만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5절).
6-10절은 바울 사도의 권위가 예루살렘 사도와 동등하다고
말합니다. 유명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새로운 것을 더한 것은 없습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안에 함께 역사하십니다.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신 분도,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분도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이 하나님께 세우심을 받은 사도임을 확신하였습니다. 바울과 교제의
악수를 나눴습니다. 사도들이 서로 같은 복음을 가진 것을 확인했다는 증거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 사도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제를 권면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 자신도 가르쳐 온 바였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목사는 하나님의 권위에만 의지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다른 유명한 목사의 인정을
바라고 의존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평가에 대한 생각을 버립시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신실하게 전합시다. 성도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복음대로 사는지에만 집중합시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평가에 대한 생각을 버립시다.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하는 자유인으로 살아갑시다.
2. 바울은 베드로가 율법주의적으로 될 때 책망하며,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 의지 (11-21절)
바울이
안디옥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율법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식사 자리에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과는 친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두려워해서 식사 자리를 서둘러 떠났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도
이방인들과 따로 앉으려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베드로가 율법주의자를 의식해서 위선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복음을 분명히 반복합니다. 17절에, 전에 율법을 잘 지키던 유대인들도 율법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그리스도
바깥에서는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죄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게 됩니다. 18절,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다시 율법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것은 마치 무너뜨렸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율법의 효력을
되살리는 셈이 됩니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19절,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죽었습니다.’ 율법이 우리가 죄인임을
나타냅니다.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의 저주가 우리와
관계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의 책임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습니다. 더 이상 율법의 저주가 나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그리스도께 다 뒤집어 씌우셨습니다. 나를 의인으로 인정하십니다.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살아갑니다. 죄와 마귀의 유혹이 있을 때, 나의 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이기고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이미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무의미해져 버립니다.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용서 받은 것을 계속 믿읍시다. 마음의 평화를 누립시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새
생명을 살아갑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죄를 벗어 버리고, 계속 거룩하게 살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주신 복음과 사명은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오직 그리스도께만 매여서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명을 담대하게
행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사람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복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