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구 100년사에 가장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건(?)이라고 하면 이상천의 3쿠션 세계제패일 것이다.
94년 1월10일 벨기에 겐트에서 벌어진 월드컵 3쿠션 파이널대회 결승에서 신예 코드롱 프레드릭을 3대1로 제압 승점90점을 득점하면서 총220점으로 종합우승을 차지 대회장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게 하였으며 이 대회 제패로 총6만 2천 달러(약 6천 8백 2십만원)의 상금을 움켜쥐었다.
월드컵 3쿠션 당구는 세계당구월드컵(BWA)주최로 해마다 5~7개국 투어경기로 열리는 세계최대 규모의 당구올림픽이다. 월드컵의 채점방식은 대회마다 1등 60점, 2등 45점, 3등 30점 순으로 부여되며 가장 중요한 마지막 파이널대회는 50%의 가산점이 부여되어 챔피언을 가린다.
이상천은 터키월드컵에서 1위, 네덜란드 3위, 일본 4위, 독일 6위를 각각 기록하였으며 이탈리아월드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상천은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3개 월드컵우승으로 1위를 달리던 토브욘 브롬달(스웨덴)이 파이널 전에서 16강에서 탈락하는 이변을 틈타 우승을 함으로서 210점을 득점한 토브욘 브롬달 보다 10점을 앞서 1993~1994 세계3쿠션 챔피언이 되었다.
“3쿠션의 머신” “꿈의 승부사” 등의 애칭을 가진 이상천의 세계제패는 1면 톱으로 대서특필 되었으며 동네경기로 인식되었던 당구를 머리기사로 올렸다는 것 자체가 우승을 떠나 화제 거리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해외에서 보는 이상천의 뉴스가치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1월9일~10일자 유럽의 30여개 TV와 신문들이 이상천을 “동양의 새 당구황제”로 대문짝만하게 소개하였으며 열흘 후 미국의 뉴욕타임스(1월19일자)는 이례적으로 이상천의 우승에 관한 기사를 두면을 할애했다고 한다. 한국의 미국이민 1백년사상 최대지면을 차지한 이 기사 제목은 “챔피언 소리 없이 귀국하다.”(The Unsung Champ) “상리가(이상천의 미국명) 미국당구사상 처음으로 유럽을 이겼다.” “상리의 개선에 왜 축하퍼레이드조차 하지 않았는가?” “시장은 왜 맨발로 뛰어나오지 않는가?”하는 뉴스기사가 나간 이틀 후 줄리아노 뉴욕시장의 축하 겸 사과전화를 받았다. 이어 인기 TV 토크쇼인 “데이비드 레터맨 쇼”등 출연요청으로 언론에 시달리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유명인사로 급부상하였다.
세계당구 최고의 테크니션이 되기까진 밤낮없이 큐를 잡아야 하는 초인적인 노력이 뒤따랐다. 본인의 말대로 “노랑머리 장대 같은 세계 허슬러 스타 틈에서 뼈저리게 깨우친 것, 패하면 죽는다.”는 처절한 승부기질이 바탕이 된 것이다.
이상천은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자극적인 충고를 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나 이상천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유는 자신만큼 연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렀다 필자가 이상천을 만난 장소는 매번 당구장이었으며 만날 때마다 큐를 들고 있었고 그 상대는 하점자 건 고점자이건 가리지 않고 게임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객관적으로 보면 또 다른 비결의 덕이 더 크다.
무엇보다 이상천이 당구선수의 재능과 기질을 갖췄다는 점이다. 71년 처음 큐를 잡고 3개월 만에 300점을 올렸으며 30대중반 나름의 절정기 때 전국의 고수들과 어려운 게임을 하면서 근성과 집중력을 배가시켰으며 상대가 넉 다운 될 때 까지 물고 늘어지는 승부사 기질을 타고 난 것이다. 같은 경기라 해도 내기당구와 정식경기는 체질이 판이하다.
내기당구 시 살아남기 위한 온갖 방법들이 정식경기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최고가 되는 데는 원천이 될 수 없다. 20대부터 50세의 오늘까지 이상천의 큐 인생은 “꾼”에서 선수로 전환한 모델케이스인 것이다. 과거 풍운아들의 “진검”승부로 날을 지새던 꾼들의 황금시대는 분명히 지나갔다고 이상천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