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수와 김태향의 맏아들로 태어나 6세에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경북 달성군 공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8년 경북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자진 입대하기도 했다. 195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육사 생도시절에는 스포츠에 뛰어나 육상부와 럭비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1955년 전두환·정호용·김복동 등과 함께 육사 11기생으로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다. 1956년 전방 사단의 보병 소대장을 거쳐 광주 보병학교 구대장으로 복무중이던 1959년 육사 동기생 김복동의 누이동생인 김옥숙과 결혼했다. 결혼 직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특수전학교로 유학하여 6개월간 심리전 과정을 거쳤다. 1960년 4월혁명 후 귀국하여 같은 해 말 학생군사교육단(ROTC) 창설요원으로 뽑혀 서울대학교에서 교관생활을 했다. 이어 군사정보대에서 영어 번역장교로 근무하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방첩부대 정보장교로 근무했으며 1966년 방첩부대 방첩과장을 지낼 때까지 정보관련 분야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그 사이 1962년에는 육사 11기 이후 정규 육사출신들로 구성된 북극성회 회장에 선출되어 육사 졸업생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68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수도사단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1년간 근무했다.
1970년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서종철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을 지냈고 이듬해인 1971년에는 보병연대장을 지냈다.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해 공수특전단 여단장을 지내다가 1978년부터는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되었으며 1979년 초에는 제9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사단장으로 부임 당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12·12사태를 계기로 군 지휘권을 장악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2·12사태 직후인 12월 13일 육군의 핵심부대인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군사쿠데타 성공으로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군 보안사령관직을 1년간 맡다가 1981년 7월 15일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군에서 예편한 직후 외교안보 담당 정무2장관에 임명되어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82년에는 잠시 남북한 고위회담 수석대표를 맡다가 뒤이어 초대 체육부장관과 제41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약 3년 동안 제5공화국의 가장 큰 역점사업이었던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와 함께 1984년부터 약 1년 동안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으면서 대내외적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하여 1987년까지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을 지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을 주장하는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자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등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인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강성 군부세력과 구별되는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군사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다가오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5일 민주정의당 제2대 총재에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16년만에 실시되었으며 노태우 후보는 36.6%의 득표율로 28.0%를 얻어 2위를 기록한 김영삼 후보를 8.6%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고, 취임 이틀 후인 2월 27일 시국사범 등 7,234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해 국민통합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여 민주정의당 중심의 정국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원활한 여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5월 28일 야 3당 총재와 청와대 4자회담을 열어 구속자석방 등의 방침을 밝혔다. 대북관계를 포함하여 대외관계 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8년 7월 7일 남북동포 교류 추진 등 대북정책 6개항 특별선언인 '7·7선언'을 발표하였으며 다음날인 8일에는 중공을 중국으로 공식 호칭키로 발표하였다. 9월 17일 160개국에서 1만 3천 6백여명이 참가한 제24회 서울올림픽이 개막되었으며, 우리 나라는 금 12·은 10·동 11개로 종합 4위를 차지한 가운데 10월 2일 폐막되었다. 1989년 2월 1일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공식수교를 맺었다. 2월 27일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고 우리 나라의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공식화했다. 또한 1990년 5월 24일 일본을 방문하여 가이후 총리와 1차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일왕으로부터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는 사과를 받았다. 뒤이어 6월 5일에는 고르바초프와 한-소 정상회담을 가졌고, 6월 6일에는 부시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와 같은 성과에 따라 10월 1일 소련과의 역사적인 수교가 이루어지고 10월 30일에는 주소(駐蘇)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남북문제와 관련해서는 더 큰 성과가 있었다. 1989년 대북관계 개선의 일환으로 9월 11일 국회 본회의 특별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통일논의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듬해인 1990년 1월 10일 연두회견서 고령이산가족 왕래 및 금강산 공동개발 등을 제의했다. 1990년 6월 20일 남북대화 재개를 요청한 북한의 제의에 따라 남북고위급회담 제7차 예비회담이 7월 3일 열렸다. 남북간의 대화분위기가 지속되자 7월 20일 남북한 민족대교류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자유방문·귀환보장 등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9월 4일 북한 연형묵 총리 등 북한 대표단 90명이 서울을 방문하였으며, 다음날인 9월 5일 남북총리회담이 개막되었다. 9월 6일에는 연형묵 총리가 노태우 대통령을 단독 면담하고 김일성 주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와 같은 남북관계의 진전으로 1991년 9월 16일 남북한이 만장일치로 유엔에 동시가입하는 등 대북정책의 큰 성과가 나타났으며, 1992년 8월 24일에는 중국과도 역사적인 국교수립이 이루어져 82년만에 양국관계가 공식적으로 회복되었다. 대북관계의 진전과 달리 국내정치에서는 우여곡절을 경험했다.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3당합당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2월 9일 민주자유당이 공식 출범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는 순식간에 216석의 거대여당과 왜소한 야당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5월 9일 민주자유당 첫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대표에는 김영삼씨가 선출되어 당 체제가 재정비되었다. 당내 큰 논란거리였던 대통령선거 문제와 관련해서 1992년 1월 10일 연두회견을 통해 김영삼 대표를 중심으로 총선을 치른 뒤 대통령 후보를 경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3월 25일 제14대 총선에서 패배한 민주자유당은 대통령선거 분위기로 방향전환을 시도하여 5월 19일 김영삼 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9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 이에 따라 10월 9일 사상 첫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42.0%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당시 부각되었던 수천억원 규모의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았으며, 그 결과 1995년 11월 16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어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 1997년 4월 17일 12·12사태와 5·18사건 및 대통령 비자금 사건 관련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 직후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조치에 의해 전두환 전대통령과 함께 석방되었다. 화랑·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첫댓글 이런 정치 역사를 볼때 이러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 보다 차기 대통령들은 오히려 더 못했으니 ...잘해야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