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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c.or.kr 2015.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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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을 환상하기 |
news letter No.395 2015/12/8 나는 돈황을 다녀왔다. 그리고 중국도 다녀왔다. 지리상의 당연한 위치지움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였다. 돈황은 엉뚱한 상상에 시달리던 고등학교 시절 이노우에 야스시의 “敦煌”이란 소설을 읽고 빠져든 세계였다. 나에게 돈황은 중국에 속한 어느 지점이라기보다는 환상 속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소설 속의 장면들에 나를 위치시키고 돈황이 펼치는 이야기에 끝 모르게 빠져들며 헤매었다. 나의 불교에 대한 공부는 이런 환상적 헤맴을 더욱 확대시켰다. . 돈황석실에서 발굴된 문서와 프레스코화 속에 깃든 부처님 스토리의 장면들, 불보살들의 아련한 미소. 이러한,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지난 날 불교의 모습을 추적하는 장소로 돈황이 떠올랐을 때 나는 나의 환상과 학문이 일치됨에 전율했다. 그래서 나는 돈황과 연관되는 몇 개의 고전어를 배운 것을 뿌듯해 했고 더욱 불교에 천착했다. 나보다 앞서 당나라를 떠돌며 정신세계를 유력(遊歷)한 신라의 원측(圓測, 613-690)스님을 학문상의 아이돌로 삼기까지 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막대한 불전을 수입한 가히 실크로드의 주인공이라 할 현장(602-664)스님 문하에서, 원측스님은 서역의 6개 국어에 통달하였고 큰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원측스님의 주저 가운데 하나가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달라이 라마까지 읽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나의 아이돌 만세”하고 외쳤다.
[A. 슈테인 ㆍ 폴 펠리오 ㆍ 스벤 헤딘]
나는 또 틈틈이 실크로드를 거쳐 돈황에 당도한 서양의 문헌 탐색가들의 엉뚱한 행적을 흥미롭게 읽었다. 스스로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결국에는 동양학(돈황학)을 기초 지은 공로자로 승화된 이들, 중국은 그들을 일컬어 “서양의 악마들(洋鬼子)”이라 불렀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은 새 것과 신기한 것을 쫓아 헤맨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나는 이 천방지축으로 떠돈 인물들, 곧 "실크로드(Die Seidenstrassen)"란 환상적인 이름을 붙여 뭇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지리학자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Lichthofen, 1833-1905), 오지 탐험의 선구자이며 타클라마칸 탐험기록을 통해 문헌학자들을 끌어들인 스벤 헤딘(Sven Hedin, 1865-1952), 고문헌 수집과 그 판독 작업으로 각광받았으나 결국은 희대의 학문적 사기극에 말려든 것으로 판명된 문헌학자 A. 훼른레(Augustus Frederic Hoernle, 1841-1918), 돈황문서를 차떼기로 실어 날라서 동양문화 약탈의 장본인으로 지탄받은 A. 슈테인(Aurel Stein, 1862- 1943), 그리고 돈황문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발굴한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 등에 대해 계속 읽었다. 이러한 벽화 도굴자, 문헌 약탈자들에 의해 동양학의 꽃으로 떠오른 것이 돈황이었다.
그런 나의 환상의 돈황, 나의 내면화된 실크로드의 한 자락을 다녀왔다. 그러나 그 돈황은 중국에 위치해 있고, 돈황은 모든 분야에서 굴기(屈起)하는 막강한 오늘의 중국의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제 나의 학문적 환상을 현실로 끝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나의 돈황 여행이었다. 과거로의 여행이자 환상으로의 여행이었으며, 결국은 현실로 되돌아오는 여행이었다.
돈황으로의 출발지는 난주이다. 난주는 황하가 시작되는 가장 큰 도시이자 서역으로 향하는 분기점이다. 동서의 갈림길이자 옛날 중화문명과 서역 야만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12시간을 가면 돈황에 도착한다. 야간 침대 열차는 편했다. 모든 시설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열차 침대칸 문짝 하나하나에는 고찰, 고성, 복원된 탑과 사찰들의 사진이 붙어있어 지루한 밤 여행을 환상 속을 달리게 해주고 있었다. 내 침대칸에는 나집사(羅什寺)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기막힌 인연이다. 한역(漢譯) 불전(佛典)에는 구역(舊譯)과 신역(新譯)이 있다. 신역의 대표자는 현장(602-664)이고 구역의 대표자는 구마라지바(Kumarajiva,344-413) 곧 나집(羅什)이다. 그를 기념하는 사찰 사진이 내 칸에 부착되어 있다니! 현장 이전의 나집까지의 불전 번역자들은 축법호(竺法護), 지루가참(支婁迦讖), 안세고(安世高) 등 거의가 서역의 호족들이다. 안세고는 중국 이름이 아닌가? 아니다. 이란 지역은 파르티아(Partia)이고 안식국(安息國)이라 불렸으므로 파르티아 출신임을 성으로 붙여주었다. 그리고 세고(世高)는 “세상에서 뛰어나다”는 lokottama를 한역한 것이다. 따라서 안세고는 “세상에서 뛰어난 파르티아 출신의 번역자”란 일반 명사일 뿐이다. 초기 불전들은 거의 돈황 서쪽의 이 호족들에 의해 번역되고 있다. 한족들의 불전 번역 능력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내가 돈황을 찾은 것은 그런 문헌들의 체취를 맡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_이민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주요 논문으로 <불교의 근대적 전환-이능화의 문화론적 시각과 민족주의>,<불교학 연구의 문화배경에 대한 성찰>,<서구 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고, 역서로《성스러움의 해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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